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야고보서 강해 설교를 계속하겠습니다. 성경을 펴시고 야고보서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 위대한 서신에는 앞으로 다룰 내용이 많이 남아 있지만, 오늘 저녁에는 잠시 멈추고 18절을 짧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원래대로라면 지난 시간에 18절을 언급했기 때문에 19절부터 이어서 다음 단락으로 들어갔을 테지만, 야고보서 1장 18절은 정말로 위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잠시 멈추고 이 말씀을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구절은 거듭남의 의미, 그러니까 구원의 의미를 매우 단순한 방식으로 분명하게 설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오전에는 처음 오신 분들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일본에서 오신 한 사랑스러운 자매님을 만났는데, 일상적인 영어는 어느 정도 이해하셨지만 오늘 아침 설교에서 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따라오기가 매우 어려우셨다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제가 사용하는 말들이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기보다, 그리스도인으로 오래 살아가고 기독교와 하나님의 말씀에 더 깊이 관여할수록 우리 안에 복음주의적인 전문 용어가 점점 더 쌓이게 되고, 일상 회화 수준의 영어만 하시는 분이 처음 설교를 들으면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저에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핵심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깨달음도 주었습니다. 바로 오늘 저녁에 하려는 일이 그것입니다. 함께 야고보서 1장 18절을 보겠습니다.
18절은 17절에서 언급된 아버지, 곧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간결한 말씀이지만, 이 안에는 거듭남의 모든 풍성함이 담겨 있습니다. 구약은 말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베드로도 자신의 서신에서 구약을 인용해서 말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룩해야 합니다. 죄로부터 구별되어 의에 이른 존재여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사람은 의롭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죄인입니다. 사람은 바르게 생각하지도 않고, 바르게 말하지도 않고, 바르게 행동하지도 않고, 바르게 행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지도 못하고, 자신을 바르게 인식하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인식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거룩하지 않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거룩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의롭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성경의 진단에 기꺼이 동의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은, 거룩함이 필요하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거나, 많은 경우에 그 거룩함이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설령 자신이 거룩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더라도, 대개는 그 현실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립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난번에 이 위대한 장을 살펴보면서 다루었던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죄악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13절부터 18절까지를 살펴보면서 본 것은, 우리의 죄악에 대해 책임질 자는 우리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지킬 수 없는 율법을 만드셨다”, “하나님이 나를 이런 환경 속에 두셔서 내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나를 이런 상황 속에 두셔서 내 행동을 통제할 수 없게 하셨다”라는 등등의 말로 하나님을 탓할 수 없습니다. 야고보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우리의 죄악에 어떤 방식으로도 관여하실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사람은 반드시 거룩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자신이 거룩하지 않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합니다. 설령 자신이 죄를 짓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더라도, 보통 그 책임을 다른 누군가에게 돌리는데, 매우 모호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그런 환경에 두셨고 그런 충동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책임을 회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13절부터 18절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죄에 대하여 누구도 탓할 수 없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탓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3절에서 야고보는 악의 본질에 대해 말합니다. 사람이 유혹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유혹을 받는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유혹을 받지도 않으시고, 친히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시기 때문이죠. 하나님과 악은 서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악에 책임이 있는 분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14절에서는 사람의 본질에 대해 말합니다.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욕심에 끌려 미혹되어 유혹을 받습니다. 문제는 사람 안에 있습니다. 죄악과 타락한 상태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15절과 16절에서는 욕심의 본질에 대해 말합니다.
