성경 야고보서 1장을 보겠습니다. 2절부터 12절까지입니다. 성경을 찾으시는 동안, 잠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삶 속에서 아주 흔히 일어나는 일이 있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다 보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꽤 자주 이런 사람들을 만납니다.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살다가 극심한 어려움이 생기면 하나님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독한 시험을 감당해 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죠. 산 믿음이 아니라 죽은 믿음이었고,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자원을 붙들 능력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결국, 겉으로는 진짜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 믿음을 버리고 떠나갑니다. 사는 동안 수없이 찾아오는 시련들은 바로 이 역할을 위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안전한 상황을 뒤흔들어서 가장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과연 하나님을 신뢰하는지, 신뢰하지 않는지를 드러냅니다. 시련은 우리의 믿음이 합당한지 아닌지를 확인해 주는 매우 유익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야고보가 염두에 두고 있는 핵심입니다.
야고보는 이 서신 전체를 통해 살아 있는 믿음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룹니다. 참된 구원, 곧 진정한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야고보서 전체는 믿음의 진정성을 드러내기 위한 일련의 시험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서신 전체가 살아 있는 믿음을 검증하는 시험의 연속입니다. 그 중에서 첫번째가 바로 혹독한 시련에 대한 반응입니다.
우리에게 시련이 닥칠 때, 그 시련은 믿음이 참된지 아닌지를 드러냅니다. 믿음을 붙드는지, 붙들지 못하는지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의 자원에 의지하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드러납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강한지, 얼마나 진실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 속에서도 분별되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이제 몇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다음과 같은 사람의 영적 상태가 어떻다고 판단하시겠습니까? 첫째, 기꺼이 복음을 들었다. 마음을 열고 간절하게 열의를 갖고 들었다. 둘째, 아무런 저항 없이 말씀을 받아들였다. 셋째, 기쁨으로 반응했다. 넷째, 믿었다. 마음을 열고 복음을 듣고, 말씀을 받아들이고, 기쁨으로 반응해 믿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참된 구원을 가진 것일까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진정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제 누가복음 8장 말씀을 함께 살펴보면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8장 13절입니다. 이 구절은 씨 뿌리는 비유 설명 중 한 부분입니다. 땅 아래에 바위가 깔려 있는 얕은 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습니다. 잠시 동안은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련을 당하면 어떻게 됩니까? 배반합니다. 떨어져 나갑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복음을 듣고, 말씀을 받아들이고, 기쁨으로 반응하면서 믿었던 사람들이 결국 떨어져 나가는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요소들 자체만으로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에 이르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시련이 없었다면 그 믿음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이라는 사실이 결코 드러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시련을 당할 때’라는 이 짧은 표현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시련을 통해 어떤 믿음을 소유했는지 그 실체가 드러납니다. 여기서 ‘때’로 번역된 단어는 연대기적 시간, 그러니까 지금이 6시 35분이다, 이렇게 말할 때 사용하는 시간 ‘크로노스(chronos)’가 아닙니다. 지금이 몇 시인지, 달력과 시계로 표시하는 그런 시간이 아닙니다. 여기 사용된 단어는 ‘카이로스(kairos)’입니다. 예정된 때, 기회의 때, 어떤 상황이나 특정한 시기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저 흘러가는 시간의 한 순간이 아니라 인생 속에서 맞이하는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살다 보면 반드시 시련을 당할 때가 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바로 그 시련의 때에 떨어져 나갑니다. 배반합니다. 한때 하나님께 속했다가 떠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 사용된 동사는 ‘아피스테미(aphistemi)’입니다. 문자적으로는 ‘떨어져 서다’, ‘떼어놓다’라는 의미입니다.
시련을 당할 때에 이들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집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 속해 있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시련이 이 사실을 드러낸 것일 뿐이죠. 다시 요한일서 2장 19절로 돌아가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시험의 때에 배반하는 사람들,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과 사귐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누가복음 8장의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위 겉에 흙이 조금 있어서 식물이 잠시 서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뿌리를 내리지는 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핵심은 뿌리가 뽑혔다는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뿌리가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그냥 흙 위에 있었을 뿐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만 흙과 연합한 것처럼 보였지 참된 관계를 맺지 못했던 것입니다. 식물이 깊이 뿌리를 내리게 하고 자라게 하며 열매를 맺게 하는 그런 연합의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불완전해 보이는 믿음의 실체는 시련이 있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참고로 말하자면, 누가복음 8장 13절에서 사용된 이 ‘시련’이라는 표현은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시험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페이라스모스(peirasmos)’입니다. 곧 시험의 때를 말합니다. 이제 다시 야고보서로 돌아가서, 야고보가 이 동일한 주제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시련은 믿음을 파괴하지 못합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점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싶습니다. 시련은 믿음을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을 시험할 뿐입니다. 시련을 견뎌 내는 믿음은 참된 믿음으로 입증되고, 시련에 실패하는 믿음은 거짓 믿음으로 드러납니다. 시련은 믿음을 결코 파괴하지 못합니다. 오직 시험할 뿐이죠.
