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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요한계시록을 공부하면서 마치 ‘미래로 돌아가는’ 듯한 놀라운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을 펴 주십시오. 여기서 잠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난주에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요한계시록에는 404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1절 절반만 하셨네요. 계산해보니 그 속도로 하면 808편이 나옵니다. 1년에 50편씩 설교하셔도 엄청나게 오래 걸리겠어요.” 그래서 말씀드립니다. 앞으로는 훨씬 더 빠르게 진행하겠습니다. 훨씬 더 많은 내용을 한번에 다룰 겁니다. 다만 서론에서는 앞으로 이어질 모든 설교의 기초를 세우는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본론으로 들어가면 전개 속도가 빨라지고, 저도 더 빠르게 진행할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위대한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기초적인 주제들을 상세하게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요한계시록만큼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드러난 책은 없습니다. 이렇게 복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의 그 어떤 책보다도 더 오해받고, 잘못 해석되고,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많은 이들에게 닫힌 책, 봉인된 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봉인하라고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다니엘 12장 9절을 보면 “이 말씀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0절입니다.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봉인하지 말고, 숨기지 말고, 덮어두지 말라십니다. 더 나아가 요한계시록은 성경에서 유일하게 시작과 끝 모두에서 읽는 사람에게 복을 약속합니다. 봉인이 해제되어 읽는 자에게 복을 주는 책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마지막 책입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것이 요한계시록에서 끝납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하늘과 땅이 요한계시록에서 완성됩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죄와 저주가 요한계시록에서 끝납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사탄의 활동이 요한계시록에서 끝납니다. 창세기에서 잃어버린 생명나무가 요한계시록에서 다시 주어집니다. 창세기에서 들어온 죽음이 요한계시록에서 사라집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슬픔이 요한계시록에서 사라집니다. 창세기에서 잃어버린 낙원이 요한계시록에서 회복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가운데 핵심은, 창세기에서 약속된 구주가 요한계시록에서 높임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으로 인생 최고의 여정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구속 역사를 위대한 절정으로 이끄시는 다가올 영광을 보기 위해 ‘미래로 돌아가는(back to the future)’ 여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제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1절에서 6절까지 이어지는 서론 부분을 몇 개로 나누어 살펴보려 합니다. 기억하기 쉬운 개요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나누어 그 풍성한 은혜를 하나씩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본질을 살펴봤습니다. 1절을 보면 ‘계시’라고 했습니다. 헬라어로 ‘아포칼뤼프시스(apokalupsis)’인데, ‘덮개를 벗겨내다, 드러내다’라는 뜻입니다. 숨기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것입니다. 또 중심 주제를 살펴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으로써, 미래의 영광 가운데 나타나실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 보여주는 책입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라는 말씀에서 요한계시록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것이며, 하나님이 이 책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이유는 예수님이 자신을 낮추셨고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완전한 복종과 완전한 겸손, 완전한 고난과 완전한 속죄를 이루신 대가로,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누릴 영광의 위대한 기록을 예수님께 주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이 책의 특정 수신자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이 책을 주신 이유는 예수님이 그 종들에게 보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여기서 ‘종’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께 주신 것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다섯째로, 우리는 이 책의 예언적 성격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다시 말해서 요한계시록은 미래를 예언하는 책입니다. 앞을 내다봅니다. 우리를 미래로 이끕니다. 19절의 ‘네가 본 것’이라는 말씀처럼 과거 시제로 표현된 부분도 있습니다. ‘지금 있는 일’이라는 말씀처럼 요한이 살던 당시 현재 시제로 표현된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대부분은 ‘장차 될 일’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과 함께 일어날 모든 사건과 상황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미래로 가는 여정을 떠나는 겁니다. 놀라운 일을 보게 됩니다. 짜릿한 일을 보게 됩니다. 마음이 무거운 일을 보게 됩니다. 기쁜 일을 보게 됩니다. 아픈 일을 보게 됩니다. 위로가 되는 일을 보게 됩니다. 불안한 일을 보게 됩니다. 복된 일을 보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이 아니었다면 결코 알 수 없는 일들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전도하기 위한 책이 아닙니다.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쓰여진 책이 아닙니다. 물론 그 진리를 들은 불신자들에게도 말씀의 능력이 임해 영향을 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책을 통해 영혼을 구원하시기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소망의 책입니다.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께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온전히 아시도록,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백성들이 앞으로 예수님께 속하게 될 영광을 볼 수 있도록 기록된 책입니다. 하지만 이 책은 모든 사람을 사로잡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미래에 대해 궁금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점성술을 보기도 하고, 중국 음식점에서 포춘 쿠키를 열어보기도 하고, 타로 카드로 점치는 사람들을 찾아가기도 하죠. 그러나 미래를 아시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책에서 우리에게 그 미래를 보여주십니다.