욕심은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는 자라서 결국 죽음, 사망만을 만들어 냅니다. 이 점에 대해서 결코 착각하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해, 이것이 바로 죄의 실제 모습이라는 것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악은 서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죠. 문제는 사람의 본성에 있고, 그 사람의 본성 안에서 문제는 악한 욕망, 그러니까 잘못된 것을 향한 욕심과 정욕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17절에서 야고보는 다시 하나님의 본성을 이야기합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모든 온전한 선물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하죠.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그림자도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탓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좋은 것, 선한 것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은 오직 선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합니다. 악의 본성 때문에도, 사람의 본성 때문에도, 욕심의 본성 때문에도, 하나님의 본성 때문에도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해 하나님을 탓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8절에서 야고보는 논증을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거듭남의 본성 자체, 곧 회심과 구원과 새로 태어남의 본질이 하나님이 우리를 죄로 이끄시는 분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따라 우리를 낳으셨다.” 다시 말해, 우리를 낳으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고, 그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만드시는 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죠. 그러므로 거듭남의 목적은 생명을 낳는 것입니다.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도록 창조하는 것입니다. 새 창조의 일부로서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에 어떤 방식으로도 관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악과 섞일 수 없는 분이십니다. 문제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사람 안에서 그 문제는 욕심과 깊이 얽혀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은 오직 좋은 것만을 주시는 데 있죠.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손을 대실 때는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낳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죄가 아니라 의를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옛 사람을 그대로 두시는 것이 아니라, 새 창조를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난번에 살펴본 이 모든 내용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죄의 근원이 되실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죄로 유혹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럴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 맥락에서 18절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보다도 훨씬 풍성한 말씀입니다. 한 사람을 새로 낳으시는 일,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일, 곧 거듭남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좀 더 자세히,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야고보는 18절에서 논리 전개를 위해 거듭남이라는 주제를 소개합니다. 제가 방금 여러분께 말씀드린 바로 그겁니다. 야고보는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람을 죄로 이끄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과 같은 새로운 피조물로 이끄십니다. 죄에서 이끌어 내어서 새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로 이끄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 새롭게 다시 창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맥과는 별도로, 이 구절 자체를 놓고 보더라도, 이 말씀은 거듭남에 대해 너무나도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거듭남과 새로 태어남에 대한 전체적인 가르침은 매우 주의 깊게 살펴볼 가치가 있습니다. 이제 앞서 제가 말씀드렸고 본문에서 이미 확인한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 안에는 욕심이 가득하고, 욕심은 죄를 낳고, 죄는 죽음을 낳습니다. 거룩함이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이를 수 없고, 누구도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고, 거룩함이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은 거룩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죄인입니다. 사람의 본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욕심과 악을 만들어 냅니다. 이 사실을 좀 더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 로마서 3장을 함께 보겠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본문이지만,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 논점의 빛 아래에서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는 말씀입니다. 9절 끝에서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합니다. 문자 그대로 말하면, 죄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뜻입니다. 모두가 죄의 통치와 통제 아래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구약의 여러 구절을 인용하며 그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아담의 타락 이후 이 세상에 태어난 그 어떤 사람도 의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바르게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도 없고, 스스로 의롭게 행하는 사람도 없으며,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도 없다는 뜻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온전히 이해하고 그대로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사람은 하나님을 찾는 쪽이 아니라 죄를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사랑합니까? 요한복음 3장이 말합니다. 빛보다 어둠을 사랑합니다. 그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모두가 하나님께서 의를 위해 정하신 길에서 벗어나 자기 길로 돌아섰다는 뜻입니다. “무익하게 되었다”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쉰 우유, 상한 우유를 가리킵니다.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입니다. 완전히 무가치한 상태라는 뜻이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악의 본성을 묘사합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마치 무덤에서 시체의 냄새가 흘러나오는 것처럼 썩은 악취가 난다는 말입니다.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사람의 본질은 말 속에서 드러납니다. 죄로 더럽혀지고 죽은 그 본성이 입을 통해 그대로 흘러나옵니다.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합니다.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이것이 하나님 없는 사람,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의 정의입니다. 온 세상이 18절의 이 진단 아래 놓여 있습니다. 모든 입이 막히고,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서 유죄가 됩니다. 그리고 20절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어떤 사람도 육체의 행위로, 규칙을 지키거나 율법을 순종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설령 하나님의 율법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은 의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죄를 깨닫게 할 뿐이죠. 이것이 로마서 3장이 말하는 사람의 정의입니다. 이제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의 상태를 보기 위해서 에베소서 2장을 보겠습니다.
