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전에 시편 38편을 함께 읽었습니다. 시편 38편은 죄책감에 사로잡힌 양심이 겪는 고통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시편 기자는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화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주의 진노로 말미암아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죄를 범한 사람의 양심이 느끼는 고통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장 12절에서 말하는 모습과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다시 고린도후서 1장 12절로 돌아가서 신자의 양심과 죄의 문제를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12절에서 바울은 시편 기자와는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바울은 양심이 선하고 깨끗하다고 합니다. 반면에 시편 기자는 자신을 고발하는 양심의 극심한 고통을 호소합니다.
우리는 고린도후서 1장 12절부터 14절까지의 이 짧은 부분을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우리 영혼 속에 두신 경보 장치인 양심에 초점을 맞추어 왔습니다. 우리가 이미 배운 것처럼, 양심은 우리가 세운 가장 높은 도덕적 기준을 거스르게 되면 죄책감과 수치심, 불안과 초조함, 두려움과 의심을 일으킵니다.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질병, 고통을 일으킵니다. 사람을 깊이 낙심하게도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영혼을 파괴하는 것들을 경고하시고자 우리에게 양심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거룩하게 살았기 때문에 양심의 고발을 받지 않았습니다. 물론 바울이 죄가 전혀 없는 완전한 사람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 속에 있는 죄를 지속적으로 이기면서 살았습니다.
그 어떤 그리스도인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간증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가 남아 있습니다.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여전히 죄를 지으면서 즐거움을 느끼기도 한다는 겁니다. 단지 한두 번 죄를 짓는 게 아니라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 죄의 습관과도 계속 씨름합니다. 때로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죄에 넘어지기도 하죠. 우리가 항상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대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찮고 세속적인 일들에 시간을 허비할 때도 많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나가 버릴 것들에 쉽게 빼앗겨 버립니다. 거룩한 일과 복음 전도에 대한 열정도 종종 식어 버리죠.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로마서 6장을 보면 모든 것이 달라져야 할 것처럼 보입니다. 로마서 6장 14절입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 또 17절과 18절은 이렇게 말하죠.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정말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고,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면, 왜 우리는 순결하게 살면서 깨끗한 양심을 누리지 못하는 걸까요? 왜 이 싸움이 계속되는 걸까요? 그 이유는 우리 안에 죄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우리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심으로써 죄의 형벌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또 죄가 우리를 지배하던 권세도 깨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죄에게 복종할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현재에도 우리는 어느 정도는 죄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죄가 예전처럼 언제나, 모든 방식으로 우리를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장차 우리는 죄의 존재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고, 속량받고, 용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죄가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거룩하게 살고, 그 결과로 깨끗한 양심을 가지려면, 반드시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이 죄를 제대로 다루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그 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구약성경에 나오는 예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를 어떻게 다루어야 깨끗한 양심을 가질 수 있는지를 매우 생생하게 보여주는 예가 있습니다. 우리도 이 예를 따르면 시편 기자가 경험했던 고통이 아니라, 바울이 경험했던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5장을 보겠습니다. 구약의 이 위대한 사건은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죄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가 얼마나 의로운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물론 저는 이 본문 안에 담긴 역사적 의미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 사건을 신자들이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예화로 삼겠습니다.
사무엘상 15장 1절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사울은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습니다. 베냐민 지파였고, 백성들이 왕으로 세우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사울은 기름 부음을 받아 왕이 되었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반드시 지켜야 할 전제 조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자리에 서기 때문에, 백성의 참된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반드시 들어야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매우 구체적으로 그에게 명령하십니다.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 사울이 듣고 순종해야 할 내용이 2절에 나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집단 학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부족 전체를 완전히 멸하라는 명령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한 민족이라기보다는, 아말렉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부른 한 부족 전체를 진멸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매우 분명했습니다. 사울은 아말렉 사람들을 가차없이 진멸해야 했습니다. 남자들뿐 아니라 모든 여자와 모든 아이, 심지어 젖먹이까지 죽여야 했고, 모든 가축도 죽여야 했습니다. 그 부족 전체를 세상에서 완전히 없애버려야 했습니다. 포로를 삼아도 안 되고요, 전리품을 취해도 안 됩니다. 그러면 곧바로 이런 질문이 생기죠. 무한한 사랑과 자비와 은혜의 하나님께서 왜 이방 부족에게 이렇게나 엄중한 심판을 내리셨을까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드리겠습니다. 아말렉은 고대 부족입니다. 유목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니면서 살았습니다. 가나안 남부 지역에 거주했구요, 에서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창세기 36장 12절이 말하는 것처럼 약속의 계보 밖에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로 아말렉 사람들은 끊임없이 유대인의 원수였습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 두려워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머뭇거리고 주저했죠. 아말렉 사람들이 매우 잔인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납고 악하고 잔혹한 부족에게 압도되어서 두려워한 나머지 물러나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또 아말렉은 르비딤에서 이스라엘을 공격했습니다. 출애굽 직후에 있었던 사건이죠. 출애굽기 17장에 기록된 유명한 전투입니다. 아론과 훌이 모세의 두 팔을 붙들어 올려 주어야만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일 때에도 아주 비열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아말렉은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을 향해 가던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의 후미를 공격했습니다. 뒤처진 사람들을 노렸습니다. 누가 뒤쳐졌을까요? 노인, 어린아이, 임신한 여인들, 장애를 가진 사람들, 병든 사람들, 약하고 지쳐서 기진맥진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노렸습니다. 가장 약한 사람들을 뒤에서 공격했습니다. 정말 비겁하기 짝이 없는 방법입니다. 아말렉은 이렇게 이스라엘의 뒤처진 사람들을 기습적으로 모조리 학살했고요, 점점 앞으로 밀고 올라가다가 마침내 본격적인 전투를 벌였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잠시 후에 읽어 보겠지만 신명기 2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잔인하고 악하고, 하나님을 향한 증오며, 거룩한 것을 향한 증오, 사람들을 향한 잔혹한 태도를 그대로 보여주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모세가 두 손을 들고 있어야 승리했던 그 사건 기억하시죠? 결국 아말렉은 도망쳐 숨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전투가 끝난 뒤에, 출애굽기 17장 14절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맹세하셨습니다.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말하자면 그 민족을 완전히 쓸어 버리겠다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의지가 너무나 확고하셨기 때문에, 이 맹세를 모세 율법 속에 포함시키셨습니다. 신명기 25장에 기록되어 있죠. 25장 마지막 세 절입니다.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자, 이제 핵심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바로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너는 잊지 말지니라."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아말렉은 배신을 일삼고, 잔인하고, 살육을 서슴지 않는 민족이었습니다. 아말렉의 악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타올랐습니다.
