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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나님 말씀을 보겠습니다. 오늘 저녁에도 베드로전서 2장을 보겠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을 살펴보고 있는 이번 연구가 얼마나 풍성하고 시의 적절한지 놀라울 지경입니다. 특히 11절부터 시작되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 믿는 자들이 사회 제도에 순종하기를, 복종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또 흥미로운 것은 이번 시리즈가 기독교인들, 심지어 우리 도시의 기독교인들이 시민 불복종 운동에 참여하는 시점에 맞춰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어제 낙태 반대 단체인 ‘오퍼레이션 레스큐’(Operation Rescue)가 벌인 시위에서 그런 행태가 나타났죠. 이번 시리즈를 통해서 우리는 성경이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의무를 명확하게 살펴보고 있습니다. 바로 경건하지 못한 문화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할 행동을 알려주면서 2장 끝부분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이시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고난받으신 예수님을 우리의 본보기로, 기준으로 살펴보았죠. 오늘 저녁에는 베드로가 그랬듯이 주 예수님을 우리의 기준으로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대속물로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25절에서는 우리의 목자로서 살펴볼 것입니다.

교회 예배의 중심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름다운 성찬식이 있습니다. 성찬식에서 우리는 떡과 잔을 들어 그리스도를 기념하며 교제합니다. 성찬식의 핵심에는 교리가 있습니다. 이 교리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중심에는 성찬식이 있고, 성찬식의 중심에는 매우 중요한 교리가 있습니다. 이 교리는 주님의 말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나의 몸이라.” 기독교 복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무언가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가장 구체적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베드로가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점이죠.

베드로는 2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를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말하려는 요점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세 가지 방식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 있듯이,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우리가 부당한 대우 때문에 고난을 받을 때 대처하는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21절부터 2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 고난을 받으신 이유는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부당한 대우 속에서 인내하며 끈기 있게 고난을 견디는 방법을 보여주신 겁니다. 지난 주일 저녁에 말씀드렸듯이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가장 부당한 대우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일하게 완전한 분이셨기에 예수님이 당하신 모든 일은 전적으로 부당한 일이었습니다. 지옥과 인류가 예수님을 대적하기 위해서 힘을 모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중 그 누구도 실감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고난을 받으신 겁니다. 이러한 고난을 받으시면서 예수님은 인내의 완벽한 모범이 되셨습니다. 비록 그 고난은 그 무엇보다도 부당한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인내에 대한 완벽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준, 우리의 모범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본이 되시기 위해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도 경건하지 않은 사회에서 신자로서 부당한 고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신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단지 우리의 본이 되시기 위해서만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저녁에 여러분에게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속물로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대속물로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24절을 보겠습니다. 반드시 밑줄을 그어야 할 위대한 구절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이 위대한 구절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속물로서 어떤 역할을 하셨는지를 말해줍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봤듯이, 베드로는 2장 마지막 부분에서 이사야 53장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4절, 5절, 11절을 암시하고 있죠. 이사야 53장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바로 기독교 복음의 핵심, 대속이라는 위대한 교리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다는 것은 신앙의 기초입니다. 사실 구원의 다른 모든 요소들은 이 위대한 핵심 진리를 둘러싸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레온 모리스가 쓴 책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신학자인데, 여러분도 한번 찾아서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읽습니다. “구속은 대속적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지불할 수 없는 대가를 지불하셨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지불하셨기에 우리는 자유롭게 되었다. 칭의는 우리의 구원을 법적으로 해석한다. 신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져야 할 법적 책임을 우리를 대신하여 지셨다. 화목이란 적대감의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사람들을 하나되게 만드는 것이다. 이 경우, 그 원인은 죄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그 원인을 제거하셨다. 우리는 죄를 없앨 수 없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하셨으며, 죄가 없는 상태가 우리에게 전가되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진노가 사라졌음을 의미하며,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그 진노를 짊어짐으로써 이루어졌다. 그 진노를 불러일으킨 것은 우리의 죄였다. 이를 짊어지신 분은 그리스도였다. 지불해야 할 대가를 대신 지불하셨다. 얻어야 할 승리를 모두 얻으셨다. 감당해야 할 형벌을 모두 감당하셨다. 직면해야 할 심판을 모두 직면하셨다.”