지난주에 제가 시험에는 여러 목적이 있다고 말씀드렸던 것 기억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 시험하십니다.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떼어 놓기 위해 시험하십니다. 영원한 것에 집중하도록 부르시기 위해 시험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를 드러내기 위해 시험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얼마나 귀한지를 가르치시기 위해 시험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험을 돕도록 우리를 준비시키기 위해 시험하십니다. 더 큰 유익을 위해,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드시고자 시험하십니다. 그리고 제가 지난주에 언급하지 않았던 한 가지가 더 있는데, 때로는 우리의 죄를 징계하시고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기 위해 시험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가장 우선적으로 관심을 두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우리의 믿음이 참된지를 확인하시는 데 있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표현한 대로 말하자면, 우리 믿음의 강도를 측정하시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자들은 시련 가운데서도 반드시 인내한다는 사실을 제가 계속 말씀드렸습니다. 참된 믿음은 견딥니다. 참된 믿음은 붙듭니다. 참된 믿음은 그 과정을 통과합니다. 끝까지 견딥니다. 어떤 시험이라도 감당해 냅니다. 그러니까 야고보의 핵심 질문은, 참된 믿음이 어떻게 그렇게 견뎌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어떻게 어떤 시험도 견디는가? 어떻게 모든 것을 잃고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굳게 붙들 수 있는가?
무엇이 우리를 떨어져 나가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게 만들까요? 몇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야고보는 기뻐하라고 합니다. 참된 믿음은 혹독한 시험 중에서도 기뻐합니다. 2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전적인 기쁨입니다. 순수한 기쁨입니다. 다른 마음과 섞이지 않은 기쁨입니다. 시험 가운데서 드러나는 참된 신자의 첫번째 특징은 바로 기쁨입니다. 참된 신자는 시험을 당할 때에도 언제나 기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기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또는 오늘 오전 예배에서 말씀드린 그 아버지처럼, 딸들이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 있다는 천국의 소망으로 기뻐할 수도 있습니다. 참된 신자는 반드시 기뻐합니다. 신자인 우리는 이 태도를 갖추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시험을 통과할 때 얻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죠. 시험이 결코 해를 끼칠 수 없기 때문이죠. 시험은 우리를 주님께 더 가까이 이끌고, 우리를 강하게 하고, 우리를 더 유익한 존재로 만듭니다. 이 모든 긍정적인 이유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시험은 참된 믿음을 결코 파괴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무효화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바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시험을 만나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러니까 첫번째는 기뻐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인내의 능력과 밀접하게 연결된 요소가 있는데, 사실 우리가 2주 전에 한번 살펴본 내용입니다. 바로 ‘아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시험은 지식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시험이 인내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내는 버티는 힘, 끝까지 견디는 힘, 지속하는 능력인데, 시험이 없다면 이 능력이 강해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뻐하는 동시에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셋째로 살펴본 것은 순종하는 의지입니다.
4절에서 야고보는 이렇게 명령합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다시 말해, 시험을 받아들이고, 그 시험이 인내를 낳게 하고, 그 인내가 온전함에 이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온전함은 영적 성숙을 의미합니다. 영적 성숙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이루어 낼 수 있게 우리를 시험에게 내어 맡기라는 말입니다. 시험이 여러분을 겸손하게 만들도록, 세상으로부터 떼어 놓도록,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게 하도록, 여러분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내도록 맡기십시오.
시험이 하나님의 복과 은혜의 가치를 가르치도록 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을 돕는 사람이 되도록, 장차 더 크게 쓰임받을 수 있도록 맡기십시오. 만일 정결케 하시기 위한 징계라면, 그것 또한 받아들이십시오. 다시 말해, 맞서 싸우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그대로 하도록 맡기십시오. 그러므로 시험을 맞이할 때 올바른 태도는 기뻐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지식은 하나님의 목적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올바른 의지는 순종하는 것입니다. 시험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 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기에, 기꺼이, 그리고 간절히 받아들이십시오. 이렇게 영적으로 성숙해 집니다.
이제 이 첫 세 가지에 이어서 오늘 저녁에는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의 삶에 필요한 나머지 두 가지 태도를 나누겠습니다. 네번째입니다. 믿는 마음입니다. 믿는 마음입니다. 5절부터 8절까지를 보겠습니다. 그런데 본문으로 바로 들어가기 전에 상황을 하나 설정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떤 시험을 지나고 있다고 한번 가정해 봅시다. 여러분은 기쁘게 여기려고 애쓰고, 알기 위해 애쓰고, 순종하기 위해 애를 쓰지만 지속하는데 어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마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나는 올바른 태도를 갖고 싶고, 바르게 이해하고 싶고, 기꺼이 순종하고 싶다. 그러나 이 시험 속에서 계속 기뻐하고, 계속 견디고, 계속 성숙해 가기에는 지혜도 능력도 부족하다고 느낀다. 계속 기뻐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 이 상황을 이해하는 것도 힘들고, 하나님의 뜻에 나 자신을 맡기는 것도 버겁다.’
그럴 때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떤 도움이 필요할까요? 정말로 필요한 한 가지는 바로 지혜입니다. 시험을 감당하기 위한 지혜입니다. 이 상황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삶의 문제들을 직면하고 다루는 데 필요한 실제적인 통찰이 필요합니다. 단지 우리의 인간적인 능력만으로는 이 시험을 통과하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그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여기서 5절이 나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무엇이 부족합니까? 지혜입니다. 지혜가 부족하거든 지혜는 언제나 귀하지만, 특히 시험을 당할 때 더욱 귀합니다. 이 시험을 이해하고 싶고, 어떻게 기뻐해야 하는지를 알고 싶고,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 이 시험을 기꺼이 견디고자 한다면, 반드시 지혜가 필요합니다.
