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다음 주일 아침에는 교회 구성원에 관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릴 예정입니다. 그 다음 주일에는 고린도후서 1장으로 다시 돌아가서 이어지는 본문, 그러니까 1장 15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양심을 주제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을 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성탄절 연휴가 시작되기 전에 12절부터 14절을 상당히 자세하게 살펴봤습니다.
하지만 그 후로 몇 차례 말씀을 전하면서 저는 ‘양심’ 이라는 단어에 조금 더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양심에 관해 계속 살펴보기 위해서 12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사도 바울은 자신의 정직함, 의로움, 권위, 신뢰성, 사역의 효력을 두고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사실상 모든 면에서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변호하면서 가장 높은 법정에 호소합니다. 하나님을 제외한다면 이 땅에서 가장 높은 법정은 바로 양심입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위해 증언해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추천서를 써 달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바울의 양심은 바울이 거룩하고 경건하고 진실하게 살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에서, 특별히 고린도 교인들을 대하여 올바르게 행했다고 증언합니다.
따라서 양심은 이 땅에서 가장 높은 법정입니다. 지난번에 이 문제를 다루면서 살펴보았듯이, 양심은 영혼 안에서 위험 신호를 보내는 경보 장치입니다. 로마서 2장 15절에 따르면, 우리를 고발하기도 하고 변호하기도 하는 것이 바로 이 양심입니다. 다시 말해서 양심은 우리가 선하고 의롭고 거룩하다고 인정해 주기도 하고, 반대로 우리가 악하고 죄 많고 사악하다고 고발하기도 합니다. 사실 양심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정확하게 판단합니다. 왜냐하면 양심은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 감추어진 비밀까지 알고 있기 때문이죠. 우리가 평안한 삶을 살고 싶다면, 평온한 삶을 살고 싶다면, 바울이 말한 것처럼 조용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고 싶다면, 행복과 만족을 누리고 싶다면, 마음으로 기뻐하고 아무 거리낌 없이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하는 그런 기쁨을 누리고 싶다면, 반드시 깨끗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신자가 진정으로 바라고 추구해야 할 목표입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향해 원하는 만큼 온갖 비난을 쏟아부어도 좋다. 그러나 내 양심이 떳떳하게 증언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고 경건한 진실함 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양심에게 이런 인정을 받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쉽지 않죠. 죄가 우리의 가장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죄성은 인간 영혼의 가장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5장 19절부터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또 누가복음 6장 4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다시 말해서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죄가 있고, 그 죄가 밖으로 솟아나와서 우리가 죄라고 부르는 말과 행동을 만들어 냅니다. 사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죄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로마서 8장 7절은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죠.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를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고, 의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태어났다고 해서 이 점을 놓치면 안 됩니다. 죄는 우리가 책임질 수 없는 연약함이나 결점이 아닙니다. 죄는 우리의 의지에서 솟아나서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의도적으로 대적하는 존재입니다. 죄인은 자유롭게, 자기 의지로, 기꺼이 죄를 선택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안에 있는 죄는 하나님을 향해 의도적이고 자발적으로 반역을 행합니다.
성경은 죄인들이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시편 12편 4절입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다시 말해서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은 내 삶에 아무런 권리도 없으시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 이사야 57장 4절은 죄인들을 하나님을 향해 입을 크게 벌리고 혀를 내미는 패역한 자식들로 묘사합니다. 죄는 하나님을 왕좌에서 끌어내려서 몰아내고 권위를 빼앗아 그 자리에 자신을 앉히려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의 중심에는 교만이 있습니다. 교만은 이렇게 말하죠. “하나님, 비키세요. 이제 내가 주인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게요.” 그러므로 모든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가 하나님을 공격하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죄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반역을 사랑하고, 교만을 사랑하고, 하나님 모독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즐기고, 드러낼 기회를 수도 없이 찾아다닙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양심이 있습니다. 그 양심이 우리에게 죄가 있다고 말한다는 겁니다. 양심은 끊임없이 우리를 몰아붙입니다. 마치 영적인 귀에서 끊임없이 울려 대는 소리와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죄를 감추든지, 죄를 다른 것으로 규정하거나, 그 죄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없다고 부인하면서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잠재우려고 합니다.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양심을 잠재우기 위해서 대개 죄를 덮어서 감추려고 하죠. 새롭지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에덴동산에서 그렇게 했죠. 창세기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자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숨으려고 했습니다. 죄를 덮어서 감추려고 했습니다.
