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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베드로전서 1장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1절과 2절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놀라운 서신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이 짧은 두 구절에서 우리가 이렇게나 깊게 신학적 고찰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는 말은, 우리를 매우 깊고 광범위하고 심오한 영역으로 이끕니다. 바로 택하심의 문제, 택하심입니다.

바로 이 문제를 서신의 첫머리에서부터 꺼내는 이유는, 이 교리가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위로를 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 세상의 나그네요 외국인인 초대교회 교인들은 사실 하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기저기 흩어져 살았습니다. 사회에서 여러 면으로 버림받은 사람들처럼 여겨졌습니다. 로마 대화재의 책임이 초대교인들에게 돌아가게 되면서 박해가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존중받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존재임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비록 세상은 그들을 거부하고 박해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셨다는 사실로 그들을 위로합니다.

이 두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택하심에 대해 몇 가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지난 시간에 택하심의 본질을 살펴보았습니다. 택하심의 본질, 1절 끝에서 베드로는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 어떤 외부의 영향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오직 자신의 자유롭고 주권적인 은혜에 근거하여 우리를 주권적으로 택하셨다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 중에서 사랑할 자들을 미리 정하셨습니다. 택하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것이 본질입니다.

그 다음에는 택하심의 상태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로 택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외국인입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잠시 이 세상에 살고는 있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사회 속의 또 다른 사회입니다. 이 땅의 문화 속에 존재하는 초자연적인 문화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의 신념, 믿음, 사상, 신앙고백, 윤리, 습관, 감정, 삶의 기준, 원리, 생각, 추구하는 바, 기쁨은 모두 세상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세상과 벗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히려 세상과 적대적입니다. 우리는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나그네요 이방인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은 단지 세상과 다른 존재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나그네로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로만이 아니라 존재로도 증언합니다. 우리의 말이 힘을 얻는 토대는 바로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에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증인으로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너희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사회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사회, 문화 속에 존재하는 초자연적인 문화에 속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전혀 다른 기준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세상과 벗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세상과는 적대적인 관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향해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일 만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입니다.

세상에서 효과적인 증인으로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만의 작은 공동체 안에만 머무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더욱이 이 서신을 처음 받은 성도들처럼 박해받는 환경에서는 서로를 보호하고, 지지하고, 사랑하고, 교제하는 등등의 이유로 점점 더 안으로만 움츠러드는 경향이 생깁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죠.

그래서 베드로는 이 서신을 통해 박해받는 성도들에게 안으로만 움츠러들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거듭 일깨워 줍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움츠러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매우 사랑합니다. 또 공통점도 매우 많습니다. 기독교가 직면하는 큰 위험 중 하나는,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믿지 않는 사람들과 삶을 공유하는 일이 점점 줄어든다는 겁니다. 기독교 문화와 기독교 공동체 안에 깊이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 맥라렌(Alexander MacLare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구니는 씨앗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다. 들판에 뿌려져야 한두 달 후에 황금빛 밀밭으로 출렁이게 된다.”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그네라는 처지 때문에 안으로만 움츠러들려는 유혹을 반드시 이겨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잃어버린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우리끼리만 이야기하는 공동체가 되고 말 겁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만의 공동체를 어느 정도는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8장을 보면, 하나님이 교회의 박해를 허락하시고 성도들을 흩으실 때마다 교회는 오히려 성장했습니다. 씨앗이 바구니에서 쏟아져 들판에 뿌려질 때마다 황금빛 밀밭이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나그네라는 우리의 처지를 생각할 때마다, 단지 이 땅에 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되새겨야 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수도원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 어딘가 동굴로 숨어들면 안 됩니다. 평생 상아탑 같은 학문의 세계 안에만 머물러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흩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나그네, 사신입니다. 구원의 복음을 세상으로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안으로만 움츠러들어서 폐쇄적인 공동체가 되려는 유혹에 맞서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세상 속의 나그네입니다. 세상이 자기 편을 대하듯이 우리를 대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 땅의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듯 우리를 대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훨씬 더 나은 본향, 우리의 참된 고향을 사모합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히브리서 11장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다고 합니까?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우리의 성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본향입니다.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영원을 향한 망명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인을 매우 인상적으로 묘사한 글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쓴 것은 아니지만, 고대의 어떤 저술가가 매우 흥미롭게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나라나 언어, 또는 관습으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헬라인의 도시에도, 야만인의 도시에도 자신에게 주어진 곳에서 살아간다. 의복과 음식, 그리고 일반적인 생활 방식에서는 그 지역의 관습을 따른다. 그러나 자신들의 삶이 지닌 놀랍고도 분명히 역설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자신이 태어난 땅에 살지만 그곳의 임시 거주자로 살아간다. 시민으로서 모든 책임은 함께 감당하지만, 나그네로서 모든 불이익도 함께 견뎌낸다. 모든 외국 땅이 고향이 되고, 모든 고향은 외국 땅이 된다. 이 땅에서 살아가지만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바로 이겁니다. 이것이 우리입니다. 우리를 가장 정확하게 묘사한 말입니다.

