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는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함께 묵상하면서, 누가복음 1장부터 2장에 기록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장을 펴시기 바랍니다. 1장 전체, 그리고 2장 일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아마 세상의 모든 부모는 의심의 여지 없이 자기 자녀가 가장 특별한 아이라고 확신할 겁니다.
또 아이들은 모두 다 부모의 큰 기대 속에서 태어나죠. 저희 네 명의 아이가 태어났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아이들이 가능한 최고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꿈꾸며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대가 크다 한들 부모의 기대는 그저 기대일 뿐입니다. 바람도 그저 바람에 지나지 않죠. 왜냐하면 갓 태어난 아이의 인생은 백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될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기대와 긴장과 염려 속에서 자녀가 어떤 사람이 될지를 지켜보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하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그 아기의 경우에는 이미 모든 것이 처음부터 선포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대, 바람, 꿈, 상상, 이런 것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가 누구인지, 왜 오셨는지, 무엇을 할 것인지,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를 부모가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죠. 평범한 유대인 부부가 이 세상이 이제껏 보지 못했던 가장 아름다운 아기를 마주했던 것입니다.
이 아기는 태어날 때 이미 인생이 명확하게 계획되고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어떤 아이들과 달랐습니다. 인생을 시작하기도 전에, 자신의 삶과 운명, 그리고 자신이 가져올 변화가 미리 완전하게 주어진 그런 아이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역사에 그 업적을 남기기도 전에, 자신의 인격과 성취와 영향력에 대한 모든 세부적인 내용들이 미리 명확하게 제시된 아이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탄생은 아주 특별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탄생 직전에 태어난 아이가 또 한 명 있습니다. 미리 기록된 증언으로 태어난 유일한 또 다른 아이입니다.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에 대해서도 많은 말씀이 예언이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 초반에 나옵니다. 세례 요한은 사가랴라는 제사장과 아내 엘리사벳 사이에 태어날 아이로 나옵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해서 많은 말씀이 선포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질문이 남아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장 66절에서 이 특별한 아이에 대한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그러니까 세례 요한의 경우는, 비록 많은 예언의 말씀이 주어졌다고 해도, 여전히 정확히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태어난 후에 탄생한 아기는 그보다 더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신약성경 첫 부분에 탄생에 관해 언급될 뿐만 아니라, 그의 삶과 사역이 구약성경 전체에 걸쳐서 미리 모두 다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아이는 세례 요한보다 훨씬 더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너무나도 놀랍고 경이로운 말씀들이 주어졌기 때문에, 누가복음 2장 33절을 보면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조차도 천사가 전해준 말씀들 때문에 깜작 놀란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떤 말씀을 하셨기에 부모가 그토록 크게 놀라고 경외감과 경이로움에 사로잡혀 있었을까요? 그 궁금증에 대한 대답이 누가복음 1장 30절부터 나오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전해준 소식에서 드러납니다. 제가 읽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이 수태고지의 말씀과 더불어 천사가 요셉에게 전한 말씀, 그리고 누가복음 2장 끝부분, 그러니까 34절에서 38절에 기록된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들을 듣고 놀랐던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여섯 가지 초점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전반적인 표현에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1장 32절입니다. “그가 큰 자가 되고...” 예수님은 큰 자가 되실 겁니다. 동일한 표현이 누가복음 1장 15절에서 세례 요한에게도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세례 요한도 큰 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큰 자가 되실 것이었습니다. 이 단어, 그러니까 ‘큰 자’가 된다고 하는 것에는 ‘비범한, 놀라운, 장엄한, 탁월한, 고귀한, 뛰어난, 현저한, 저명한, 능력이 있는’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존재를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세례 요한은 큰 자였습니다. 선지자 직분을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메시야의 길을 예비한 자였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자가 없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큰 자이십니다.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고, 탁월하고, 으뜸이고, 장엄하고, 영광스럽고, 두드러진 분이십니다. 세례 요한과는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그 이유가 이 본문에 나옵니다. 무엇이 예수님을 위대하게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그 부모를 그렇게 놀라게 했습니까?
