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펴고 요한계시록을 보겠습니다. 오늘 저녁부터는 놀라운 요한계시록에 담긴 위대한 진리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살펴보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소개하면 좋을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에스겔에서 시작할까, 아니면 다니엘에서 시작할까, 아니면 또 스가랴에 나오는 예언으로 시작할까, 이렇게 저렇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 책들이 모두 각각의 방식으로 요한계시록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죠. 또 감람산 강화, 즉 예수님께서 친히 재림에 대해 말씀하신 마태복음 24장과 25장 또는 누가복음에서 시작할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바울서신이나 베드로의 서신 속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된 주제들이 있으니까 거기서 시작할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하며 1장을 읽고 또 읽고 묵상하면서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구약에서든 신약에서든 제가 새로 서론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쩌면 요한이 남겨둔 영역, 그러니까 곧 요한이 직접 기록한 서론을 침범한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요한계시록의 서론을 읽으면서 깊이 생각하다 보니, 1절부터 3절까지가 요한이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받아 직접 기록한 서론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따라서 제가 따로 소개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한이 이미 했기 때문이죠. 첫 세 절이 완벽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그 말씀을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1절부터 3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그리고 나서 4절에 가서야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라고 하면서 본격적으로 편지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편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인 1절부터 3절에 놀라운 서론이 나옵니다. 저는 이 세 구절을 묵상하면서, 요한계시록을 통해 인생을 변화시키는 경험을 하기 위한 준비사항이 다 담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앞으로의 방향을 잡기 위해, 또 이 일이 매우 중요하고 필수적인 일이기 때문에, 이 세 절을 살펴보면서 요한계시록의 위대한 주제와 핵심 사안을 접하게 해주는 서론의 요소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이 서론의 몇 가지 구성 요소를 하나씩 살펴보면 이 놀랍고 풍성한 요한계시록에 함께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요한은 서론에서 요한계시록의 본질적인 성격에 대해 말합니다. 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계시라…” 여기서 잠깐 멈추겠습니다. 여러분이 제가 이렇게 할 것을 이미 아셨겠지만, 꼭 멈춰야 됩니다. 이 책은 계시입니다. 계시입니다. 이후의 모든 내용을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이 책에는 지금까지 감추어져 있던 진리가 드러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구약에서 상징과 비유의 형태로 전해졌던 진리들이 드러나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적 언어 속에 가려져 있던 진리들이 드러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에서 직접 인용한 구절이 전혀 없습니다. 404절 가운데 단 한 구절도 없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275절은 구약의 예언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거나 관련이 있습니다. 직접 인용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인용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구약에서 암시된 것들을 밝히 드러내는 계시로 가득한 책입니다.
또 요한계시록을 읽는 누구에게나 분명한 것은, 요한이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때에 마태복음 24장과 2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감람산 강화를 염두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계속 살펴보면 알게 되겠지만, 이 위대한 설교, 마태복음 24장과 25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과 요한계시록 사이에는 평행구조와 유사점이 아주 많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구약, 신약뿐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가르침에서도 계시되었습니다. 또한 바울 역시 교회의 휴거와 더불어 예수님이 경건하지 않은 자들에게 내리실 심판에 대해서 여러 차례 언급했습니다. 베드로 역시 자신의 서신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보며 그 위대한 날을 소망하는 마음을 기록했습니다. 심지어 요한 서신에도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기대감이 드러나 있습니다. 야고보서도 믿는 자들에게 주의 재림까지 인내하고 견디라고 권면합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재림에 관한 말씀이 많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구약의 예언서에서 재림은 비유로, 상징으로, 가려진 예언으로, 때로는 일반적으로, 때로는 매우 구체적으로 주어졌습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이 밝히 드러납니다. 이것이 바로 계시입니다. 드러나 있습니다. 여기서 쓰인 헬라어는 ‘아포칼뤼프시스(apokalupsis)’인데, 영어로 ‘아포칼립스(apocalypse)’, 우리 한국말로 하면 ‘종말’이라는 단어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이 말의 뜻은 덮개를 벗기는 것, 덮개를 제거하는 것, 드러내는 것,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열여덟 번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가 사람을 가리킬 때는 항상 그 사람이 다른 이들의 눈에 보인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사람에게 보이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진리가 명확히 드러난다, 이런 뜻입니다.