어렸을 때 중고등부 모임에서 이 찬송을 자주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이 세상은 나의 본향이 아니오 나는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일 뿐이라. 나의 보화는 저 푸른 하늘 너머에 쌓여 있네.” 택함을 받은 자들의 삶입니다.

세번째, 택하심의 근원도 살펴봐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매우 중요한 내용을 만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여기에 택하심의 근원이 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고, 그 결과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일 수밖에 없는 가족에 속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았습니다. 그런데 2절은 택하심의 근원을 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하나님은 미리 아심을 따라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우리는 택하시는 분이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실을 살펴보았죠. 택하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아주 간단히 다시 말씀드리자면, 로마서 11장 5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에베소서 1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4절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택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영향도 받지 않고 스스로 택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사람의 영향도 받지 않으실 뿐 아니라, 잘 들으십시오, 어떤 상황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이해해야 하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상황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이나 결정을 유발하는 상황도 전혀 없습니다.

다니엘 4장 3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 아무도 하나님의 선택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그 과정에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자신의 뜻 가운데 따로 구별하셨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21절에서 말하는 거룩하고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중에서도, 사람들 중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복을 얻도록 택하셨습니다. 창조하시기도 전에 영원한 선택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택하심을 받은 백성은 택하심을 받은 자들로 이루어집니다. 택하심을 받은 백성은 택하심을 받은 자들로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택하심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잘 따라오셔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 그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미리 아셨기 때문에 우리를 택하신 겁니다.” 여러분도 이런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택하심에 대한 가장 일반적이고 전통적인 설명이죠. “미리 아심”이란 “미리 내다보심”을 뜻한다. 또 이런 설명도 많이 합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시간의 흐름을 내다보시며 자신의 전지하심으로 장차 여러분이 무엇을 할지, 제가 무엇을 할지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을 것을 보셨기 때문에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반대로 믿지 않을 것을 보셨기 때문에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미리 아심이 이런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전지하심으로 우리가 무엇을 할지, 모든 사람이 무엇을 할지를 미리 아셨고,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아직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미리 보신 다음에, 믿게 될 것을 미리 내다보신 사람들을 선택하셨다. 사람들은 이런 교리를 참 좋아합니다. 정말 좋아합니다. 그렇게 믿고 싶어합니다. 사실 제 안에도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도 그런 마음이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받아들이기가 참 좋게 들립니다.

