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가 되면 사람들은 여러 가지 말을 합니다. 그중에서도 흔한 표현이 바로 ‘크리스마스 정신’이죠. 크리스마스 정신을 가져야 한답니다. 그래서 저는 조금 분석적으로 생각을 해봤습니다. 도대체 크리스마스 정신이 뭔가? 아마도 여러 가지로 답할 수 있을 겁니다. 스크루지 영감에게는 유령일 것이고, 주류 업계 종사자들에게는 술병에 담긴 술일 겁니다. 미국인들은 이 한 달 동안에 약 7천5백만 달러, 한화로 하면 약 600억에 이르는 소비를 합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크리스마스 정신은 가정 내 휴전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도 문제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갈등 상황을 만들어내지 않는 상태, 그런 상태 말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크리스마스 정신을 인사말을 담은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미국인의 95퍼센트가 이런 마음을 담아서 약 50억 장이 넘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고받습니다. 또 어떤 어린 소년은 크리스마스 정신이란 만족하는 마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만족감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또 친구들과의 교제 속에서 느끼는 기쁨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천만 마리에서 천오백만 마리에 이르는 칠면조를 소비하면서 즐기는 분위기 좋은 파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크리스마스 정신은 그렇게 가볍거나, 사소하거나, 즐겁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슬퍼지고 우울해집니다. 자신이 겪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이 시기의 떠들썩한 분위기와 비교되면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고, 그래서 더 깊어지기 때문이죠. 한 시인은 자신의 아픔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가난한 어머니들에게는 쓰라린 날이다. 아이들의 애타는 눈빛은 견디기 힘든 비수와도 같다. 가게에는 장난감이 가득하지만, 어머니의 지갑이 비어 있다면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내 지갑에는 돈이 가득하지만, 나는 장난감을 살 수 없다. 내 어린 아들의 무덤에 놓을 겨우살이 화환만 살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는 바로 이런 시간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오래 전에 G. K. 체스터턴(G. K. Chesterto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고 감사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는 감사하지 않는 것인가?” 한편 대부분의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정신이란 선물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쇼핑몰을 한번 보십시오. 그러면 알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상점 안에서 부딪히고 돌아다니면서 수백억에 달하는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몇 백원짜리 사탕에서부터 수백만 달러에 이르는 보석에 이르기까지 말이죠.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트리 양말을 채우고 선물을 포장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크리스마스 정신은 베푸는 것이야.’ 맞는 말이긴 합니다. 저는 스크루지처럼 냉소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즐거움을 망치고 싶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 보고 싶습니다. 진정한 크리스마스 정신은 무엇일까요? 즐거움일까요? 교제일까요? 나눔일까요? 도대체 무엇일까요?
언제나 그렇듯이,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좋은 답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을 누가복음 1장과 2장으로 안내하고 싶습니다. 진정한 크리스마스 정신을 이곳에서 알아보겠습니다. 사람들과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탄생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살펴보면 그 의미가 분명해질 겁니다. 먼저 엘리사벳을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장 41절입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엘리사벳의 반응입니다. 바로 여기에 크리스마스 정신의 본질이 담겨 있습니다.
그 전에 누가복음 1장 67절로 가서 또 하나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엘리사벳의 남편,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나옵니다.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사가랴의 이 반응은 사가랴의 마음과 태도를 잘 보여줍니다.
이제 누가복음 2장 13절로 가보겠습니다. 천사들의 영역으로 갑니다. 13절입니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천사들의 반응입니다. 이어서 20절을 보면 목자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그리고 25절로 내려가면, 그리스도의 탄생 시기에 등장하는 또 한 사람, 시므온이 등장합니다. “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이곳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대부분이 성령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사벳, 사가랴, 천사,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던 아이, 마리아, 이제 시므온까지 모두 그렇습니다.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할례를 행하려고 한 것입니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그리고 36절로 내려가면 또 한 사람의 반응이 나옵니다.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입니다.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엘리사벳, 사가랴, 천사들, 목자들, 시므온, 안나, 이 모든 사람들의 반응은 결국 하나로 귀결됩니다. 바로 크리스마스 정신이죠. 뭡니까? 예배입니다. 예배입니다. 첫 번째 크리스마스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에게서 나타난 크리스마스의 정신은 찬양이었고, 감사였고,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배입니다.