다윗 왕도 우리아에게 죄를 지었을 때 자신의 죄를 덮어 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했죠. 밧세바가 임신을 하자 다윗은 먼저 사무엘하 11장 5절부터 13절에 나오는 것처럼, 마치 우리아가 그 아이의 아버지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일을 꾸몄습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우리아를 죽이려고 계략을 꾸몄습니다. 죄에 죄를 더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밧세바가 임신해 있는 동안 다윗은 계속해서 자신의 죄를 덮어 감추려고 했습니다. 훗날 다윗은 자신의 죄를 지적받고 회개한 뒤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시편 32편 3절부터 4절이죠. 다윗은 죄를 덮어서 감추려고 했지만 양심이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결국 몸의 진액이 다 말라 버릴 정도가 되었죠. 진액이 뭡니까? 침도 있고, 혈액도 있고, 신경계의 기능을 가능하게 하는 체액도 있습니다. 말 그대로 육신이 몹시 아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죄를 다루는 두 번째 방법이 있습니다. 양심을 달래고 죄를 감추어서 어떻게든 양심의 가책을 견뎌 보려고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죄를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립니다. 다시 아담에게로 돌아가 봅시다. 아담은 단지 하와만 탓한 게 아니라 사실 하나님을 탓했습니다. 하와를 가리켜서 “주께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이렇게 불렀죠. 자기 아내뿐 아니라 하나님까지 탓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그렇게 잘못할 수밖에 없었던 타당하고 불가피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잘못을 변명하려고 합니다. 어떤 외부의 힘이나 다른 원인 때문에 그렇게 된 피해자일 뿐이므로 괜찮다고 스스로를 설득합니다. 오늘날에도 심지어 죄를 질병이라고 부르고, 자신을 피해자라고 부르고, 정말로 자신이 잘못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부인하기까지 합니다. 죄인은 생각이 뒤틀려 있기 때문에 자신을 정당화하는 데 있어서 끝없이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고 만들어냅니다.
세 번째는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죄를 덮어 감추거나, 자신을 피해자로 여기면서 스스로를 정당화하거나, 아니면 죄 자체를 깨닫지 못함으로써 죄를 감추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전혀 모르면서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너무 모르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 너무 무지하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죄를 짓는 것이죠. 이것 역시 죄인인 우리의 특징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시편 기자처럼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다윗이 시편 19편에서 한 기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삶에는 자신조차 모르는 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다윗은 고의로 짓는 죄로부터도 자신을 지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알고 계획하고 미리 생각해서 짓는 죄가 있는가 하면, 타락한 본성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저지르는 죄도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 자신이 지은 죄에 둔감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태복음 7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우리는 자기 죄보다 다른 사람의 죄를 훨씬 더 잘 볼 때가 많죠. 죄는 아주 기만적이기도 합니다. 때로 우리는 죄가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마음속에 있는 죄악된 태도까지 다룰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인간 전체를 놓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양심이 작동합니다. 그 양심은 우리 마음이 알고 있는 가장 높은 법에 따라 작동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법이 그 마음에 기록되어 있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기 때문에, 그들 안에 있는 양심도 죄책감으로 그들을 괴롭힙니다. 그러니 그들도 죄책감을 어떻게든 처리해야 할 겁니다. 어떻게 합니까? 대개는 죄를 덮어 감추거나,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정당화하거나, 아니면 아예 무시해 버립니다. 삶이 너무 분주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죄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죠. 과거 어느 때에는 알고 있었다 해도 이미 오래전에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살면서 계속 죄를 짓는데도 정작 자신은 깨닫지 못할 수 있습니다. 죄가 너무나 일상적인 삶의 방식이 되어 버려서 이제는 죄라고 부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결국 그것 때문에 정죄받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것 때문에 지옥에 갑니다. 구주께 나아가려면 반드시 인정해야 하는 바로 그 죄를 감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미 이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 죄의 문제가 우리 모두의 삶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이제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답하면서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죄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아봅시다. 성경에 따르면, 요한일서 3장 4절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 죄입니다. 다시 말해서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 죄입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도덕적 기준에 조금이라도 미치지 못하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법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까? 첫째 되는 계명이 뭡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거 아닙니까? 둘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의 가장 분명한 잣대는 이 두 계명을 지키는가의 여부입니다. 결국 모든 죄의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범죄입니다. 요한복음 16장에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주님은 성령을 보내실 것이고 성령께서 세상에 대하여 죄를 깨닫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죄의 핵심이 뭘까요?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다시 말해서 죄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6장 2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죄, 모든 죄의 핵심, 모든 죄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죄의 핵심이자 모든 죄악을 요약한 것입니다. 다시 로마서 8장 7절을 보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고, 그래서 계속해서 죄를 짓고 또 짓고 또 짓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죄의 맨 앞에 서서 이끌고 가는 가장 근본적인 죄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기에 자기 사랑이 따라붙고, 이 자기 사랑은 교만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미워하기 때문에, 그 법의 요구사항을 알아도 순종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 불순종합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로마서 7장 5절부터 8절이죠.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나는 죄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말씀을 읽었다. 그러고 나서야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다음에 바로 그 죄를 짓고 있는 나를 보았다. 하나님의 법이 죄를 이기도록 도와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안에 있는 죄를 자극했다. 죄의 정체를 알면 알수록 내 마음은 오히려 그런 죄를 더 많이 짓고 싶어한다.”