이제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위대함, 그러니까 탄생의 순간부터 드러난 여섯 가지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3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이것은 곧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다,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을 시작하면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 속에 분명하게 자리잡아야 할 진리가 바로 이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누가는 하나님을 일컬어서 “지극히 높으신 이” 혹은 “가장 높으신 이” 이런 표현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천사도 그렇게 불렀습니다. 35절에서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또 76절에서는 성령으로 충만한 사가랴가 증언합니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천사도 하나님을 지극히 높으신 이라고 부르고, 성령께서도 사가랴를 통해서 그렇게 부르십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주권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6장 35절에서 예수님을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7장 48절에서도 누가는 동일하게 “지극히 높으신 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귀신들조차도 하나님을 “지극히 높으신 이” 이렇게 불렀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높으신 이, 지극히 높으신 이, 이렇게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장엄한 주권을 선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 우월성을 선포하는 표현이죠. 하나님보다 높으신 이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하거나 하나님 위에 있는 존재도 없습니다. 구약에서는 히브리어로 엘 엘리온(El Elyon), 이렇게 사용되었습니다. 창세기 14장 18절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죠. 이후에 구약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매우 일반적인 칭호로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엘 엘리온(El Elyon)이라는 이름이 사용될 때마다,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초월적인 능력을 느끼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주권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높으신 분은 없습니다. 권위와 탁월함에 있어서 하나님은 가장 높으신 분이십니다. 바로 이 엘 엘리온(El Elyon), 그러니까 ‘지극히 높으신 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주권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칭호입니다.
예를 들어서 신명기 32장 8절, “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또 시편 47편 2절은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라고 선언합니다. 또 다니엘에서는 네 번이나 지극히 높으신 이가 땅의 나라들을 다스리시며 사람의 나라를 자기 뜻대로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이 모든 구절은 지극히 높으신 이가 열방 위에 주권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나라들 위의 주권자이십니다. 두번째, 사무엘하 22장 14절에는 하나님께서 물과 구름과 하늘과 번개와 천둥과 바다와 비를 다스리시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우렛소리를 내시며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 내심이여.” 여기에서 지극히 높으신 이는 자연을 다스리시는 주권자로 나타납니다. 창조된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만국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십니다. 시편 7편 17절, 그리고 9편 2절은 악인과 하나님께 반역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면서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들 위에 주권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자들도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십니다. 또 시편 21편 7절을 보십시오.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지존하신 이의 인자함으로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하나님은 불의한 자들을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의로운 자들도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시고, 구원의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46편 4절에는 지존하신 이의 성소가 나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보호와 안전과 평안과 위로를 누린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구속받은 자기 백성들도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심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다니엘 7장 18절은 우리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주권자 하나님께 속한 성도들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37절과 38절에는 아주 포괄적인 선언이 나옵니다. “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 여기 이 “지존자”라는 칭호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모든 요소를 요약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차원의 주권자이십니다. 만국의 주권자, 자연의 주권자, 불의한 자들과 의로운 자들의 주권자, 하나님이 구속하신 백성들의 주권자, 모든 선과 악의 주권자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지극히 높으신 이”라는 말의 뜻입니다. 하나님만큼 높으신 이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신들 위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주권자이십니다.
이 칭호가 왜 이렇게 중요할까요? 누가복음 1장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32절입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전한 메시지는 이겁니다. 네가 낳을 아들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다. 그리고 35절 끝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칭호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너무도 분명하죠.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장 높으신 이의 성품과 본질과 존재를 그대로 지니고 계시다, 이런 뜻입니다. 아들이라는 표현은 위대하신 하나님이 자신보다 못한 그 신을 아래에 두셨다,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위 신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한 생명과 동등한 본질과 동등한 본성을 지니셨다는 바로 그런 선언입니다. 히브리서 1장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십니다. 히브리서 1장 1절과 2절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말하고 3절은 그 아들이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곧 아버지의 생명과 본성을 그대로 지니신 분이다, 이런 뜻이죠. 이 표현이 사용된 본질적인 의미가 여기에서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아들 되심의 의미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기록자는 요한입니다. 잠시 요한복음 5장을 보겠습니다. 2주 전에 어떤 한 분을 만났는데, 저는 그 사람의 인생에 필요한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주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으니 꼭 한 가지를 해 보라고 권면을 했습니다. 요한복음을 읽어보라고 말이죠. 그 남성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욕설과도 같은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실재를 거부합니다. 아무튼 그 유대인은 요한복음을 읽었습니다. 다시 만났을 때 “읽어 보셨어요?” 이렇게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읽고 나니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요한복음을 읽고 내린 결론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어보았죠. 