민수기 24장 20절을 보면 하나님은 심지어 타락한 선지자 발람까지 사용하셔서 아말렉의 멸망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또 사사기 6장 3절부터 5절을 보면, 아말렉은 이스라엘 약탈을 즐겼습니다. 이스라엘의 곡식을 모조리 파괴하는 짓을 가장 즐겼습니다. 백성들의 생계도 무너지고 먹을 양식도 끊어졌는데 이런 짓을 즐겼습니다. 아말렉은 하나님을 미워했습니다. 유대인들을 증오했습니다. 폭력을 즐겼습니다. 극도로 사악한 죄인들이었습니다. 이 모든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맹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말렉을 멸망시킬 작정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사무엘상 15장에 이르면 바로 그 일을 실행하실 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졌으니 행동할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가서 아말렉을 쳐라." 사울과 군대는 하나님의 명령을 실행하고, 이 악한 민족을 거룩한 심판으로 처단하는 도구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사무엘상 15장 7절을 보겠습니다. “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 아말렉 전역에 걸쳐서 철저하게 승리했다는 뜻이죠. 동쪽에서 서쪽까지, 북쪽에서 남쪽까지, 말 그대로 아말렉을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대승을 거둔 것입니다. 그런데 8절을 보십시오.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사울은 탐욕에 이끌렸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가장 좋은 가축은 남겨 두었습니다. 가장 좋은 재산은 남겨 두었습니다. 승리의 전리품으로 챙겨 두었습니다. 게다가 아말렉을 완전히 진멸하지도 않았습니다. 많은 아말렉 사람들이 도망쳐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심각한 것은 아각 왕을 살려 두었다는 사실입니다. 왕을 살려줬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사울은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했을까요? 단지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무엇이었을까요? 교만입니다. 아각은 약탈을 일삼고, 잔인하고, 사람들에게 공포를 안겨 주던 그런 민족의 왕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뛰어난 전사요, 가장 용맹한 용사요, 수많은 사람들을 굴복시킨 정복자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사울은 아각이라는 전리품을 높이 들어 보이면서 "봐라, 내가 무엇을 손에 넣었는지 보란 말이다. 내가 누구를 무너뜨렸는지 봐라"라며 자랑하고 싶었던 겁니다. 교만했습니다. 물질에 욕심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 정면으로, 노골적으로 불순종한 것은 사울의 악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심각한 죄입니다. 하나님은 즉시 사울과 그의 모든 후손을 영원히 왕위에서 폐하셨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아닙니다, 22절부터 보겠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사울은 제물로 드리려고 가축을 남겨뒀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시죠.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그리고 이어서 사울의 왕위를 폐하는 선언을 내리십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그러니까 사울이 폐위되었습니다. 그만큼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제 32절로 내려가 보겠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너희는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끌어 오라.” 여기서 한 가지를 아셔야 합니다. 살아남은 아말렉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의 왕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왕이 살아 있는 한, 자신의 민족도 여전히 존재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왕이 살아 있으니 민족도 아직 건재하다고 여긴 것이죠.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살아남은 아말렉 사람들이 왕을 중심으로 다시 세력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다시 힘을 회복해서 재기를 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말합니다.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끌어오라." 그런데 아각은 모든 일이 잘 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울은 이미 왕위에서 물러났고, 모든 것이 다 용서되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태연하게 사무엘 앞으로 나왔죠. “아각이 즐거이 오며 이르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하니라." "이제 다 끝났구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이 말합니다. "네 칼이 여인들에게 자식이 없게 한 것 같이 여인 중 네 어미에게 자식이 없으리라." 무슨 말입니까? "내가 너를 죽이겠다"라는 말입니다.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끔찍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명하신 일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했습니다. 사무엘은 군인이 아니라 제사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향한 거룩한 진노로 자신의 심판을 집행하고 계셨습니다. 사울과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달리, 사무엘은 여호와의 명령을 끝까지 수행했습니다. 죄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관점을 보여주는 매우 강력한 장면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말렉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그 민족을 뿌리째 없애야 했던 그 전쟁은, 목표를 이루기 전에 끝나고 말았죠. 군사들은 전리품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좋은 가축과 나쁜 가축을 가려내는 일에 몰두한 나머지, 하나님이 명령하신 일을 끝까지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몇 년 뒤에 다시 세력을 회복한 아말렉 사람들이 남쪽 지역을 습격해서 여인들과 아이들을 모두 사로잡아 갔다고 기록합니다.
이제 사무엘상 30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1절입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사흘 만에 시글락에 이른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네겝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거기에 있는 젊거나 늙은 여인들은 한 사람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읍에 이르러 본즉 성읍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다윗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도 사로잡혔더라)."