에베소서 2장을 보면 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사람의 상태가 ‘죽음’으로 규정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시체의 악취가 나는 죽음입니다. 그 죽음의 특징은 허물과 죄 가운데 있는 죽음입니다. 두 가지 단어를 사용해서 사람의 죄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를 보여 주는 것이죠. 사람들은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서 살아갑니다. 다시 말해서 일상적인 삶의 방식이 이 악한 세상의 체계에 의해 지배됩니다. 삶을 주관하는 존재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인데, 사탄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3절에 따르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심판의 대상이자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 모든 것은 아주 기본적인 사실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 반드시 거룩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거룩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자신이 거룩하지 않고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더라도, 자신의 상황을 핑계로 하나님께 책임을 돌립니다. 그렇게 책임을 회피하는 동안 사람은 계속해서 죄의 지배 아래 묶여 있고, 그 결과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자, 그러면 이제 질문이 생기죠. 이런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상황을 어떻게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이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외적인 변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겠다고 결정한다고 해서 이 죽음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에게 새 생명을 줄 수가 없습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 창조되는 것입니다. 새 마음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내적 사람, 새로운 생명의 원리가 필요합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완전히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니고데모의 말처럼, 마치 어머니의 태 속으로 다시 들어가 전혀 다른 본성을 가지고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거룩함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한 절대적인 조건이기 때문에, 타락하고 죽은 상태에 있는 죄인은 결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부패한 옛 자아를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새 생명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생명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이나 거듭남에 대해서 말할 때에, 무엇인가를 더하는 것을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것도 아닙니다. 돼지에게 리본을 달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낡은 사람에게 새 옷을 입히는 것도 아닙니다. 전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분명히 확증합니다. 신약에 와서 새롭게 등장한 개념도 아닙니다. 신약에서 이루어질 일을 미리 내다보면서 구약에서 이미 약속된 내용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는 사람의 마음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구스인, 그러니까 에티오피아인이 자기 피부색을 바꿀 수 있겠냐는 것이죠. 스스로 원한다고 해서, 의지를 가진다고 해서, 그 검은 피부색을 바꿀 수 있겠냐는 겁니다. 또 예레미야는 묻습니다. 표범이 자기 반점을 바꿀 수 있겠느냐. 분명히 아니죠. 그렇다면 악에 익숙한 사람이 어떻게 선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변화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 13장 23절 말씀입니다. 그리고 31장에 가면 그 변화에 대한 놀라운 약속이 나옵니다. 예레미야 31장 31절입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그리고 3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셔서 내면을 바꾸시겠다는 말입니다. 사람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대신 그렇게 행하셔야 합니다. 사람은 가장 깊은 중심에서부터 변화가 필요합니다.
자연적인 사람, 그러니까 거듭나지 않은 사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 죄 가운데 있는 사람, 구속받지 못한 사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고린도전서 2장 14절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않습니다. 받을 수 없습니다.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시체는 그 어떤 것에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새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새 생명이 필요합니다. 앞서 에베소서 2장 1절부터 3절에서 보았듯이, 사람은 허물과 죄로 죽어 있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합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그러니까 사탄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같은 장 5절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죽음에서의 부활, 새 생명, 새로 태어남의 개념이 담겨 있습니다. 로마서 6장도 말합니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옛 사람은 죽고, 무엇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고 합니까? 새 생명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죠. 새 생명입니다. 옛 삶은 완전히 끝나야 하고 새로운 삶이 다시 시작되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구원에 이를 때, 우리는 새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새 사람이 됩니다.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다시 창조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가장 분명하고도 생생하게 보여 주는 예가 바로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놀라운 만남입니다. 요한복음 3장으로 잠시 가서 이 놀라운 이야기를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니고데모는 매우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어쩌면 그 시대의 어떤 교사보다도 뛰어난 인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10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여기서 예수님은 정관사를 사용하십니다.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그 선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에서 공적으로 인정받는 위대한 교사였습니다.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말합니다.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매우 존경받는 사람이었고, 자기 소명에 대한 자각도 분명했지만, 동시에 자신보다 훨씬 더 큰 이해와 권위를 가진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2절입니다.