왜 그렇게 믿고 싶어지는지 아세요? 첫번째는, 타락한 우리의 본성은 구원에 있어서 자신이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는, 역시 타락한 우리의 본성은 그 반대의 설명을 들으면 어떻게 느낍니까? 불공평하게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죄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교만을 미화해서 미덕이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의 공의를 깎아내려서 공의가 아닌 것처럼 말할 처지도 아닙니다. 사실 “미리 아심”이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런 견해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아세요? 이제 말씀드릴게요. 몇 가지 이유를 말씀드릴테니까 적어 보십시오. 먼저, 여기서 말하는 “미리 아심”을 단순히 “미리 내다본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하나님께서 역사를 미리 내다보시면서 여러분이 무엇을 할지를 보신 후에, 여러분이 그렇게 할 것을 보셨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하셨다고 생각한다면, 가장 먼저 생기는 문제는 사람이 주권자가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권자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행동하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어, 그렇군. 저 사람이 그렇게 하겠구나. 기록해 두자”라고 하는 셈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주권자는 사람이 됩니다.

이제 그렇게 생각하면 요한복음 15장 16절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그렇다면 누가 주권자입니까? 사람이 주권자입니까? 여러분이 주권자이고, 제가 주권자이고, 모든 사람이 각각 주권자입니까? 그래서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그 모든 것을 정리하시면서 적당한 사람을 장부의 이쪽저쪽에 맞춰 넣으시는 분이십니까? 아닙니다. 그런 견해를 받아들이면 결국 사람을 주권자로 만듭니다.

둘째, 그런 견해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 구원의 공로를 사람에게 돌리게 하며, 영광을 하나님과 함께 공유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제가 말씀드렸듯이 사람은 그렇게 하기를 좋아합니다. 얼마 전에 어떤 사람의 간증을 들었는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그리스도를 영접할 분별력이 있었던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저는 벌떡 일어나서 이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아닙니다. 그게 아닙니다. 저는 당신을 전혀 모르지만, 한 가지는 아는데요, 당신에게는 그리스도를 영접할 분별력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스스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분별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분별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은 “제가 그리스도께 제 삶을 드릴 분별력이 있었던 것이 참 감사합니다”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그게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영광을 조금이라도 차지하고 싶어합니다.

우리를 택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29절은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합니다. 또 에베소서 2장 9절도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라고 합니다. 동일한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리 아심”을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무엇을 할지를 미리 아셨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결국은 사람을 주권자로 만듭니다. 둘째로, 사람이 그리스도께 나아올 만큼 충분한 지혜를 가졌다고 공로를 사람에게 돌리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도 구원의 선물에 대한 영광을 하나님과 함께 나누게 되죠.

세 번째 문제는, 그런 견해가 사람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고 전제합니다. 다시 말해서, 타락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 스스로 여러 정보를 살펴보고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고 가정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3장 11절은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이끌어 주시기 전에는 결코 하나님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네 번째 문제는, 그런 견해가 구원을 인간의 행위의 결과로 만듭니다. 어떤 행위입니까? 바로 믿음이라는 행위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전적으로 자신의 인간적인 능력만으로 믿을 수 있다면, 여러분은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얻은 것이 됩니다. “잠깐만요, 구원받으려면 믿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맞습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믿어야 하죠. 그러나 여러분이 믿게 된 것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그저 가만히 앉아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시면서 여러분이 어떻게 할지를 기다리기만 하셨다면, 여러분이 행사한 믿음은 하나님의 주신 믿음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믿음이죠. 그렇다면 그것은 결국 인간의 행위입니다. 그렇게 되면 구원은 인간 행위의 결과가 됩니다. 비록 믿음의 행위일지라도 여전히 인간의 행위일 뿐이며, 인간에게서 나온 믿음입니다.