마태복음 2장 2절을 보면, 동방 박사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심지어 악한 헤롯까지도 이 사건의 의미를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하고, 그 아이가 어디에서 났는지를 묻습니다.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려 하노라”라고 말이죠. 모든 사람이 경배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마스 정신입니다. 비록 헤롯은 거짓말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경배이죠. 크리스마스의 가장 본질적인 태도, 크리스마스 정신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신자들이 구주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며 드리는 예배의 시간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예배하는 때입니다. 예배입니다. 예배를 간단히 정의해 보겠습니다. 예배는 태도입니다. 예배는 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놀라움과 감사로 마음이 가득 차서, 더 이상 자신의 필요나 복을 생각하지 않게 되는 상태가 됩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며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하는 일 중에서 가장 이타적인 일입니다. 찬송가 작가의 표현대로 말하면, 경이로움에 차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찬양을 드리는 가운데 나 자신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감사와 놀라움으로 마음이 가득 차서, 결국 자기 자신을 잊고 경배와 찬양에 몰입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우리의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주신 사건에 시선이 집중되는 크리스마스야말로 마땅히 예배해야 할 때입니다. 이제 예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 한 사람을 주목하려고 합니다. 사가랴도 아니고, 엘리사벳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고, 목자도 아니고, 동방 박사도 아니고, 시므온도 아니고, 안나도 아닙니다. 우리가 드려야 할 예배의 모범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친밀함으로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었던 사람. 이 탄생 사건으로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한 사람, 바로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예배의 참 모범입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마리아는 가장 위대한 예배의 시를 남겼습니다. 사실 신약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장엄한 찬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주제로 하나님께 드린 마리아의 찬양입니다. 누가복음 1장 46절, 함께 보겠습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보십시오. 마리아 역시 다른 모든 사람들과 동일한 반응을 보입니다. 예배입니다. 찬양입니다. 경배입니다. 감사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성육신을 노래한 찬송입니다. 시입니다. 노래입니다. 예배의 찬양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35절에서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마리아는 이 아이가 위대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이미 들었습니다. 32절을 보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라고 했죠. 또 주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것이고, 그가 영원히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엘리사벳조차 마리아를 “내 주의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오직 한 가지, 가장 합당한 반응으로 나아갑니다. 뭡니까? 예배입니다. 로마 가톨릭의 기도, 그러니까 특별히 묵주 기도를 보면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죠. 그러나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것은 예수님이 신적 본성을 마리아에게서 받아 가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결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단 한 가지, 예수님이 마리아로부터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는 면에서만 그렇습니다. 마리아는 성육신하신 하나님, 그러니까 하나님이신 인간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왜곡해서, 마리아가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어떤 기여를 한 것처럼 이해를 하고, 결국 마리아를 숭배하는 방향으로 나갑니다. 역사적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를 나누는 중요한 차이가 된 거죠.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면, 오늘날 전 세계의 로마 가톨릭은 상당 부분 마리아를 숭배합니다. 마리아를 예배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예수님은 부수적인 존재처럼 밀려나 버리고, 마리아가 중심 인물로 자리잡아 버렸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마리아에 대해 정한 다음과 같은 공식 교리들을 통해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두 다섯 가지인데요, 이 교리들은 변경될 수 없도록 확정된 교리입니다. 마리아와 관련된 다섯 가지 교리입니다. 첫번째, ‘성모무염시태’입니다.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죄 없이 잉태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리아 자신이 어머니에게서 잉태될 때에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원죄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다고 말하는 겁니다.