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마음속에 있는 질문을 입으로 꺼내지 않았습니다. 질문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마음을 읽으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런 표현이 나오는 것이죠. 질문을 하지 않았는데 대답하신 것입니다. 마음속 질문에 예수님께서 응답하신 것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니고데모의 질문은 이겁니다. 제가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여기에 이스라엘의 선생이 하나 있습니다. 바리새인이었고, 종교적으로는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자기 안에 그것을 확증해 주는 어떤 것도 없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마음속의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 질문 속에는 이런 함의가 담겨 있습니다. 저는 매우 종교적인 사람입니다. 율법을 연구합니다. 구약의 규범을 따라 살아가려고 애씁니다. 도덕적인 사람이고, 신뢰받는 사람이고, 존경받는 사람입니다. 제 삶에 무엇을 더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더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모든 것을 끝내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 거듭나야 한다. 그러자 니고데모가 묻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물리적인 출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방식의 비유적 언어,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마샬(mashal), 은유적이고 우회적인 표현을 그대로 받아서 질문하고 있는 겁니다. 같은 비유, 같은 묘사, 같은 표현을 사용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거죠. 한 종교 안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사람이, 한 규범을 따라 수십 년을 살아온 사람이, 이제는 바리새인이요 랍비요 율법 교사가 된 이 사람이,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되돌려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니고데모가 하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정통 유대교 신앙생활을 해 온 사람에게 전도해 본 적이 있다면 이 사고방식을 잘 이해하실 겁니다. 어떻게 이 평생에 걸친 종교적 삶의 방식을 다 풀어버리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마음에 있던 질문이죠.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이 말은, 반쯤은 농담처럼 들리지만 예수님이 사용하신 비유에 일관되게 맞추어 질문을 한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영적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영적인 차원에서 말씀하고 계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때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니고데모야, 너는 할 수 없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너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자신 바깥에서 오는 능력과 자원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자신에게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자신 밖에서 오는 역사여야 합니다. 바로 물과 성령입니다. 그렇다면 물은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요? 구원의 물을 말합니다. 잠시 에스겔 36장으로 돌아가 보십시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매우 익숙한 언어로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구약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에스겔 36장 25절의 약속을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여기서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내가…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시는 말은 이것입니다. 첫째,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정결하게 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 과정은 성령님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 자신 밖에서 오는 주권적인 구원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에스겔이 예언한 것처럼, 깨끗한 물로 더러움을 씻어 내는 역사입니다. 바울도 디도서에서 말씀을 통한 물로 씻음에 대해서 말합니다. 곧 거듭남의 물입니다. 그리고 에스겔 36장 2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곧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사람 안에 두셔서, 내면에서부터 순종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니까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니고데모를 에스겔 36장으로 데려가신 것입니다. 선지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너에게는 너 자신 밖의, 그러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주권적인 정결함과, 새 생명과 새 마음과 새 동기를 주시는 성령의 내주하심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6절에서 말하듯이,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이죠. 우리 힘으로 하려고 하면 무엇만 만들어 냅니까? 결국 우리 자신만 만들어 낼 뿐입니다. 그러나 “영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한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어 그 소리는 들리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듯이,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러하다고 하십니다. 무슨 뜻일까요? 성령님이 언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우리가 다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이 성령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라는 사실입니다. 계획표로 그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눈으로 쫓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주권적으로 원하시는 곳에 임하시고, 원하시는 사람에게 새 생명을 주십니다. 말씀의 물로 씻어 거듭남을 이루시고, 사람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시며, 그 안에 성령을 심으십니다. 니고데모야, 너에게 필요한 것은 새 생명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다. 바로 예레미야 24장 7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라고 하신 바로 그 약속입니다.
새 본성, 새 마음, 새 생명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처럼 말이죠.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러니까 거듭남은 필수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죄인에게 내려오셔서 은혜로 그 죄인을 깨끗하게 하시고, 그 죄인 안에 자신의 성령을 심으시는 일입니다. 정결케 하심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결하고, 성령을 심으심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목적입니다.