그랬더니 한 번도 요한복음을 읽어 본 적이 없었지만, 망설임 없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는 단순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는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을 읽은 유대인이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이 기록된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분이신지는 요한복음에 가장 분명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바로 요한복음 5장입니다. 16절을 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사람이 만든 유대 전통을 어겼다고 생각했죠.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고, 병 나은 사람에게 자리를 들고 가라고 하신 것을 자신들의 전통을 어긴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17절입니다. 이 대답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밝히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 하여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삼으셨기 때문이죠. 유대인의 생각 속에서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곧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지녔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전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겁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이유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본질에 있어서 동등하다고 주장하신 것과 같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본질에 있어서 동등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의미입니다. 마가복음 2장 27절에서 말씀하셨듯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하나님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분이 계실 겁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지 않으셨어요? 그러나 일곱째 날에 하나님께서 완전히 모든 활동을 멈추셨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쉬신 것은 창조 사역을 마치셨기 때문에 쉬셨습니다. 창조를 마치셨기 때문에 그 일에서 쉬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완전히 활동을 멈추셨다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모든 것은 즉시 무너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과정은 쉬셨지만 만물을 유지하시고 붙드시는 사역은 결코 쉬신 적이 없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과 본질에 있어서만 동등한 것이 아니라 사역에 있어서도 동등하다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9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죠.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바로 그 일이다. 만일 내가 안식일을 어겼다고 고발하려고 한다면 하나님도 고발해 보라. 나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대로 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나도 한다. 그러므로 나를 고발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고발하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그대로 한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보여 주시면 그대로 행한다. 그러므로 너희의 논쟁은 나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문제이다. 나와 하나님은 사역에 있어서 동등하다.” 세번째, 예수님은 본질과 사역에 있어서 동등할 뿐만 아니라 능력에 있어서도 동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21절에서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육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죽은 자를 살리는 동일한 능력을 내가 가지고 있다, 이렇게 선언하신 겁니다. 26절에서도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라고 하면서 같은 진리를 반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놀라운 주장을 하고 계십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는 것은 곧 지극히 높으신 이의 본성을 지니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사역을 행하시고 능력에 있어서도 동등하십니다. 네번째입니다. 예수님은 권위에 있어서도 동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21절 끝에서 “아들은 자기가 원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준다”라고 하십니다. 동등한 권위를 가지셨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뜻하는 대로 행할 수 있다.’ 또한 22절을 보면 심판에 있어서도 동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7절에서도 같은 내용을 반복하십니다.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30절에서는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그 심판을 그리스도께 맡기셨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함께 심판하신다는 뜻이죠. 그러므로 심판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동등하십니다. 그리고 23절에서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경에 있어서도 동등하다’라는 선언입니다. 이 본문 전체에 반복되는 표현은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와 아들입니다. 이 관계가 전달하려는 핵심은 본질에 있어서의 동등함, 사역에 있어서의 동등함, 능력에 있어서의 동등함, 권위에 있어서의 동등함, 심판에 있어서의 동등함, 그리고 영광과 공경에 있어서의 동등함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천사가 마리아에게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이렇게 말했을 때에, 하나님과 모든 면에서 동등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런 선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주장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자, 그 아기는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선언입니까. 얼마나 경이로운 음성입니까. 도저히 믿기 어려운 말씀이 귀에 울려 퍼졌습니다. 네가 잉태하고 네 팔에 안게 될 그 작은 아기가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이런 선언이죠. 마태복음도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록하면서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인간의 태 안에서 태어나실 수 있을까? 마태복음 1장 18절입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20절입니다.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3절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그 아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인간 아버지 없이 잉태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리아 안에 씨를 심으셔서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잉태되게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장 43절에서 엘리사벳도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엘리사벳은 자기 친족 마리아가 주님을 낳을 것임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또 누가복음 2장 11절에서 천사는 목자들에게 선포합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바로 주님이 나셨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모에게 처음 주어진 놀라운 메시지는 이 아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이십니다. 오랜 세월 동안 크리스마스 찬송을 지은 작가들도 이 진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이 찬양들을 부르지만, 때로는 도대체 무엇을 노래하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게 되죠. 따라서 크리스마스 찬송이 강조하는 내용을 함께 잠시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익숙한 가사이지만 잘 들어보십시오.