‘아포칼뤼프시스(apokalupsis)’라는 단어가 처음 쓰인 곳은 누가복음 2장입니다. 이 단어의 용례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을 살펴볼 때 이 단어의 의미를 꼭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장 28절을 보면,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데리고 왔을 때 시므온이라는 사람을 만납니다. 25절을 보면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 즉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으로서 성령이 그 위에 계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8절에서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팔에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이제 메시아를 보았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입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여기서 ‘비추는’ 이라는 단어가 바로 ‘아포칼뤼프시스(apokalupsis)’입니다. 그러니까 덮개를 열다, 베일을 벗긴다 이런 뜻입니다. 이 경우에는 예수님이 눈에 보이게 나타나셨다는 뜻이죠. 메시아, 그리스도, 구주를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빛나게 눈에 보이는 사람으로 나타나셨다는 뜻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7절에서는 이 단어가 ‘나타나심’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7절에서는 ‘나타나심’, ‘오심’ 또는 ‘도래하심’으로 번역됩니다. 로마서 8장 19절에서는 ‘나타남’으로 번역됩니다. 따라서 ‘아포칼뤼프시스’에는 이 모든 의미가 포함됩니다. 드러나다, 벗겨지다, 어떤 사람이 눈에 보이게 되다,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빛나게 드러나 보이다, 나타나다, 도래하다, 현현. 이것이 본질입니다. 물론 성경 전체가 계시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더욱 특별하게 계시된 책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빛나게 드러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리스도의 찬란한 영광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부분을 꼭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이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한계시록을 읽고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혼란스러워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나 난해하고 기괴한 퍼즐이라고 생각합니다. 불분명하고, 모호하고, 복잡하고, 알 수 없고, 혼란스럽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감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드러냅니다. 중요한 점입니다.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책입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은 무엇을 드러냅니까? 무엇을 밝힙니까? 아주 많은 것들입니다. 먼저 교회의 고질적인 죄에 대한 경고를 드러냅니다. 거룩의 필요성에 대한 교훈을 드러냅니다. 죄와 사탄을 이기는 그리스도와 성도의 놀라운 능력과 영광스러운 승리를 드러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죽임당한 성도들의 궁극적인 승리를 드러냅니다. 예배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인류 역사의 종말을 드러냅니다. 세상의 최종 정치적 구도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최후 승리를 드러냅니다. 적그리스도의 행보와 아마겟돈 최후의 전쟁, 열방의 연합을 드러냅니다. 악의 세력과 끝까지 인내하며 싸워야 함을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의 지상 왕국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사탄이 무엇을 꾀하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최후 승리를 드러냅니다. 모든 인간과 사탄의 권세를 이기실 그리스도의 궁극적 승리를 드러냅니다. 사탄의 최후와 죄의 최후를 드러냅니다.