무염시태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련된 교리가 아니라 마리아의 탄생과 관련된 교리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정한 두 번째 교리는 마리아의 무죄성입니다. 마리아가 평생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합니다. 세 번째 교리는 마리아의 영구 처녀성입니다. 마리아가 평생 남자와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는 겁니다. 자신들의 체계 안에서 마리아의 독보적인 순결과 훼손되지 않은 특성을 유지하려는 거죠. 네 번째, 로마 가톨릭 교회는 ‘마리아의 승천’, 그러니까 마리아가 육체적으로 승천했다고 합니다. 다섯 번째, 로마 가톨릭 교회는 마리아가 하늘로 올라간 뒤에 ‘하늘의 여왕’으로서 관을 받았다고 가르칩니다. ‘주권의 자리, 권위의 자리’를 말합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가톨릭 체계 안에서는 때때로 예수님 자신조차 그 주권적인 어머니께 호소하는 위치에 놓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이런 교리를 만들어낸 겁니다.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교리, 평생 죄가 없었다는 교리, 영구 처녀였다는 교리, 육체로 하늘에 올라갔다는 교리, 하늘의 여왕으로 왕관을 받았다는 교리입니다. 이런 식으로 꾸며 낸 신학의 결과가 바로 전 세계 로마 가톨릭의 중심에 놓여 있는 마리아 숭배입니다. 실제로 전 세계 어디를 가든지 마리아 우상, 또 마리아 신당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교회와 모든 성당 안에, 가정마다, 방마다, 식당마다, 호텔마다, 사업장마다, 길가, 큰길, 오솔길, 어디든지 마리아가 숭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여러분은 이 사실을 잘 모르실 수도 있는데, 로마 가톨릭은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와서 주를 낳게 될 것,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을 낳게 될 것, 그러니까 구주를 낳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는 말에 대해서, 천사가 그렇게 해 줄 수 있냐고 마리아에게 요청한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마리아의 권위 아래에서 요청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천사가 그 일이 이루어져도 되는지 마리아의 허락을 구하고 있었고, 마리아가 38절에서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했을 때 허락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허락합니다” 이렇게 말했다고 이해하는 겁니다. 결국 구속의 모든 계획이 마리아의 권위와 동의 여부에 달려 있었고, 마리아가 천사에게 내린 그 한마디가 구속을 시작하게 했다는 그런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마리아를 왜곡되고 비뚤어진 모습으로 그려내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 찬양의 의미를 심각하게 훼손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배에 대한 이해도 무너뜨립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마리아는 예배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죠. 만약 마리아가 죄가 없는 존재이고, 죽지 않는 존재이고, 하늘에서 주권을 가진 존재이고, 가브리엘에게 구속 계획을 허락할 수 있는 존재라면, 예배하는 자의 모습과는 전혀 다를 겁니다. 그러나 이 찬양 속에서 마리아는 예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마리아가 하나님께 드린 예배의 찬양입니다.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장엄해서 마치 여러 면을 가진 다이아몬드처럼 다양한 방향에서 빛을 발하는 듯합니다. 언젠가는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이 찬양 안에 담겨 있는 예배의 본질과 의미를 보여주는 요소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여기 한 예배자가 있습니다. 한 크리스마스의 예배자가 있습니다. 바로 마리아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우리가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이제 첫 번째를 보겠습니다. 세 가지를 말씀드릴 겁니다. 첫 번째는 예배의 태도입니다. 마리아에게서 예배의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예배의 태도는 1절과 2절, 3절 앞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이 시의 46절과 47절, 그리고 48절 앞부분까지에서 예배의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태도에 대해 네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내면적인 것입니다. 내면적입니다.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주를 크게 높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영혼’과 ‘마음’이라는 표현은 서로 같은 의미입니다. 사람의 내면을 가리킵니다. 두 가지 표현을 함께 사용하는 것은 단순히 문학적 장치가 아닙니다. 그 내면 전체를 포괄하는 표현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존재 전체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예배는 안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겉으로만 행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단순한 표현이나 형식이 아닙니다. 물론 겉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본질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배는 도덕적인 것이고, 생각의 문제이고, 감정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을 모두 포함합니다. 우리의 내면 전체를 아우르는 것입니다.
마리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마음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느끼고 있습니다. 생각이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붙들고 있습니다. 마치 거대한 오케스트라처럼, 내면의 모든 요소가 어우러져 웅장한 절정의 조화를 만들어 냅니다. 마리아라는 존재 전체가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는 내면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표현을 빌리면, 안에서 끓어오르고 넘쳐흐르는 것입니다. 예배는 단순히 예배당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찬송을 부르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을 읽는 것만도 아닙니다. 설교를 듣는 것만도 아닙니다. 헌금을 드리는 것만도 아닙니다. 의식을 수행하는 것, 심지어 성찬에 참여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물론 이런 것들은 예배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열매이지만, 이것 자체가 예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참된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을 향해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경배와 찬양입니다. 영혼과 마음이 완전히 사로잡힌 상태입니다. 철저하게 내면의 일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탄생을 겉으로만 기념하는 모습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오늘날 크리스마스 시즌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피상적인 예배는 받지 않으십니다. 예를 들어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29장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크리스마스에 대입해서 말해보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크리스마스 카드에 하나님에 대한 문구를 적고, 찬송을 부르지만, 정작 하나님을 공경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죠. 마음이 없는 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반드시 영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예배자는 마음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입니다. 마음에서 예배가 넘쳐 흐르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예배는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기 때문에 언제나 계속됩니다. 이제 두번째로 이어집니다. 예배는 강렬합니다. 내면적일 뿐만 아니라 강렬합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이 말씀을 영어로 읽으면 그 의미가 크게 그렇게 와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이 ‘찬양하며’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메갈뤼노(megalunō)’입니다. 우리도 ‘메가(mega)’ 이런 말을 자주 쓰죠. 그러니까 이 ‘메가’는 보통보다 더 크고, 더 강하고, 더 크게 확장된 상태를 말할 때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서 스피커에 ‘메가 베이스’ 이렇게 쓰여 있다면 저음이 강조된 스피커라는 말이죠.