이제 1절에서 이 책의 예언적 성격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속히’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로 ‘타케오스(tacheos)’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이 단어가 이 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는 짧은 시간 안에, 혹은 빠르게라는 뜻입니다. 영어 단어 ‘tachometer(타코미터)’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자동차에 타코미터, 그러니까 속도계가 달려 있죠. 엔진의 회전 속도를 측정하는 장치입니다. 분당 회전수를 측정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속도를 나타내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요한계시록에서 6장 이후의 미래 부분에 들어가면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일이 진행된다는 의미입니다. 불과 7년 동안 믿기 어려운 심판들이 전 세계를 휩쓸게 됩니다. 그리고 ‘천년왕국’이라고 불리는 기간 동안 놀라운 일들이 계속되다가, 결국 온 우주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됩니다. 이 모든 사건이 ‘짧고’ ‘빠르게’ 일어납니다. 6장 이후의 미래 부분에 들어가면 너무 빨리 진행되서 마치 빛의 속도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불과 7년 안에, 사람과 사탄이 만든 이 세상의 모든 체계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에 덮힙니다. 그리고 천년왕국이 빠르게 지나갑니다. 우리에게는 천년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하루와도 같은 천년왕국입니다.

그러나 사실 ‘속히’라는 단어의 주된 의미는 빠르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의미로도 쓸 수 있고, 어쩌면 성령님께서 그 의미도 함께 담아서 사용하셨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도 사실이까요. 하지만 이 단어의 핵심 의미는 ‘곧’이라는 뜻입니다. 곧, 곧입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 부분으로 가면 이 해석이 더 분명해집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에서 예수님은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도 같은 어근을 가진 ‘타코(tachu)’라는 단어가 쓰였지만, 이 경우에는 예수님이 오실 때의 ‘속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재림이 ‘가깝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20절에서도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라고 다시 말씀하시는데, 이 역시 오시는 속도를 말한다기보다는, 그때가 가깝다는 것, ‘곧’ 오실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속히’라는 말의 의미는 다른 곳에서도 확인됩니다. 예를 들어 2장을 보면, 5절에서 에베소 교회의 사자, 즉 그 교회의 사역자에게 하신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교회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실제로 주님이 임하셔서 그 촛대를 옮기셨습니다. 여기서도 ‘곧’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곧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같은 장 16절을 보면 버가모 교회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여기서도 강조점은 속도가 아니라 그 임박함입니다. 곧, 바로 다음, 아주 가까운 때라는 뜻입니다. 3장에서도 교회들에게 주시는 편지가 이어지는데, 11절에서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내가 속히 임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역시 강조점은 그리스도가 곧 오시리라는 겁니다. 이렇게 요한계시록을 쭉 따라가다 보면, 같은 단어가 11장 14절에도 나옵니다.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오리로다.” 계속해서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속히’라는 단어는 예수님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오실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실 때가 얼마나 가까이 임박했는지를 말하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물론 휴거 때에 예수님은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성도들을 데리러 오실 때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눈 깜짝할 사이입니다. 순식간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전체에 걸쳐 사용된 ‘타케오스(tacheos)’의 용례를 비교해 보면, ‘속도가 빠르다기보다 ‘때가 가깝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예를 들어서, 요한계시록을 벗어나서 디모데후서 4장에서도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같은 단어가 쓰였습니다. 저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속력으로 달려올 수 있겠니?”라고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지체하지 말고 와 달라는 뜻으로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움직이는 속도가 아니라, 오는 그 시점이 가까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1장에서 말하는 ‘임박함’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서 다음 순서의 사건이 그리스도의 오심이라는 뜻입니다. 