다윗과 일행이 돌아와 보니, 끔찍하고 잔인한 약탈자인 아말렉 사람들이 또다시 이런 짓을 저질렀습니다. 사무엘상 30장 16절입니다. "그가 다윗을 인도하여 내려가니 그들이 온 땅에 편만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땅과 유다 땅에서 크게 약탈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먹고 마시며 춤추는지라." 누굽니까? 다름 아닌 아말렉 사람들입니다.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이 이튿날 저물 때까지 새벽부터 그들을 치매." 거의 하루 종일 학살이 계속됐습니다. "그들 가운데 도망한 자는 약대 타고 도망한 소년 사백 명 외에는 한 사람도 없었더라." 젊은이 사백 명만 도망쳤고, 나머지는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다윗이 아말렉 사람들이 빼앗아 갔던 모든 것을 도로 찾고 그의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그들이 끌어갔던 것 가운데는 크고 작은 것과 자녀들과 탈취물 등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고 다 도로 찾아왔고." 다윗은 모든 것을 되찾았습니다. "다윗이 그 양 떼와 소 떼를 다 빼앗고 사람들이 그 가축을 몰고 자기보다 앞서 가며 이르되 이는 다윗의 전리품이라 하였더라." 하나님의 자비로 다윗은 사로잡혀 갔던 여인들과 아이들을 구해 냈고, 아말렉 사람들이 빼앗아 갔던 모든 전리품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아말렉은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그대로 되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렸듯이, 아말렉 멸망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와 죄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진노를 보여 주는 아주 놀라운 장면입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는 이것을 하나의 비유로 사용해 보고 싶습니다. 신자의 삶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죄를 설명하는 데 아주 적절한 비유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구원을 받았을 때, 바로 그 순간 죄는 철저히 패배했습니다.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동쪽에서 서쪽까지, 북쪽에서 남쪽까지, 우리의 죄는 철저히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안에는 죄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삶에는 아직도 돌아다니는 아말렉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아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문제는 죄가 패배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죄는 이미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남아 있는 죄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아직도 살아 움직이는 사악한 아말렉 사람들이 남아 있습니다. 구원받은 순간에 죄의 패배로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당당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남아 있는 죄를 반드시 찍어 없애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죄가 다시 살아날 겁니다. 우리 마음을 약탈할 겁니다. 영적인 힘을 빼앗아 갈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아각에게 자비를 베풀면 안 됩니다.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를 너그럽게 대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그 죄가 다시 일어나 반란을 일으키고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할 겁니다. 그렇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아말렉 사람들처럼,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도 이전보다 더 사납고 더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경계하지 않기 때문이죠.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도 아말렉은 이미 패배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왕이 토막나 죽었고,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겼을 겁니다. 그런데 다시 나타났습니다. 성경은 사무엘이 아각을 다루었던 것처럼 우리의 죄를 다루라고 말합니다. 죄를 죽이라고 합니다. 아직도 우리의 구속받지 않은 인간성, 곧 육신 안에 죄가 남아 있습니다. 그 죄를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끝까지 추적해서 찾아내고 없애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바울이 담대하게 말했던, 거룩하고 경건하며 진실한 양심에서 오는 확신을 결코 누릴 수 없습니다.
이제 골로새서 3장을 잠시 보겠습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우상 숭배를 모두 죽이랍니다. 죽이십시오. 죽여 버리십시오. 죽을 정도로는 안 됩니다. 적당히 죽이면 안 됩니다. 아각 하나쯤은 삶의 한구석에 그대로 둔다?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반란을 일으킵니다. 죄가 완전히 죽을 때까지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죄는 아말렉 사람들처럼 학살을 피해 달아나는 법을 압니다. 살아남아서 다시 번성하고,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을 또다시 공격합니다.
이제 로마서 8장 12절과 13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1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절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살아 있으려면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참된 신자는 몸의 행실을 계속 죽입니다. 남아 있는 아말렉 사람들을 계속 처단하는 것이죠. 그리고 바울은 이것이 성령의 능력으로 이뤄진다고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죄에 대한 승리를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7장에서는 여전히 계속되는 죄와의 싸움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로마서 8장에서는 그 싸움에서 승리하고 양심을 잠잠하게 만드는 삶을 설명합니다. 비결이 뭡니까?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입니다. 죄를 죽이는 것입니다. 죄를 찍어 없애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 그리고 죄를 이기며 살아가는 사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끊임없이 자신의 악한 행실을 죽입니다. 계속 죄를 죽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참된 신자의 특징이라고 말합니다. 참된 신자는 육신의 악한 행실을 죽입니다. 죄를 죽입니다. 참된 신자는 사울처럼 아각을 살려두지 않습니다. 자비를 베풀지 않습니다. 사무엘처럼 아각을 토막내 죽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육신의 악은 길들일 수 없습니다. 애완동물처럼 데리고 살 수 없습니다. 공존할 수 없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그냥 돌아다니게 두자. 설마 해치겠어?" 이렇게 하면 안됩니다. 바울의 요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그 약탈자 아말렉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하셨던 것처럼, 남아 있는 죄도 끝까지 찾아내 모두 죽여야 한다고 합니다. 단호하게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죄를 단호하게 다뤄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29절부터 30절입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우리 몸을 상하게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죄를 죽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과 매우 비슷합니다. 여러분의 삶에는 반드시 죽여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죄를 죽이라고 말하면서 바로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신자에게 죄의 괴로움에서 즉시 벗어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한 번의 위대한 승리를 통해 모든 아말렉 사람이 단번에 사라질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평생 동안 계속해서 그 죄를 죽여야 한다고 합니다. 또 이 문제를 어떤 극적인 체험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제2의 축복(second blessing), 제2의 은혜의 역사(second work of grace), 순간적인 성화의 체험, 이런 것으로 해결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다 내려놓고 우리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그냥 가만히 계십시오. 한발 물러서서 하나님께서 다 하시도록 두십시오", 이런 식으로 수동적인 태도로 해결할 수 있다고 하지도 않습니다. 또 설교가 끝난 뒤의 초청 시간에 다시 헌신을 하거나 다시 자신을 봉헌하기로 결단하는 어떤 전환점만으로 이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지도 않습니다.