다섯 번째 문제는, 하나님을 인간의 선택에 좌우되는 분으로 만든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인간의 선택의 희생자로 만듭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앉아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말이 됩니다. “음, 보니까 저 선택은 내 계획에 영향을 미치겠어. 저 사람이 ‘예’라고만 했더라면 내가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제는 계획이 뜻대로 되지 않겠는걸.” 하나님을 모독하는 견해나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자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선하고 기쁘신 뜻을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어떤 행동 때문에 좌절하시거나 계획이 어그러지는 그런 분이 결코 아닙니다. 반드시 이 진리를 분명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사야 46장 9절입니다.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하나님은 결코 어떤 상황의 희생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단지 미래를 내다보면서 누가 믿을지를 확인하셨다라고 생각한다면, 사람이 주권자가 됩니다. 구원의 공로 일부를 사람에게 돌림으로써 하나님께서 받아야 할 영광의 일부를 사람에게 주는 셈입니다. 또 사람이 하나님께서 먼저 역사하지 않으셔도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인간이 믿은 행위의 결과로 만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인간의 선택에 좌우되는 분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미리 아심”은 이런 뜻이 결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왜 옳지 않은지 신학적인 이유를 들어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본문 자체로 가 보겠습니다. 이 단어 자체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를 이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서 “미리 아심”이라고 번역된 단어를 잘 보십시오. 헬라어로는 ‘프로그노시스(prognōsis)’입니다. 들어 보신 적 있으세요? ‘프로그노시스’,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베드로는 이 단어를 같은 장에서 한 번 더 사용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19절은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고, 이어서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같은 단어가 사용됐습니다. ‘프로기노스코(proginōskō)’입니다.

그렇다면 이 “미리 알린 바”라는 말이 단순히 ‘미리 내다보았다’라는 뜻입니까? 하나님이 하늘에서 미래를 보시면서 “아, 그리스도가 앞으로 이렇게 하겠구나”라고 말씀하셨다는 뜻인가요? 하나님이 역사의 흐름을 미리 살펴보시면서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하실지를 확인하셨다는 말입니까? 그런 뜻이 결코 아닙니다. 2절의 ‘프로그노시스’는 20절과 의미가 같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같은 장에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려고 같은 단어를 전혀 다른 뜻으로 사용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창세 전에 미리 아셨고, 우리 역시 창세 전에 미리 아셨다면, 그리스도를 미리 아신 것처럼 우리도 미리 아시지 않겠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사도행전 2장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오순절 설교에서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단어를 아주 즐겨 사용합니다. 사도행전 2장 23절에서 나사렛 예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잠깐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해가 되세요? ‘미리 아심’은 ‘정하신 뜻’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미리 아심은 의도적인 선택입니다. 의도적인 선택, 하나님이 미리 정하셨다, 예정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정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앞을 내다보셨다는 뜻이 아니라, 미리 계획하셨다는 뜻입니다. ‘안다’는 것은 관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을 만들고 그 일에 관계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혼동하지 않도록 몇 가지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예레미야 1장 5절에서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바로 이런 의미의 ‘앎’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나는 너와 관계를 맺기로 미리 정했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입니다. “나는 너와 관계를 맺기로 미리 정했다.”

또 아모스 3장 2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만 아셨고 다른 민족은 전혀 모르셨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만 지켜보셨다는 뜻입니까? 아니죠. “내가 모든 민족 가운데 오직 너희와만 특별하고도 미리 정한 언약의 관계를 맺었다”는 뜻입니다.

이사야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이 문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반드시 분명하게 이해를 하셔야 됩니다. 이사야 49장 1절입니다. “섬들아 내게 들으라 먼 곳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 이사야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 모든 일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미리 계획하셨습니다. “주께서 나를 아셨다”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이사야가 누구인지 알고 계셨다는 말인가요? 아니죠. 하나님께서 이사야와 특별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기로 미리 정하셨다는 뜻입니다.