곧바로, 곧, 임박했다는 의미이지 반드시 빠른 속도로 온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간이 늦춰질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 6장 10절을 보면, 환난 가운데 제단 아래에 있는 성도들이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가 주어지고 “아직 잠시 동안 쉬되”라는 응답을 받습니다. 이것은 ‘속히 오신다’는 약속에 기다림의 시간이 포함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항상 이 기대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를 보면 바울도 예수님이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오실 수 있다고 전제하며 휴거될 사람들을 가리킬 때에 “우리”, “우리의”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교회는 항상 주님의 임박한 오심을 소망하며 살아왔습니다.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로 같은 기대 속에 살았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7절에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의 임박한 오심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사도행전 1장으로 돌아가 보면,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신 후에 천사가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항상 그 기대 속에 살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홀연히, 눈 깜짝할 사이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부활한다고 했는데, 데살로니가전서 4장의 내용과 동일합니다. 히브리서 10장에서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항상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날이 언제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1장 7절에서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실 위대한 메시아적 사건을 바라보면서 항상 기대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2장에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언제나 준비하고 있으라는 뜻입니다. 40절에서는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재림의 모든 구성 요소를 포함한 전체 사건을 가리킵니다. 언제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항상 끊임없이 기대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놀라운 서론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습니까? 첫째, 요한계시록의 본질적 성격입니다. 둘째, 중심 주제입니다. 셋째, 근원입니다. 넷째, 특정 수신자입니다. 그리고 다섯째, 예언적 성격입니다.

자, 이제 여섯번째 요점을 보겠습니다. ‘초자연적 전달’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1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누구를 보내셨습니까?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초자연적인 전달입니다. 매우 흥미로운 장면입니다. 아주, 아주 특별한 일입니다. 신약성경의 여러 책 중에서 천사를 통해 직접 전달되고 전해진 책은 요한계시록이 유일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요한계시록이 특별한 이유입니다. 주님은 요한계시록을 전달하시기 위해 천사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천사를 통해 주어진 중요한 계시에는 또 무엇이 있습니까? 바로 모세 율법입니다. 사도행전 7장 53절입니다.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천사를 통해 전달된 이 놀라운 책이 우리 손에 있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6절 상반절입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요한계시록은 천사를 통해 전해진 책입니다. ‘보내다’라는 단어의 명사는 헬라어로 ‘아포스톨로스(apostolos)’인데, 영어로 ‘apostle’, 그러니까 ‘사도’라는 단어가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권위를 위임받은 사절이 사명을 띠고 파송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천사의 사명과 사역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성경 전체를 보아도 요한계시록만큼 천사의 사역이 많이 나오는 책은 없습니다. 이 시리즈를 다 마칠 때쯤이면 천사들과 정말 친해지실 겁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셔서 요한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요한이 기록함으로써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예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증언하게 하셨습니다. 거의 모든 장에 천사가 등장합니다. 4장, 5장, 6장, 7장, 8장, 9장, 10장, 11장, 12장, 14장, 15장, 16장, 17장, 18장, 19장, 20장, 무려 67번이나 언급됩니다. 앞으로 우리는 천사들과 아주 친해질 겁니다.