이제 야고보서 1장 18절로 돌아가서, 이 구절 안에서 네 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서론이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8절을 보면서, 거듭남에 대해 네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아주 단순한 질문들이고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겁니다. 첫번째 질문입니다. 거듭남이란 무엇입니까? 방금 우리는 사람이 거룩함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살펴봤습니다. 사람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거룩하지 않음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인식하더라도 하나님을 탓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딜레마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탓하거나, 문제를 인식하지도 못한 채로 말이죠. 어떻게 변화될 수 있을까요? 누군가 더 높은 기준을 제시하고, 더 나은 윤리를 가르치고, 지켜야 할 율법을 주면 그 사람이 스스로 해낼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육신이 만들어 내는 것은 결국 무엇입니까? 더 많은 육신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주권적인 하나님의 개입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들어오셔서 죄를 씻어 주시고, 사람 안에 새 생명을 심으시고, 그 새 생명 안에서 순종하며 살아가도록 성령으로 능력을 공급하셔야 합니다. 전적으로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이제 정말 본문으로 들어가서 네 가지 질문을 살펴봅시다. 첫번째 질문입니다. 거듭남이란 무엇입니까? 거듭남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이미 많이 말씀드렸고 설명했지만, 이 구절 안에 있는 이 표현만 한번 보겠습니다. “그가… 자기의 뜻을 따라 우리를 낳으셨으니.” 거듭남의 본질입니다.
거듭남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낳으시는 일입니다. 새로운 존재로 출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여기 사용된 동사가 15절에 사용된 동사와 정확히 같은 동사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잉태하신즉 거듭남을 낳으십니다. 새 생명을 낳으십니다. “죄를 낳고”에 쓰인 그 동사와 동일한 동사입니다. 이 동사는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 그러니까 신적 부모이신 하나님에 의해 태어나 하나님의 자녀로 새 생명을 받았던 그 사건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만약에 “그가 우리를 낳으셨다”는 표현에 대해 기술적인 정의를 하나 제시하자면, 오래 전에 신학자 벌코프(Berkoff)가 제시한 정의가 매우 탁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거듭남이란,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새 생명의 원리를 심으시고, 그 영혼을 지배하는 성향을 거룩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아주 훌륭한 정의입니다. 거듭남이란,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새 생명의 원리를 심으시고, 그 영혼을 지배하는 성향을 거룩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전적인 변화입니다. 로마서 3장에 묘사된 인간의 모습이나, 에베소서 2장 1절부터 3절이 말하는 상태와는 전혀 닮아 있지 않습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우리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 자신의 존재, 자신의 의로운 성품, 자신의 거룩함을 우리 안에 심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정말 놀라운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여러분은 하나님의 본성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이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입니다. 물론 그 의미가 완전히 드러나는 것은 미래의 일이지만, 이미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새 생명의 원리가 우리 안에 심겨 있습니다. 이 일은 한 순간에 완성됩니다. 과정이 아닙니다.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단번에 일어나는 역사입니다. 은밀한 사역입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가라지와 알곡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이 특별한 역사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죠. 그 결과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다시 창조하시는 순간을 볼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인간의 눈으로도 볼 수 없는, 하나님의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거듭남은 사람 안에 새로운 생명의 원리와 새로운 성향을 심어 주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게 하고 그 방향으로 이끄는 힘을 줍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죄로 인한 죽음의 상태를 극복할 뿐 아니라, 죄가 가져오는 죽음의 결과까지도 넘어섭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않습니다.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이 말하듯이, 죄는 더 이상 우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제 기꺼이 열망을 가지고 새로운 주인을 따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죽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거듭남이란 무엇입니까? 무엇입니까? “그가 우리를 낳으셨다”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내적인 존재 전체를 바꾸는 전적인 변화입니다. 두번째 질문으로 넘어가 봅시다. 누가 거듭남을 행하십니까? 요한복음 3장에서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누가 거듭남을 행하십니까? 다시 야고보서 1장 18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자기의 뜻을 따라…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여기서 ‘그’는 17절에서 모든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의 근원으로 언급된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헬라어 원문에서는 “그의 뜻으로”라는 표현이 문두에 놓여 있는데, 이 새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른 방식일 수는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스스로 생명을 줄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새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받는 사람의 열망이 아니라, 주시는 분의 은혜입니다. 받는 사람의 열망조차도 주시는 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전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선택이고,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만일 제가 구원받았고 여러분이 구원받았다면, 그 모든 공로는 누구에게 돌아가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로 다시 가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잠깐만요. 제가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제가 믿지 않았나요?” 물론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영접했고 믿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을 한번 보십시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러면 이렇게 말할 겁니다. “거봐요. 제가 믿었고 제가 영접했어요. 제가 한 일 아닙니까? 