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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를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도 4장 1절부터 6절까지를 보겠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속에 있는 주제, 죄를 멀리하기 위해 기억해야 할 것들이죠. 위대한 청교도 존 오웬(John Owe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자의 죄는 그를 기쁘게 하는 즐거움이 아니라 괴롭히는 짐이다.” 참된 신자는 구속받지 못한 육신의 욕망과 새로운 본성 사이에서 치열하게 싸우며 살아갑니다. 로마서 7장의 사도 바울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역시 로마서 7장의 바울처럼 죄의 원리의 법과 싸웁니다. 하나님께서 거듭남이라는 놀라운 기적을 통해 우리 안에 깊이 심어주신 것이 있습니다. 옳은 것, 진리, 선한 것, 존귀하고 고상하며 거룩하고 정결한 것을 갈망하는 새로운 생명의 원리를 심어 주셨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구속받지 못한 육신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싸움이 일어나는 겁니다. 오늘 저녁 본문을 바라보며 이러한 질문을 던져 봅니다. 이 전쟁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이 갈등의 현실을 어떻게 마주하고 승리할 수 있을까? 죄에 대해 세 가지 관점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첫번째, 우리는 미래를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올바른 방향성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며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앞에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강력한 유혹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늘 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늘 깨어 있어야 하고, 늘 경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미래적인 차원만 필요한 것이 아니죠. 현재적인 차원도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일을 대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 앞에 있는 현실도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악한 것을 미워해야 합니다. 선한 것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하고, 현재의 삶 속에서 육신의 정욕을 이루기 위해 육신에게 틈을 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다가올 유혹을 의식하고, 현재의 현실 속에서 깨어 살아가는 것은 죄를 다루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 또 하나의 차원이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가 오늘 이 본문에서 집중하고 있는 차원입니다. 과거적 차원입니다. 뒤를 돌아보는 것이죠. 과거를 바라보는 관점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저는 죄를 다루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과거를 잘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이제 1절부터 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는 고난을 겪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거절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박해를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베드로는 경건한 사람이 경건하지 않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어려움에 대해서 여러 차례 말합니다. 그러다가 3장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한 가지 사실을 강조합니다. 가장 큰 고난 속에 가장 큰 승리가 있다. 베드로전서를 공부해 보면 고난이 배경에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고난에 대한 관점이 절정에 이르는 부분이 바로 3장 18절부터 22절입니다. 가장 큰 고난이 가장 큰 승리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 대표적인 본보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3장에서 살펴봤던 내용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은 가장 큰 고난의 순간에, 가장 극심한 아픔의 순간에, 가장 혹독한 박해의 순간에,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시던 바로 그 순간에 세상이 알지 못했던 가장 위대한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베드로가 말하려는 핵심입니다. 아무리 적대가 심하고 박해가 극심하다 해도,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 동시에 가장 영광스러운 승리의 시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고 계셨지만, 바로 그 죽음을 통해 죄를 이기고 계셨습니다. 사탄을 이기고 계셨습니다. 귀신들을 이기고 계셨고, 죽음을 이기고 계셨고, 지옥을 이기고 계셨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심판까지도 이기고 계셨던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3장 22절입니다.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승리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사실을 근거로 1절에 이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고난을 통해 승리하셨으니 너희도 그렇게 하라, 우리도 그리스도의 승리와 동일한 승리를 경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 죽음입니다. 3장 18절이죠.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어떤 사본에는 “고난을 받으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표현이 한 곳에서는 죽음 자체를, 또 다른 곳에서는 그 죽음에 수반된 고난을 강조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둘 모두를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4장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셨다”라고 할 때에, 이 말 안에는 예수님의 죽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죽음을 가리키는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어서 말합니다.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여기에서 “마음”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엔노이아(ennoia)입니다. 같은 마음, 같은 목적, 같은 원리, 같은 결심으로 무장하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입니까? 목적이 무엇입니까? 의를 위해 죽는 것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죽음 안에 승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박해에 맞서서 죽음까지도 각오한 사람이라면, 만일 마태복음 10장 38절과 39절,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명령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계시다면,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위해 죽음까지도 감당할 마음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가졌던 바로 그 마음으로 무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바라보시며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죽음이 무엇을 이루게 될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 안에 있는 승리를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승리는 무엇일까요? 