인간적인 이성만으로는 결코 모든 해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야고보에게 있어서, 그리고 당시 유대인에게 있어서도 지혜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실제적인 능력이었습니다.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시작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험을 만나고 시련을 통과할 때, 반드시 지혜가 필요합니다. 시험 중에는 연약함을 느낍니다. 능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낍니다. 붙들 수 있는 자원이나 기반을 찾게 됩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나아가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하나님께 구하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구하랍니다.
인간이 구할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일입니다. 주님을 알고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에게는 뚜렷한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우리에게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잠언 3장 5절부터 7절 말씀이 떠오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시험을 통과하고 있을 때, 어려움 한가운데 있을 때,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마음을 다해 여호와를 신뢰하라는 말입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자기 안에서 해답을 찾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시험은 우리의 기도 생활을 깊어지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시험은 우리를 무릎 꿇게 만듭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을, 절실히, 정말로 절실히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부르짖게 만듭니다. 그래서 시험을 통과할 때, 그 시험을 지날 때, 그 시험이 무엇이든 간에, 하나님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무력한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해답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점을 생각할 때 저는 욥이 떠오릅니다. 욥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해답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잘못된 답만 주었습니다. 옳은 답은 언제나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이 주십니다. 잠시 욥기 28장을 함께 보겠습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아주 장엄한 장입니다. 이 장의 앞부분은 귀한 금속을 캐내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부를 찾기 위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주 큰 수고를 합니다. 땅속 깊이 들어가서 온갖 위험을 감수하고, 귀한 것을 얻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합니다. 땅 속에서 캐내려고 깊은 곳까지 파고듭니다. 부를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합니다.
그러나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인고.” 지혜를 얻으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명철은 어디서 구합니까?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 길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는 찾을 수 없구나 깊은 물이 이르기를 내 속에 있지 아니하다 하며 바다가 이르기를 나와 함께 있지 아니하다 하느니라 순금으로도 바꿀 수 없고 은을 달아도 그 값을 당하지 못하리니 오빌의 금이나 귀한 청옥수나 남보석으로도 그 값을 당하지 못하겠고 황금이나 수정이라도 비교할 수 없고 정금 장식품으로도 바꿀 수 없으며 진주와 벽옥으로도 비길 수 없나니 지혜의 값은 산호보다 귀하구나 구스의 황옥으로도 비교할 수 없고 순금으로도 그 값을 헤아리지 못하리라 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이 머무는 곳은 어디인고 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고 공중의 새에게 가려졌으며.”
인생에서 겪는 시험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참된 지혜, 곧 초자연적인 지혜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습니다. “멸망과 사망도 이르기를 우리가 귀로 그 소문은 들었다 하느니라.” 멸망과 사망도 그 존재에 대해 듣기는 했지만 알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23절에서 마침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 길을 아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그렇다면 지혜를 원한다면 누구에게로 가야 합니까?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제가 단순화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성경이 말하는 바를 분명히 강조하고 싶을 뿐입니다. 이제 다시 야고보서 1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요지는 분명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험을 통과할 때 우리가 나아가야 할 곳은 하나님 앞입니다. 해답을 찾기 위해 친구들에게 먼저 달려가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친구들을 찾아갔다가 욥과 같은 상황에 빠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도 전에 각종 상담 기관 예약부터 잡는 것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 구절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이 성경 전체에서 가장 위대한 약속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어쩌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가장 위대한 약속일지도 모릅니다. 무엇입니까? 지혜가 필요하면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삶의 모든 시험을 이해하고, 모든 상황에 올바르게 반응할 수 있도록 주시는 하나님의 통찰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지혜를 주십니다. 그렇다면 이 지혜는 어떤 지혜입니까? 철학적 사변이 아닙니다. 추상적 이론도 아닙니다. 옳은 일을 행할 수 있게 하는 지혜입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으로 이해하는 지혜입니다. 야고보가 3장 17절에서 더 자세히 말하는 바로 그 지혜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 곧 성결하고 화평한 지혜입니다.
이 지혜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올바르게 행하게 합니다. 이 지혜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지, 우리는 이 기본으로 다시 돌아와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첫 반응은 대개 다른 인간적인 자원을 찾아 달려갑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분명히 말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 하나님께 구하라고 명령합니다. 무엇을 구합니까? 기쁨의 태도와 순종하는 마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해 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무엇이 옳은 일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겪는 수많은 어려움 가운데서 이 사실을 꼭 기억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고난은 다른 사람들에게로 달려가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 주어진다는 사실, 참된 지혜의 유일한 근원은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고난을 상대하는 올바른 해답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이제 다시 5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 하나님께 구하라고 합니다.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명령입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명령만큼이나 분명하게 기도하라는 명령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에서 우리가 배운 것처럼, 거룩한 사람들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는 명령과 동일하게 엄중한 명령입니다. 기도하라는 분명한 명령입니다. 시험은 우리를 하나님께 의존하도록, 하나님께로 나아가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우리가 가진 인간적인 자원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보이지 않는 분의 도움의 손길 뿐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자는 시험 가운데서 반드시 자신에게 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훨씬 더 적극적으로 부르짖어야 합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 끝부분을 보십시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그리고 엘리야의 예가 이어집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기도에 반응하십니다.