출애굽기 33장도 같은 의미입니다. “...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17절에서도 주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다시 말해서, 여기 ‘안다’는 말 속에는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적 유대관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도 나옵니다. 어떤 말씀인지 기억하시겠어요? “많은 사람이 이르되 ‘주여, 주여’”라고 할 때, 예수님은 23절에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이것이 “나는 너희가 누구인지 몰랐다”는 뜻입니까? 아니죠. 예수님은 그들이 누구인지 분명히 아셨습니다. “나는 너희와 미리 정한 언약적 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4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라고 말씀하십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이 양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입니다. 단지 안다는 의미가 아니라, 미리 정하고 택하여서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게 미리 아심의 의미입니다. 이제 다시 베드로전서로 돌아가서 베드로의 말을 정확히 이해해 봅시다. 베드로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정하신 계획 안에서 스스로 미리 세우신 관계를 의미합니다.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택하심의 근원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관계를 맺기로 미리 정하신 작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내다보시면서 “저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고 거기에 맞춰 내가 반응해야지”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셨기에 아셨습니다.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이 말씀을 마음에 꼭 새기시기 바랍니다. 이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뜻하시고, 존재하도록 정하셨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이해하시겠어요? “그러면 죄는 어떻습니까?”, 이렇게 물으실 텐데, 하나님께서 죄를 정하지는 않으셨지만, 죄가 존재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나, 과거에 일어난 일이나, 앞으로 일어날 일 가운데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거나 정하지 않으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해하시겠어요? “그렇다면 죄는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물으실 텐데, 저는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의 존재를 허락하셨고, 그 안에도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죄가 존재하도록 허락하셨지만 결국에는 영원히 멸하실 겁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죄가 다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더럽힐 가능성조차 남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이해하기 쉬운 내용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반드시 이해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을 받을 자들을 미리 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미리 아심’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점에서 가장 좋은 본이십니다. 베드로전서 2장 6절은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심으로 그리스도를 택하신 것처럼, 우리도 미리 아심으로 택하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진리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다시 정리해 봅시다. 택하심의 본질, 뭡니까? ‘하나님이 택하셨다’입니다. 택하심의 상태는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라는 것이죠. 택하심의 근원은 하나님이 관계를 맺기로 예정하신 작정입니다. 이제 네 번째로, 택하심에 대해 아직도 할 말이 많이 있지만, 네 번째 주제로 넘어가겠습니다. 택하심의 영역입니다. 택하심의 영역.

2절을 보십시오.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잘 들으십시오. 택함 받는 것과 구원 받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서로 다른 일입니다. 들을 준비가 되셨나요? 택하심을 받았어도 아직 구원받지 않은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고요? 우리는 모두 택하심을 받았지만 아직 구원받지 않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택하심을 받았으니 구원받을 필요가 없다”, 이런 말은 틀린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계획하신 선택이 실제로 일어나는 영역입니다. 택하심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을 통해 택하심을 받은 사람에게 이루어집니다.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 역사 속에서 실제가 됩니다.

택하심을 받은 사람은 언제 택함을 받았습니까? 기억하시겠어요? 여러분은 언제부터 택하심을 받았습니까? 영원 전부터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언제부터 구원받았습니까? 몇 년 전이죠. 여러분은 구원받기 훨씬 전부터 이미 택함을 받았습니다. 아직 죄 가운데 잃어버린 상태에 있었을 때에도 이미 택함을 받았습니다. 이 둘은 서로 다릅니다. 하나님의 계획인 택하심은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을 통해 택함 받은 사람의 삶 속에 실제로 이루어집니다.

참으로 놀라운 진리입니다. 여기 이 “거룩하게 하심”이라는 말은 신학자들이 흔히 “구원 사역”의 전 과정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저는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이라는 베드로의 말은 바로 거듭남을 염두에 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원, 거듭남, 믿음, 회개, 성령님이 이루시는 그 모든 구원 사역을 말이죠.

이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 ‘하기아스모스(hagiasmos)’는 ‘거룩하다’를 뜻하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구별하다, 따로 세우다, 거룩하게 하다, 성별하다’, 이런 의미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속격은 거룩하게 하시는 주체가 성령이심을 나타냅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여러분을 거룩하게 하십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을 세상에서 구별하고, 따로 세우고, 하나님께 성별하고, 구원의 사역 안에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성령님이 만드십니다.