따라서 계시록은 퍼즐이 아닙니다. 신비가 아닙니다. 덮고 숨기는 것이 아니라 드러냅니다. 계시록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유이죠. 요한은 이 단어를 매우 신중하게 선택했습니다. 아포칼립스, 곧 지금까지 숨겨져 있던 세부 내용이 드러나는 책입니다. 우주 종말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줍니다. 마치 세계의 미래를 미리 보고 쓴 특종 기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말로 제목을 붙여 본다면, <백 투 더 퓨처>, 그러니까 <미래로의 귀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의 본질적인 특성입니다. 드러내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요한계시록의 서론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계시의 중심 주제, 중심 주제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단어 하나하나에 얼마나 깊은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하느라 계속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떤 면에서 사실입니다. 마지막 장인 요한계시록 22장 16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이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온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런 의미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온 계시라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입니다. 이 책에서 드러나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실 4절, 5절, 6절에 들어가자마자 그리스도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7절과 8절에 이르면 모든 영광의 광채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습니다. 2장과 3장에서는 교회를 살피시는 그리스도를 볼 수 있습니다. 4장부터 22장까지 전체 주제는 재림 가운데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사탄이라는 찬탈자에게서 이 땅을 되찾으시고,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와 오실 하나님 나라를 세우십니다. 드러나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나타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영광 가운데, 위엄 가운데 드러나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요한계시록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과 매우 비슷하지만 한 가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복음서는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드러내지만, 요한계시록은 높아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드러냅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의 주제는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주제는 높아지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주제는 동일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아포칼립스(apocalypse)입니다. 아포칼뤼프시스 예수 크리스투(apokalupsis Jesu Christou), 곧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참고로 이 표현은 신약의 다른 곳에서도 사용됩니다. 고린도전서 1장 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 바로 ‘아포칼뤼프시스 예수 크리스투’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7절 “주 예수께서… 나타나실 때에”도 ‘아포칼뤼프시스 예수 크리스투’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7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에서도 마찬가지로 ‘아포칼뤼프시스 예수 크리스투’가 쓰였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을 보면 같은 표현이 한 번 더 등장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입니다. 의미를 오해하지 않도록 주목해야 할 아주 중요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사람의 뜻을 따른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에게서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12절에서는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주신 계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라고 말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전달해 주셔서 복음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무슨 뜻인지 그 다음 구절을 읽으면 압니다. 13절입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절입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즉, 하나님께서 은혜로 바울을 부르시고 그 아들을 나타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라고 이어갑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은혜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포칼뤼프시스 예수 크리스투’라는 표현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를 의미하지,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계시를 뜻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다시 요한계시록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요한은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의 중심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요한계시록 강해 설교자는 W.A. 크리스웰(W.A. Criswell) 목사님입니다. 크리스웰 목사님은 오랫동안 텍사스 댈러스에 있는 제일침례교회에서 존경받는 담임목사로 섬기셨고, 저도 여러 번 그곳에서 설교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큰 기쁨과 은혜를 누렸습니다. 크리스웰 목사님은 요한계시록 주석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처음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우리의 육신이라는 장막을 입고 오셨다. 하나님의 신성이 사람의 본성으로 덮였다. 하나님의 본질이 인성 속에 가려졌다. 가끔씩만 그 신성이 드러났다. 변화산 위에서처럼, 혹은 기적의 사역을 행하실 때처럼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의 아들이자 삼위일체 하나님의 두 번째 위격이신 영광과 위엄과 신성과 놀라움과 경이로움은 육신 속에 가려져 있었다. 마구간에서 태어나셨고 가난 속에서 자라셨다. 굶주림과 목마름을 아셨고, 조롱과 매질과 상함을 당하셨다. 그리고 범죄자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온 세상에게 조롱을 당하셨다. 이 세상이 본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은 바로 수치와 고통과 고난 속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이었다. 예수님은 그 후 제자 몇 명에게 나타나셨지만, 믿지 않는 세상이 본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은 로마의 십자가에서 범죄자처럼 죽으신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우리 주님의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은혜와 사랑의 일부였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다.”
계속 읽겠습니다. “그러면 세상이 본 우리 구주의 모습이 수치 속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으로 전부란 말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계획에는 또 다른 날이 있다. 언젠가 믿지 않고 신성을 모독하며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세상이, 하나님의 아들을 온전한 모습, 곧 영광과 위엄과 신성이 온전히 드러나는 경이로움 속에서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날에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손에 온 우주의 소유권 증서를 들고 계실 것이다. 우리 위에 있는 우주와 주위의 우주와 아래의 모든 우주를 포함한 피조 세계 전체의 주권, 이 세상과 그 운명을 못 자국이 선명한 사랑의 손에 들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말이다.”