1절 하반절입니다.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승리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이 구절에 대한 여러 해석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 본문을 통해 내린 결론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렸죠. 베드로가 말하는 바는 확실합니다. 만일 박해하는 자들이 우리를 죽인다면 죄가 그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1절 끝에 나오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라는 표현은 1절 처음에 사용된 의미와 동일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말하고, 죽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우리가 죽으면 죄도 끝난다는 겁니다. 핵심은 이겁니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여러분을 죽이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을 죽이면 죄와의 싸움이 끝납니다. 여러분에게 어떻게 들리십니까? 그리고 만일 여러분이 이렇게 무장하고 있다면 결코 믿음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시험 속에서도,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어떤 박해 속에서도, 어떤 위협 속에서도 담대함과 용기와 확신과 힘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2절의 태도를 만들어 냅니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이것이 핵심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될 것을 알고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원수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인 죽음의 위협을 빼앗는 겁니다. 우리에게 죽음이 위협이 아니라면 더 이상 원수들의 무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목표가 죄를 그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또한 죽음이 그 목표를 완전히 이루어 준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남은 육체의 삶을 더 이상 사람의 정욕을 위해 살지 않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목표가 죄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는 것으로 무장하게 되면, 죽음의 위협은 힘을 잃게 될 겁니다. 동시에 완전한 자유가 우리 삶의 방식을 지배해서 사람의 정욕을 위해 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멀리하며 살아야 합니다. 더 이상 육신의 욕망에 끌려다니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타협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결국 죄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위협이 우리로 하여금 타협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죄를 멀리하게 만드는 매우 중요한 자극입니다. 베드로는 기억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제가 간단하게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개요의 두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첫번째, 베드로는 죄가 예수 그리스도께 무엇을 했는지를 기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1절이죠. 죄는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우리가 죄를 다루고 죄에 대해서 승리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를 미워하기 위해서는 죄가 무엇을 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죄가 무엇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큰 예는 바로 죄가 그리스도께 한 짓이죠.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3장 18절이 말하는 것처럼 죽으셨습니다.

두번째, 지난 시간에 우리는 죄가 그리스도께 무엇을 했는지를 기억해야 할 뿐만 아니라 죄가 그리스도인에게 무엇을 했는지도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1절 하반절입니다. 죄는 그리스도인도 죽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위해 실제로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도 있습니다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죄가 신자들로 하여금 죽는 그날까지 평생 싸우게 만든다는 겁니다. 1절 하반절에 담긴 의미입니다. 죄를 완전히 그치는 유일한 길은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가 그리스도를 죽였기 때문이죠. 우리는 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가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되지 못하게 막기 때문입니다. 완전하고, 거룩하고, 그리스도를 닮고, 죄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을 막기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할 모습이 되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게 하고, 정작 하고 싶은 일은 하지 못하게 합니다. 죄는 우리 안에 끔찍한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우리를 속박하고 가두어 둡니다. 그래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게 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 8장에서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탄식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입니다. 오늘 저녁에 우리가 본격적으로 살펴보게 될 부분이죠. 우리가 죄를 멀리하려면 죄가 그리스도께 한 짓, 또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짓만 기억해서는 안 됩니다. 죄가 하나님께 한 짓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직접적으로 설명되지는 않지만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내용입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죄가 하나님께 하는 짓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무엇을 거스릅니까? 하나님의 뜻을 거스릅니다. 이 말씀 속에 담긴 의미가 이겁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받기 전의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사람의 정욕을 따라 사는 삶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둘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한 가지를 다시 기억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뒤를 돌아보며 죄를 짓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사람의 정욕을 따를 때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겁니다.