이제 다시 1장 5절로 돌아가겠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 이것은 기도하라는 명령입니다. 고난을 당하거든 하나님께로 돌이키라는 말입니다. 고난을 당하거든 기도하라는 명령입니다. 이제 여기서 제가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심한 고난을 당했는데도 풍성하게 기도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어쩌면 그 고난은 여러분이 마침내 깨어나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기 시작할 때까지 계속될지도 모릅니다.
지혜의 근원은 우리가 구하기만 하면 언제나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후하게 주십니다. 우리는 관대하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쏟아 부어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잠언 2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그런데 그 지혜를 어떻게 얻습니까?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지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혜를 찾는 자에게 주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나아와 구하기 전까지 붙들어 두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 신뢰, 의지하는 마음이 드러나게 하시기 위해서죠.
예레미야 29장 11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다시 말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자, 이제 “후히”라는 단어를 봅시다. 참으로 놀라운 단어입니다. 헬라어로 ‘하플로스(haplōs)’인데, 조건 없이, 흥정 없이, 자유롭게, 관대하게 준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7장이 떠오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이죠. 특히 7절부터 11절 말씀은 우리가 한 번쯤은 모두 붙들어 보았던 말씀일 겁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약속은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어려움을 겪을 때, 고난을 통과할 때, 시험 가운데 있을 때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은 흥정하지 않으십니다. 조건을 내세우지도 않으십니다. 그 시험을 바르게 이해하고 올바르게 반응하는 데 필요한 지혜를 아낌없이, 후하게 주십니다. 그리고 5절에서 한 가지를 더 덧붙이십니다.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은 지혜를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되, 그로 인해 책망하거나 면박 주지 않으시고, 아무것도 아끼지 않으십니다. 거리낌 없이, 제한 없이, 관대하게 주십니다. 앞서 말한 내용을 부정형으로 다시 강조한 표현입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입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하나님은 주시고 또 주시고 계속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본성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주시는 분 십니다. 진심으로 주십니다. 망설임 없이 주십니다. 마음에 어떤 거리낌도 없이 주십니다. 마지못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꾸짖지 아니하신다’는 말이 바로 그 뜻이죠. 하나님은 “이걸 해 주면 안 되는데, 그래도 내가 해 주기는 하겠어. 대신에 네가 고마워해야 해”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무가치함을 들춰내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격이 없는 존재인지 상기시키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참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주십니다. 그저 계속해서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아끼지 않으십니다. 지혜가 부족하면,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아무것도 아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하면, 5절 끝에서 말하듯이 “그리하면 주시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약속입니다. 하나님께 구하는 신자에게는 시험을 통과하며 끝까지 인내하는 데 필요한 모든 지혜를 반드시 주십니다.
정말 놀라운 약속 아닙니까? 이 사실을 꼭 붙드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만 하면 시험을 통과하며 인내하는 데 필요한 모든 지혜를 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거죠. 우리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만 빼고는 다 합니다. 무릎을 꿇고,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방향을 구하며 부르짖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시편 81편 10절 말씀이 떠오릅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참으로 놀라운 약속 아닙니까? 하나님은 시험 한가운데 있는 신자에게 필요한 모든 자원을 공급하기 원하십니다. 결국 이 약속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제가 계속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기도를 통해 인내합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기도를 통해 견뎌냅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기도를 통해서 말이죠.
마가복음 14장 38절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여기서 시험은 페이라스모스(peirasmos)입니다. “깨어 기도하라”는 말은 ‘페이라스모스’에 빠지지 않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만일 시험을 맞이한다면, 그 시험이 유혹으로 변하지 않도록 하나님께 의지해 자신을 맡기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인내합니다. 하나님께 구하며 견뎌냅니다. 그런데 6절을 보면,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확신 있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참된 신뢰를 말합니다. 야고보는 기꺼이 주시는 아버지를 말한 뒤에 기다리는 자녀를 말합니다. 지혜가 부족한 것은 하나님 탓이 아닙니다. 왜 시험을 겪는지 이해하지 못하신다구요? 아내가 왜 죽었는지, 남편이 왜 죽었는지, 왜 누군가 병에 걸렸는지, 왜 경제 문제나 재정 문제나 주거 문제나 자동차 문제나 직장 문제를 겪게 되었는지, 왜 마음에 불안이 밀려오는지 알지 못한 채 시들어 가고 있다구요?
여러분이 시험을 겪고 있는데도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가장 간단한 첫번째 이유는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구했는데도 여전히 모르시겠다면, 참된 믿음으로 구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야고보서 4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마음을 다해 능히 응답하시고 또한 응답하실 것을 믿는 정직한 믿음으로 구하지 않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디모데전서 2장 8절에 나오는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에서 말하는 그 기도의 방식과는 정반대로 기도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도와주실 수 있는지 의심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야고보서 1장 6절에서 말하는 의심은 단순한 망설임이 아닙니다. 논쟁하거나 따지는 태도입니다. 헬라어로 ‘디아크리노마이(diakrinomai)’인데, 흔들리다, 갈팡질팡하다, 마음이 나뉘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야고보는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구하라”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답을 주실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의심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왜 그런 일을 하셨는지를 놓고 하나님과 논쟁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아니라 다툼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의심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의심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옳은 일을 하셨는지 아닌지를 따져 묻는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어떤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이렇게 하셨어야죠” 이렇게 논쟁해서는 안 됩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란,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믿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하나님이 시험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시험을 겪는 전형적인 모습은 어떻습니까? 의심 없이 곧바로 주님께 나아가 주님의 발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해결하실 수 있고 지혜를 주실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 논쟁하지 않고 계속해서 지혜를 구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마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은 이와 관련해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참된 믿음, 그러니까 조건을 갖춘 믿음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움직입니다.