요한계시록을 끝까지 살펴보면 그 중심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실제로 복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일곱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첫째, 교회들 가운데 계신 부활하신 영광의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둘째, 하늘에서 어린 양으로서 사람들에게 내릴 예정된 예비 심판을 집행할 권세를 공식적으로 받으십니다. 셋째, 땅 위에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오십니다. 넷째, 그리스도로 나타나십니다. 다섯째, 크고 흰 보좌 심판의 심판자이십니다. 여섯째,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 양의 보좌에 앉아 계신 어린 양이십니다. 일곱째, “나 예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라고 하셨습니다. 혹시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이 언급되는 것이 이 일곱 번뿐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예수님을 일컫는 다른 호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충성된 증인이십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땅의 임금들의 통치자이십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처음과 마지막이십니다.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오실 이십니다. 전능자이십니다. 처음과 마지막이십니다. 인자이십니다. 살아계신 이십니다.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이십니다.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눈은 불꽃 같고 발은 빛난 주석과 같은 이십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거룩하시고 참되신 분이십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십니다. 아멘이시며,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며,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이십니다. 유다 지파의 사자이십니다. 거룩하고 참되신 주이십니다. 전능하신 주 하나님이십니다. 성도들의 왕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이 모든 호칭이 요한계시록 안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책의 중심이시고 전부이십니다. 시작이자 끝이시고, 가장 높으신 분이자 가장 낮아지신 분이십니다. 안에 계시고 밖에 계시고 위에 계시고 아래에 계십니다. 우리는 하늘이 열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환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낮아지신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주권적 위엄과 영원한 영광을 지니신 모습입니다. 사도행전 7장 56절에서 스데반이 순교하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잠깐 보았던 것처럼,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이 한순간 스쳐 본 그 광경이 우리 앞에서는 1장에서 22장까지의 오랜 시간에 걸쳐 펼쳐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장엄한 영광 가운데 나타나십니다. 결코 낮아지신 모습이 아닙니다.
이 책의 본질은 계시입니다. 감추어져 있던 것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주의 종말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세부적인 내용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절부터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책은 하나님이 주신 책입니다. 출처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라고 할 때, 영어 성경으로는 ‘Him’이 대문자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책을 누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다는 겁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아마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받으실 필요가 있을까요?
이에 대해 몇 가지 흥미로운 해석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마가복음 13장 32절로 돌아가 보자고 합니다. 직접 찾아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읽어드리면 기억이 날 겁니다. 마가복음 13장 32절에서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기억이 나시죠? 우리는 종종 이렇게 묻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어떻게 다시 오실 때를 모르실 수 있지?” 예수님은 천사들도 모르고, 자신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을 때에, 하나님으로서의 속성을 제한하셨습니다. 자신의 지식을 제한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들도 모른다’는 말씀은 정확한 사실입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사”라는 표현이 예수님께 지금까지 알지 못하던 정보를 주셨다는 뜻이라고 해석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네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것을 이제 너에게 알려주겠다. 네가 스스로를 낮추고 제한한 동안에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했지만, 이제 이 책에서 종말의 세부 내용을 알려주겠다”라고 말이죠. 그럴듯한 추측이지만, 사실 이 책도 정확한 날과 시각은 알려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좋은 해석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속성을 되찾으신 후에는 전지하심도 온전히 회복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굳이 이 책이 기록되는 주후 96년까지 기다리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 이 책을 주셨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또 다른 의미, 참 놀라운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시고, 이 땅의 왕이 되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의 상속자가 되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낮추시고, 육신이 되시고, 아버지를 온전히 순종하며 섬기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죽기까지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앞으로 올 영광을 보여주는 이 위대한 계시를 예수님께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정확한 때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영광 가운데 이루어질 일들에 대한 온전한 계시입니다. 완전하고 겸손하며 신실하고 거룩한 섬김에 대한 상급입니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너는 좋은 아들이었고, 훌륭한 아들이었고, 순종하는 아들이었고, 충실한 아들이었다. 아버지로서 내가 약속한 것은 네가 충성스럽게 내가 부탁한 일을 행하고 내가 세운 목표를 이루면 나의 기업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제 아들아, 여기 있다. 모든 일을 전부 다 기록해 놓은 문서를 너에게 준다. 이것은 이제 네 것이다”라고 말이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요한계시록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선물을 엿듣고 있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근원이시고, 첫번째 수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순종하신 아들이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시는 미래에 일어날 장엄하고 놀랍고 영광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부활은 아버지께서 주신 상속의 첫 보증이었습니다. 가장 첫번째 상속의 증표가 바로 부활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두번째로 아버지의 기쁨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표는 승천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늘로 데려가셔서 어디에 앉히셨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히셨습니다. 세번째로 아들의 순종에 대한 아버지의 기쁨을 보여주는 증표는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고 구속하신 교회 안에 거하도록 보내심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증표가 바로 이 책, 요한계시록입니다.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한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온전히 이루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도 장차 이루어질 모든 일을 미리 알고 기뻐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주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의 말씀으로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바로 예수님의 낮아지심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주라는 이름입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 마지막 세 절, 9절, 10절, 11절이 요한계시록에서 자세히 이루어집니다. “네가 낮아질 때 충성했으니 너를 높일 때 나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본질은 계시, 드러냄입니다. 그 중심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 주어질 영광을 증언하는 말씀의 의미로써 그리스도께 주셨습니다. 우리는 정말 놀라운 특권을 받았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직접 보고 알 수 있는 특권입니다. 보통 아버지가 아들에게 유산을 남기면서 유언장에 내용을 기록하고, 어떻게, 어떤 순서로 아들에게 줄지를 명시하면 그 문서는 봉인됩니다. 아무도 볼 수 없습니다. 훼손되지 않도록 안전하게 보관됩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실제로 6장에 가면, 유산의 소유권 증서가 펼쳐지고 일곱 인이 하나씩 떼어지면서 우리 모두가 이해할 수 있도록 모든 내용이 드러납니다.