‘메가’라는 표현은 단순히 크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 크기가 보통을 넘어선다, 이런 뜻입니다. 여기서 마리아가 하고 있는 것도 단순한 찬양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메가 찬양’입니다. 크게 높이는 것입니다. 헬라어 ‘메갈뤼노(megalunō)’는 크게 만들다, 확대하다, 이런 뜻이 있습니다. 어떤 지점에서 시작해서 점점 더 커지고 확장되면서 절정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뻐한다’는 단어도 기쁨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단어 중의 하나가 선택된 것인데요, 넘치는 기쁨을 의미합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소리로 터져 나오는 기쁨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억누를 수 없는, 거의 폭발하듯이 터져 나오는 기쁨입니다. 자발적이고 넘치는 기쁨이 예배 가운데서 터져 나오는 것이죠. 그러니까 참된 예배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내면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깨달아 얻은 이해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이 사건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마리아의 생각을 완전히 사로잡았습니다. 그 깨달음이 감정으로 이어졌고, 내면 전체를 움직이기 시작해서 결국 강렬하게 터져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본질입니다. 먼저 지성에 주어지는 계시에서 시작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그 사실이 무엇인지가 먼저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이 폭발하듯이 일어나는 겁니다. 진실하고 강렬한 예배입니다. 결코 얕지 않습니다. 결코 피상적이지 않습니다. 결코 일시적이지 않습니다. 예배는 올바른 태도입니다. 내면적이면서 동시에 강렬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피상적인 예배를 얼마나 싫어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선지자 말라기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말라기 1장에서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라고 하십니다. 가장 형편없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드고아의 목자였던 선지자 아모스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의 배교와 위선을 드러내고 책망하게 하셨습니다. 아모스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하나님은 피상적인 예배를 역겨워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지키라고 명하신 그 절기들조차 사람들의 위선과 이중적인 태도 때문에 하나님께는 악취와 같은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이사야도 같은 말을 합니다. 이사야 1장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하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결국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원하십니다. 마리아는 바로 그런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죄를 가차 없이 정죄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의 모든 초점이 주님께 맞추어져야 합니다. C.S.루이스(C.S. Lewis)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음 깊은 곳에서 기쁨이 터져 나와 스스로도 놀랐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언제 그렇게 기쁨이 넘쳐났습니까? 바로 며칠 전에 저희 집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저희만의 조촐한 크리스마스 파티에 켄(Ken)하고 조니(Joni Eareckson Tada)를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면서 하나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조니가, 평소에도 그런 편이지만, 갑자기 이렇게 말을 하는 겁니다. “우리 지금 찬양해요. 지금 찬양합시다.”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말이라는 것을 제가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삶의 순간들을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죠.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혹시 찬송가 있어요? 찬송가 가져와서 우리 같이 찬양해요.” 그런데 제가 찬송가를 가져오기도 전에 이미 찬양을 시작했습니다. “우리 같이 불러요”라고 하면서 우리 모두를 이끌었습니다. 우리가 모두 다 같이 찬양을 불렀습니다. 얼마나 오래 불렀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한 시간, 아니면 한 한 시간 반쯤 됐을 겁니다. 그제서야 제가 찬송가를 가져왔습니다. 한 곡, 또 한 곡 계속해서 찬양을 불렀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예배입니다. 위대한 영적 진리를 깊이 묵상할 때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반응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내면에서 시작이 되어서, 강렬하게 터져 나옵니다. 사실 조니는 장애 때문에 잠자리에 들려면 한 두 시간 반 정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밤 8시 30분에는 집으로 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날은 훨씬 늦게까지 저희와 함께 있었습니다. 기쁨이 계속해서 이어져서 도무지 끝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죠.