백지수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정욕으로 쓰려고 구하는 것은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지 않으면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되지 않으면 받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14장 13절과 14절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능력을 사용하여 기도하는 제자는,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갑작스럽고도 극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볼 겁니다. 산을 옮기게 될 것입니다. 물론 문자 그대로의 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일을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이죠. 우리 주님께서 사용하신 비유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란 작게 시작하지만 점점 크게 자라는 믿음입니다. 겨자씨는 씨앗 가운데서 가장 작지만, 자라면 매우 큰 나무 같은 관목이 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뜻은 이겁니다. 시작은 작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자라나는 믿음, 인내하며 성장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응답을 볼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진, 지속적이고 점점 더 깊어지는 믿음은 어떤 시험이든 감당하는 데 필요한 지혜를 가져다 줍니다. 참으로 놀라운 약속입니다. 어떤 시험이든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뜻하신 목적이 있기 때문에 시험하시는 것이고 그 목적이 옳다는 것을 믿는 그런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시험을 견디게 할 지혜를 주실 것이고, 그 시험이 없었다면 결코 될 수 없었던 모습으로 우리를 빚어 가실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제 7절에서 그 반대편을 보겠습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아, 하마터면 6절을 지나칠 뻔했네요. 6절을 보십시오.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하나님께 나아가면서도 하나님이 지혜를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믿지 못하고 흔들리는 사람은, 이리저리 밀려 다니는 거친 바다와 똑같습니다. 끝없이 출렁이면서 결코 안정되지 못한 바다와 같습니다. 이리저리 내던져지고, 바람에 휘둘리는 모습이죠. 여호수아 시대에 두 의견 사이에서 머뭇거리던 사람들처럼, 엘리야 시대에 여호와가 참 하나님인지 바알이 참 하나님인지 결정하지 못했던 사람들처럼, 바울 시대에 귀신에게 제사하면서 동시에 주의 만찬에 참여하던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하나님도 원하면서 동시에 다른 것을 원하는 사람들, 이쪽저쪽을 오락가락하는 사람들입니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아서 주님께서 입에서 토해 내시겠다고 하는 미적지근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면서도 확신 있게 신뢰하며 붙들지 않는 사람은, 바로 이런 출렁이는 바다와 같습니다. 그래서 7절은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그런 사람이 무엇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심하는 사람, 하나님과 논쟁하려는 사람, 신뢰가 흔들리고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받지 못합니다. 이런 모습은 불신자를 특징짓는 모습이기도 하죠. 때로는 불신자처럼 행동하는 연약하고 의심 많은 그리스도인을 특징짓는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교회에 다니지만 거짓된 그리스도인,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시험을 만나면 의심하기 시작하고, 하나님과 다투고, 하나님께 분노하고, 결국 떠나 버립니다. 그런데 매우 자주, 그리고 여러 면에서 그에 못지않게 비극적인 경우가 또 있습니다. 연약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심각한 시험을 통과하면서도 기쁨의 태도도 없고, 이해하는 마음도 없고, 순종하는 의지도, 또 믿는 마음도 없이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감정적으로 완전히 무너진 상태가 되어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기도로 지혜를 구하지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영적 계좌에 예비해 두신 자원들을 사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아무것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시험의 고통 속에 계속 머물러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실하고 끈질긴 신뢰의 기도를 통해 즉시 얻을 수 있는 해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말입니다.
8절이 이 모든 것을 요약해 줍니다. 이렇게 마음이 둘로 나뉘어 하나님을 신뢰할지 버릴지 갈팡질팡하는 사람은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 마음을 품은 사람, 남자이든 여자이든 모두 죄인입니다. 실제로 야고보서 4장 8절에서는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라고 말합니다.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은 사실 위선자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시험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실제로는 신뢰하지 않고, 오히려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그런 경우 그 사람은 아무것도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모든 길에서 불안정한 상태로 살아갈 뿐입니다.