이제 다음 부분으로 넘어갑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저자이십니다. 이 계시를 예수님께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계시를 받는 ‘인간’은 누구입니까? 인간 중에서 누가 이 말씀을 받았습니까?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요한은 이 책을 이해하는 데 있어 다음 단계를 제시합니다. 이 계시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만 보시고 깨닫고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보여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를 위해 기록된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수님께 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볼 수 있는 권리를 주셨습니다.
‘종’, 영어 성경으로는 ‘본드-서번트(bond-servant)’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둘로스(doulos)’, 곧 ‘노예’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노예’입니다. 여기서 제가 한 가지를 짚어드리겠습니다. 이 단어가 바로 비그리스도인들이 요한계시록을 이해하지 못하는 분명한 이유입니다. 원래부터 그들을 위해 쓰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죠?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종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지 않다면 이 책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둘로스(doulos), 곧 ‘본드-슬레이브(bond-slave)’는 ‘휘페레테스(huperetes)’나 ‘디아코니아(diakonia)’와는 다릅니다. 종을 가리키는 헬라어 단어가 여섯 개가 있는데, ‘본드-슬레이브’(bond-slave), 우리말로 하면 ‘묶인 종’은 특별한 노예를 뜻합니다. 사랑과 헌신으로 섬기는 노예를 말합니다. 구약 시대의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관습이 있었습니다. 종이 만일에 그 주인에게 “저는 주인님을 사랑합니다. 주인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인님을 섬기고 싶습니다. 의무 때문이 아닙니다. 두려움 때문도 아닙니다. 사랑하기에 섬깁니다. 주인님을 사랑하기에 평생 주인님의 종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면, 주인은 그 종을 나무 문틀로 데리고 가서, 종의 귀를 잡아서 문틀에 대고 귓불을 송곳으로 뚫었습니다. 귀에 구멍을 냈습니다. 이렇게 귀에 구멍이 뚫린 종은 이런 의미를 드러냈습니다. “나는 의무로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써 섬긴다. 나는 ‘본드-슬레이브(bond-slave)’, 곧 주인께 자발적으로 묶인 노예이다.”
이 책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런 사람들뿐입니다. 저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자유주의 신학 서적을 읽을 때마다 늘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정말 기이합니다. 혹시 시간이 되면 도서관에서 자유주의 학자가 쓴 요한계시록 관련 책을 한 번 읽어 보십시오. 굳이 빌릴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훑어보기만 하십시오. 사실 그럴 가치조차 없습니다. 읽어보면 풀 수 없는 미로 속에서 완전히 길을 잃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 교회 안의 위선자에게 요한계시록은 혼돈과 혼란으로 가득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발적인 종에게는 가려진 것을 드러내는 책입니다. 모든 것이 분명해지는 책입니다.