레온 모리스가 말하는 것은 구속, 칭의, 화목, 죄와 허물을 사하심, 화목제물, 덮으심, 이 모든 것이 대속이라는 위대한 진리의 부산물이라는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대속물이라고 기록한 이유이죠.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베드로와 같은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과 베드로가 동일한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기록한 것은 “이것이 대속이다”라고 기록한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대속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만일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속물이 아니시라면 우리는 여전히 정죄받아야 할 죄인입니다. 만일 우리 죄와 죄책이 그리스도께 전가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가 친히 담당하시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남아있게 됩니다. 만일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해결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해결해야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가 우리의 형벌을 담당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담당해야 합니다. 다른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우리, 둘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대속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비도덕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몇몇 신학자들은 인간의 육신을 입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다고 가르치는 것이 비도덕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무언가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더럽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과정에서 죄에 대한 형벌을 죄를 지은 사람에게서 죄가 없는 사람에게 전가하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직접 죄를 담당하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속적 죽음을 강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담당하셨습니다. 따라서 비도덕적이지 않습니다. 거룩한 하나님께서 죄를 담당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모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의지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형벌을 원하셨고, 친히 그 벌을 몸소 받으시는 희생자가 되셨습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우리 죄를 예수님이 담당하시거나 우리가 담당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 죄에 대한 형벌을 예수님이 치르셨거나 우리가 지옥에서 영원히 그 형벌을 치르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24절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여기서 “친히”는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홀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 강조된 표현은 혼자서 이루셨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셨음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자발적으로, 홀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에서 요한이 하나님의 어린 양에 대해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자발적으로 죄를 담당하셨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외부의 어떤 영향도 없이 스스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순교자로서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단순히 대의를 위해 죽은 위대한 본보기로 여깁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라는 뮤지컬이 있죠. 한국어로는 <슈퍼스타 예수 그리스도>라는 뮤지컬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을 대의에 완전히 헌신하여 순교한 위대한 본보기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순교자는 고난의 본보기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속물이 될 수는 없습니다. 순교자가 자신을 희생한다고 해서 우리의 죄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잠시 베드로전서 3장 18절을 보겠습니다. 여기에서도 베드로는 대속이라는 위대한 진리를 반복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의로우신 분께서 불의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여기서 “담당하다”라는 동사는 거대하고 무거운 짐을 나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가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해 주죠. 죄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짊어지신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이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알고 싶다면 로마서 8장을 읽으시면 됩니다. 22절입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난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죄라는 무거운 짐을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자, 이제부터 ‘담당하다’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생각해 봅시다. 이 표현은 구약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구약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신약에서는 흔치 않은 표현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라는 표현은 베드로전서 2장 24절과 히브리서 9장 28절에서만 나타납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자주 등장합니다. 구약에서 이 표현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살펴보면 베드로가 이 표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유대인으로서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을 보면 죄를 담당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매우 명확해집니다. 그 의미를 이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후에 가나안 땅의 가데스 바네아로 인도하신 것 기억하십니까? 정탐꾼들이 40일 동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이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않고 신뢰하지 않으니 내가 너희를 벌하겠다. 이 광야에서 방황하게 될 것이다.” 얼마나 오래 방황하게 하셨을까요? 40년, 40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바로 들어가는 대신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게 하는 벌을 주셨습니다.