이제 일곱번째로 넘어가겠습니다. ‘인간 전달자’입니다. 천사들은 이 메시지를 기록하도록 누구에게 전해줍니까? 이 환상을 누구에게 줍니까? 이 계시를 누구에게 줍니까?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그리스도께 속한 천사가 그리스도께 속한 종에게, 바로 요한에게 전한 것입니다. 요한은 완전히 압도되었습니다. 감격에 겨운 모습입니다. 1장 9절을 보십시오. “나 요한은…” ‘나 요한은’이라고 반복하는데,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게 믿어지는가? 내가 이걸 받고 있다.’ ‘나’라고만 하지 않고, 꼭 ‘나 요한은’이라고 이름을 덧붙입니다. ‘내가 이걸 받다니,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다’ 이런 뜻입니다. 21장에서도 여전히 그 감격이 이어집니다. “또 내가 보니 거룩한 성이…” 마치 ‘이걸 내가 봤다니, 말도 안 된다’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22장 8절에서도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을 떠올려 보십시오. 요한이 자기 이름을 몇 번이나 언급합니까?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겸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자기 이름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 모든 것을 받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요한은 당시 나이가 여든이 넘었습니다. 주후 96년입니다.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주후 33년에 요한은 십대였습니다. 그로부터 63년이 지났으니 팔십 대 노인입니다. 그리고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었습니다. 혼자서 그 외딴 섬에 있는 노인이 이런 계시를 받고 있다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2절에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요한은 젊을 때나 나이 들었을 때나 변함없이 신실한 증인이었습니다. 요한일서가 어떻게 시작되는지 기억하십니까?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요한은 자기가 본 그대로, 들은 그대로, 손으로 만졌을 때 느낀 그대로 기록하고 증언했습니다. 참된 증인의 모습입니다. 증인이란 무엇입니까? 목격한 일을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저도 증언했던 적이 있습니다. 한 번은 제가 살인 미수 사건을 목격했는데 저를 법정에 세웠습니다. 제가 증인이라고 하면서, 제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말해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보고, 듣고, 느낀대로 말했습니다. 증인이 하는 일이 이런 겁니다. 요한은 신실한 증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천사를 통해 주어진 환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표현은 사실 동의어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쭉 살펴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 또는 ‘예수의 증언’이라는 표현이 여러 차례 함께 등장합니다. 1장 9절에도, 12장 17절에도, 19장 10절에도 함께 나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곧 예수님에게서 온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에 주신 증거입니다. 그리고 4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나오는 모든 계시는 예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확실하냐구요? 확실합니다. 22장 16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그러니 말씀은 하나님에게서도 오고, 그리스도에게서도 옵니다. 삼위일체의 사역이 함께 엮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천사들을 통해 받은 그 모든 환상을 충실하게 증언했습니다. 본 그대로, 들은 그대로, 받은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요한은 증인으로서 참으로 충성스러웠습니다.

이제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겠습니다. 여덟번째로 생각할 부분은 바로 영적인 복입니다. 영적인 복입니다.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사실 이 말씀만으로도 여러분이 매주 교회에 와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복이 있습니다. 복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읽고 듣고 순종하여 삶에서 지킨다면 여러분은 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에서 주신 약속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 22장 7절을 보십시오. 비슷한 약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7절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처음에서도 끝에서도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우리가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이번 시리즈를 들으시는 동안에 이 복이 계속 반복되는 것을 확인하실 겁니다. 1장에서는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합니다. 14장에서는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합니다. 16장에서는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또 19장에서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합니다. 20장에서는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라고 합니다. 22장에서는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라고 합니다. 그리고 같은 장 22장에서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라고 합니다. 복이 있다는 말씀이 참 많이 나옵니다. 사실 제가 방금 읽어드린 것만 해도 이 책에 기록된 일곱 가지 복입니다.

다시 3절을 보면 동사가 세 개 나옵니다. 읽는 것, 듣는 것, 적용하는 것입니다. 모두 현재분사로 쓰였습니다. 계속되는 행동을 표현할 때 사용합니다. 사실상 예배의 모습을 묘사한 겁니다. 읽고, 듣고, 적용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제가 말씀을 읽고 설명해 드리면 여러분은 듣습니다. 2장과 3장에 반복해서 나오는 구절에 주목해 보십시오. “귀 있는 자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합니까? “들을지어다.” 여러분은 듣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제가 읽고 설명을 덧붙이면 여러분은 들어야 하고, 반드시 적용해야 합니다. 너무나 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다음에 또 다른 책이 없습니다. 이 책이 마지막입니다.