여러분과 저는 영원 전부터 택함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구원받지 못한 인류에 속한 때가 있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상태로 그 무리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성령님이 찾아오셔서 우리를 따로 구별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거룩하게 하셨다”라는 것은 “구별하여 따로 세우셨다”는 뜻입니다. 구원뿐만 아니라 그 구원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바로 성령께서 그 놀라운 일을 이루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바로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보여줍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셔서 하나님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세우시는,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우리는 구별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성별되었습니다.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10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 택하심을 받았고,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너희는 처음부터 택하심을 받았다. 그러나 성령님이 너희를 거룩하게 구별하셨을 때 비로소 구원을 받았다. 성령님이 너희를 죄에서 하나님께로 구별하시고, 어둠에서 빛으로 구별하시고, 불신앙에서 믿음으로 구별하시고, 불의를 사랑하던 자를 회개로 구별하셨다.” 이 모든 것이 바로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사도행전 15장 7절입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하나님이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택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성령님은 믿음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별하여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 삼으십니다.

누가 그렇게 하셨다고요?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이 믿음으로 마음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으로 나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성령으로 나야 합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를 죄와 불신앙에서 구별하여 믿게 하고 거듭나게 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납니다.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디도서를 보겠습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구절을 제가 자주 찾아보는 이유는 너무나 놀라운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디도서 3장 5절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역사를 미리 내다보시면서 “아, 저 사람들이 앞으로 저렇게 하겠구나, 그러니 나는 이렇게 해야겠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아닙니다.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따라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지가 나옵니다.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하나님은 구원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구원을 이루기 위한 값을 치르셨습니다. 성령님은 그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하십니다. 성령님이 중생의 사역을 이행하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하나님이 너희를 택하셨다는 것을 안다고 합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택함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령님이 능력으로 임하셔서 삶을 변화시키실 때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성령께서 변화시키실 때에 하나님의 택하심이 현실이 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을 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봤던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어떻게 구원받게 하셨습니까?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절입니다.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성령이 변화를 일으키십니다. 깨끗하게 하시고 구별하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진리입니까. 하나님이 계획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적용하십니다.

로마서 15장 1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도 동일한 표현이 나옵니다. 구원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속하게 하는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뭐라고 말합니까? 고린도전서 6장 11절입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다시 말해, 여러분도 전에는 음행하는 자, 우상 숭배하는 자, 간음하는 자, 탐색하는 자, 남색하는 자,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 술 취하는 자, 모욕하는 자, 속여 빼앗는 자였다고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우리는 흔히 성화를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 일어나는 일로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포괄합니다. 죄에서 구별되어 하나님께 속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 베드로전서에서는 구원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회심할 때 성령님이 행하시는 결정적인 사역입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속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일단 성령님이 여러분을 구별하신 후에는 계속해서 여러분을 거룩하게 하시고, 성별하시고, 더욱 거룩하게 만들어 가십니다. 성화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우리의 평생 동안 계속됩니다. 구원은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으로 거듭났습니다.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성령님이 여러분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믿음은 성령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성령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열어 믿게 하십니다. 성령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돌이켜 복음의 메시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디모데후서 2장 25절은 성령님이 여러분에게 회개를 주신다고 말합니다. 성령님이 여러분을 죄에서 돌이키시고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택하신 목적을 실제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진리입니다. 정말 놀라운 진리입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에베소서 1장 4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택하셨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은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완전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구별됨을 의미합니다. 저는 거룩한 사람입니다. 알고 계셨어요?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도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는 마땅히 거룩해야 할 만큼 거룩하지 못하고, 여러분도 마땅히 거룩해야 할 만큼 거룩하지는 못합니다. 저는 아직 온전히 거룩하지 않고, 여러분도 아직 온전히 거룩하지 않습니다. 저는 전혀 거룩하지 않은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죄와 불신앙과 어둠에서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구별됐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 가고 있습니다. 제가 영적으로 성장할수록 죄를 짓는 빈도가 줄어들고, 그만큼 거룩해지죠. 과정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성령님이 행하시는 구원의 사역에서 시작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방식으로 새 언약의 실체를 보여 줍니다.