세번째, 찬양의 특징은 지속적이라는 겁니다. 지속적입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이 표현은 현재 시제, 계속되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어떤 한 사건이나 한 순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런 순간은 영원한 의미를 가진 사건이지만,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한번 기뻐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았을 때, 그때 시작된 기쁨은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지, 다시 말해서 상황은 참된 예배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배는 끊임없이 지속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바울의 말처럼 살면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참된 예배는 삶의 방식입니다. 왜냐하면 변하지 않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도 변하지 않으십니다. 구원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도 변하지 않습니다. 언약도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미래도 변하지 않습니다. 성령도 떠나지 않으십니다. 변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배가 변해야 합니까? 왜 예배가 밀려왔다가 사라져야 합니까? 참된 예배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예배가 주일 아침에만, 혹은 어떤 특별한 행사나 크리스마스 같은 시기에만 잠깐 뜨거워지는 것이라면, 자신이 참된 예배자라고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겁니다. 만약에 삶이 잘 풀릴 때만,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만, 상황이 만족스러울 때만 기쁨으로 예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참된 예배가 아닙니다. 그런 조건에 묶여 있는 예배는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겁니다. 참된 예배는 변하는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지 않습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찬양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진리는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태도와 모습이 흔들리고, 기쁨이 지속되지 않는다면,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와 변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임재가 아니라 다른 것에 마음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기쁨을 변하는 삶의 상황에 연결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초점이 하나님께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초점이 자신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참된 예배자는 삶의 어떤 상황을 지나가든지 흔들리지 않는 만족과 변하지 않는 기쁨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것이 네 번째 요소로 이어집니다. 예배의 태도는 내면적입니다. 강렬합니다. 지속적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겸손합니다. 겸손합니다. 참된 예배는 오직 겸손한 마음에서만 나옵니다. 겸손한 마음입니다. 겸손한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자신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교만은 자기 자신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하나님하고 경쟁을 합니다. 여러분이 감사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이 정한 만족 기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시선이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대했던 것, 바랐던 것, 기도했던 것, 자신이 받아야 한다고 여겼던 것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자신이 받은 상처를 다 기억합니다. 교만은 공격을 받으면 되갚아주고 싶어합니다. 보복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찬양으로 가득 차지 못합니다. 삶의 상황이 오르내리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겸손은 그런 것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겸손은 단지 자신을 계속해서 낮추며 계속해서 죄를 슬퍼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한 부분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겸손은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내 것이 되고 무엇이 내 것이 되지 않느냐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더 이상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중심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교만을 미워하시고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은 반드시 겸손해야 합니다. 진정한 예배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잃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더 이상 중심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마리아를 보십시오. 48절입니다.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마리아를 놀라게 한 것은 바로 이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비천하고 평범한 자신을 돌보셨다는 사실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점이 마리아는 놀라웠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이렇게 터져 나옵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신 건 참 잘하신 거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보다 불경건한 여인들이 얼마나 많으면 나를 택하셨을까’라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은 단 한 번도 스쳐 지나가지 않습니다. 그런 가능성 자체를 언급하는 것조차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말이죠.
우리는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지만, 자신의 성공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물론이고, 사실은 듣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도 말이죠. 아주 작은 성공조차도 과장된 이야기로 부풀리지 않습니까? 어떤 일을 이루었거나, 큰 복을 받았거나, 중요한 사람을 만났거나, 어떤 명예나 지위에 올랐을 때 우리는 말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첫 반응은 어쩌면 이럴지도 모릅니다. 내 영혼이 나 자신을 높인다고 말이죠. 상장을 벽에 걸어 두고 드러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전화기가 있었다면 전화를 붙들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신 아들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으니, 알리고 싶은 유혹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마리아의 마음은 즉시 하늘을 향합니다. 모든 선함과 모든 선물과 모든 은혜와 모든 복이 오는 하나님께로 향했습니다. 마리아는 그저 압도되어 있었습니다. 엘리사벳의 말에 대해서도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사벳이 42절에서 45절까지 그렇게 은혜로운 축복의 말을 했지만, 감사 인사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엘리사벳의 말에 마음을 두지 않은 겁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시선을 엘리사벳에게도, 자신에게도 두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이렇게 평범한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런 일을 행하실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태도에서 참된 예배가 흘러나옵니다.