죄인은 이토록 죄를 짓고 싶어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더 많이 알수록 오히려 죄를 더 많이 짓습니다. 율법은 그런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죄를 자극할 뿐이죠. 로마서 1장 32절이 이 모든 것을 이렇게 요약해 줍니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알고 있고, 그렇게 살면 죽는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하던대로 행합니다. 심지어 자기와 똑같이 행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잘한다고 인정해 줍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 문화 전체가 죄에 대한 열망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제 그런 욕망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도 괜찮다고 여기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떤 문화는 사회적으로 그런 욕망을 억제하는 장치가 있기도 하죠. 그러나 우리 문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문화 전체가 죄를 향한 이 뜨거운 사랑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는데도 아무도 막으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바로 대중매체입니다. 대중매체는 인간의 저속한 죄악을 대변하는 통로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MTV만큼 추악하게 보여 주는 곳은 없습니다. ‘뮤직 텔레비전(Music TV)’, MTV는 성, 마약, 폭력에 관련된 영상을 끊임없이 내보냅니다. 쉬지 않고 내보냅니다. 의도적으로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자극합니다. 다른 목적은 없습니다. 유익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을 도덕적으로 만들려는 것도 아니고, 선하게 만들려는 것도 아니고, 깊이 생각하게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교육하려는 것도 아니고요, 필요한 정보를 알려 주려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사람 안에 있는 욕망을 마음껏 분출하게 하려는 것뿐입니다. 그것뿐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MTV에서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프로그램은 두 인물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 시리즈입니다. 이 두 인물이 그저 뮤직비디오만 보면서, 선과 도덕에 관한 모든 기준을 조롱하고 거부합니다. 비비스(Beavis)와 그의 친구, 이름 자체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말하기 민망하지만 여러분도 알고 있는 그 인물은 텔레비전에서 도덕적 허무주의가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프로그램에 나오는 말과 영상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도록 의도적으로 저속하게 만든 겁니다. 도덕을 거스르고 기독교를 대적하는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예배 시간에 제가 입에 올려 설명하는 것조차 적절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MTV가 최근에 죄의 신학을 다룬 특집 프로그램을 방송했습니다. 대중매체 가운데서도 가장 밑바닥, 말하자면 하수구 같은 MTV가 말이에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MTV에서 본 게 아닙니다. 제 텔레비전에는 MTV가 나오지도 않습니다. 공영방송인 PBS(Public Broadcasting Service)에서 그 프로그램을 다시 방송했는데 제가 그때 봤습니다. 솔직히 저는 MTV가 죄라는 개념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놀라웠습니다. 더구나 그것을 주제로 특집 프로그램까지 만들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내용을 다루는지 참 궁금했습니다.
녹화된 비디오테이프를 보았는데 대체로 제가 예상했던 그대롭니다. 철저하게 인본주의적인 관점에서 죄를 합리화하면서, 죄를 악하다고 보지 않고 죄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해 버렸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하지 않는 편이 좋은 행동들이 있기는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행동은 현명하지 못할 수도 있고, 어떤 행동은 불친절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행동도 그 자체로 본질적인 악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거스르는 행동이라는 개념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관점에서는 애초에 하나님이라는 존재 자체가 없기 때문이죠.