사실 여기서 잠깐 한 가지만 덧붙이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택하셨는데도 그 사람을 거룩하게 하지 않으셨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모순입니다. 이 점을 꼭 말씀드려야 하는데, 마침 생각이 났으니까 참 잘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택하여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셨는데 그 사람을 거룩하게 하지 않으셨다는 말은 모순입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완전한 모순입니다. 진짜 모순입니다.

여러분이 어둠에서 건짐을 받아 빛 가운데로 옮겨졌다면, 죽음에서 건짐을 받아 생명으로 옮겨졌다면, 불신앙에서 건짐을 받아 믿음을 얻었다면, 죄에서 구별되었다면, 여러분은 거룩한 사람입니다. 마땅히 거룩해야 할 만큼 거룩하지는 않지만, 여러분은 거룩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택하시고 성령님을 보내셔서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셨는데도, 그 사람을 죄에서 구별하지 않으셨다는 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로마서 6장 22절에서 바울이 한 말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당연합니다. 너무나 당연합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고 해 봅시다. “나는 그리스도인이지만 내 삶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어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성령님이 여러분을 불신앙에서 믿음으로 구별하셨다면, 죄를 사랑하던 데서 죄를 미워하는 데로 구별하셨다면, 그 모든 면에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옮기셨다면, 여러분은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거룩함은 여러분의 삶에서 반드시 드러납니다.

이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복음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생겨났습니다. 성령님이 어떤 사람을 거룩하게 하시고 죄에서 구별해서 하나님께 속하게 하셨는데도, 그 사람의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차이가 있습니다. 반드시 변화합니다. 여러분은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본성에 완전한 변화가 이미 일어났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입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놀랍습니다. 이것도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오셔서 거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달라지지 않겠어요? 물론 달라지죠.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믿지도 않고 죄에서 구별되지도 않을 수 있다고 어떻게 말할 수가 있습니까?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너무나도 분명히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그렇다면 택하심의 영역은 무엇입니까? 택하심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영역은 구원입니다. 거룩하지 않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시는,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택하심이 구원이라는 영역으로 펼쳐집니다. 베드로후서 1장 3절을 보겠습니다. 2절에 나오는 인사말도 비슷합니다.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한 뒤에, 우리 주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받았습니까?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알게 될 때에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습니다. “그 모든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실텐데요. 분명히 회개가 포함됩니다. 회개는 분명 영적인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죠. 믿음과 덕과 의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성령의 역사하심을 기뻐하는 것, 이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택하심의 본질은 뭐라고요? 하나님이 그 어떤 외부의 영향도 받지 않으시고 우리를 택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이런 질문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렇다면 택하심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우리는 낯선 땅에 거하는 나그네입니다. 서로 사랑합니다. 세상과는 전혀 다른 삶의 기준을 따라 삽니다. 그러나 우리끼리만 너무 뭉친 나머지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을 잃게 만드는 유혹을 이겨내야 합니다. 우리가 이곳에 있는 목적은 소금과 빛으로 씨앗을 널리 뿌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택하신 근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계획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우리를 아셨습니다. 여기에서 ‘아셨다’는 것은 단순히 관찰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를 아셨다는 것은 우리와 관계를 맺기로 미리 정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택하심의 근원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이 실제가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실제로 일어나기도 전에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택하심이 실제가 되는 영역은 무엇입니까? 구원입니다. 이론적으로 말해서,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 죽는다면, 설령 이론적으로 택하심을 받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지옥에 갑니다. 물론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택하심은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으로 확증되기 전까지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구원이 택하심이 적용되는 영역입니다.

이제 예습을 좀 하겠습니다. 다섯 번째입니다. 다섯 번째는 우리를 택하신 목적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우리를 택하신 목적이 뭘까요? 너무나 분명합니다. 무엇을 하라고 택하셨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라고 택하셨습니다. 우리를 택하신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라고 여러분을 구원하셨습니다. 너무나 기본적인 진리입니다. 단순히 소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저 소망하는 게 아니라 사실입니다.