두 마음을 품었다는 말은 ‘디프쉬코스(dipsuchos)’라는 단어입니다. 앞의 ‘디(di)’는 둘이라는 뜻이고, ‘쉬코스(psuchos)’는 영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두 영혼, 두 마음이라는 말이죠. 하나님과 세상, 이렇게 둘로 나뉜 영혼입니다. 신뢰하는 듯 신뢰하지 않고, 믿는 듯 믿지 않는 상태입니다. 주님의 친구이면서 동시에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사람입니다. 야고보서 4장 4절은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합니다. 요한도 세상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존 번연은 <천로역정>에서 이런 사람을 ‘양쪽을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시편 12편 2절은 여호와께서 심판하실 두 마음을 말하고, 신명기 6장 5절은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라고 하면서 두 마음을 품은 사람에 대해 말합니다. 바로 결단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저는 이러한 두 마음이 불신자에게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조차 하나님의 주권을 붙들지 못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의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구할 때마다 기꺼이, 후히 주시는 지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두 영혼을 가진 사람, ‘양쪽을 바라보는 사람’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불안정합니다. 일부가 아니라 모든 영역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시험을 견디지 못합니다. 시험을 감당하는 데 절실히 필요한 지혜를 구하러 하나님께 나아갈 만큼의 믿음도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이와 같이 의심하는 사람을 책망합니다. 참된 신뢰도 없고, 참된 충성도 없으면 삶 전체가 끊임없이 흔들립니다. 불안정합니다. 정착하지 못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3절에서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라”고 할 때 사용된 그 단어입니다. 혼란 속에 있고, 혼돈 가운데 있습니다. 이 단어는 야고보서 3장에서도 사용되는데, 8절에서는 ‘길들여지지 않은’으로 번역되었습니다.
통제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안정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5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은 아주 분명합니다. 이제 정리해 보겠습니다. 시련을 당할 때, 그 시련을 견디는 길은 하나님의 지혜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이 후히 주시되, 따지지 않으시고, 논쟁하지 않으시고, 아무것도 붙들어 두지 않으시고, 그 시련을 견디는 데 정확히 필요한 것을 주신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이어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요동하는 바다와 같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었다가 믿지 않았다가, 신뢰했다가 의심했다가 하는 그런 믿음은 중간에 걸려서 아무것도 받지 못합니다. 그런 두 마음은 삶을 불안정하게 만듭니다.
안정된 삶은 그 어떤 시험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만 누릴 수 있습니다. 모든 시련이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믿는 마음은 끝까지 인내하는 데 필수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겸손한 영입니다. 겸손한 영입니다. 매우 깊이 있는 말씀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여기서 잠시 멈추어 봅시다. 이것도 명령입니다. 반드시 자랑하라, 반드시 기뻐하라는 명령입니다. “낮은 형제”란 무엇을 말할까요? 가난한 사람입니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을 말합니다. 경제적 지위가 낮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가진 것이 많지 않은 사람이죠. 야고보가 이 편지를 쓴 대상이 누구인지 여러분 혹시 기억하십니까? 1절을 보면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라고 했습니다. 박해당하는 성도들입니다. 재산을 빼앗기고, 결핍을 겪고, 차별받고 편견을 당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흩어진 성도들은 보통 가난했습니다. 매우 가난했습니다.
가진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여기서 “낮은”으로 번역된 단어는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인 칠십인역에서 ‘가난한’이라는 말로 번역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타페이노스(topeinos)’죠. 가난한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자랑하라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자랑하다”라는 말은 매우 풍성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어떤 특권이나 소유를 자랑하다, 자랑스럽게 여기다, 이런 뜻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자랑하라’는 말은 정당한 자부심에서 나오는 기쁨을 뜻합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적으로는 기뻐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에서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자랑할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높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높임을 받았습니까? 영적으로 그렇습니다. 세상에서는 더럽혀진 존재고 버림받은 존재일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높임을 받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고, 가진 것을 빼앗겨 가장 낮은 자리, 가난한 자가 되었지만, 오히려 자랑할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는 높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배고플 수 있지만 생명의 떡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마를 수 있지만 생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난할 수 있지만 영원한 부를 가졌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받았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는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땅에는 집이 없을지 모르지만 장차 들어갈 하늘에는 영광스러운 집이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합니다. 가난한 형제들이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관심을 두신다는 사실로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시험이 여러분을 온전하게 만들고, 영적인 차원에서 여러분을 높이고 있다는 사실로 기뻐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거두어 가실 때는 우리를 영적으로 성숙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하게 되는 것 자체가 높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빼앗긴 사람은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고, 자신의 시험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시험들을 통해 영적인 차원에서 그를 높이시고, 궁극적으로 장차 올 영광으로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약속된 모든 유업을 받게 될 때에,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말로 다할 수 없는 영광의 기쁨으로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시험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고, 그 무엇을 빼앗겨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서 높임을 받는 자리로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17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참된 부가 이미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난은 잠시뿐인 시험입니다.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가난을 비롯한 시련을 인내하는 사람들은, 장차 올 영광스러운 높아짐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세상에서의 형편을 기뻐하려고 하지 말라. 그렇게 하면, 아무것도 없을 때 반드시 실망한다. 대신에 영적인 높아짐을 기뻐하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시고, 마침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데려가실 것을 소망하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제 반대로 10절을 보십시오.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동사가 같습니다. “자랑하라”입니다. “기뻐하라”입니다. 부한 사람도 자랑해야 합니다. 무엇을 자랑합니까? 자신이 낮아졌다는 사실을 자랑하라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한 형제는 부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모든 것이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입니다. 삶의 많은 시련은 가난과 관련되어 있지만,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이 부한 사람에게도 시련은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야고보는 이제 말합니다. 자신의 부를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셨다는 사실을 자랑하라고 말입니다. 낮아짐, 겸손, 자기 비움 속에서 기뻐하라고 합니다.