그 특집 프로그램은 7대 대죄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는데요. 가톨릭 배경이 있으신 분이라면 아마 ‘7대 대죄(Seven Deadly Sins)’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겁니다. 성경에 규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중세 시대에 몇몇 신학자들이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치명적인 일곱 가지 죄를 규정했습니다. 아마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교만, 탐욕, 정욕, 분노, 시기, 탐식, 나태입니다. 성경에 명확히 규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아마 중세의 몇몇 신학자가 정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모든 죄를 하나하나 열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죄의 뿌리가 되는 마음의 태도를 나태내려는 목적으로 이렇게 규정했습니다. ‘7대 대죄’라고 불리는 이 일곱 가지 죄를 보면 행동이 아니라 마음의 태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만, 탐욕, 정욕, 분노, 시기, 탐식, 나태입니다. 물론 이런 마음의 태도는 결국 특정한 말과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당시의 신학자들은 인간의 죄악된 행동 밑바닥에 바로 이런 것들이 깔려 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데 MTV에서는 이 7대 대죄를 치명적인 것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만화 캐릭터들의 짤막한 대사와 유명 영화의 장면들, 유명인과 펑크 록 가수와 래퍼들의 인터뷰, 쇼핑몰에서 만난 사람들의 인터뷰를 모아서 편집해서 이 죄들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갔습니다. 거기서 나온 대답은 이렇습니다. 랩 가수 퀸 라티파(Queen Latifah)는 이렇게 말합니다. “교만이 죄라고요? 저는 그런 줄 몰랐어요.” 또 배우 커스티 앨리(Kirstie Alley)도 똑같이 생각합니다. “저는 교만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바보가 그런 말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합니다.” 록 그룹 에어로스미스(Aerosmith)의 한 멤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욕은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죠. 그것 때문에 밴드에 들어갔습니다. 맨 앞줄에 있는 어린 여자애들을 보려고요.” 래퍼 아이스-T(Ice-T)는 분노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분노요? 필수적이죠. 분노로 긴장을 풀어야 합니다. 삶 자체가 긴장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우리는 음반을 만들면서 분노를 풀어냅니다. ‘경찰 죽이기(Cop Killer)’라는 곡을 만들었을 때 우리는 화가 나 있었고요, 경찰들도 우리에게 화를 냈죠.” 그리고 <월 스트리트(Wall Street)>라는 영화에 나오는 마이클 더글러스(Michael Douglas)가 연기한 인물은 “탐욕은 좋은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말들로 죄의 의미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습니다. 이런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어김없이 대중 심리학을 끌어들였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자존감을 지켜줘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웁니다. 심리학은 “사람들에게 죄인이라는 딱지를 붙여서는 안 된다. 그러면 자존감이 망가진다”라고 합니다. 또 아이스-T(Ice-T)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만(pride), 그러니까 일종의 자부심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도심 빈민 지역의 문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아이들에게 자부심이 없다는 것이죠. 저도 자부심을 갖기 위해 갱단에 들어갔습니다.” 얼마나 생각이 뒤틀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존 레오(John Leo)는
탐식에 관한 이야기도 금세 중독에 관한 잡담으로 흘러가 버리는데, MTV 세대가 자라면서 접해 온 대중적인 심리치료에서는 모든 습관과 집착을 중독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탐식에 대해 이야기해 보라고 했더니 한 청년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내 여자친구에게 중독되어 있습니다.” 12단계 자조 프로그램이 21세기를 향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저 이 모든 혼란과 무질서를 그대로 드러내는 말일 뿐입니다.
그런데 참고로, 이 논평 글에서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있다고 소개한 ‘동성애자 폭행범(gay basher)’은 실제로 동성애자를 죽인 젊은 남자입니다. 자신이 느끼는 깊은 죄책감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자신이 과연 용서받을 수 있을지 고민이 되어서 교도소에 있는 군목이나 교목 같은 종교 담당자를 찾아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종교 담당자가 그에게 용서받는 것이 가능하지만 자신이 용서받았는지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언젠가 용서받았다는 느낌이 실제로 들 때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자신이 용서받았다고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면서 하루하루 살아간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MTV에 따르면 죄는 절대적인 도덕 기준에 따라 결정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자의 생각에 달려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에게는 죄인 것이 타인에게는 죄가 아닐 수도 있답니다. 그리고 서로 모든 것을 용납해야 한다고 호소하면서 끝을 냅니다. 잘 들으십시오. MTV에 따르면 죄가 정말 위험한 이유는 여러분의 자아에 상처를 주기 때문이랍니다. 자아에 상처를 주면 죄랍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스르는 절대적인 죄의 기준이 있다고 믿으면서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망치는 태도가 가장 악한 죄라고 합니다. 죄의 절대 기준이 있다는 생각 자체가 가장 큰 죄랍니다.