바울은 평생에 걸쳐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합니다. 이 동사의 시제가 보여주듯이 우리는 끊임없이 죄를 찾아다니면서 죽여야 합니다. 싸움은 계속됩니다. 이 싸움은 계속됩니다. 육신의 행실을 집요하게, 쉬지 않고 죽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육체적 고통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전에 저는 허리에 작은 바늘이 촘촘하게 박힌 띠를 맨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늘 자기 살을 찌르고 상처를 내면서 그렇게 하면 자신의 죄를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가톨릭교회의 역사 속에는, 신발 안에 압정이나 돌이나 못을 넣고 다니면서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면 죄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것은 고행이 아닙니다. 수도원에서 자신을 학대하는 삶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자기 몸을 훼손하는 것도 아닙니다. 몸을 벌하는 모든 행위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바울은 죄를 죽이고, 죄를 짓밟고, 죄의 힘을 빼앗고, 죄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깨끗하고 선한 양심을 얻고, 평안과 기쁨과 안식과 안전과 확신과 소망을 가져다준다고 합니다.
결국 죄를 죽인다는 말은 경건한 새로운 습관을 기르는 동시에 죄된 옛 습관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적극적인 면에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시작하고요, 소극적인 면에서는 죄를 짓는 일을 그만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토록 헌신해야 하는 끊임없는 영적 전쟁입니다.
말씀을 맺으면서, 성경이 우리에게 아각을 찍어 없앨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들을 어떻게 제시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삶에 남아 있는 아말렉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입니다. 그런데 그 어떤 방법도 육신적이지 않습니다. 외적이지도 않습니다. 기계적이지도 않습니다. 의식이나 형식도 아닙니다. 촛불을 켜거나 종교 의식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청교도 시대의 위대한 신학자이자 저술가였던 존 오웬(John Owen)은 로마 가톨릭 체계 대부분이 "죄를 죽이는 잘못된 방법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서원, 수도회 생활, 금식, 고행 같은 잘못된 방법으로 평생 동안 죄를 죽이려고 애쓰는데 모두 헛된 일입니다. 율법주의나 수도원 생활이나 경건주의나 금욕주의나 바리새주의나 독신 생활이나 채찍질이나 고해성사나 묵주기도나 성모송이나 그 밖의 어떤 외적인 방법으로도 죄를 없앨 수 없습니다. 죄를 죽이는 도구는 마음속에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입니다. 로마서 8장 13절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이라고 합니다. 육체적인 일이 아니라 영적인 일입니다. 성령님은 반드시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수동적으로는 안 됩니다.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죄를 죽이는 모든 방법은 성경이 신자에게 명령한 간결한 명령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그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제가 지금부터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씩 순서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죄를 죽이고 싶으세요? 깨끗한 양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죠. 죄를 다루고 싶으세요? 그러면 이렇게 하십시오. 첫 번째 단계는 육신의 정욕을 멀리하십시오. 육신의 정욕을 멀리하십시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를 죽이려면 먼저 정욕을 멈춰야 합니다. 단호하게 끊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11절에서 베드로는 이보다 더 분명하게 말할 수 없을 만큼 직접적으로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무슨 뜻입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정욕을 품지 마십시오. 무슨 신비한 방법이 있는 게 아닙니다. 정욕을 품지 마십시오. 고린도전서 6장 18절에서 "음행을 피하라"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의 정욕을 죽이고 싶으세요? 그렇다면 더 이상 마음속에 품지 마십시오. 베드로는 복잡한 치료법을 말하지 않습니다. "정욕을 제어하라, 멈추어라, 너희 속에서 쫓아내라"라고 합니다. 하늘에서 능력이 내려와서 정욕을 없애 주기를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정욕의 귀신을 쫓아낼 비법을 찾겠다면서 몇 시간이며 몇 년을 허비할 필요도 없습니다. 죄를 죽이는 가장 단순하고도 직접적인 방법입니다. 정욕을 품지 마십시오. 멈추십시오. 야고보서 4장에서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라고 한 것과 똑같습니다. 정욕을 멈추면 죄도 멈춥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욕을 멈출 수 있을까요? 로마서 13장 14절을 보겠습니다. 여기에도 아주 간결한 명령이 나옵니다.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정욕을 멈추고 싶다면 정욕이 먹고 자랄 먹잇감을 제공하지 마십시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여러분의 정욕을 도와주지 마십시오. 시작되기 전에 막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식탐이 많다면 혼자서, 그것도 배고픈 상태로 돈을 많이 챙겨서 장을 보러 가지 마십시오. 먼저는 배를 든든히 채우고, 돈은 조금만 가져가시고요, 믿을 만한 좋은 친구와 함께 가십시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식탐을 부추기는 상황에 자신을 내몰지 말라는 겁니다. 식탐이 있다면 집에 군것질거리를 잔뜩 쌓아 두지 마십시오. 성적인 유혹에 약하다면 그 유혹을 키우는 영상으로 마음을 채우지 마십시오. 그런 내용을 보여 주는 영화를 보러 가지도 말고, 그런 이야기로 가득한 소설을 읽지도 말고, 그런 종류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하지도 마십시오. 그런 짓을 하면서 왜 늘 정욕과 싸워야 하는지, 왜 양심이 계속 자기를 고발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하사면 안 됩니다.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정욕을 굶겨 죽여야 합니다.
저는 감자칩을 참 좋아합니다. 물론 그것이 죄라는 말은 아닙니다. 예를 들려는 겁니다. 그런데 의사가 감자칩이 제 몸에 좋지 않다고 말을 하더군요. 제가 감자칩을 먹지 않으려면 감자칩이 제 주변에 없어야 하겠죠. 제 주변에 감자칩이 있으면 자꾸 먹습니다. 물론 적당히 먹습니다. 하지만 아예 없으면 아무 문제가 없죠. 가끔 찬장을 열었는데 감자칩이 하나도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제 뛰어난 절제력을 스스로 칭찬하기도 합니다. 더구나 저는 가장 가까운 마트에서 한 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살고 있습니다. 악한 생각을 품게 만드는 것들을 마음에서 치워 버리는 것은 사실 아주 간단합니다. 죄를 지을 가능성을 차단하면 됩니다. 그러면 죄가 자라기 전에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정욕을 멀리하려면, 먼저 그것이 자라날 여지를 만들지 마십시오.