“기쁘다 구주 오셨네. 참 반가운 성도여 다 이리 와서 엎드려 절하세 구주 나셨네. 천사 찬송하기를 거룩하신 구주께 영광 돌려보내세. 왕 되신 주께 경배하세 영원한 주. 참 반가운 성도여 다 이리 와서 베들레헴 성 안에 가 봅시다 구유에 누이신 아기를 보고 엎드려 절하세 엎드려 절하세 엎드려 절하세 구주 나셨네. 만왕의 왕 내 주께서 낮고 천한 이 땅에 나셨네 오 놀라우신 사랑 그 크신 사랑.” 이처럼 수많은 크리스마스 찬송의 작사가들은 아기 예수가 하나님이시라는 진리를 분명하게 노래해 왔습니다. 두 번째로 놀라운 사실은 이 아기가 인간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입니다.
누가복음 1장 31절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하나님께서 단지 세상에 내려온 것이라면 다른 방식도 가능했을 겁니다. 그냥 나타나실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인간 어머니 없이도 나타나셨습니다. 인간의 출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와 동산에서 걸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번 모습을 나타내셨죠. 시내산에도 내려오셨고, 아브라함에게도 자신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에는 굳이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으로 오실 뿐 아니라 완전한 인간으로 오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태어나는 방식 그대로, 인간인 여성의 자궁과 산도를 통해서 태어나셔야 했습니다.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인성을 분명하게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네 태에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는 선언은 예수님이 참 사람으로 오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36절을 보십시오. 엘리사벳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평행 구조가 분명합니다. 엘리사벳도 아이를 배어 출산을 기다리고 있었고, 마리아도 아이를 배어 출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엘리사벳이 낳을 세례 요한이 분명한 인간이었던 것처럼, 마리아가 낳을 예수님도 분명한 인간이실 겁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 19절을 보십시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요셉은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알았습니다. 마리아와 관계를 가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부정하다고 생각해서 이혼하려고 했습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마태도 역시 동일하게 말합니다. 마리아가 잉태했고 아들을 낳을 것이다. 이제 누가복음 2장 6절을 보십시오.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마리아와 요셉이 베들레헴에 있는 동안 해산할 날이 찼다는 말은 아홉 달의 임신 기간이 다 채워졌다, 이런 뜻이죠. 정상적인 아홉 달이 흐른 것입니다. 매우 정상적인 출산입니다. 잉태는 정상적이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잉태되셨죠. 그러나 출산은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정상적인 인체의 과정을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7절에서 아주 담담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첫아들을 낳아.” 저는 이 표현이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첫아들을 낳아.” 이 말은 다른 자녀들도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죠. 첫째를 낳았다는 것은 그 이후에도 더 낳았다는 뜻입니다. 마리아는 첫째 아들을 낳았고, 그 이후의 자녀들도 정상적인 과정을 통해서 낳았습니다. 마태복음 12장 46절, 47절, 13장 55절, 56절, 요한복음 2장 12절, 7장 3절, 5절, 10절, 이 모두가 예수님께 형제자매가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마리아의 태는 여러 자녀를 품었습니다. 여러 자녀를 출산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중의 첫째이셨죠. 요점은 이겁니다. 예수님은 정상적인 인간의 방식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온전한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놀랍고 경이로운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인간 아버지의 도움 없이 한 여인이 완전한 인간을 낳을 수 있었을까? 그 아이가 하나님이시라는 이 신비만큼이나 깊은 신비입니다. 무한한 기적이 필요한 일이죠.