우리 문화가 이렇게나 뒤틀려 버렸습니다. 이 프로그램이 죄를 변호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악한 욕망에 내버려 두신 문화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죄를 사랑하고, 죄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스스로를 정죄에 빠뜨리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병이 무엇인지 제대로 진단하지 못하면 결국 올바른 치료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죠. 죄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면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생각에 속은 사람들은 결국 정죄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도 있습니다. 이제 그 문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제가 염려하는 건 바로 이겁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에까지 침투했다는 겁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인간의 행동을 새롭게 규정해 버린 이 문화의 영향을 받아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는 간음이며 음행이며 동성애, 거짓말, 속임수를 비롯한 온갖 죄를 용납하지 않았던 교회들이 이제는 너무나 쉽게 용납합니다. 과거에는 죄를 지적하고 바로잡으려 했던 교회들이 이제는 더 이상 죄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자존감을 높이고 자아를 세워주어야 한다는 심리학적 사고방식에 빠져 버렸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여러 흐름에서 이런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교회가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흐름은 분명히 그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흐름에 반대하는 말을 하면 오히려 배척받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도덕법을 자기 방식대로 다시 규정하도록 내버려 두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성품까지 다시 규정하면서 하나님을 실제보다 죄에 훨씬 더 관대한 분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접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런 시대에 교회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기준을 끊임없이 접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교회가 MTV식 사고방식에 굴복해서 세상과 똑같은 것을 사람들에게 주고 있습니다.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일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들이 거대한 물결처럼 일어나서 진리를 희석시키는 그런 교회들을 완전히 뒤엎어 버릴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타협에 대해 분노가 치밀어서 영적인 혁명이 일어나야 합니다. MTV가 문화를 규정하고 있는 이런 시대에 교회가 오히려 그 문화에 맞추려고 한다는 것이 저는 정말 놀랍습니다.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접하는 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매주 끊임없이 세상의 온갖 것들로부터 공격을 받는 가운데서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도덕적 기준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하나님의 기준과 참된 거룩함과 참된 순결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 절실하게 필요한데도, 교회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겠다는 이유로 말씀을 내던져 버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제 두 번째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어디까지 살펴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어떤 죄가 가장 심각할까요? 우리는 죄의 정체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조금이라도 어기는 것은 죄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계속 하나님의 법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면 죄에도 결코 민감하게 반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에 민감하게 반응하려면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의 문화는 새로운 도덕관과 죄악을 재정의해 설명하는 심리학적인 사고방식과, 자존감을 높이고 자아를 세워야 한다는 허튼소리로 사람들을 휩쓸어 버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까지도 그 속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접할 때에만 죄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말씀을 접해야 합니다. 지금은 흥미를 끌기 위한 짧은 설교가 아니라, 시간과 의지를 요구하는 긴 설교가 정말 필요한 때입니다. 이런 시대에 순결한 삶을 지켜나가는 것은 정말로, 정말로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봅시다. 가장 심각한 죄는 무엇일까요? 어떤 죄가 가장 심각할까요? 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중세 신학자들이 이 점을 제대로 보았습니다. 바로 마음으로, 생각으로 짓는 죄입니다. 마음으로 짓는 죄. 예수님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합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이 밖으로 나와서 사람을 더럽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 속 생각을 깨끗하게 지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으로 찾아가서 확신있게 선포되는 말씀을 끊임없이 듣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사실 중세 신학에서 말한 ‘7대 대죄’는 행동으로 범하는 죄가 아니었습니다. 모두 생각과 마음으로 범하는 죄입니다. 그리고 생각으로 범하는 죄만큼 양심을 파괴하는 죄는 없습니다. 생각으로 짓는 죄는 다른 어떤 죄보다도 양심을 거세게 공격합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생각으로 짓는 죄를 막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양심뿐이기 때문입니다.
말로 짓는 죄는, 그리스도인 친구가 곁에서 막아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른 그리스도인과 함께 있을 때는 자기가 하는 말을 조심합니다. 그렇죠? 그리스도인 친구나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가 곁에 있으면 행동으로 짓는 죄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평생 동안 생각으로 짓는 죄를 막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뭡니까? 양심 하나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마음에 채워 넣어야 합니다. 그래야 양심이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양심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죄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바울이 누렸던 것을 여러분도 누릴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했죠.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여러분은 생각으로 짓는 죄를 반드시 제대로 다루어야 합니다. 그 죄는 여러분 자신과 하나님만 아시죠. 고린도전서 2장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걸 알 수 있는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자기 속에 있는 자기 자신만 압니다.