마리아가 잠시라도 자신을 돌아보았다면, 이유는 한 가지 뿐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주목하셨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아셨는지, 어떻게 자신을 돌보셨는지, 어떻게 자신을 이런 일에 합당한 사람으로 여기셨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택하셨는지, 왜 자신이었는지, 왜 하필 나였는지를 묻는 그런 마음이었을 겁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의 특징입니다. 겸손은 자신을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칭찬이나 인정을 받으면 놀라고, 때로는 충격을 받기까지 합니다. 마리아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비천함을 돌아보셨다고 말한 것은 자신이 낮고 천한 상태에 있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고, 아무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저 시골 목수의 아내일 뿐이었습니다. 요셉은 멍에를 만들고, 쟁기를 만들고, 상과 의자와 문을 만들고, 아마 건물도 몇 개 지었을 겁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자란 마리아는 하나님이 아들을 맡기실 만한 인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 특별한 점이 있다면, 다윗 왕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는 것이죠.
물론 마리아는 정결하고 경건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정말로 정결하고, 정말로 경건하고, 정말로 의로운 사람들은 스스로를 그렇게 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정결하고 경건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지 않다는 것을 더 분명하게 압니다. 왜냐하면 경건과 정결과 의로움은 자신의 죄를 더 깊이 들여다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 구석구석에 숨겨진 죄까지도 보게 만듭니다. 그래서 더 경건해질수록 오히려 자신을 덜 경건하다고 여기게 됩니다. 자신을 낮추고 겸손할 뿐이죠.
참된 영성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그런 영성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예배자는 겸손합니다. 자격이 없다는 의식, 죄인이라는 자각, 어떤 복도, 어떤 선함도, 어떤 하나님의 선물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선물을 주실 때 완전히 압도되는 것이죠. 예배는 내면적입니다. 강렬합니다. 지속적입니다. 그리고 겸손합니다. 만약 마리아가 모든 여성 가운데서 높임을 받았다면, 아마도 가장 겸손한 사람이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높은 자리로 끌어올리셨다면, 가장 낮은 자리에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마리아는 그 나라에서 가장 경건한 여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사야 57장 15절은 이 모든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나님은 자신을 높이고 또 높이십니다.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그렇다면 그곳에 함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입니다. 그렇다면 예배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감사와 기쁨이 강렬하게 터져 나오고,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자신의 전적인 무가치함을 아는 겸손한 영혼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태도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정신입니다. 우리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 놀라운 은혜를 받았습니까? 하나님이신 분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 은혜를 우리가 받다니,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다니, 우리가 누구입니까? 이 모든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자격 없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제 두 번째, 예배의 대상입니다.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입니다. 마리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모든 존귀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모든 예배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는 매우 단순합니다. 매우 집중되어 있습니다. 한 방향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누가복음 4장 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예배는 이 우주 가운데 오직 한 분께만 드려지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예배의 중심이자 전부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이 우리의 구주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하나님 내 구주”라고 말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만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저를 구원하지 않으셨다면 저는 하나님을 예배하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하나님에 대해 참된 사실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만으로 예배드리기는 어렵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는 전지하심, 어디에나 계신다는 편재하심,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심, 그리고 결코 변하지 않으시는 불변하심, 이런 속성들은 모두 참입니다. 그러나 만약 제가 영원한 심판을 향해 가고 있는 상태라면, 그런 하나님의 속성들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나님이 나의 구주가 아니시라면, 하나님의 다른 속성들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구주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심판자로 찬양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지옥과 심판과 정죄와 형벌과 진노에 대해서 기쁨으로 노래하는 찬양은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구주가 아니시라면,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두려움 속에 숨었을 겁니다. 떨면서 웅크리고 있었을 겁니다. 어쩌면 원망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예배라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속성을 가지고 계시든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하셨든지간에, 결국 한 가지 사실에서 실마리가 풀립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을 받았고, 그로 인해 심판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이름을 주실 때에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구주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구주가 아니시라면, 다른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구원자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하나님을 구주로 예배합니다. 하나님은 여러 번 “우리의 구주 하나님” 이렇게 불리십니다.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대상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이방 신들처럼 하나님께 잘해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고, 그 구원의 사역을 친히 시작하신 분이십니다. 예배의 정신은 내면적이고, 강렬하고, 지속적이고, 겸손합니다. 예배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예배의 대상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세번째, 마지막입니다. 예배의 원인입니다. 무엇이 예배하게 합니까? 무엇이 예배의 원인입니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48절 중간을 보십시오.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왜 그렇습니까?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일을 행하실 수 있는가, 나 같은 죄인에게 말이다.’ 예배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인 나를 위해 이런 일을 행하셨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이제부터 모든 세대가 나를 복되다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행하신 일 때문이죠. 예배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구주이시라는 사실은, 여러분이 그 구원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 구원이 여러분에게 실제가 되어야 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구주가 오셨기에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자신의 죄가 해결될 것임을 의미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죄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마리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구속자가 오셨기 때문이죠. 자신의 죄를 짊어지실 분, 모든 희생제사의 의미를 완성하실 분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예배가 시작됩니다. 예배의 동기입니다. 예배의 이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경험한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사회적 지위를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사회적 지위는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평생 이 땅에서 여왕이 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어머니였지만, 여전히 같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같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는 사도 요한에게 맡겨졌죠.