여기서 보충 설명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요한계시록을 보면 7이라는 수가 정말 많이 나옵니다. 아까도 제가 이 책에 나오는 일곱 가지 복을 읽어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외에도 7이라는 수가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일곱 교회, 일곱 영, 일곱 촛대, 일곱 별, 일곱 등불, 일곱 인, 일곱 뿔, 일곱 눈, 일곱 천사, 일곱 나팔, 일곱 우레, 칠천 명, 일곱 머리, 일곱 면류관, 일곱 대접, 일곱 산, 일곱 왕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일곱이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일곱 가지 복, 일곱 심판,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그리스도에 대한 ‘나는 …이다’라는 일곱 가지 선언,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일곱 번의 송영 등등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전체를 다 읽고 나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이 모든 7이라는 숫자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그렇습니다. 7, 일곱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창세기 2장 3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일곱이라는 숫자에 아무 의미가 없다 해도, 적어도 이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일곱은 끝을 의미합니다. 일곱은 완성을 의미합니다. 일곱은 충만함을 의미합니다. 반복해서 나오는 7이라는 숫자는 요한계시록이 완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22장 18절과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더하지 말라는 뜻이죠. 요한계시록은 7의 책입니다. 충만의 책입니다. 종결입니다. 하나님이 끝내시는 때입니다.

자, 지금까지 무엇을 배웠습니까? 요한계시록의 본질은 계시입니다. 중심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수신자는 하나님의 종들, 곧 신자들입니다. 예언적 성격은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초자연적인 전달은 천사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했습니다. 인간 전달자는 요한이죠. 영적 복은 3절에서 말하듯이 듣고 지키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여기에 또 하나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그 시급한 긴급성입니다. 3절 끝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때가 가까움이라.” 여기서 말하는 ‘때’는 크로노스(chronos)가 아닙니다. 시계나 달력이 표시하는 물리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이 아닙니다. 카이로스(kairos)입니다. 시대, 시기, 특별한 시점을 의미합니다. ‘가까움’이라는 단어, 엔구스(engus)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역사 가운데 다음 위대한 시대가 이미 가까이 왔다는 뜻입니다. 곧 다가왔고, 임박했다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6절은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바로 이겁니다. 임박했습니다. 곧 일어날 겁니다. 22장 10절도 “때가 가까우니라”라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이후 교회의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그에 비추어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재림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곧 다가올 미래에 일어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낯선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때가 가까웠다고 말씀하시는데,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벌써 2천 년이나 지났어요.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정말 이루실까요?” 그렇습니다. ‘가깝다’라는 말을 ‘다음 번에 일어난다’라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그렇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두 번째로 알아야 할 것은, 우리에게는 길지만 하나님께는 아주 짧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야고보서 5장 8절도 같은 단어 ‘엔구스(engus)’, 즉 ‘가까이’를 사용했습니다.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2천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가깝습니다. 사실, 재림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가까워졌습니다. 로마서 16장 20절 기억하십니까? 위대한 약속입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여기에도 ‘속히’, ‘타케오스(tachoes)’가 쓰였습니다. 2천 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다음 차례’에 일어날 일입니다. 반드시 일어날 다음 사건입니다.

그렇지만 비록 재림이 다음 차례에 일어날 일이고 가까운 일이라 할지라도 누가복음 18장에는 흥미로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누가복음 18장 7절부터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다시 말해서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박해와 불의에 대해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다고 합니다. “주님 오시옵소서, 주여 오시옵소서,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여기에도 같은 개념이 나옵니다. 다음에 일어날 일, 속히 일어날 일, 가까운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재림의 때가 너무 지체되어서 사람들이 결국 예수님이 다시 오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때가 가까이 왔고 다음에 반드시 일어날 일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지체되어서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시기나 하는 거냐고 의심할 거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조롱하는 자들은 바로 이 점을 들어서 비웃습니다. 몇 달 지체되는 그런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도대체 어디 있느냐?”라면서 조롱합니다. 베드로후서에 기록되어 있죠. 그러나 예수님은 오십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 속에서 다음 차례로 예정된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한 가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2천 년이 지났지만 하나님께는 이틀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오십니다.