여기에는 한 가지 단계가 더 있습니다. 앞 단계보다 더 근본적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그리스도께 두십시오. 같은 로마서 13장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십시오.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삶을 추구하십시오. 그리스도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기까지 결코 만족하지 마십시오. 시편 기자가 말한 것처럼, 또는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입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목표로 삼으십시오. 요한일서 3장 3절입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여러분의 마음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성품에 고정해 두십시오. 그리고 언제나 "그리스도라면 어떻게 하실까?", 이렇게 자문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예배하는 대상을 닮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영적인 원리입니다. 정말입니다.
운동선수들에게도 이런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어디를 가든 쇼핑몰에 들어가 보면, 운동 용품을 파는 가게가 한두 개가 아니라 서너 개, 많게는 대여섯 개씩 있습니다. 거기에 가면 스포츠 영웅들 사진도 살 수 있고, 셔츠며 유니폼이며 재킷이며 모자도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정말 끝이 없습니다. 얼마 전에 저는 밴쿠버 커넉스(Vancouver Canucks) 팀에서 뛰는 한 친구의 초대로 로스앤젤레스 킹스(Los Angeles Kings) 경기를 보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날 경기에 출전한 후에 우리와 함께 교제도 했습니다. 주님을 알기도 하고 아주 사랑하는 친구입니다. 오랜만에 경기장에 갔는데 정말 놀랐습니다. 운동은 별로 하지 않아 보이는 통통한 남자들이 웨인 그레츠키(Wayne Gretzky), 켈리 루디(Kelly Hrudey), 뤼크 로비타유(Luc Robitaille), 이런 선수들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선수처럼 서 있는데 등에는 선수의 이름과 등번호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자신이 숭배하는 영웅처럼 자신도 되고 싶었던 겁니다. 물론 실제로는 아이스링크에서 제대로 스케이트도 타지 못하는 사람들이었겠지만, 자신의 우상인 스포츠 영웅을 숭배한 결과, 그 영웅을 상징하는 모습만이라도 닮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은 자기가 예배하는 대상을 닮습니다. 시편 135편입니다. "열국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들의 입에는 아무 호흡도 없나니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으리로다." 피할 수 없는 영적인 원리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예배하는 것을 닮습니다. 이방인들은 자신의 신을 닮습니다. 그 신이 우상이든, 운동선수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삶의 중심을 그리스도께 둔다면 얼마나 더 그리스도를 닮겠습니까? 더욱이 우리는 우리 힘으로 닮지 않고 성령님이 우리를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그리스도께 둘수록 점점 그리스도를 닮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을수록 육신의 정욕을 부추기는 것들을 선택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더 이상 육신의 정욕을 위해 여지를 만들지 않게 되고, 결국 육신의 정욕을 멀리하게 됩니다.
이제 한 단계 더 거슬러 올라가서 네 번째 명령을 보겠습니다. 시편 119편 11절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여호수아 1장 8절도 결국 같은 말씀입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예수님도 아버지께 기도하시며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바울도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가득 채우고, 말씀이 여러분을 지배하고, 말씀으로 여러분의 생각과 삶이 사로잡히고, 말씀에 흠뻑 젖게 될 때, 여러분의 삶은 자연스럽게 그리스도 중심으로 향하게 됩니다. 말씀 속에 나타난 주의 영광을 바라볼 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됩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될수록 육신의 정욕을 위해 여지를 만들지 않게 됩니다. 육신의 정욕을 멀리하게 됩니다. 죄를 죽이게 됩니다. 더 나아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그 말씀의 검으로 죄를 찍어 없애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반드시 덧붙여야 할 다섯 번째 영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 그리스도께 마음을 두게 됩니다. 그리스도께 마음을 두면 육신을 위해 여지를 만들지 않게 됩니다. 육신을 위해 여지를 만들지 않으면 육신의 정욕을 멀리하게 되죠. 그런데 여기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결국 기도입니다. 주님께 간구하십시오. 또 마태복음 26장 41절과 누가복음 22장 4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죄악을 이길 힘을 구할 때, 기도는 결코 빠질 수 없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입니다.
시편 19편에서 기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다시 말해서 "주님, 제가 죄를 짓지 않도록 막아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주 직접적인 기도입니다. 저는 히브리서 기자가 히브리서 4장 16절에서 말한 것도 바로 이런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때를 따라 돕는”에서 이 때란 바로 시험을 받는 때입니다. 신자가 죄와 싸우는 때입니다. 바로 그때에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합니다. 긍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에 하나님께서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 말씀 묵상, 그리스도께 마음을 두는 것, 정욕을 부추기는 것들을 멀리하는 것, 정욕의 충동을 거절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우리 삶에 절제를 이루어 가는 과정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을 보십시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여러분이 승리하는 삶을 살려면 절제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말씀을 묵상할 때, 그리스도께 마음을 두고 살 때에 다른 모든 것을 절제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정욕을 부추기는 것들에 "아니오"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경기하는 사람들은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말합니다. 먹는 것도 절제합니다. 운동도 절제합니다. 훈련도 절제합니다. 잠자는 것도 절제합니다. 위대한 운동선수는 자기 삶을 철저히 통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썩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썩지 않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왜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27절에서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쳐"라고 번역된 헬라어 “hupopiazō(휘포피아조)”는 문자적으로 "눈 아래를 가격하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내 몸을 주먹으로 친다"입니다. 내 몸을 훈련시키고 통제하고 복종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깨끗한 양심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죄를 철저하게 다뤘습니다. 자기 몸을 통제했습니다. 늘 깨어서 자기를 절제했습니다. 끊임없이 기도하고 끊임없이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누가복음 21장 34절에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말씀도 바로 이런 뜻입니다. 바울은 그런 것들 위에 서기 위해 자신을 훈련했습니다. 결국 자기 절제입니다. 빌립보서 2장도 같은 말을 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우리는 이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힘써야 합니다. 절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다시 로마서 8장 13절로 돌아갑니다. "영으로써." 죄를 죽이는 것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참여 없이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제가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여러분 삶에 있는 아말렉 사람들과 아각이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안됩니다. 죄와 공존하면 안됩니다.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정욕을 부추기는 모든 것을 피해야 합니다. 그렇게 육신의 정욕을 멀리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는 죄를 죽이는 또 다른 의무들도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서 베드로전서 5장 5절은 겸손으로 옷 입으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4장 31절과 32절은 다른 사람을 향한 원한과 앙심을 버리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6장은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합니다. 골로새서 3장 8절과 9절은 죄된 성품을 벗어 버리라고 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 5절부터 7절은 영적으로 자라 가는 덕목들을 더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겁니다. 기도하십시오. 말씀을 가까이하십시오. 그리스도를 닮아 가십시오. 정욕을 부추기는 것들을 피하십시오. 그러면 정욕을 품지 않게 되고, 결국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 함께 살펴보고 있는 바로 이 서신, 고린도후서 7장 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다시 말해서, 우리의 책임이랍니다. 물론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집니다. 신비한 부분이죠. 그러나 우리의 몫도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더러움을 없애십시오. 죄를 없애십시오. 죄를 죽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아말렉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죄가 다시 돌아와서 우리를 파괴할 겁니다.