악한 행동은 하지 않으면서도 생각으로는 거리낌 없이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게 하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악한 행동을 실제로 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마음속으로는 악한 생각에 깊이 빠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남자가 음행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으면서도, 마음속으로 음란한 상상에 빠지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은밀하게 짓는 죄는 다른 사람이 알아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이렇습니다. 그가 의도적으로 마음에 품고 즐기는 죄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감히 행동으로 옮길 생각조차 하지 못할 죄보다 천 배나 더 악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실제 행동으로 옮긴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이 그토록 강하게, 끊임없이 그를 몰아붙이는 것이죠. 생각으로 죄를 즐기고 그런 것들을 마음속에 계속 품는 것은 자신의 양심을 직접 괴롭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끊임없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생각이 깨끗하지 않은 사람은 깨끗한 양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악한 생각 자체에 이미 죄책감이 따라붙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더러워지는 순간 양심도 곧바로 더러워지고, 양심은 소리를 지르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디도서 1장 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마음이 더러워지면 양심도 더러워집니다. 악한 생각을 계속 품고 즐기는 습관만큼 양심을 심하게 손상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일단 그런 습관이 시작되고 나면 되풀이하는 것은 너무나 쉽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으로 짓는 죄는 죄를 지을 기회조차 필요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셨습니까? 상대방이 현장에 없어도 되고요, 물건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특정한 장소에 가야만 하는 것도 아니죠. 생각으로 짓는 죄는 언제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으로 짓는 죄를 마음속에서 키우기 시작하면, 여러분은 정말 무서운 상황에 자신을 몰아넣게 됩니다. 거기서 도망칠 수가 없게 됩니다. 어떤 죄는 피해서 달아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으로 짓는 죄는 피해서 달아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각으로 짓는 죄는 어떤 죄보다도 파괴적입니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은 마음속에서 짓는 죄가 더 심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가운데 생각과 감정과 욕망과 기억과 상상력을 끌어들여서 죄를 반복해서 짓게 만들기 때문이죠. 생각으로 짓는 죄의 실체입니다. 이런 죄는 여러분의 영혼을 죄악된 습관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일정한 흐름이 있습니다.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인격을 낳고, 인격은 운명을 낳습니다.
생각의 죄는 비극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듣고 죄에 늘 민감하게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문제를 다시 말씀드리는 이유는 그만큼 염려가 깊기 때문입니다. 계속 교회에 다니면서도 죄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순간적으로는 편안하게 느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양심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안에 있는 것들이 밖으로 드러나고 맙니다. 목회자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만, 갑자기 간음에 빠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누구도 갑자기 간음에 빠지지 않습니다. 간음하는 자의 마음은 이미 오랜 시간 죄악된 생각과 정욕에 물들면서 형성됩니다. 도둑도 도둑질을 저지르기 오래 전부터 마음이 탐심으로 이미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모든 죄는 먼저 마음에서 잉태됩니다. 야고보서 1장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내면에서 시작됩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의식법은 철저히 지키면서도 도덕적인 부분은 소홀히 했기 때문에 거듭해서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의롭게 보이는 데 온통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마치 무덤 같았습니다. 겉은 희게 칠해져 있었지만 속에서는 죽은 사람의 뼈가 썩어서 악취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그런데 여러분은 바리새인들이 결국 악한 생각 자체는 실제로 죄가 아니고 악한 행동만 죄라고 믿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살인만 죄가 아니라 분노도 죄입니다. 간음만 죄가 아니라 음욕도 죄입니다. 이 사회에 이 사실을 말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각 속에는 무엇이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까? 우리의 생각과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 무슨 일입니까? 제가 말씀드리죠.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참된 예배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를 참된 예배자로 삼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그렇다면 생각으로 죄를 짓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가장 높고 가장 아름다운 예배를 드려야 할 바로 그 성소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으로 짓는 죄를 마음속에서 키우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더럽힐 뿐만 아니라, 우리가 구원받은 목적인 예배를 밀어내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생각으로 짓는 죄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동으로 지은 죄나 말로 지은 죄를 고백하고 버리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 그러나 생각으로 짓는 죄는 다른 어떤 죄보다도 고백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죄는 우리의 영혼을 검게 물들이고, 우리의 인격을 망가뜨립니다. 그런 죄는 양심을 직접 공격하고, 양심은 그 공격에 맞서 온 힘을 다해 싸웁니다. 그래서 구약성경 잠언 4장 23절은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양심을 넘어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 사도행전 15장 8절은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요한일서 3장 20절은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기록했죠.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음욕과 탐심과 분노와 적대감과 이기심과 교만으로 가득하여 온갖 생각의 죄를 계속 키우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드리는지를 아십니다. 시편 44편 21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예수님도 누가복음 16장 15절에서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살피면 여러분의 인격의 실체를 알 수 있습니다. 잠언 23장 7절입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잠언 6장 12절을 보면 불량하고 악한 자에 대해서 “그의 마음에 패역을 품으며 항상 악을 꾀하여 다툼을 일으키는 자라”,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실체를 알고 싶으세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십시오. 자신의 마음속을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잠언 27장 19절입니다.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만으로는 인격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 진실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생각을 아는 분은 하나님과 자신의 양심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깨끗한 양심의 증거를 누리기 위해서는 정결한 삶을 가꾸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말씀을 배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말씀을 더 많이 접할수록, 그리고 그 진리로 마음을 더 많이 채울수록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예배도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깨끗해지면 양심도 깨끗해집니다. 저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 생각 속에 더럽고 추악하고 음란하고 악한 것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것들을 계속 집어넣으면서도, 사람들 앞에 서서 사역할 수 있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어떻게 양심의 거센 공격을 받지 않을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욥을 위로하러 왔던 사람들을 기억하시죠? 욥에게 와서 거짓으로 고발합니다. 그런데 욥의 삶에는 고발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욥을 기억해 보세요. 욥은 그 누구보다 의로웠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죄로 욥을 고발할 수 있었겠습니까? 욥이 마음속으로 더러운 생각을 품고 있다고 비난을 한 것입니다. 소발은 욥에게 와서 욥기 20장 12절부터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비록 악을 달게 여겨 혀 밑에 감추며 아껴서 버리지 아니하고 입천장에 물고 있을지라도.”