성경은 순종을 수도 없이 권면합니다. 매우 익숙한 말씀 몇 개만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7장 24절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이 모든 말씀은 결국 한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인데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자들에게 심판이 임할 것이다. 바로 앞의 21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는 권면입니다. 마태복음 28장에 지상명령이 나오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제자를 삼는 일의 핵심은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 계명에 순종하도록 사람들을 이끄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2절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에베소서 5장 6절부터 7절입니다.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에베소서 6장 6절입니다.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저는 골로새서 4장 12절이 참 좋습니다. 에바브라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이처럼 신약 전체를 통해서 계속해서 순종하라고 권면합니다. 반대로 죄는 어떻습니까? 루시퍼의 타락에서 시작한 죄는 결국 불순종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죄는 반역입니다. 성경은 죄를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대감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방금 살펴본 성경 구절들은 순종의 중요성을 상기시켜 줍니다. 핵심은 이겁니다. 죄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우리가 어떻게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그토록 은혜로우신 하나님, 그토록 사랑과 긍휼과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베드로의 말처럼 어떻게 우리가 남은 삶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정욕을 위해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삶 속에서 죄를 멀리하기 원하신다면 반드시 과거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죄가 그리스도께 한 짓을 알아야 합니다. 죄는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니 죄를 혐오하고 미워해야 합니다. 또한 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짓도 알아야 합니다. 죄는 신자들의 성장을 막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죄를 짓지 않았다면 될 수 있었던, 또 되어야 했던 그 모습에 이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죄가 하나님께 한 짓도 기억해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거스릅니다. 어떤 의미에서 죄는 하나님의 복되신 얼굴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것과 같습니다. 죄는 하나님께 반역하는 겁니다. 죄를 있는 그대로 보십시오. 예레미야 22장 21절과 35장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거듭 말하였으나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이것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반역이죠.

네번째입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죄를 멀리하려면 죄가 세상 사람들에게 한 짓도 기억해야 한다고 합니다. 죄가 그리스도께 한 짓, 또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될 수 있었던 모습이 되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던 짓만이 아닙니다. 죄가 하나님께 한 짓도 기억해야 하지만, 동시에 죄가 구원받지 못한 인류에게 한 짓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절부터 5절은 죄가 인간에게 끼친 파괴적인 영향을 매우 생생하고 비극적으로 묘사합니다. 죄를 멀리해야 할 이유를 충분히 기억하게 합니다. 베드로는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죄 가운데 이미 충분히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이미 죄 가운데 살아갈 만큼 살아봤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더 거기에서 시간을 끌려고 합니까? 베드로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삶, 구원받기 이전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기 전 죄 가운데 살았던 경험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족하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단순히 충분하다,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사실 “차고 넘친다” 이런 뜻에 더 가깝습니다. “이미 너무 충분하다”, 이런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이방인의 욕망을 따르는 삶을 더 이상 계속할 필요가 없을 만큼 충분히 경험했습니다.

여기서 “욕망”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불레마(boulēma)입니다. 욕망 이상의 의미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의지를 가지고 추구하는 욕망, 목적을 가진 욕망, 이런 뜻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하나님도 없고 그리스도도 없던 시절에는 여러분의 마음 자체가 악한 욕망을 이루기 위해 그 방향을 정하고 살았습니다. 베드로가 1장 18절에서 말한 “헛된 행실”이죠. 우리는 이미 충분히 그렇게 살아봤습니다. 이방인의 삶을 끝까지 살아봤고, 그 삶의 결과를 이미 충분히 경험했죠. 그러니 이제는 버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죄가 인류에게 한 짓을 기억해야 합니다. 구원받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 남은 인생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미 헛된 행실의 삶은 충분히 경험했으니까요. 아니, 차고 넘치도록 경험했으니까요. 그런데 베드로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과거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다시 3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라고 합니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는 지속해 왔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길을 따라서 인생을 지속해 왔다, 이런 말입니다. 마치 죄라는 길을 걸어가면서 악한 북소리에 홀린 듯 끌려갔던 것이죠. 죄를 향한 그 음산한 행진에 박자를 맞추게 하는 마귀에게 끌려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충분합니다. 여러분의 과거를 돌아보십시오. 이제 충분하지 않습니까? 지금 여기 계신 많은 분들도 과거를 돌아보면서 이렇게 말할 겁니다. “아, 그걸로 충분해. 차고도 넘쳐. 더 이상 필요없어.” 어떤 삶이었습니까? 베드로는 여섯 개의 단어로 설명합니다. 먼저 “음란”, 헬라어로 ‘아셀게이아(aselgeia)’입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영혼입니다. 그 어떤 죄라도 거리낌 없이 저지를 수 있는 상태입니다. 제어되지 않는 삶입니다. 절제 없는 악입니다. 옛 표현으로 말하면 “방탕”입니다.