부유한 사람이 시련을 겪게 되면, 아무리 부자라도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실제로 깨닫습니다. 부유한 그리스도인은 시련을 통과하면서 세상의 재물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직면할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낮은 형제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자랑하고, 부한 자 역시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자랑합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자랑합니다.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였던 사람도 그것으로는 자신이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자랑하게 됩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가난한 그리스도인은 부유한 사람들과 함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자랑할 수 있고, 부유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가난한 성도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자기 부인의 특권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험 앞에서는 우리 모두가 같은 자리로 낮아지고, 모두가 하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이것이 핵심입니다. 돈은 사람을 인생의 문제, 곧 참된 시험으로부터 건져내지 못합니다. 물론 경제적인 문제는 해결해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돈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또 다른 문제들이 반드시 따라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요점은 이것입니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시험은 우리 삶에 찾아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며, 참된 겸손이란 이 세상의 재물을 많이 가졌든 적게 가졌든 상관없이 “나의 자원은 하나님께 있다” 이렇게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루터교의 위대한 주석가인 렌스키(Lensky)는 이 대목을 매우 흥미롭게 해석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은 낮은 형제를 시험을 지나 그리스도의 나라 안에서의 높은 지위에 이르게 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요함을 기뻐하고 자랑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은 부유한 형제에게도 동일하게 복된 일을 한다. 믿음은 그 형제를 그리스도의 영, 곧 낮아짐과 참된 그리스도인의 겸손의 영으로 채운다. 가난한 형제가 이 땅에서의 가난을 잊듯이, 부유한 형제도 자신의 이 땅의 부요를 잊게 된다. 이렇게 두 사람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안에서 동등해진다.”
맞는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동일함이 바로 시련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믿습니다. 딸을 잃거나 아들을 잃거나, 아내를 잃거나 남편을 잃게 될 때, 돈이 얼마나 있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그 시련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해주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못해줍니다. 시련은 평준화 장치입니다. 시련은 우리 모두를 하나님께 대한 동일한 의존의 자리로 끌어내립니다. 그렇게 우리를 서로 겸손하게 같은 자리에 서게 만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의 것들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많이 가진 사람을 적게 가진 사람 위에 높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소유로는 영적으로 우리가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을 살 수 없기 때문이죠.
야고보는 부한 자들을 강하게 다루는 데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1장뿐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삺펴볼 서신 전체에 걸쳐서 계속 강하게 다룹니다. 그런데 10절을 다시 보면, 부유한 사람은 자신이 낮아졌다는 사실을 자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낮아질 때에야 비로소 참된 부요가 이 세상이 아니라 다른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부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갈 겁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중의 특별한 사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유한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소유한 부는 풀의 꽃처럼 사라질 겁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매우 흔한 세 가지 꽃이 있는데, 아네모네, 시클라멘, 백합입니다. 이 꽃들은 2월쯤 되면 화려하게 피어나 아름다운 색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5월이 되면 완전히 말라버립니다. 사실 이 남부 캘리포니아 언덕도 비슷하죠. 꽃이 만발할 때 제가 며칠 도시를 떠났다가 돌아와 보면 사막처럼 변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겸손의 영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빠르게 지나가고, 이렇게 쉽게 타 버리는 것들을 신뢰하지 않겠다. 야고보는 11절에서 이 비유를 더 확장합니다.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문법 형태는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일을 표현하는 형태이죠. 이사야 선지자의 말, 이사야 40장 6절부터 8절에서 가져온 겁니다.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이 바람은 ‘시로코’라고 부르는 바람, 아주 뜨거운 바람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그 바람이 불어닥치면 지나가는 길에 있는 모든 꽃들을 모조리 황폐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아주 뜨겁고 강렬한 바람입니다. 장차 부한 사람들의 운명에 대해 하는 말입니다. 죽음의 맹렬한 열기와 바람, 하나님의 심판이 모든 것을 잿더미로 태워 버릴 겁니다. 그러므로 부한 사람은 고난 속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 고난이 자원에 대한 의존을 끊어버렸기 때문이죠. 어차피 그 모든 자원은 결국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랑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불타 사라진 뒤에, 가난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참된 부요를 소유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시험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입니까? 기뻐하는 태도입니다. 아는 마음입니다. 순종하는 의지입니다. 믿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신뢰하는 겸손한 영입니다.