민수기 14장 33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그러면 죄를 담당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바로 벌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사십 년간 죄악을 담당하게 하신다는 말은, 너희 죄에 대한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죄를 담당한다는 말은 벌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에스겔은 이를 다르게 표현합니다. 여러 구절이 있지만 한 두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에스겔 18장 20절입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잘 들으십시오.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무슨 뜻일까요? 아들은 아버지의 죄로 인해 벌을 받지 않을 것이며, 아버지도 아들의 죄로 인해 벌을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죄악을 담당한다는 것은 벌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 경우 죄를 지은 영혼은 죽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에스겔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죄로 인해 죽지 않을 것이고 아버지는 아들의 죄로 인해 죽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죄를 담당한다는 것은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 벌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매우 중요한 성경적 특징으로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을 명확히 이해하게 해줍니다. 예수님이 대신 벌을 받으셨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 대신 예수님께 내려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의미입니다. 민수기 18장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조상의 가문은 성소에 대한 죄를 함께 담당할 것이요.”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에게 자신들의 제사장 직분과 관련하여 죄를 담당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임명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너희가 성소를 모독하고 제사장 직분을 모독한다면 그 죄를 담당할 것이다.” 무슨 뜻입니까? ‘그 벌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민수기 18장 2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레위인은 회막에서 봉사하며 자기들의 죄를 담당할 것이요.” 다시 말해서 레위인은 직무를 수행하는 동안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의미입니다. 에스겔의 여러 구절에서 이를 반복적으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까 에스겔 18장을 읽어드렸는데, 4장 4절도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또 왼쪽으로 누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짊어지되 네가 눕는 날수대로 그 죄악을 담당할지니라.” 에스겔은 상징적인 형벌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죄악에 대한 형벌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에스겔 44장을 비롯한 구약성경 곳곳에서 이런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한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베드로는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바울이 말하는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형벌을 받으셨는데, 육체적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적 죽음이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영적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의 외침입니다. 영적 죽음이란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그 형벌을 담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죄악이 예수님께 전가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몸소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그 죄에 대한 형벌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족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놀랍고 감동적인 진리입니다.

아마도 설교자 스펄전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스펄전은 대속 교리를 사랑했습니다. 절대적으로 사랑했습니다. 그의 저서를 몇 권 읽다 보면 이 교리를 계속 반복해서 접하게 됩니다. 스펄전은 이 교리가 기독교의 핵심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 저서에서 발췌한 내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인이 소망을 두어야 할 위대한 사실은 대속이다. 죄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신 그리스도,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많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참된 대속의 희생을 드리신 그리스도, 이것이 복음의 핵심 사실이다.”

스펄전이 말하는 것은 속죄가 중심에 있다는 겁니다. 대속이 중심에 있다는 겁니다. 계속 읽습니다. “대속 교리만큼 내 영혼을 기쁨으로 타오르게 하는 교리는 없다. 대속은 성경 전체의 핵심이다. 구원의 핵심이자 복음의 본질이다. 설교를 이 교리로 가득 채워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 사역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오래된 신앙, 즉 대속의 복음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으며, 내가 하는 일은 그것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 교리를 버린다면 복음의 핵심을 빼앗아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절반밖에 들려드리지 않았습니다. 더 있습니다. 스펄전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이 성전의 모든 돌이 무너지고 모든 나무가 산산조각 나기 전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을 부인하거나 뒷전으로 미루는 사람이 이 강단에 서지 않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대속이 우리의 표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속물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어떻게요? 다시 24절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으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반드시 들어 올려지셔야 했습니다. 반드시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습니다. 그것이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나무에 달린 자의 저주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매달리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무에 못 박히셔야 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계시면서 하나님의 강력한 형벌을 몸소 느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십자가”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나무”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나무 위에서 자신의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24절입니다.