감각적인 쾌락에 빠져드는 삶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오기 전의 상태, 잃어버린 상태였을 때 바로 그렇게 살았다고 말합니다. 제어되지 않는 불법 가운데, 하나님을 대적하며 거리낌 없이 살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죄악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드러내며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사는 오늘날의 문화도 똑같습니다. 음란한 문화라고 정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가 사용하는 두 번째 단어는 첫 번째 단어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로 “정욕”입니다. 혹은 “욕망”이라고도 하죠. 악한 욕망을 뜻합니다.

짐승 같은 본능에 끌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욕망에 의해 지배당하는 삶입니다. 정욕이 추구하는 쾌락에 정신없이, 생각 없이 자신을 내던지는 삶입니다. 이어서 베드로는 또 다른 단어를 사용하죠. “술취함”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술이 끓어오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습관적인 만취 상태를 말합니다. 술뿐만이 아니라 약물에 취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네번째입니다. “방탕”으로 번역된 코모스(kōmos)입니다. 광란의 파티, 난잡한 향락을 의미합니다. 일반 문헌에서는 이 단어가 술에 취한 채 비틀거리며 흔들리고, 허세를 부리고,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소란과 혼란을 일으키는 무리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광란의 모습이죠. 술에 취해 돌아다니는 겁니다. 대부분 거짓 신을 섬기는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디오니소스(Dionysus)나 바쿠스(Bacchus) 같은 고대 우상 숭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또 하나의 매우 비슷한 단어를 덧붙입니다. “향락”입니다. 포토스(potos), 술판입니다. 마시기 위해 마시고, 취하기 위해 마시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무법한 우상 숭배”를 덧붙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겁니다. 하나님께 가증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최악의 수준까지 타락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문화 속에서, 또 베드로 시대에도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의 전형적인 삶의 모습이죠.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너희는 이미 그런 삶을 충분히 살았다. 절제 없는 더럽고 방탕한 삶도 충분히 살았다. 정욕에 끌려 사는 삶도 충분히 경험했다. 술 취함도 충분하고, 광란의 파티도 충분하고, 술판도 충분하고, 거짓 신들을 섬기는 가증한 우상 숭배도 충분하다. 그러니 이제는 그만하라. 이제부터는 그렇게 살지 말아라. 너희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기억해라. 죄가 너희에게 한 짓을 기억하고, 음란과 정욕이 남긴 고통을 기억해라. 술 취함과 방탕이 남긴 고통을 기억해라. 술판과 가증한 우상 숭배가 남긴 고통을 기억해라. 흥미로운 사실은 이 모든 것들이 고대 사회에서 “종교”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거짓 신을 섬기는 예배의 한 형태로 이런 죄의 행위가 정당화되었습니다.

4절에서 베드로는 매우 흥미로운 말을 덧붙입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저 이제 삶이 변했어요.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놀랍니다. 여러분의 삶이 달라진 것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왜입니까? 그들에게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삶의 방식 자체가 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으면 이상하게 여기는 겁니다. 여기서 “이상히 여긴다”라는 말은 놀라고 충격을 받는다, 이런 뜻입니다. 동시에 불쾌하게 여긴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이 더 이상 방탕한 삶 속으로 뛰어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변화가 된 이후에 더 이상 이전같이 살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놀랍니다. 그들에게는 충격이고 놀라운 일입니다.