따라서 저는 요한계시록 강해를 시작하면서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이 진리는 여러분에게 닫혀 있습니다. 제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또 제가 설명하는 내용을 주의 깊게 들으면 글자로서는 의미가 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삶을 사로잡을 수는 없습니다. 마음속에서 실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 깊은 의미와 진정한 무게를 결코 온전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비유로 가르치실 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비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볼 수 있고 말을 들을 수는 있지만 영적으로는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합니다. 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왜냐하면 종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인을 위한 책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이 아들에게 주시고, 아들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입니다. 이제 다섯번째로,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바로 이 책의 예언적인 성격입니다. 다시 말해 예언적인 성격입니다. 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여깁니다. 이 책은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에 관한 예언입니다. 이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책은 다른 모든 신약 성경과 다릅니다. 정말 다릅니다. 복음서는 이미 일어난 일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물론 복음서 안에도 미래에 관한 언급이 있지만, 복음서의 주제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사도행전은 무엇을 기록했습니까?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부터 사도 바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교회 역사를 기록했습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렇다면 바울, 야고보, 베드로, 요한, 유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의 서신은 무엇입니까? 이 서신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와 이것이 교회와 성도의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설명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역사를 당시 교회와 성도의 삶으로 옮겨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신약성경의 처음 다섯 권은 과거에 관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스물한 권의 책들은 현재에 관한 내용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역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마지막 책은 미래에 관한 책입니다. 곧 속히 일어날 일들에 관한 책입니다. 미래에 관한 예언으로 이루어진 책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이 가진 매력입니다.
앞으로 나올 내용에 대한 개요가 19절에 나와 있습니다. 잘 보십시오. 요한계시록 전체의 개요가 나옵니다. 요한은 이런 명령을 받았습니다. “기록하라.” 어떻게 기록하라고 합니까?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세 가지입니다. 네가 본 것, 과거입니다. 지금 있는 일, 현재입니다. 장차 될 일, 미래입니다. 이 책의 개요입니다. 1장은 요한이 본 것입니다. 2장과 3장은 지금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4장부터 22장까지는 장차 될 일입니다.
그러니까 예언은 4장에서 시작해서 22장까지 이어집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언서입니다. 미래적 의미에서의 예언입니다. 예언적 성격의 책입니다. 여기서 꼭 말씀드려야 할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모든 예언서는 항상 양쪽 면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하나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영광과 성도들이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장차 임할 악인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말씀을 따라가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제이고, 미래의 영광이 주된 강조점이라는 것을 볼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미래의 계시와 함께 죄와 사탄과 귀신과 죄인들이 멸망하는 모습이 병행하여 나타납니다. 요한계시록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성도들이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을 세밀하게 예언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죄인들의 영원한 심판을 예언합니다.
그래서 요한이 10장에서 말한 것처럼 이 책의 진리는 달지만 쓰고, 또 쓰지만 답니다. 요한계시록은 심판의 책입니다. 멸망의 책입니다. 세상의 끝, 인류 역사와 죄인의 끝을 보여줍니다. 그 어두운 면을 단 한 순간도 숨기지 않습니다. 이것 또한 완전히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죄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고, 회개하지 않는 완고함과 반역은 결국 비참한 패배, 재앙, 죽음, 그리고 영원한 심판으로 이어집니다. 요한계시록은 감상적인 책이 아닙니다. 엄중한 책입니다. 마음을 사로잡는 책입니다. 마음을 아프게 하는 책입니다. 불편케 하는 책입니다. 악에 대한 나약한 관용 따위는 없습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계시지만, 동시에 어린 양의 진노도 있습니다. 생명수의 강이 있지만, 불못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며 모든 눈물을 씻기시고 죽음을 폐하시며 슬픔을 폐하시며 고통을 폐하실 사랑의 하나님을 봅니다. 그러나 그 전에 하나님은 원수들을 슬픔과 고통과 죽음과 눈물이 있는 상상할 수 없는 장소로 보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인한 어두운 면은 결코 숨겨지지 않습니다. 더 밝은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새벽 전에 천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미래를 살펴볼 겁니다. 96년경에 기록된 이 오래된 책으로 돌아가서 사도 요한이 그곳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환상 가운데 보았던 미래를 기록한 내용을 다시 살펴볼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돌아보는 책이다. 네로 황제가 통치하던 주후 54년부터 68년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을 묘사한 것이다. 