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얼마나 위대한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천국에 가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평화를 얻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주된 이유는 천국에 가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죄인에서 성도로 변하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목적은 단지 죄의 용서나 죄책의 제거, 우리의 위치나 신분의 변화만이 아닙니다. 이 점에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단지 법적 선언이 아닙니다. 단지 선언된 변화가 아니라 실제적인 변화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변화되어 죄에 대해 죽게 하시려고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여기에서 “죽다”라는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쓰이는 독특한 단어인데, 일반적인 “죽다”라는 단어가 아닙니다. 사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단 한 번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멀리 떨어지다', '사라지다', '떠나다', '존재하기를 멈추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사실 헬라어에서 이 단어는 ‘고인이 된 사람’을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베드로가 말하려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의 목적이 우리가 죄에서 떠나는 것에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죄에서 떠나고 의에 대하여 사는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게 된 겁니다.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실제적인 변화입니다. 로마서 6장의 이 위대한 구절은 기독교인의 삶에서 모든 것의 중심에 있습니다. 만일 아직 자세히 공부하지 않으셨다면 꼭 하셔야 합니다. 제가 쓴 로마서 6장과 7장을 다룬 소책자가 있습니다. 설교 테이프도 있습니다. 모든 기독교인이 반드시 숙지해야 할 말씀이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이를 통해 죄에 대해 죽었습니다. 어떻게요? 우리는 형벌을 치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죄에서 떠났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을 넘어섭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하여 죄의 형벌을 치름으로써 죄에 대해 죽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벌을 치렀기 때문에 죄가 우리에게 더 이상 요구할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죄에서 떠나도록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바울도 새 생명 가운데에 사는 것을 말하면서 이 점을 언급하지만, 베드로는 “떠나다”라는 의미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죽으신 것은 여러분이 죄에서 떠나 의롭게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방식을 바꾸고, 여러분을 변화시키고 거듭나게 하여 새로운 사람이, 죄인에서 성도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다음 베드로는 이사야 53장 5절을 암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여기에서 “채찍에 맞음으로”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몰롭스’, 몰롭스입니다. 어떤 의미일까요? 채찍에 맞아 생긴 상처, 멍, 자국, 채찍 자국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상처로, 고난으로, 예수님이 형벌을 담당하심으로 우리는 나음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이 담당하신 죄에 대한 형벌의 일부가 바로 예수님이 맞으신 채찍, 예수님의 등을 찢은 채찍질이었습니다. 우리의 영적 치유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육체적인 치유가 아닙니다. 영적 치유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죄에서 의로 향하는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는 말씀은 속죄를 통한 치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 말도 맞습니다. 저 역시 속죄에 치유가 있다고 믿지만 아직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속죄를 통한 치유는 영화 단계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시겠나요?

속죄에는 치유가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 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영적으로 치유되었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육체적으로 치유될 것입니다. 더 이상 그 어떤 육체적인 고난도, 육체적인 질병도 없게 될 날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8장 17절을 보면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시고 아픈 사람들을 모두 치유하셨습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보세요,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셨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시지 않았습니까. 실제로 사람들을 치유하시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에게 우리 모두가 영광 중에 경험하게 될 육체적 질병의 치유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육체적 질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속죄에는 육체적인 치유가 약속되어 있지만 아직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일 지금 속죄 안에 육체적인 치유가 주어졌다면, 오늘날 병에 걸리거나 죽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겁니다. 얼마나 분명한 사실인가요? 예수님의 속죄에 약속된 치유는 미래에 일어날 치유입니다. 미래에 일어날 치유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부당한 대우 속에서 우리에게 고난의 본보기를 보여주시기 위해 고난을 받으셨고, 우리의 대속물로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매우 기본적인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아들, 죄가 없으시고 정결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우리의 형벌을 자발적으로 담당하셨다는 것이 정말 놀랍지 않으십니까?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이 단지 우리의 본보기와 대속물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목자이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25절을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셔야 했던 이유는 우리가 양과 같이 계속 길을 잃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희생하시지 않았다면 결코 우리를 주님의 우리로 데려가실 수 없었을 겁니다. 주님께서 대속물이 되시지 않았다면 결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었을 겁니다. 베드로는 이사야 53장 6절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받기 전에 분명히 이 구절을 읽었을 겁니다. 이사야 53장 6절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이 모든 죄의 형벌을 지셨고, 이로 인해 우리 영혼의 목자이자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오게 되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목자가 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길을 잃은 양과 같았습니다. 베드로도 이사야와 동일하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이사야가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라고 말한 것은 과거의 구원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로 인해 여러분은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돌아왔습니다. 