이제 열번째 요점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여전히 서론에 있는 내용인데, 바로 삼위일체적 축도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축도는 너무나도 장엄해서 반드시 찬양이 나와야만 합니다. 곧 그 부분을 보게 될 텐데요, 아마 다음주까지 기다려야 다룰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찬양을 보기 전에 먼저 4절, 5절, 6절에 나오는 축도를 살펴야 합니다. 이 축도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위대한 진리를 다시 한 번 우리 마음에 새기게 합니다. 3절에서 복이라는 개념으로 강조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여기서 말하는 아시아는 아시아 대륙 전체가 아니라 소아시아, 오늘날로 하면 튀르키예 지역을 가리킵니다. 튀르키예 서부 지역에 위치한 일곱 교회인데, 11절에 이름이 나옵니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이 교회들이 편지를 받았습니다. 먼저 서신서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인사가 나옵니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 다음에 놀라운 삼위일체적 축도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을 부어주시는 표현입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며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삼위일체입니다. 놀라운 삼위일체의 축도로 시작합니다. 축도란 축복하는 것입니다. 은혜와 평강이 삼위일체 전체로부터 이 일곱 교회와 그 안에 있는 참된 성도들, 그리고 온 세상의 참된 성도들에게 임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편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담아 보내십니다. 성령님께서 복을 담아 보내십니다. 예수님께서 복을 담아 보내십니다. 삼위의 하나님 모두가 은혜와 평강을 주십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이 은혜를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성령님이 원하시고, 아들이신 예수님이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평강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성령님이 원하시고, 예수님이 원하십니다. 제가 확실히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의 의미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모든 은혜와 평강과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입니다.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점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시간의 차원 속에서 묘사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지만, 동시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두루 포함하시는 분으로 설명됩니다.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이 칭호는 성경 여러 곳에서 반복됩니다.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고 묘사합니다. 4장 8절을 보아도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이렇게 노래합니다. 11장 17절을 보면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 뭔가 빠져 있지 않습니까?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왜일까요? 그때가 되면 하나님이 이미 오셨기 때문입니다. 16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미래가 아닙니다. 16장 5절에서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라고 고백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제는 오실 분이 아니라 이미 오셨기 때문에 “장차 오실 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제 삼위일체의 두번째 위격으로 넘어가서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잠깐만요, 성령님은 한 분 아닌가요?” 맞습니다. 성령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왜 여기서는 일곱 영이라고 표현했을까요? 몇 가지 설명이 있습니다. 첫번째로 일곱이라는 수가 충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나타낸다는 해석입니다. 두번째로는 이사야 11장 2절에 나오는 성령님에 대한 놀라운 말씀과 연결됩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여기에서 성령님의 일곱 가지 측면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 지혜의 영, 총명의 영, 모략의 영, 재능의 영, 지식의 영,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입니다. 성령님의 일곱 가지 사역입니다.