육신은 교활합니다. 육신은 사람을 속입니다. 한동안은 여러분을 가만히 내버려두고 이제는 죄를 이겼다고 착각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다시 지옥 같이 맹렬하게 달려들 겁니다. 죄는 늘 여러분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코 방심하면 안 됩니다. 죄는 언제나 숨어서 가만히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아각이 웃는 얼굴로 다가와서 "참으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나갔도다"라고 말할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 전쟁은 끝났잖아. 너는 구원받았고 천국을 향해 가고 있잖아. 나는 이미 패배했어. 그러니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이렇게 속삭일 겁니다. 아각과 아말렉 친구들이 여러분과 화해하자고 하면서 더 이상 대적하지 말자고 다가올 때에, 바로 그때 우리는 칼을 들어 죄를 찍어 없애야 합니다. 우리는 사탄의 계략을 잘 압니다. 그렇니 우리의 무기도 잘 알아야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오늘 아침에도 이렇게 놀라운 예배의 시간을 허락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또한 이 본문이 우리 삶에 얼마나 실제적으로 적용되는지를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말렉과 아각에 관한 이 위대한 사건을 기록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 주님의 공의와 심판, 거룩한 진노와 죄를 미워하시는 마음을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또한 사무엘이 아각을 찍어 없앤 그 놀라운 역사적 사건이, 우리 삶에서 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너무나도 적절한 비유로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께 두는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육신이 틈탈 기회를 조금도 내어 주지 않는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정욕을 품지 않게 하시고, 악한 생각을 끊게 하시고, 악한 말을 끊게 하시고, 악한 행동을 끊게 하시고, 악한 욕망을 끊게 하옵소서. 우리 삶에서 죄를 끊임없이 죽이게 하시고, 그 결과 바울이 누렸던 것처럼 담대하고 확신에 찬 양심을 누리게 하옵소서. 진실하고 거룩하고 경건한 양심을 누리게 하옵소서.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성도들 가운데는 자신의 양심이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아침에 이미 자신의 죄를 온전히 자백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 이렇게 함께 예배드리는 지난 몇 주간 동안에, 특별히 이 좋은 계절을 보내면서 마음이 이미 이전보다 더 주님께 향하게 되었고, 그래서 양심이 평안을 누리고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또 다른 이들도 있습니다. 시편 기자와 같은 심정일 겁니다. 마음의 상처가 깊고, 고통이 너무나도 깊습니다. 때로는 몸까지 병든 것 같이 아픕니다. 수치와 죄책감과 불안과 두려움과 의심 속에 살아갑니다. 기쁨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의 양심을 주님의 손이 무겁게 누르기 때문입니다. 자기 삶에 남아 있는 아말렉 족속을 제대로 다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 우리로 언제나 육신의 행실을 죽이는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깨끗해져,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온전히 거룩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를 인정해 주는 깨끗한 양심이 주는 복과 유익을 누리게 하옵소서. 간절히 원합니다. 오직 성령만이 이 일을 우리 안에서 이루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꺼이 순종할 때 성령께서 이 모든 일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 아침 설교를 마치고 난 뒤에 저는 죄를 죽이는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생각했습니다. 우리 삶에 얼마나 꼭 필요한 일인지를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다시금 이런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주일 아침마다 여러분에게 최선을 다해 이 진리를 가르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해하셨을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받아들였을 수도 있고, 동의했을 수도 있고, 믿었을 수도 있고, 실천하기로 결심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을 듣고, 또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매주 반복해서 들어야 합니다. 진리 앞에서 계속해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주에 다음주에, 매주, 또 매주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직면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죄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계속해서 내놓고 다루어야 합니다. 참 놀라운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진리도 어느새 마음 한구석으로 밀려나 버리고, 그 자리를 죄가 다시 차지하여 우리 안에서 힘을 얻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보면 더 그렇습니다. 죄는 최첨단 미디어를 통해서 끊임없이 소비되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에서는 주일 예배 한 번만으로는 한 주를 버티기조차 어려울지 모릅니다. 주일에만 말씀을 접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아무런 양육도 받지 않는다면, 어느새 죄를 용납하는 삶으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말 겁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문화가 점점 악해지는 만큼, 좋은 기독교 설교 테이프와 책들도 참 많아졌습니다. 기독교 라디오도 있고, 여러 가지 유익한 자료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정보를 얻기만 하면 안 됩니다. 정보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정보를 알고, 믿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0장이 말하듯이, 우리가 함께 모이는 목적은 서로를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고, 주님의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서로를 더 큰 책임 가운데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역시 책임의 자리입니다. 단순히 새로운 정보를 얻는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죠. 그래서 반복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단지 새로운 정보를 전하거나, 옛 정보를 새로운 방식으로 포장해서 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같은 진리를 계속해서, 또 계속해서, 또 계속해서 상기시켜 드리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싸움은 끝이 없이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주일마다 빠짐없이 신실하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예배를 빠지기 시작하면 삶 속에서 죄를 조금씩 용납하는 습관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점검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는 설교를 청종하지 않으면 그렇게 되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을 설교의 목표로 삼는 교회들을 볼 때마다 너무나 염려스럽습니다. 그러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즐겁게 시간을 보내겠죠. 그러나 신자들도 자기 죄를 편안하게 여기게 됩니다. 죄가 책망을 받지 않고, 정면으로 다루어지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불신자들이 잘 즐기는 만큼, 많은 신자들도 죄와의 싸움에서 계속 패배하며 살아가게 될 겁니다.