자, 이제 결론입니다. 우리가 처음 시작했던 자리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살아 있는 믿음에 대한 첫번째 시험은 시련입니다. 시련을 당할 때 인내하는 것이 참된 신자임을 드러냅니다. 참된 신자임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자신의 삶 속에서도, 또 다른 사람들의 삶 속에서도 이것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누가 진짜인지, 누가 참 믿음을 소유했는지를 분별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매우,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시련을 통과하는 동안, 주님은 우리를 세상 의존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우리 자신에게로, 더 정확히는 하나님 자신에게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의 믿음 수준을 드러내시고,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온전하게 다듬어 가십니다.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옛날 선원들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항구로 들어갈 때 가장 안전한 바람은 맞바람도 아니고 뒷바람도 아니고 옆바람이라고 말이죠. 말이 되지 않습니까? 항해해 보신 적 있으세요? 정면에서 부는 바람을 맞으면서 항구로 들어가 보신 적 있습니까?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순풍을 타고 들어왔다가 해변가로 12미터나 밀려 올라가 보신 적 있으세요? 선원들 말이 맞습니다. 항구로 들어갈 때 가장 안전한 바람은 옆에서 부는 바람입니다.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시험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우리 자신의 악한 마음을 더 잘 알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사랑하는 구주를 더 깊이 알게 하는 것이다.” 정말 그렇습니다. 시험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1642년에 죽은 리슐리외 추기경(Cardinal Richelieu)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덕을 갖추고 바르게 정돈된 사람은 좋은 금속과 같다. 달굴수록 더 정제된다. 더 많이 대적받을수록 더 인정받는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상처를 입을 수는 있지만, 거짓이라고 도장을 찍을 수는 없다.”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이번 주에도 아주 오래된 책을 읽고 있는데요, 17세기의 저자 조셉 처치(Joseph Church)가 쓴 참으로 아름다운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고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나뭇조각에 불과하다. 고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나뭇조각에 불과하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엄청난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아주 작은 방식으로 고난에 동참할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제 마무리를 하면서 시 한 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1880년경에 엘라 휠러 윌콕스(Ella Wheeler Wilcox)가 쓴 시입니다. 오늘 말씀을 마음에 새기기에 참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읽겠습니다. “나는 의심하지 않으리. 바다에 나가 있던 나의 모든 배들이 부서진 돛대와 찢긴 돛을 달고 떠밀려 돌아온다 해도. 결코 실패하지 않으시는 그 손을 믿으리라. 겉보기에는 악한 일을 통해서도 나를 위해 선한 일을 이루시는 그 손을 믿으리라. 돛이 산산이 부서져 눈물 흘릴지라도, 나의 가장 큰 소망들이 무너져 내린다 해도, 나는 외치리라. 주님을 신뢰한다고. 나는 의심하지 않으리라. 나의 모든 기도가 고요하고 흰 하늘의 나라로부터 아무 대답도 없이 돌아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내가 갈망하던 것을 거절하신 것이 전지하신 사랑임을 믿으리라. 때로는 슬픔을 억누르지 못할 때가 있을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나의 믿음에서 나오는 순수한 열정은 흐려지지 않고 타오르리라. 나는 의심하지 않으리. 슬픔이 비처럼 쏟아지고, 환난이 벌집 주위의 벌들처럼 몰려올지라도, 내가 추구하는 그 높은 곳은 고통과 아픔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음을 믿으리라. 십자가로 인해 신음하고 떨지라도, 가장 혹독한 상실 너머에서 더 큰 유익을 보게 되리라. 나는 의심하지 않으리. 굳건한 배처럼 믿음에 단단히 닻을 내린 나의 영혼은 모든 광풍을 견디며, 용기를 잃지 않고, 죽음이라는 미지의 거대한 바다를 향해 나아가리라. 몸이 영혼과 헤어지는 그 순간에도 외치게 하소서. 의심하지 않는다고. 나의 마지막 숨결로 온 세상이 듣도록 외치리.” 이것이 신자가 삶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죽음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모든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야고보가 가르쳐 준 그 길로 우리가 인내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은 바로 그 믿음을 우리 안에 이루어 주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잠시 마음을 모으고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상에서 겪는 어떤 고난이든, 그것이 그가 평생 겪을 모든 지옥이다.”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 끝입니다. 더 이상은 없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천국을 약속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견딜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참되기 때문이죠. 한 청교도 저술가는 모든 시험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가 가져야 할 매우 바람직한 태도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면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경건한 사람과 악한 사람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시험을 겪을 때 드러난다. 악한 자들은 주님께서 그들 위에 손을 얹으실수록 더 원망하고 하나님을 거역한다. 그러나 신실한 자들은 자신이 죄로 짓눌리고, 사탄의 싸움으로 마음이 어지럽고, 하나님을 거스른 데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느낄 때, 하나님의 긍휼의 품으로 몸을 던진다. 그리고 자신을 치시는 하나님의 손을 붙잡아, 그 손에 입을 맞춘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손이 우리를 치시는 때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참으로 이해할 수만 있다면, 그 손에 입을 맞출 것입니다.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따지지 않겠습니다. 논쟁하지 않겠습니다. 그리스도를 닮게 하는 시련을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참된지 거짓된지를 드러내는 시련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세상으로부터 떼어 놓고,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게 하고, 우리가 무엇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를 드러내는 시련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주님의 복을 귀히 여기도록 가르치고, 다른 이들을 돕는 법을 배우게 하고, 더 큰 유익을 위해 우리를 빚으시고, 정결함으로 징계하시는 그 시련으로 인해 감사합니다. 모든 것을 기쁨으로 여기겠습니다. 아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의지로, 지혜를 구하는 믿음의 기도로 나아가겠습니다. 인간적인 자원이 아니라 주님께 의존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스스로를 낮추겠습니다. 주님, 삶의 모든 시험을 통해 주님의 선하고 거룩한 목적을 이루어 주옵소서. 우리에게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없다는 것을 확신하며 쉼을 누립니다.
주님은 신실하셔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시험과 함께 항상 피할 길을 내셔서 능히 감당하게 하심도 믿습니다. 그리하여 저희가 주님의 자녀임이 드러나게 하여 주옵소서. 저희 마음 가운데 주님의 일을 이루어 주옵소서. 시험 가운데서 저희를 위로하시고, 기도로 겸손히 의지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 모든 일을 통해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를 빚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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