이 인사 속에 스가랴가 들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스가랴 4장을 보면, 전부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일곱 영이라는 개념이 스가랴 4장 1절부터 10절에 나옵니다.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잔대가 있는데 그 위에는 기름 그릇이 있고 또 그 기름 그릇 위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기름 그릇 위에 있는 등잔을 위해서 일곱 관이 있고.” 여기서 또 일곱이라는 수가 등장합니다. 일곱 등잔입니다. 유대인이 사용하는 ‘메노라(menorah)’라는 촛대를 본 적 있으십니까? 일곱 개의 촛대가 곡선으로 휘어진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가운데 하나가 있고 양 옆으로 세 개씩 있습니다. 크네세트(Knesset), 그러니까 예루살렘 국회의사당 앞에도 아주 큰 메노라가 세워져 있습니다. 10절에 가면 다시 비슷한 개념이 나옵니다.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 이 메노라가 성령을 가리키는 것인지 궁금하실 텐데요, 네, 그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본문 정중앙에 이런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6절이죠.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은 스가랴 4장의 상징과 아주 비슷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님의 사역이 스가랴 4장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 6절입니다. “...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이것은 거의 스가랴 4장의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스가랴는 일곱 등잔을 언급하는데, 하나님의 빛을 가리킵니다. 또 일곱 눈을 언급하는데, 성령을 가리킵니다. 계시록 5장에서도 거의 같은 묘사가 나옵니다. 그래서 스가랴 4장과 가장 잘 연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의미하든, 이사야 11장에서 말하는 일곱 가지 성령의 사역을 가리키든, 아니면 스가랴 4장에 나온 일곱 등잔과 일곱 눈의 개념을 계시록 5장에서 다시 반복하는 것이든, 모두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놀라운 사실은 성령님께서 모든 영광 가운데, 충만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가 교회에 속해 있고, 하나님께 속해 있고,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면 아버지와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이제 삼위일체의 마지막 위격에게로 나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은혜와 평강입니다. 5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묘사됩니다.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얼마나 영광스러운 묘사입니까? 정말 가슴이 벅차오르는 말씀입니다.

요한은 성령님이나 하나님 아버지에 비해 예수님에 대해서 조금 더 많이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이 책의 주제이기 때문이죠. 요한계시록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환상입니다. 심각한 고난과 박해를 받아 낙심한 소아시아의 성도들에게 주어진 환상입니다. 장차 오게 될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성도들을 격려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성도들에게 가장 먼저 위로가 되었을 점은,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이들을 잊지 않으셨고 은혜와 평강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두번째 위로는 성령 하나님께서도 이들을 사랑하시며 은혜와 평강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성령님도 결코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가장 놀라운 위로는 바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잊지 않으시고 은혜와 평강을 주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요한은 예수님을 “충성된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55장 4절입니다. “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충성된 증인이란 언제나 진리를 말하는 자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항상 진리를 말씀하셨고 언제나 충성되셨습니다. 결코 진리에서 벗어나신 적이 없습니다. 실제로 요한계시록 3장 14절에서 예수님을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라고 부릅니다. 시편 89편에서도 하나님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충성된 증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여기서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전하는 메시지가 시편 89편에서 나왔다고 믿습니다. 시편 89편 27절과 37절을 읽어보면 시편의 내용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메시아는 충성된 증인으로 오십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8장 3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지금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증언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충성된 증인이십니다.

둘째로 예수님께 주어진 칭호는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먼저 나셨다는 말이 예수님이 처음으로 부활하신 분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나신 이’라는 말은 모든 부활한 이들 가운데서 예수님이 가장 뛰어나시고 으뜸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헬라어로 ‘프로토토코스(prototokos)’는 ‘우월한, 탁월한’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과거에나 미래에 부활하는 모든 사람 중에서 예수님이 가장 존귀하시고 가장 뛰어나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이 표현은 시편 89편 27절을 배경으로 합니다. “내가 또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 여기서 ‘장자’란 곧 ‘상속자’를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바로 이 사건을 기록한 책입니다. 충성된 증인의 증언을 전하는 책이며, 하나님께서 ‘프로토토코스’, 곧 죽은 자 가운데서 가장 으뜸이 되시는 예수님을 높이시는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주어진 칭호가 있습니다. 바로 “땅의 임금들의 머리”라는 칭호입니다. 여기서 임금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아르콘(archon)인데요, ‘통치자, 지배자’를 뜻합니다. 어떤 번역에서는 ‘군주’ 혹은 ‘통치자’로 표현되지만, ‘통치자’라는 일반적인 의미가 가장 적절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땅의 임금들의 통치자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나타나십니다. 얼마나 위대하신 왕이십니까. 다니엘 4장 37절은 예수님을 “하늘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마태복음 2장 2절은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장 49절은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합니다. 디모데전서 1장 17절은 “영원하신 왕”이라고 선포합니다. 시편 24편 7절은 “영광의 왕”이라고 찬송합니다. 요한계시록 15장 3절은 “만국의 왕”이라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님께 주어진 세 가지 칭호를 다시 보십시오. 