J.B. 니콜스(J.B. Nichol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욕에 불타면서도 끄지 못하고, 스스로 끊어낼 수 없는 습관에 묶여 있으며, 자기 힘으로는 거스를 수 없는 힘에 끌려 아래로 추락하는 방탕한 사람들은, 이제 삶의 유일한 목적이 하나님의 뜻이 된 신자들의 완전히 변화된 삶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또 오래 전에 M.B. 웰치(M.B. Welch)는 자신의 아름다운 시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면 어리석은 무리는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주님의 손길이 닿아 변화된 한 영혼의 가치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몹시 불편해합니다. 여러분이 더 이상 그들과 함께 달려가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의 양심에 죄책감을 쌓아 올리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이 하는 짓을 하지 않습니다. 문자 그대로 더 이상 그들과 함께 죄악으로 달려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예전에는 여러분도 함께 달려갔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같은 극한 방탕”이라는 표현은 매우 생생한 묘사입니다. 거대한 군중이 함께 미친 듯이 달려가는 모습입니다. 무질서한 돌진입니다. 혼란스러운 광란입니다. 윌리엄 켈리(William Kelly)는 “쾌락을 좇는 자들의 도취된 질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이 “극한”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성경에서 오직 여기에만 사용이 되었는데요, 원래 의미는 “물이 한곳으로 합쳐 흐르는 것”, 이런 뜻입니다. 물이 모여서 한 방향으로 쏟아져 내려가는 모습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물 저장고를 의미한다고도 보고, 또 어떤 학자들은 오물이 하수구로 쏟아져 들어가는 장면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구원받기 이전의 삶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정욕과 술 취함과 쾌락과 우상 숭배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미친 듯이 달려가며 하수구의 물처럼 타락의 구덩이로 쏟아져 들어가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이 “방탕”이라는 단어는 악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건강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돈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명예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격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욕망을 채우는 것만 생각합니다. 죄에는 사람을 태워버릴 만한 강한 욕망이 있어서 사람들은 생각 없이, 거부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충동에 이끌려서 타락의 구덩이로 달려 들어갑니다. 사람들은 바로 그곳에 끌려 들어갑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 머물 곳이 결코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쉬어야 할 장소가 아니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예전에 어떠했는지를 꼭 기억하십시오. 어떤 삶이었는지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그들이 너희를 비방하나.”

‘블라스페메오(blasphēmeō)’입니다. 여러분을 비방합니다. 중상모략하고, 명예를 공격하고, 헐뜯는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더 이상 자기들과 함께 같은 타락의 구덩이로 달려가지 않기 때문에 악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윌리엄 켈리(William Kelly)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교도 자료든 기독교 자료든 증거는 충분하다. 그리스도인들이 당시 사회의 일상적인 삶에 참여하기를 꺼렸던 것, 특히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오락과 시민 의식, 우상 숭배와 관련된 행사, 혹은 그리스도인들이 부도덕하다고 여긴 일들에 참여하지 않았던 바로 그 태도가 그들을 미움받고 멸시받게 만들었으며, 심지어 불법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처럼 의심받게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했던 겁니다. 잃어버린 인류의 모습은 참으로 추합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비방합니다. 멸시합니다. 더러운 물이 하수구로 쏟아져 들어가듯이 방탕의 구덩이로 달려갑니다. 얼마나 추한 모습입니까? 그리고 베드로가 말하는 것은 이겁니다. 여러분도 한때는 그들과 함께 달려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여러분도 한때는 성적으로 타락하고, 술 취하고, 우상 숭배에 빠져 미친 듯이 방탕의 구덩이로 달려갔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건져내셨다. 그리고 이제 너희는 세상의 미움과 적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다시 과거에 행하던 그 죄 속으로 돌아가려고 하느냐?

그 방탕의 구덩이로 다시 들어가는 것보다 의롭게 살면서 승리 가운데 고난받는 편이 훨씬 낫다. 그리고 베드로는 5절에서 한 가지를 덧붙입니다.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여기에서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사실 그런 식으로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들을 비방하고 신자들을 헐뜯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빚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갚아야 할 빚입니다. 반드시 값을 치르게 될 겁니다. 원래 이 동사는 회계 용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장부에 기록해 두셨습니다.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성경은 그 대가에 대해 분명히 말합니다. 마태복음 18장 23절 이하를 읽어보십시오. 또 요한계시록 20장 11절부터 15절도 보십시오. 반드시 값을 치르는 날이 옵니다. 크고 흰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산 자”는 베드로 당시에 살아 있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죽은 자”는 이미 죽은 사람들입니다. 결국 모두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로마서 3장 19절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모든 입은 막히게 될 것이고 누구도 변명할 수 없게 될 겁니다. 아무도 심판을 피하지 못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 심판의 보좌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설 것입니다. 변호할 말도 없고, 변호해 줄 자도 없고, 핑계도 없을 겁니다.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이 얼마나 무서울지는 데살로니가후서에 매우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그날이 반드시 옵니다. 꼭 옵니다. 그리고 4장 5절에서 한 가지를 더 보겠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여기에서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는 누구입니까? 심판하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한편으로는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7절은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이렇게 말했죠.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5장 22절부터 27절을 보면 모든 심판이 예수 그리스도께 맡겨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은 맞지만, 하나님은 그 심판을 아들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심판을 예수님께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죄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무엇을 했습니까? 