우리가 함께 모일 때 가장 중요한 일은 거룩하라는 이 요구 앞에 자신을 세우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주일에 모이는 이유입니다. 오늘 아침 설교에 덧붙여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도 바로 이겁니다. 여러분이 꼭 이해하셨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의 역할은 단지 새로운 정보를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여러분이 알고 있는 진리, 오래전부터 들어온 진리,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키는 그 진리 앞에 여러분을 계속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너무나 쉽게 실패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저는 이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양심을 찌르는 말씀으로 그 진리를 여러분의 마음에 적용하는 것이야말로 설교자의 역할입니다. 또 성찬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찬은 우리의 실패와 죄와 허물을 드러내고, 우리를 책망하는 양심 앞에 서게 하는 의식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 우리가 함께 주님의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오늘 아침에 미처 다 말씀드리지 못했던 몇 가지를 여러분에게 덧붙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아침 설교를 보충하는 내용이자, 다시 한번 상기시켜 드리는 말씀으로, 죄를 죽이는 일에 도움이 되는 몇 가지 원리를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로마서 8장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를 죽이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우리 삶에 남아 있는 죄를 끊임없이 죽여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들을 기억하십시오. 육신의 정욕을 멀리해야 합니다. 육신을 위해 아무 기회도 만들어 주지 말아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여 그 말씀을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또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명령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또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것도 봤습니다. 성령께서 이 모든 일을 이루시는 능력이시기 때문이죠. 그리고 자신을 절제하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자기 몸을 쳐 복종시킴으로써 버림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 밖에도 겸손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여러 가지 의무들이 함께 따라온다는 것도 살펴보았습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몇 가지를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원리들을 여러분의 삶에 적용해 나갈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찬식에 참여하기 전에 그 중에서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죄는 단지 덮어 둔다고 해서 죽지 않습니다. 죄는 그저 감춘다고 해서 죽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죄를 감추는 데 아주 능숙할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말이죠. 주변 사람들에게 죄를 완벽하게 숨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죽인 것이 아닙니다. 죄를 그저 겉으로만 덮어 두었다면, 마치 엉망으로 칠해진 벽을 벽지로 가려 놓은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위선입니다. 그리고 위선 역시 또 하나의 죄일 뿐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양심을 그저 달래 놓기만 했다면, 오히려 이전보다 더 위험한 상태입니다. 죄를 성공적으로 감추었다고 해서 죄가 죽은 것이 아니죠. 오히려 더 강하게 살아서 움직이게 됩니다. 드러나지 않고 숨어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잠언 28장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여러분은 죄를 자백하고 버리기 전까지는 죄를 제대로 죽이지 않은 겁니다. 죄를 덮어 두는 것은 오히려 죄를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둘째, 죄를 죽이는 이 중요한 의무를 실천하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죄는 단지 마음속 깊이 감춘다고 해서 죽지 않습니다. 단지 내면 깊이 감춘다고 해서 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전에 입으로 죄를 짓고, 혀로 죄를 짓고, 몸으로 죄를 지었을 수 있습니다. 손으로, 눈으로, 귀로 겉으로 보이게 죄를 지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이는 그런 행동들을 그만두고, 그 악한 행동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면 죄를 죽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죄를 지으며 즐겼던 그 마음을 속에서 계속 되새긴다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제는 음란한 내용을 보여 주는 영화를 보지 않겠다", 이렇게 결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더 이상 그런 영화를 보지 않지만, 과거에 봤던 장면들을 생생하게 떠올리면서 마음속으로 계속 즐긴다면, 그 죄는 전혀 죽지 않은 것입니다. 단지 내면으로 옮겨 놓는다고 해서 죽지 않습니다. 그 죄가 주었던 즐거움을 여전히 마음속으로 되새긴다면, 그 죄는 아직 죽지 않은 겁니다. 단지 죄를 겉에서 속으로 옮겨 놓았을 뿐이죠. 오직 여러분 자신과 하나님만 아시는 상상의 세계 속으로 옮겨 놓았을 뿐입니다. 그 죄가 죽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치명적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 그 죄는 겉으로는 의로운 척하는 위선과 결합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전보다 더 가증스러운 죄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이유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미워하는 마음은 그대로 품고 있었습니다. 간음은 하지 않았지만 여자를 보고 음욕을 그대로 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영원한 지옥의 심판을 받을 자들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죄는 단지 위선으로 덮어 둔다고 해서 죽지 않습니다. 단지 마음속으로 옮겨둔다고 해서 죽지도 않습니다. 이 두 경우 모두 이전보다 더 위험해졌을 수 있습니다.