사회적 지위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지위는 변했습니다. 그리스도 탄생 이전이나 이후를 막론하고 그리스도를 믿었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마리아의 영적 직위는 변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마리아의 죄를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마리아는 구속자가 오신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찬양은 구원에 대한 순전한 감사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그리고 예배는 언제나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일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예배는 결국 의미 없는 피상적인 것이 되고 맙니다. 능하신 이가 내게 큰 일을 행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죄에서의 구원을 말입니다.
두번째로, 하나님께서 마리아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행하신 일로 인해서 찬양이 나옵니다. 50절을 보십시오. 마리아는 자신만을 강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약 시편 103편 17절을 인용합니다.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마리아의 겸손이 다시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이 일이 자신에게만 일어나는 특별한 사건인 것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는 세대를 이어 계속해서 이루어질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행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마리아는 기뻐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적인 일을 우선시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것과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마음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일로 인해 압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대에서 세대로 계속해서 행하실 일로 인해 마음이 더욱 벅차올랐습니다. 자신의 구원, 그리고 다른 사람의 구원이 찬양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요소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행하시는 일로 예배했습니다. 정말 놀라운 부분입니다. 자세히 살펴볼 시간은 없지만, 51절을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역사 속에서 행하신 일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능력과 힘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선을 행하지 않으시고,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하나님은 겸손한 자기 백성을 들어 올리셨습니다. 약한 자에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53절을 보면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시편 107편의 말씀과 연결됩니다. 반면에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그리고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도우셨습니다.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나님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지키셨습니다. 예배하는 이유입니다. 개인의 구원, 세대를 이어 계속되는 구원,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기 백성의 모든 필요를 신실하게 채우시는 그 신실하심, 이것이 예배의 동기입니다.
덧붙여서 51절부터 5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행하신 일을 서술할 때 부정과거 시제가 사용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을 행하셨기에 비로소 전할 복음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셨고, 지금도 구원하시며, 끝까지 신실하시기 때문에 예배와 찬양과 영광과 경배가 존재하는 것이죠. 크리스마스의 정신,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예배입니다.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리고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옛 역사를 더듬습니다. 바로 성탄 축하 찬송을 부르는 겁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중에는 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들도 있습니다. 여러 번 번역을 거치면서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것들이 많습니다. 또 11세기, 15세기, 16세기, 17세기, 18세기, 19세기에 이르는 아주 다양한 시대의 찬송가를 우리가 지금 부릅니다. 그렇게 크리스마스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찬송가를 접해보면, 우리는 크리스마스의 진리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시인 그리고 신자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의 태도는 언제나 한가지입니다. 예배입니다.