다음 주에는 순종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고,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피 뿌림의 의미를 살펴볼 겁니다. 제가 신약성경에서 발견한 강력한 진리입니다. 이 내용은 자세히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다음주까지 남겨 두겠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제 말을 흘려듣지 마십시오. 마음을 닫지 마십시오. 선택 교리는 지극히 실제적입니다. 정말 강력한 교리입니다. 이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면 말 그대로 한 사람의 삶 전체가 달라집니다. 여러분 자신이 택함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그 진리가 가져오는 실제적인 결과가 여러분의 매일을 바꾸어 놓을 겁니다.

선택 교리는 우리의 교만을 다룹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배의 문제를 다룹니다. 기쁨의 문제도 다룹니다. 선택 교리는 우리가 받은 은혜와 영적인 특권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가르쳐 줍니다. 선택 교리는 다른 어떤 교리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가 합당하게 살아가도록 강력하게 이끕니다. 선택 교리는 우리의 삶에 능력을 가져다줍니다. 이 교리를 이해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여러분의 삶에 능력을 줍니다. 이 교리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무시하시면 안됩니다.

스펄전(Spurgeon)이 한 말을 들어 보십시오. 제가 이 말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구원이 이 세상에 오기 전에 택하심이 가장 앞장서서 행진했다. 택하심이 맡은 일은 구원이 머물 곳을 정하는 것이었다. 택하심은 온 세상을 다니며 구원이 찾아갈 집을 표시했고, 그 보화가 담길 마음을 표시했다. 택하심은 아담으로부터 마지막 사람에 이르기까지 온 인류를 훑어보며 구원이 주어지도록 정해진 사람들에게 거룩한 표를 찍었다. 택하심은 “그가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라고 말했고, 구원은 반드시 그곳으로 가야 했다.”

“그 다음에는 예정이 왔다. 예정은 단지 집에 표시만 한 것이 아니라, 구원이 그 집까지 가야 할 길을 그려 놓았다. 예정은 구원이라는 거대한 군대가 내딛을 모든 발걸음을 정했다. 죄인이 언제 그리스도께로 인도될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구원받을 것인지, 어떤 수단이 사용될 것인지를 예정이 정했다.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죄로 죽은 사람을 살리실 정확한 시간과 순간을 정했고, 예수님의 피를 통해 평안과 용서가 선포될 때를 정했다. 예정은 그 집까지 이르는 길을 너무나 완전하게 표시해 놓았기 때문에 구원은 결코 그 경계를 벗어나지 않으며,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몰라 헤매는 일도 없다.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가운데 긍휼이 내딛는 모든 발걸음 하나하나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비유 아닙니까? 택하심은 집에 표시를 했다고 합니다. 예정은 그 집에 이르는 길과 때를 정했답니다. 그리고 구원은 그 길을 따라왔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함께 머리 숙여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고백합니다.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무한한 은혜를 생각하면 그저 압도될 뿐입니다.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우리를 택하셨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기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오직 감사로 가득할 뿐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나그네라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하게 하옵소서. 우리는 주님께서 완전한 곳을 위해 택하신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마음을 붙이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의 참된 본향과 영원한 운명을 분명히 바라보게 하옵소서. 은혜에 대한 감사로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셔서, 우리 자신을 헌신하고, 아낌없이 드리고, 지치지 않고 섬기고, 우리의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주님의 복되신 이름을 높이는 일에 바치게 하옵소서.

우리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 사라져 가는 세상에 마음을 빼앗겨 헛되이 살아가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를 구별하여 세워 주시니 감사합니다. 성령님이 계속해서 이 일을 이루어 가심을 우리가 압니다. 성화의 길에서 날마다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우리를 힘써 나아가게 하옵소서.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택하심이 실제가 되는 사건이 일어나길 원합니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이들이 이제 긍휼과 구원의 은혜를 받고, 회개와 믿음을 얻고, 죄에서 구별되어 주님께 속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 일을 이루어 주옵소서.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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