셋째, 이것 역시 매우 실제적으로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죄는 다른 죄로 바꾸어 놓는다고 해서 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 가지 죄를 버리고 다른 죄로 바꾸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죄를 죽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육신의 정욕을 안목의 정욕으로 바꾼들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안목의 정욕을 이생의 자랑으로 바꾼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정욕의 형태만 달라졌을 뿐입니다. 음행을 탐심으로 바꾸었다고 한들 아무런 진전이 없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더 위험하게 만듭니다. 죄의 속임수에 마음이 굳어지도록 내버려 두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죄를 버리고 다른 죄를 선택해 놓고는, 영적인 진보를 보인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죠. 그러나 영적으로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넷째, 죄는 억눌러 놓는다고 해서 죽지 않습니다. "어떻게 죄를 억누를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술로 죄를 억누릅니다. 술에 취해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고 하죠. 죄책감을 느끼느니 차라리 술에 취해서 환상을 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락과 다른 여러 가지 즐길 거리로 죄책감을 덮어 버립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존감을 높여 주는 상담가나 자기에게 좋게 이야기해 줄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그렇게 하면서 죄책감이 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명하지 못한 조언에 속아서 죄책감을 마음속 깊이 눌러 놓았을 뿐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는 이렇게 썼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유혹이나 마음속에 처음 일어나는 죄의 충동을 그저 억눌러만 둔다면, 아마도 더 강한 힘으로 다시 나타날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나는 현대 심리학자들의 말에 동의한다. 억압은 언제나 좋지 않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죄의 첫 충동이 일어날 때 즉시 스스로를 붙들고 이렇게 말하라. 나는 결코 타협하지 않겠다. 그 죄를 끌어내어 똑바로 응시하겠다. 그리고 악하다고, 추악하다고, 첫 사람을 낙원에서 쫓겨나게 만든 바로 그 죄라고 말하겠다. 죄를 끌어내어 대면하고, 폭로하고, 악하다고 선언하라. 그리고 온전히 미워하라. 바로 그때 비로소 그 죄를 제대로 다룰 수 있다. 두려워하거나, 혹은 소심한 태도로 그 죄를 그저 마음속 깊이 밀어 넣어서는 안 된다. 죄를 밖으로 끄집어내라. 드러내라. 분석하라. 그리고 추악하다고 분명히 선언하라. 마침내 그것을 미워하게 될 때까지 계속 그렇게 하라." 참 좋은 조언입니다. 우리는 죄의 머리를 정면으로 때려야 합니다. 용기있게 죄를 다루어야 합니다. 죄를 조금 약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각의 경우에서 배운 것처럼, 완전히 없애 버려야 합니다. 토막을 내서 죽여야 합니다. 평생 계속되는 숙제입니다.
이렇게 지금까지 여러 가지 경우를 살펴봤습니다. 죄는 단지 덮어 둔다고 해서 죽지 않습니다. 단지 마음속 깊이 감춘다고 해서 죽지 않습니다. 다른 죄로 바꾸었다고 해서 죽지 않습니다. 단지 억눌러 놓는다고 해서 죽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립니다. 오늘 아침 이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면서 살펴보았던 내용입니다. 죄는 양심이 잠잠해질 때까지 죽지 않습니다. 양심이 평안을 얻기까지 죽지 않습니다. 죄와 싸우는 궁극적인 목표가 디모데전서 1장 5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우리의 양심이 계속해서 우리를 고발하고 있다면, 우리의 양심이 여전히 가책을 느낀다면, 그 죄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부터 16절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우리가 믿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 번째 방법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깨끗한 삶입니다. 깨끗한 삶이 선한 양심을 낳습니다.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고 싶으세요? 믿음을 비방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고 싶으세요?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으세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을 보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두 가지를 갖추십시오. 첫번째는 믿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번째는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첫 번째 변증은 믿음을 변호할 것이고, 두 번째 변증은 그 믿음을 향한 여러분의 헌신을 변호할 것입니다. "나는 기독교를 믿습니다. 나는 기독교 신앙을 믿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헌신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했습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성경을 전적으로 믿습니다." 이렇게 말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데 왜 당신은 죄 가운데 살고 있으세요?"라는 물음에는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도대체 무엇에 헌신했다는 겁니까? 그래서 이 말씀이 두 가지 방법을 말합니다. 첫째는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고, 둘째는 선한 양심을 낳는 깨끗한 삶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우리가 믿는 내용을 비방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가 그 믿음을 얼마나 깊이, 얼마나 진실하게 붙들고 살아가는지에 대해서도 비방할 수 없습니다.
죄를 완전히 죽이는 과정에서 죄책감의 문제를 반드시 바르게 다루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죄가 남아 있는지 알고 싶다면,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오늘날 세상의 일반적인 지혜와는 정반대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지혜는 전혀 다르죠. 존 오웬(John Owe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를 죽이고 싶다면, 죄책감으로 너의 양심을 무겁게 하라." 참으로 귀한 말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책감에서 벗어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존 오웬은 오히려 "죄책감으로 너의 양심을 무겁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죄책감의 고통이 죄를 지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자연스럽고도 건강한 결과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부끄러워하라. 크게 부끄러워하라." 수치심이 오히려 유익하다고 봤습니다. 부끄러움과 죄책감에 눌린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존 오웬은 사도 바울이 이해했던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7장 10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는 참된 근심은 회개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면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뭡니까? 죄책감을 느끼는 양심입니다. 오늘 아침에 함께 읽은 시편 38편이 보여 주지 않았습니까? 시편 38편은 죄책감이 만들어 낸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수치심이 시편 기자를 깊은 죄의 고백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죄책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가볍게 용서의 약속만 붙잡은 뒤에, 금세 스스로를 안심시키고는 더 이상 자기 죄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죄의 속임수 때문에 마음이 점점 굳어지는 위험에 빠지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이 깊고 진실한 회개를 이루기까지 충분히 역사하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의 죄는 크게 약해질 겁니다.
이렇게 우리 삶에 남아 있는 아말렉 족속을 죽이십시오. 이렇게 아각을 찍어 없애고,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를 죽이십시오. 평생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 살펴본 것처럼, 우리는 이 싸움을 혼자 싸우지 않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절에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죄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 모르겠지만, 저는 제 신앙생활 가운데 바울이 고린도후서 1장에서 했던 말을 늘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정말 되고 싶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말했던 것처럼, 언제나 "제 양심은 깨끗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양심이 조금도 나를 고발하지 않는 상태 말입니다. 바울은 죄를 심각하게 다뤘습니다. 죄를 그저 덮어 두지 않았습니다. 마음속으로만 감추어 두지도 않았습니다. 억눌러 두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죄로 바꾸지도 않았습니다. 죄를 철저하게 다뤘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의 양심은 평안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양심은 영혼의 경고 장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반드시 들어야 할 말씀을 양심을 통해 들려주십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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