제가 시작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13절을 보십시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여러분이 믿었고 영접한 것은 누구의 뜻이었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주권적인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믿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이면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결정적인 은혜라는 뜻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어떤 아이도 스스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적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이의 출생은 전적으로 부모의 결정이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결정이 아닙니다. 영적인 탄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적 부모의 주권적인 결정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우리가 행사하는 그 믿음조차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심을 경험하는 그 의식적인 순간, 예수 그리스도께 삶을 맡기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마음을 열어 예수님을 영접하고 복음을 믿는 이 모든 경험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의 결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영원한 과거에 이미 여러분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여러분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잠시 멈추고 생각해 보면,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오직 그렇게 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여러분과 영원히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맺기로 예정하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아이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부모가 먼저 사랑하고 돌보며 생명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뜻하시고, 우리에게 새 생명과 거룩한 본성을 주시기로 뜻하셨기 때문에, 야고보가 말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로 이끄실 수는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참으로 가슴 벅찬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기로 예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셔서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를 누리게 하시려 했고,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갈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 아들과 같이 만드실 것입니다. 영원토록 끝없는 복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요한이 요한일서 3장에서 이렇게 외친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요한은 형용사조차 찾지 못했습니다. 도저히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랑이기 때문이죠. 그저 “어떠한 사랑”이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만큼 이것은 형용사로 설명할 수 없는, 주권적이고 자유로운 하나님의 예정된 사랑입니다.
자, 이제 다시 야고보서 1장 18절로 돌아가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자기의 뜻을 따라”라고 할 때에 사용된 헬라어는 ‘불레데이스(boulētheis)’인데, 부정과거 분사입니다. 단순한 소원이 아닙니다.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성취되는 적극적인 의지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단지 우리가 구원받기를 바라신다, 이런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받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그 뜻이 실제로 이루어지도록 작정하신다, 이런 뜻입니다.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뜻하시면 그 일은 반드시 일어납니다. 일종의 소원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랄 수 있지만 실제로 일어날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는, “나는 이 일이 이루어지게 하겠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단어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 뜻의 결과를 반드시 만들어 냅니다. 그렇다면 거듭남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창조하시는 일입니다. 그 창조는 누가 행하십니까?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적인 능력으로 행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주권적인 은혜에 반응합니다. 이제 세번째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지금까지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또 누가 행하는가를 봤죠. 세번째 질문입니다. 그러면 거듭남은 어떻게 일어날까요?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너는 구원받았다’라고 하시면서 그냥 ‘퍽’ 하고 바꾸시는 겁니까? 어떻게 도대체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다시 18절을 보겠습니다. “자기의 뜻을 따라…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그 사이에 무슨 말씀이 있습니까? “진리의 말씀으로.” “진리의 말씀으로”입니다. 문자적으로 말하면 “진리의 말씀에 의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말하는 것이죠.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의 능력을 통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씻으시고,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 안에 새로운 내적 존재를 주시고 성령을 심으십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거듭납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납니다. 말씀의 능력으로 새 생명이 주어집니다. 말씀을 듣지 않으면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칭찬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믿음과 함께 역사하는 것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구원을 이루시고, 사람은 말씀에 노출될 때 믿음으로 반응합니다. 그 순간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뜻은 말씀을 이해하고 그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의 마음에 이르러 실제로 성취됩니다. 그때 거듭남이 일어납니다. 어떻게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일어납니다. 디도서 3장 5절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어떻게 구원하셨습니까?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여기에도 같은 두 가지가 나옵니다. 말씀의 물로 씻는 역사와 성령을 심으시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핵심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제 이 표현을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진리의 말씀”이라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 반복해서 사용됩니다. 고린도후서 6장 7절에도 이 표현이 나오는데, 굳이 찾아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또 골로새서 1장 5절입니다. “...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여기서는 진리의 말씀이 복음과 직접 연결이 되어 있죠. 다시 말해 “복음의 진리의 말씀”입니다. 