이 아기는 실제 인간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 12절을 보십시오. 목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실제 실존하는 아기입니다. 또 21절을 보십시오. “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다른 유대인 아기들과 똑같이 이 아기에게도 언약의 표징인 할례가 행해졌습니다. 포피를 베어 내는 그 언약의 표가 어린 아기 예수님에게도 동일하게 시행되었습니다. 이상하고 기괴한 존재가 세상에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창세기 17장 12절에서 명령되었고, 레위기 12장 3절에서 다시 확인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위한 율법이 이 어린 아이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또 누가복음 2장 40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이 말씀은 누가복음 1장 80절에서 세례 요한에 대하여 한 말씀과 매우 유사합니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세례 요한이 자라난 것처럼 예수님도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의 성장 과정을 따라 자라나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히브리서 여러 곳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해서 본질적인 진리를 밝혔습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2장 17절은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라고 말합니다. 모든 일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또 히브리서 4장 15절은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 4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에 나셨습니다. 곧 다른 모든 사람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태어나셨다는 뜻입니다. 여인에게서 나셨고,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 아래 들어오셨습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형제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사람을 대신하려면 온전한 사람이 되셔야 했습니다. 사람을 위해 죽음에서 부활하시려면 사람이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전서 2장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예수님의 부모는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동시에 사람이시라는 사실에도 놀랐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셨습니다. 기적의 아이죠. 해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을 다시 한번 떠올려 봅시다 우리가 부르는 모든 노래 속에 이 진리가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거룩한 아기 부드럽고 온유하네.” “아버지의 말씀이 이제 육신으로 나타나셨네.” “구유에 누이신 아기를 보라.” “육신을 입어 나타난 하나님을 보라.” “마리아의 품에 안겨 잠드신 이 아기는 누구인가.” 다른 아기와 다를 바 없는 마리아의 아기입니다. 한 작가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네, 지극한 겸손으로 나셨네.” 또 다른 작가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네, 동정녀의 태에서 나셨네, 사람과 함께 거하시기를 기뻐하셨네, 예수 우리 임마누엘”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완전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완전한 사람으로 노래하며 증언합니다. 이 아이에 대한 세번째 놀라운 사실은 누가복음 1장 35절에 다시 나타납니다. 이 아이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실 뿐 아니라 죄가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거룩하셨습니다. 완전하셨습니다.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것이 동정녀 탄생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 우리가 아는 전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이 아이는 거룩한 아이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선언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인류 역사에서 인간의 출생 과정을 통해서 태어난 거룩한 아이는 단 한 명뿐입니다. 오직 한 분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이 아이 외에는 그 누구도 거룩한 아이는 없습니다. 누가복음 1장 15절은 세례 요한이 성령으로 충만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거룩한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죄가 없지 않았습니다.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흠이 없는 존재도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이 낳을 아이가 절대적으로 완전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양육 과정에 아무런 어려움도 없을 것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전혀, 단 한 순간도 어려움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성장 과정에서 예수님이 마땅치 않은 행동으로 불행을 초래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불순종하는 말이나 생각이나 행동이 없었습니다. 나쁜 태도도 없었습니다. 경솔하거나 불친절하거나 이기적인 행동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경외감과 놀라움과 존경심과 예배만을 일으키셨습니다. 이런 아이는 또 없습니다. 베드로의 어머니에게는 거룩한 아이가 없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에게도 거룩한 아이가 없었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라 고백하며 이 사망의 몸에서 벗어나기까지 싸웠던 바울도 거룩한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가인과 아벨 이후로 태어난 모든 아이는 거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기적으로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한 아이가 나게 하셨습니다. 죄가 없는 거룩한 아이가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거룩하셨습니다. 우리는 죽음 이후에야 알게 될 그 거룩함을, 예수님은 출생 때부터 거룩하셨습니다. 