이런 말입니다. 소발의 주장은 욥이 속으로는 정말 악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겉으로는 보이지도 않고 말로 드러나지도 않지만, 속은 온통 더럽다는 겁니다. 그런데 소발이 묘사한 악한 생각을 품는 사람의 모습 자체는 아주 생생하게 정확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악한 생각은 마치 사탕처럼 달콤합니다. 악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상상으로 죄를 지으면서 만족을 얻습니다. 악한 상상을 음미하고 즐깁니다. 마치 입 안의 맛있는 사탕을 즐기듯이 그것을 즐기죠. 머리 속에서 악한 생각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되새깁니다. 쾌락을 얻을 수 있는 악한 생각으로 계속해서 돌아갑니다. 마치 짐승이 되새김질하듯이 그 생각을 곱씹고 또 곱씹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악한 생각을 계속해서 다시 끄집어내서 마음속에서 새롭게 즐깁니다. 소발은 욥이 이렇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욥을 완전히 잘못 판단했습니다. 욥은 그런 죄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철저하게 지킨 사람입니다. 욥기 31장 1절에서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나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악한 생각을 키우게 만들 만한 것은 보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생각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죠. “그가 내 길을 살피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만일 내가 허위와 함께 동행하고 내 발이 속임수에 빨랐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보시고 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바라노라.” 욥은 자신의 마음이 눈을 따라간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짓은 음욕에서 비롯된 죄이고 벌을 받아 마땅한 죄악이라고 말합니다. 또 죄악을 가슴에 숨겨 두는 것은 아담처럼 자신의 죄를 감추는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욥은 그런 생각을 품는다는 것 자체가 끔직한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욥의 마음은 의로웠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욥은 죄악된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피하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욥이 또 무엇을 했는지 아십니까? 자기 자녀들이 혹시 마음으로 죄를 지었을까 염려해서 하나님께 제사까지 드렸습니다. 잔치하는 날들이 한 차례 지나고 나면 욥은 자녀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했고, 아침 일찍 일어나 자녀들의 수대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욥의 이런 생각 때문이죠.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욥은 항상 이렇게 했습니다. 자신의 생각 속에서 일어나는 일만 염려한 게 아니라 자기 가족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욥을 가리켜 이 땅에 욥과 같은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양심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려면 반드시 생각으로 짓는 죄의 문제를 다루어야 합니다. 우리의 양심을 자유롭게 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평안과 기쁨과 행복과 더없는 즐거움을 누리려면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소리치는 양심을 잠잠하게 하고 싶다면,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생각 속에서 일어나는 일의 문제를 다루어야 합니다.