또한 디모데후서 2장 15절에도 “진리의 말씀”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고 합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말해서, “진리의 말씀”이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자신에 대한 계시를 이해하도록 펼쳐 보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구체적으로 골로새서 1장 5절에 근거하면, “복음 진리의 말씀”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다시 야고보서로 돌아가서 보면, 우리가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난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무리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일반 계시만이 아니라, 골로새서 1장 5절이 말하듯이 복음이라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시를 통해서이죠. 그러면 복음이란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새 본성을 주시고, 죄를 씻어 주시고, 그 안에 성령을 심으시기로 작정하실 때, 하나님은 복음이 선포되거나 전해지는 가운데서 그 복음을 이해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해가 믿음과 결합될 때 거듭남이 일어납니다. 로마서 10장 17절을 보십시오. 이제 마무리하면서 이 주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는 성경 몇 구절을 짚어보겠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을 기억하십니까? 먼저 14절부터 보겠습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전파하는 자, 전도자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다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보내심을 받지 않으면 어떻게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겁니다.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17절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 10장 17절의 정확한 의미이죠.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생명을 새롭게 창조하시지만, 사람이 복음을 듣고 이해하며 그 복음에 믿음으로 반응할 때 일어납니다. 그 결과가 거듭남입니다. 그렇다면 거듭남이 무엇입니까? 전적인 변화입니다. 누가 행하십니까?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적인 뜻으로 행하십니다. 어떻게 일어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할 때, 곧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통해 일어납니다. 이와 관련해 한 구절을 더 보자면 베드로전서 1장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그 수단이 무엇입니까?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육신으로는 새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집니다. 육신은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바로 이 말씀이, 우리에게 전해진 복음이 곧 이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말씀으로 거듭나는데, 그 말씀이 바로 복음이며, 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시고 내려오셔서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고 성령을 심으시지만, 그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선포된 복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해가 믿음과 결합될 때에 새 생명, 곧 새 생명이 주어집니다. 만일 우리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면, 하나님께서 하셔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복음에 반응해야 합니다. 이제 그러면 하나의 질문이 남죠. 왜입니까? 왜 하나님은 이런 일을 하실까요? 이제 거듭남이 무엇인지도 알고, 누가 하시는지도 알고,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압니다. 그러나 왜 그렇습니까? 왜입니까? 우리를 새롭게 만드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18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깊이 들어가면 끝이 없습니다. 그 의미가 너무나도 큽니다. “되게 하시려고”라는 표현은 목적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종류의 창조를 이루시려는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이죠. 새로운 종류의 창조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창조의 첫 열매입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처음 익은 열매”가 무엇입니까? 시간 관계상 구약을 모두 살펴보지는 않겠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9절, 레위기 23장, 신명기 18장, 신명기 26장을 적어 두시면 좋겠습니다. 이 본문들이 모두 처음 익은 열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농작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의 처음 익은 열매를 원한다.” 처음 익은 열매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순서상 첫번째라는 의미이고, 또 다른 하나는 가장 좋은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곡식을 수확할 때 하나님은 가장 먼저 거둔 것을 제물로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보여주라는 의미죠. 왜냐하면 농부는 더 거두지 못할 것에 대비해서 첫 수확물을 움켜쥐고 쌓아 두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처음 거둔 것, 가장 좋은 것을 나에게 가져오라. 처음 익은 열매의 의미입니다. 장차 이어질 온전한 수확의 첫 부분이죠. 앞으로 올 전체 수확을 미리 보여 주는 표입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의미도 정확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가 앞으로 거두게 될 수확을 보여 주는, 첫번째이자 가장 좋은 증거가 되기를 원한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여러분은 이 세상이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상은 전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성경은 이 땅의 모든 것이 불타 없어진 후에 주님께서 이 땅을 자신의 뜻에 따라 다시 창조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창조를 이루실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시 태어날 겁니다. 남자와 여자뿐만 아니라, 흙과 산과 골짜기와 물과 풀과 식물과 동물, 모든 것이 새롭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실 것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창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첫 증거일 뿐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말하듯이, 세상은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지를 아직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육신에 가려져 있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때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죠. 그때가 되면 우리가 진정 어떤 존재인지 분명하게 모두에게 드러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참으로 흥분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인 저는, 그리고 여러분은, 장차 올 것을 미리 보여 주는 표본입니다. 우리는 새 창조의 첫 모습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창조하셔서, 다가올 새 창조의 상징으로, 본보기로, 그림으로 삼으십니다.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알고 싶으십니까?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안이 완전히 새로워진 모습과 같을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겉사람까지도 완전히 새로워진 모습일 겁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아직 처음 익은 열매일 뿐입니다. 처음 익은 열매란 무엇입니까? 장차 올 온전한 수확에 대한 약속입니다. 바로 우리가 그 처음 익은 열매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고 싶다. 너희가 나에게 속한 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장차 올 완전한 새 창조를 보여 주는 표징이 되기를 원한다.”