회개하고 믿음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에게 돌아온 탕자입니다.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우리가 어떤 시스템이나 신학이나 종교가 아니라 한 사람에게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이 참 좋습니다. 우리는 우리 영혼의 목자이자 감독 되신 이에게로 돌아왔습니다. 말 그대로 우리의 생명입니다. 완전하신 우리의 목자이자 감독 되신 이를 의미합니다. 누구입니까? 선하신 목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건 요한복음 말씀 아닌가요?” 베드로의 서신에도 나옵니다. 5장 4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목자장”이라고 합니다. 매우 놀라운 구절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목자장”이라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입니다. 2장에서는 “목자이자 감독”이라고 합니다. 참고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참된 목자는 누구였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러니까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목자”라는 용어는 예수님의 호칭입니다. “감독”이라는 용어는 예수님의 역할입니다. 목자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보호하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목자’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포이멘(poimēn)’으로 “목사”를 의미합니다. ‘감독’이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피스코포스(episkopos)’입니다. “주교” 또는 “감독”을 의미합니다. 이 두 단어는 모두 장로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 역시 목자장이자 감독이신 예수님 아래에서 양 떼를 치는 목자이자 감독인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겔 34장 23절부터 24절과 37장 24절을 보면 목자라는 호칭은 메시아적 호칭으로 사용됩니다. 에스겔도 메시아를 목자로 부르는 겁니다. 따라서 모든 유대인은 메시아가 하나님이실 것을 알았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양떼를 보호하고, 감독하고, 인도하고, 지도하고, 더 나아가 양떼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목자이십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예수님은 우리를 자신에게로 인도하시기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본보기가 되기 위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대속물이 되기 위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목자가 되기 위해, 우리를 자신에게로 데려가시기 위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통이 우리의 몸을 뚫고 끔찍한 죽음이 눈앞에 나타날 때, 사람들은 죽어가는 그리스도인의 인내를 본다. 우리의 연약함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다이아몬드가 더욱 밝게 빛나게 하는 검은 천이 된다. 고난을 겪을 수 있음에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수치와 경멸의 대상이 될 수 있음에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무슨 뜻일까요? 베드로의 말을 요약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우리에게 하고 싶었던 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예상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11절로 돌아갑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절입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왜 여기서 멈추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멈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언급하기 시작하면 단순히 예수님이 본이 되시기 위해 고난을 받으셨다고만 말할 수 없습니다. 죄를 담당하신 분으로서 고난을 받으셨으며, 양들을 모으시는 목자로서 고난을 받으셨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사탄이 우리에게 부당한 고난을 받게 한다는 겁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승리를 잃고, 간증을 잃으며, 입으로 죄를 짓고, 행동으로 죄를 짓고, 태도로 죄를 짓습니다. 보복하려는 복수심에 불타오릅니다. 베드로가 우리에게 알려주려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비록 부당하게 고난을 받을지라도 우리는 극복할 수 있습니다. 좋은 방법을 알려드리죠.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요한계시록 12장 11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을 참소하는 사탄으로부터 끊임없이 공격받고 있는 경건한 성도들에 대한 묘사입니다. “우리 형제들이… 그를 이겼으니…” 여기서 ‘그’는 누구입니까? 사탄입니다. 형제들이 사탄을 이겼습니다. 사탄의 모든 공격, 모든 모욕, 모든 박해를 이겨냈습니다. 형제들을 멸하고 증언을 무너뜨리려는 모든 노력을 이겨냈습니다. 형제들은 사탄을 이겼습니다. 어떻게 이겼습니까?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먼저 어린 양의 피로써 이길 수 있습니다. 구원이자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어린 양의 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이겨낼 수 있습니다. 둘째입니다. 형제들은 증언하는 말로써 이겼습니다. 다시 말해 증언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겼습니다. 박해를 받고 적대적인 대우를 받을 때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증언을 잃지 않았습니다. 담대한 용기와 타협하지 않는 정신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타협의 정도가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이겨냈습니까? 구원을 통해 그리스도의 능력을 받았기 때문이고, 증언을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이겼습니다. 이생에서 고난을 받든 받지 않든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구원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있고, 확신을 통해 타협하지 않는 담대함을 가지고 있으며, 증언을 타협하지 않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유지하며, 이 세상에서의 삶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이길 겁니다.

우리 역시 이런 말을 듣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로써 사탄을 이겼으니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다시 한 번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본보기가 되어 주셔서 우리가 부당한 고난을 당하더라도 인내하게 하시고 예수님처럼 반응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고난을 받아들이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부탁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대속물로, 우리 죄의 형벌을 치르신 분으로,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분으로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고난받는 목자로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양들을 구하고 우리로 모으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 아침 빌립보서 3장에서 보았듯이 주님만을 사랑하고 높이기를 원합니다. 오늘 아침 빌립보서 3장에서 본 것처럼,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김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오직 주님만 찬양받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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