충성된 증인은 과거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말씀하신 것에 대해 예수님은 충성된 증인이셨습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신 것은 현재의 역할입니다. 다시 살아나신 주님, 곧 모든 부활한 자들의 으뜸이 되신 주님이 지금 아버지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실 것은 미래입니다. 언젠가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왕들을 다스리시는 통치자가 되실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에 그 영광이 펼쳐지는 것을 볼 겁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통치자가 되시는 이유는 모든 부활한 자들 가운데 으뜸이시기 때문이며, 충성된 증인이셨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편지 속에서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지막 주제로 넘어갑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책의 본질, 중심 주제, 근원이신 하나님, 수신자, 예언적 성격, 초자연적인 전달, 인간 전달자, 영적 복, 시급한 긴급성, 삼위일체의 축도를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은 높이 올리는 송영입니다. 요한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불과 여섯 절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감격을 억누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6절을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이라고 찬양을 올린 것입니다. 이것은 높이 올리는 찬송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 드리는 찬양입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형이라는 점입니다. 현재형, 지속적인 사랑입니다. 바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과거의 경험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의 현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의 사랑과 지금 우리를 향하신 사랑은 똑같이 충만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미워하던 때에도 사랑하셨고, 이제 우리가 예수님께 속한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과거,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은 이것입니다.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여기서 피라는 단어는 예수님의 모든 속죄 사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언급할 때마다 온전한 속죄를 의미합니다. 피는 곧 죽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경우 죄를 대신한 희생적이고 대속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속죄의 사역을 통해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진리입니까.

단순히 소극적인 측면, 그러니까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신 것뿐만이 아닙니다. 6절에 적극적인 측면이 나옵니다.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먼저 “나라”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요한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입니까? 우리가 지금 이미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왕을 모시고 있으며, 그 왕의 권위 아래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신자들을 가리키는 집합적인 표현입니다. 믿는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다스림의 영역 안에 있으며,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며 대속하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를 영원한 성도의 공동체,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의 구성원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나라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의 통치를 누리고, 전능하신 사랑의 보호를 누리며 삽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특권처럼 만왕의 왕의 다스림을 받게 하셨고, 또한 함께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죄에서 해방된 우리는 이제 나라가 되었습니다. 믿음을 통해 그 나라에 들어가 예수님의 다스림 아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권리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제사장만이 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고, 1년에 한 번 대제사장만이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모두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성소에 들어갈 수 있고, 모두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구주이십니까.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요한이 말하는 뜻은 분명합니다.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주신 예수님은 영원한 찬양을 받을 권리가 있으시며, 영원한 영광과 영원한 능력을 가지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능력’이라는 단어의 의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영광과 능력을 영원토록 받지 못하신다면 우주의 질서에 어긋나는 불의가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요한은 그 엄숙하고도 장엄한 응답, 아멘을 덧붙입니다. 아멘은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이런 뜻입니다.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는 고백입니다. 이렇게 요한은 서론을 마무리하면서 동시에 우리를 미래로 이끌어 갑니다. 그렇게 이 놀라운 책의 풍성한 보화를 붙들게 합니다. 요한은 아직 서론을 끝내기도 전에 이미 찬양 속에 푹 빠져버립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분,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삼으시고 제사장으로 삼으신 분, 바로 그 예수님께 영광과 능력을 영원무궁토록 돌리는 책입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가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모두가 새로운 차원에서 더욱 높이 그리스도를 찬양할 수 있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우리도 요한과 함께 진정으로 아멘이라고 외치게 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녁 요한계시록의 문을 열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이제 저희는 그 문을 지나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의 찬양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고 능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인데도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고백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배워가며 보게 될 그리스도의 영광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심령을 가득 채워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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