자, 이제 한 2분 안에 빨리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생각이 죄를 범하는 세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이것만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첫째는 기억으로 죄를 짓습니다. 과거에 지었던 죄의 기억을 아주 소중히 간직하고, 지나간 죄의 생생한 기억을 다시 불러내는 것은 그 죄를 다시 짓는 겁니다. 얼마 전에 저는 과거에 동성애 생활을 하다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된 한 남자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어울리는 친구들도 달라졌고요. 조금이라도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에서 가능한 멀리 떨어졌습니다. 과거에 사귀었던 사람들 때문에 유혹을 받지도 않고, 주변 동성애자들 때문에 유혹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그를 유혹했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 혹시 무엇인지 아시겠어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뭘까요? 기억입니다. 그의 기억은 온갖 부도덕한 과거의 관계들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떠오르게 했습니다. 그 기억들이 너무나 생생하고 뇌리에 깊이 박혀 있어서 때로는 결코 이겨내지 못할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과거의 온갖 더러운 관계가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유혹에 ‘아니요’라고 할 수도 있고 반대로 ‘예’,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더러운 기억들을 다시 하나하나 되짚어 갈 수도 있습니다. 죄는 우리가 떨쳐 버릴 수 없을 만큼 생생한 감각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깊은 흔적을 남기는 특성이 있습니다.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직 감수성이 예민한 십 대 청소년들이 영화관에 가서 거대한 스크린에 5미터가 넘는 크기로 등장하는 사람들이 생생하게 성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지켜보고, 그렇게 본 장면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그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저는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그 장면들은 마음에서 빠져나가지 않습니다. 마음대로 지워 버릴 수도 없습니다. 사탄은 그런 장면들을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계속해서 다시 떠오르게 할 것이고, 여러분의 육신도 그렇게 할 겁니다.
성적인 죄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화가 나서 미워하던 사람에게 앙갚음을 했던 기억을 반복해서 떠올리면서 그 순간을 즐깁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고도 들키지 않았던 일을 되새기고요, 어떤 사람들은 소득세를 속여 냈던 일을 떠올리면서 즐거워합니다. 온갖 종류의 유혹이 기억에서 되살아납니다. 사탄은 여러분을 과거의 쓰레기 같은 기억 속으로 다시 끌고 들어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어떤 자극적이고 불결한 장면이 마음속에 한 번 새겨지고 나면 그것을 없애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 기억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으로 죄를 짓는 첫 번째 방식은 과거의 죄를 기억해내 다시 되새기는 것입니다.
둘째는 계획으로 죄를 짓습니다. 야고보서에서 살펴본 것처럼, 마음에서 욕망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그 욕망을 상상 속에서 계속 키워서 공상으로 발전시킵니다. 어떻게 죄를 지을지 궁리하고, 일을 꾸미고, 계획합니다. 뻔뻔하게도 계획의 죄를 짓습니다.
그러다가 셋째 종류의 죄, 곧 상상의 죄로 이어집니다. 죄를 계획하다 보면 실제로 죄를 행동으로 옮길 수도 있지만,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고 순전히 상상으로만 죄를 짓기도 합니다. 마음으로 간음하고, 마음으로 살인하고, 마음으로 탐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이나 현재 처한 형편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사는 모습을 상상하고, 갖고 싶은 사치품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면서 즐기고, 상상 속에서 마음껏 먹어 대면서 탐식에 빠집니다. 문자 그대로 수많은 사람이 이런 죄악으로 가득한 상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여러분, 혹시 ‘긍정 고백 신학’이라고 들어보셨어요? 저는 소위 ‘긍정 고백 신학’은 상상의 죄를 짓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경건하지도 않고, 덕스럽지도 않고, 믿음도 아닙니다. “나는 새 롤스로이스를 갖고 싶어. 새 캐딜락을 갖고 싶어. 새 집을 갖고 싶어. 더 좋은 직장을 원해. 더 많이 벌고 싶어. 그리고 나는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실 것을 믿어”라고 말하는 것은 의로운 믿음의 행위가 아닙니다. 죄악입니다. 상상으로 짓는 죄입니다. 욕심입니다. 탐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마음으로 기억의 죄, 계획의 죄, 그리고 상상의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어떻게 해달라구요?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이제 기도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이 머리를 숙이고 있는 동안 저의 말을 잘 들으십시오. 그러고 나서 기도로 마치겠습니다. 그렇다면 생각으로 짓는 죄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첫째, 그 죄를 고백하십시오. 무슨 죄를 지었는지 분명히 밝히고 버리십시오. 부도덕한 생각이든, 분노이든, 복수심이든, 쓰라린 감정이든, 탐심이든, 교만이든 고백하고 버리십시오. 둘째, 그런 생각을 마음에 품고 즐기라는 유혹을 단호하게 거부하십시오. 주님 앞에서 약속하십시오. 존귀하고, 옳고, 순결하고, 사랑받을 만하고, 선한 것들을 생각하기로 마음을 정하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먹으며 살아가십시오. 그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면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악한 것에 마음이 끌릴 만한 상황을 피하십시오. 죄악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에 자신을 노출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기르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구주를 높이고, 깨끗한 양심이 주는 복과 승리의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되기를 기도하고 소망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바울과 함께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기도합니다. 아버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서 이 일을 이루어 주옵소서. 우리 모두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의 양심이 우리를 인정해 주는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하옵소서. 용서받을 길을 열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용서는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주님께서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여 주옵소서.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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