여러분, 오늘 밤에 이 작은 벽돌 건물 안에 있는 작은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 우리가 이렇게 모여 있지만, 세상은 우리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죠?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전체를 다시 창조하실 그 엄청난 새 창조의 처음 익은 열매입니다. 우리는 그 첫 열매입니다. 로마서 8장은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그 재창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 재창조를 갈망하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이미 새로워졌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 몸의 속량입니다. 아직 육신이 남아 있는 그 부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받은 이 새 생명은, 장차 온 우주가 새롭게 될 미래의 영광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자, 그렇다면 거듭남이란 무엇입니까? 다시 창조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안에서부터 완전히 새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누가 이 일을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하십니다. 언제, 어떻게 일어납니까? 우리가 복음의 말씀을 믿는 마음으로 들을 때 일어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적인 능력과 믿음을 주셔서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시 창조하실 때, 이 세상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살아 있는 본보기로 우리가 세상 가운데 서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자, 이제 다시 야고보서의 문맥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 짓기를 원하신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완전히 잘못된 주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죄 짓는 것을 원하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기뻐하시지 않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 없는 세상의 본보기로 삼으시기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지을 때에 하나님을 탓해서는 안 됩니다. 그 책임은 육신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육신마저도 구속받을 날을 사모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의미입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녁 설교의 제목을 ‘거룩함으로 태어남’이라고 정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그 부르심에 헌신되어 있습니다. 거룩하지 않았던 우리가 거룩하게 되도록 새롭게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죠. 얼마나 놀라운 진리인지요. 우리를 하나님의 새 창조를 보여 주는 상징으로 삼아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 가운데서 빛으로 빛나게 하여 주옵소서.
구속받은 자로서 깊은 감사함을 마음에 품고, 우리가 처음 익은 열매로서 장차 올 그 온전한 새 창조를 바르게 드러내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을 탓했던 모든 순간들을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거룩하게 다시 창조하시는 데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모든 힘과 성령의 능력으로 이 거룩함을 추구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오늘 밤 이 자리에 아직 예수 그리스도께 나오지 못한 분들, 아직 거듭나지 못한 분들, 아직 생명의 원리를 받지 못한 분들, 내면에서 변화되지 못한 분들, 모든 죄를 씻음 받지 못한 분들, 새 영과 새 내적 존재를 받지 못한 분들, 성령께서 그 안에 거하시지 않는 분들, 아직 하나님의 특별하고 사랑받는 친밀한 소유, 곧 처음 익은 열매로서 장차 올 새 우주의 약속이 되지 못한 분들이 있다면, 오늘 밤이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 피를 흘리신 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분을 믿게 하여 주옵소서.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 믿음을 두게 하시고, 그 주권적인 긍휼과 은혜의 영광을 경험하게 하시고, 장차 올 재창조를 미리 보여 주는 처음 익은 열매로 사는 기쁨을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이미 하나님을 아는 우리는 우리의 존재에 합당하게 살게 하시고, 장차 올 미래가 어떠한지를 이 세상에 바르게 보여 주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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