성탄 축하 찬송을 한번 살펴봅시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1483년에 태어나서 1546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사명은 분명했습니다. 라틴어 성경과 신학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독일어로 번역해서 옮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성경을 이해하고, 찬양의 의미를 이해하면서 부를 수 있기 때문이죠. 우리는 루터가 위대한 신학자였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지만, 뛰어난 시인이었다는 사실은 잊어버립니다. 마르틴 루터는 찬송가를 쓰고 번역하는 일에도 헌신했습니다. 루터가 쓴 찬송가 중에서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영원하신 주여, 찬양을 받으소서, 육신의 옷을 입으시고, 모든 세계가 주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구유를 왕좌로 택하셨네. 한때 하늘이 주 앞에 엎드렸으나 이제는 처녀의 팔이 주를 안고 있다네. 한때 주를 기뻐하던 천사들이 이제는 주의 아기 음성을 듣고 있다네. 작은 아기로 오신 주님, 지친 자들이 주 안에서 쉼을 얻게 하시려 함이라네. 낮고 비천한 탄생은 우리가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게 하시기 위함이라네. 어두운 밤에 오셔서 우리를 빛의 자녀로 삼으시고, 하늘의 영역에서 주의 천사들처럼 빛나게 하시려 함이라네.” 그리고 이렇게 마칩니다. “이 모든 것을 주의 사랑이 우리를 위해 이루셨으니, 이로써 우리의 사랑이 주께로 향하네. 그러므로 우리는 기쁜 노래로 주를 찬양하며 끊임없이 감사의 찬송을 올리네.” 이것이 예배입니다. 크리스마스에 마르틴 루터는 아들 한스를 위해서 성탄 찬송을 썼습니다. 이렇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이 땅으로 내려온 것은 모든 가정에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함이라.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노니, 이제 내가 말하고 노래하리라. 오늘 밤 너희를 위하여 한 아기가 태어났으니, 온유한 마리아에게서 나신 아기라. 이 낮고 비천하게 태어난 아기가 온 세상의 기쁨이 되리라. 온 세상이 아무리 아름답고 귀한 보석으로 가득하다 할지라도, 주님을 모시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작은 요람일 뿐이라.” 그리고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 거룩한 아기여, 제 마음 속에 깨끗하고 부드러운 자리를 마련하여 주소서, 그곳이 주를 위한 고요한 처소가 되게 하소서.” 이것이 예배입니다. 내 마음속에 모시겠다고 고백합니다. 윌리엄 딕스(William Chatterton Dix)는 1898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저 아기 잠들었네”라는 찬송가의 가사를 썼습니다. 이 곡은 영국 전통 민요인 “그린슬리브즈” 선율에 가사를 붙였습니다. 마지막 부분입니다. “저 황금 유향 몰약을 다 주께 드리어서 만왕의 왕된 구세주 늘 함께 경배하세.”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는 찬송가를 6천 곡이나 썼습니다. 아마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곡이 오늘 아침에 여러분이 들으신 “천사 찬송하기를”일 겁니다. 마지막 절을 보십시오. “의로우신 예수는 평화의 왕이시고.” 이것이 예배입니다. “세상 빛이 되시며 우리 생명 되시네 죄인들을 불러서 거듭나게 하시고 영생하게 하시니 왕께 찬양하여라 영생하게 하시니 왕께 찬양하여라.”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19세기 시인 중에 크리스티나 로세티(Christina Rossetti)가 있습니다. 1830년에 태어나서 1894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크리스티나는 이탈리아 이민자의 딸인데 매우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눈에 띄게 아름다울 뿐 아니라 시적 재능도 뛰어났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는데, 로마 가톨릭 신자하고 약혼을 했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개종하겠다고 약속했다가 마음을 바꿔버리자 약혼을 깨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답니다. 독신으로 사는 동안에 아름다운 시들을 아주 많이 남겼습니다. 모두가 그리스도를 향한 찬양입니다. 그중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세상을 떠난 지 12년 후에 곡이 붙은 그런 시입니다.
“한겨울의 혹독한 때에, 찬 바람이 울부짖고, 땅은 쇠처럼 굳어지고 물은 돌처럼 얼어붙었네. 눈 위에 눈이 쌓이고 또 쌓여, 그 옛날 한겨울에는 눈이 겹겹이 쌓였네. 우리 하나님, 하늘도 담을 수 없고 땅도 붙들 수 없으니, 왕으로 오실 때 하늘과 땅이 사라지리라. 그러나 그 혹독한 한겨울에 마구간 하나면 충분했네, 전능하신 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천사들과 대천사들이 그곳에 모였고, 그룹들과 스랍들이 공중에 가득했지만, 그의 어머니는 처녀의 기쁨 속에서 사랑하는 이를 입맞춤으로 예배했네.” 그리고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내가 무엇을 드릴까, 이렇게 가난한 내가. 내가 목자라면 어린 양을 드리겠고, 내가 동방 박사라면 내 몫을 다하겠지만, 내가 무엇을 드릴까? 내 마음을 드리리라.” 이것이 예배입니다. 1786년에 세상을 떠난 존 프랜시스 웨이드(John Francis Wade)가 이 모든 찬양을 하나로 잘 정리했다고 생각합니다. “오라, 우리가 그를 경배하자. 오라, 우리가 그를 경배하자. 오라, 우리가 그를 경배하자, 그리스도 주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엇을 삶의 중심으로 삼아야 하는지를 다시 일깨워 주시는 이 놀라운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바로 예배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게 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과, 세대를 이어 구원받은 죄인들에게 행하신 일과, 주의 백성에게 모든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신 그 일로 인해 기뻐합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하나님께서 아기로 이 세상에 오신 그 위대한 역사적 사건에 초점을 맞춥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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