즉 바울과 베드로가 순교한 때를 묘사하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다, 이것은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통치하던 주후 81년부터 96년 사이를 돌아보는 것이다. 기록된 모든 사건들이 그때 일어났다.” 이것을 ‘과거설’이라고 부릅니다. ‘프레테리스트(Preterist)’라고도 하는데, ‘프라에테르(Praeter)’는 라틴어로 ‘과거’를 뜻합니다. 이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이 책에는 예언이 없다. 초자연적인 것도 아니고, 미래에 대한 것도 아니다. 단지 네로 시대에 있었던 일을 묘사하거나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절대 불가능합니다. 요한계시록을 살펴볼수록 그때 일어난 일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만일 그때 이미 다 일어났다면, 지금 여기에는 아무도 살아있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다, 이 책은 요한이 기록하던 때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의 재림까지의 교회 역사를 전체적으로 보여주는 파노라마이다.” 그래서 이런 해석을 하는 사람들은 이 책 안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를 찾아내고, 수많은 교황들을 찾아내고, 콘스탄틴도 찾아내고, 무함마드도 찾아내고, 심지어 프랑스 혁명까지도 찾아냅니다. 고트족도 찾아내고, 예수회도 찾아냅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불가능합니다. 이 모든 사건들의 긴 목록을 교회 역사 전체에 걸쳐 늘어놓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거의 모든 사건이 3년 반, 그러니까 42개월, 1,260일이라는 기간 안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역사 전체로 늘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런 해석을 역사주의 해석이라고 부릅니다.
세번째 부류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건 실제 사람에 관한 것도 아니고, 실제 사건에 관한 것도 아니고, 실제 행위나 전쟁에 관한 것도 아니다. 단지 비유일 뿐이다. 영적 전투와 영적 전쟁에 관한 것이니 영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해석한다는 것은 결국 이 말씀에 자기 마음대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방식에는 아무런 규칙이 없습니다. 말씀의 의미가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대로라고 한다면, 결국 내 생각이 권위를 가집니다. 그러면 각자 생각하는 의미가 곧 그 말씀의 의미가 되는 것이고, 모든 사람이 다 다르게 생각한다면 결국 아무 의미도 없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상주의 해석’이라고 부르는 관점입니다. 사실상 어리석은 해석입니다.
이제 남는 해석은 오직 하나입니다. 미래에 관한 해석뿐입니다. “왜 그것이 미래를 말한다고 믿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읽어 보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대규모 부활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필요하다면 묘지를 확인해 보십시오.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죽는 전례 없는 규모의 홀로코스트가 일어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 세상의 체제가 완전히 무너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세워진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 일들은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터무니없는 얘기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바라보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미래를 예언하는 책이라는 해석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미래, 곧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대한 계시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월터 스콧(Walter Scott)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언은 시간을 소멸시킨다. 예언은 시간과 그 사이의 모든 상황을 소멸시키고, 우리를 성취의 문턱에 세운다.” 말하자면 우리는 문자 그대로 미래로 가게 될 것이고, 최후의 지점에 이를 것입니다. 여러분,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이제 1절을 다시 보십시오.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입니다. 잠깐만요, 속히요? 요한이 기록했을 때는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 의미가 무엇인지 다음 주에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시간이 부족합니다. 정말 놀라운 진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 막 요한계시록 연구를 시작한 오늘, 기대와 열정과 설렘으로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주셨고, 이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를 보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감격스러운지 모릅니다. 여기 있는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계시록을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와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오늘 저녁 세례 간증은 너무나도 아름다웠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기쁨, 죄 사함의 복, 하늘 소망의 설렘에 대한 간증이었습니다. 이제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가장 큰 복, 가장 큰 은혜, 가장 큰 부요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주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계시를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 주어진 것을 우리에게 열어 주셔서, 우리가 그 진리를 함께 나누게 하시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알게 하시고, 일어나기 전의 역사를 읽게 하시며, 그 빛 안에서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지요. 주님, 이 놀라운 계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풍성함으로 채워 주셔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더욱 충성스럽게 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존귀하신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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