죄는 그들의 삶을 방탕하게 만들었습니다. 더럽고 추악한 타락의 구덩이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워하는 자들로 만들었습니다. 결국 하나님 자신과 원수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원수가 되게 했고, 영원한 정죄의 심판 아래 놓이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저는 베드로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있었다고 봅니다. “이 모습을 똑똑히 보아라. 그리고 절대로 잊지 말라.”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죄를 멀리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의를 위해 기쁨으로 고난받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멀리하려면 잘 기억해야 합니다. 죄가 그리스도께 한 짓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는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짓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는 우리가 될 수 있었던 모습이 되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완전히 그치는 유일한 길은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육신 안에 너무 깊이 묶여 있습니다. 또 죄가 하나님께 한 짓도 기억해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반역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크게 모독했습니다. 그리고 죄가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한 짓도 기억해야 합니다. 죄는 사람들을 더럽고 추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고 결국 멸망을 향해 가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마지막입니다. 베드로는 죄를 멀리하고 의를 위해 기꺼이 고난받게 만드는 또 하나의 놀라운 기억을 제시합니다. 다섯 번째입니다. 죄를 이기는 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6절입니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매우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시지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죽은 자들”이라는 표현은 이미 죽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베드로는 복음을 듣고 이제는 죽은 신자들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순교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 이 편지를 받은 성도들과 함께 신앙생활하던 사람들 가운데도 그리스도를 위해 죽임당한 이들이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신자는 박해 아래 있을 때에도,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에도, 형벌을 받을 때에도,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기꺼이 고난받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죽음 안에 승리가 있기 때문이다. 비록 육체로는 사람처럼 죽임을 당할지라도 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죽음을 통해 여러분이 죄를 이길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금은 이미 죽은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던 이유를 상기시켜 줍니다.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할지라도 하나님 안에서 영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결국 죽음이 할 수 있는 일은 여러분을 영원한 생명 가운데로,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입니다. 3장 마지막 부분, 특별히 18절에서 살펴봤던 내용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셨지만 계속 죽어계시지는 않습니다. 영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몸은 죽었지만 영은 살아 계셨습니다. 여기서도 같은 말을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몸은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은 살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약속 안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큰 위협 앞에서도, 박해 앞에서도,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죄를 멀리할 수 있습니다. 고상하고 의로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입니다. 승리하는 방법은 바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죄가 그리스도께 한 짓을 기억하십시오. 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짓을 기억하십시오. 죄가 하나님께 한 짓을 기억하십시오. 죄가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한 짓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하든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께 나온 우리 모두는 죄와 싸우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다소 조심스럽고 어쩌면 조금은 신학적인 설명처럼 들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 말씀의 실제적인 충격과 의미를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죄와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승리를 주는 것은 어떤 신비로운 체험이나 비밀스러운 깨달음이 아닙니다. 죄가 가져오는 파괴와 폐해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죄를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죄를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죄가 그리스도께 한 짓을 기억하십시오. 죄가 하나님께 한 짓을 기억하십시오. 죄가 신자들에게 한 짓을 기억하십시오. 죄는 삶을 파괴합니다. 가정을 파괴합니다. 결혼을 파괴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되지 못하도록 가로막습니다. 또 죄가 온 인류를 어떻게 방탕의 구덩이로 끌고 가고 결국 심판으로 이끄는지를 기억하십시오. 이것을 정확히 보고 기억한다면 우리는 죄를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편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하든지 마지막에는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 안에서 영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경건하지 않은 세상이 어떤 압박을 가한다 해도 우리를 세상의 삶의 방식으로 끌어내릴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죽음의 위협조차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이 원수와 싸우는 충성된 군사와 전사로 세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바로 다음 절에서 베드로는 간절한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말합니다. 우리가 죄의 끔찍한 결과를 기억하고 그 무서운 본질을 깨닫게 된다 해도 여전히 우리는 기도해야 하고, 삶 속에서 승리하기 위해 하나님께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옵소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의롭게 하시고, 정결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목표이자 장차 이루어질 모습인 그리스도의 형상을 향해 계속 나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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