우리가 끝나는 자리에서 예수님은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는 기다려야 할 거룩함을 예수님은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먼저 거룩함의 충만함 가운데 계셨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는 날부터 속박을 받지만, 예수님은 완전하게 자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완전히 거룩하셨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마지막에야 완전히 거룩하게 될 겁니다. 예수님과 같이 거룩한 아이는 결코 없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이 죄인들과 구별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더러움이 없으신 분입니다. 징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교정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용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구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저명한 설교자였던 알렉산더 화이트(Alexander White)는 에든버러의 프리 세인트 조지 교회를 섬기면서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매우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만일 여러분의 자녀가 단지 의식적이고 관습적으로만 거룩한 아이가 아니라, 참되며 영원히 거룩한 아이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거룩함이 무엇인지 안다면, 마리아의 거룩한 아이와 같은 거룩함보다 못한 어떤 것도 목표로 두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의 자녀가 마리아의 아이처럼 태어나지 않았다는 가슴 아픈 증거를 보게 될 때마다, 자녀의 짜증과 다툼과 무례함과 토라짐과 건방짐과 교만과 분노와 꺾이지 않은 고집을 마음 깊이 느낄 때마다, 토마스 할리버튼(Thomas Halliburton)의 어머니가 했던 것처럼 아이를 따로 데리고 가서 함께 기도하라. 여러분의 자녀가 하나님이 보내신 거룩한 아이이신 예수님의 쌍둥이 형제와도 같은 존재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마리아의 아이와 동일한 거룩함으로 여러분의 자녀도 거룩하게 되기를 쉬지 말고 기도하라. 그 거룩함이 한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러분이 살아 있는 동안 적어도 시작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자녀가 순종적일 때에도 따로 데리고 가서 무릎을 꿇고 아이가 듣는 가운데 이렇게 기도하라. ‘하나님, 거룩한 아이 예수님의 하나님 아버지, 사랑하는 제 아이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제가 떠난 후에도 예수님께 그러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으로 지켜 주옵소서.’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쉬시지 못하게 하라. 아이의 마음에 하나님의 씨가 뿌려질 뿐 아니라, 마리아의 첫아들처럼 집에서 어머니께 순종하며 날마다 지혜와 키가 자라가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받는 모습을 보기까지 말이다.” 얼마나 큰 도전입니까? 거룩한 아이입니다. 다른 어떤 아이와도 다른 아이입니다. 모든 아이의 본이 되는 아이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노래하지 않습니까? 크리스마스 찬송가에 이렇게 나오지 않습니까? “저 들 밖에 한밤중에 목자들 잠들었네” 이렇게 노래하면서 그 거룩한 탄생을 선포하지 않습니까? “거룩한 아기 부드럽고 온유하네” 이렇게 노래하지 않으십니까? “주의 거룩한 얼굴에서 광채가 비치네”, 우리가 노래하죠, “오 베들레헴의 거룩한 아기 우리에게 오소서”라고 노래하죠? “베들레헴에는 주의 거룩한 탄생을 맞을 방이 없었네” 분명히 이렇게 노래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 아이가 죄가 없으셨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자, 하나님이시고 사람이시고 죄가 없으실 것이라는 말에 놀랐을 뿐만 아니라, 네번째입니다, 그 부모가 놀랐던 이유는 그 아이가 주권자이신 주님이시고 왕이 되실 것이라는 선언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누가복음 1장 32절을 보십시오.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예수님은 영원한 나라를 소유하실 겁니다. 주께서 그 왕위를 주실 것입니다.
사무엘하 7장 11절부터 13절의 예언을 성취하는 말씀입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요셉의 족보를 읽어 보십시오. 또 누가복음 3장에 기록된 마리아의 족보를 읽어 보십시오. 두 사람 모두 다윗의 혈통에서 나왔습니다. 마리아와 요셉 모두 다윗의 계열에 속해 있습니다. 왕의 혈통이 그리스도 안에서 만났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참으로 다윗의 왕위를 이을 합법적인 상속자이십니다. 세례 요한처럼 레위 지파, 그러니까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왕의 가문, 다윗의 집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위를 이을 권리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 왕위는 세상의 왕위이고, 온 우주의 왕위이고,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한 왕위일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은 주권자이신 주님이셨습니다. 이 작은 아이가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아 영원한 나라를 다스리게 될 것이라는 선언을 부모가 들었습니다. 얼마나 엄청난 선언입니까?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은 주께서 단지 이렇게만 말씀하셔도 충분히 기쁠 것입니다. “네 자녀가 자라서 믿게 될 것이다. 훌륭한 선교사가 될 것이다. 위대한 교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기 예수님에 대해 선포된 영향력은 실로 압도적이고 경이로웠습니다. 그 부모의 마음은 이 작은 아이에 대해 쏟아지는 이 위대한 선언을 붙들기조차 어려웠을 겁니다. 우주의 왕이십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마태복음 2장에서 이 사실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1절부터 8절까지에서 마태는 동방 박사들, 우리가 흔히 지혜자라고 부르는 이들을 소개합니다. 영어로는 ‘마기(Magi)’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바벨론과 메대와 바사의 큰 영향력을 가진 동방의 세습 제사장 집단이었습니다. 동방의 왕을 세우는 자들입니다. 메대와 바사의 법을 아는 자들입니다. 동방 박사의 권세는 매우 큽니다. 서방의 로마 제국과 맞서는 동방의 그 어떤 왕도, 동방 박사의 훈련과 승인과 임명을 거치지 않고는 세워질 수 없었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바벨론에서 자랐습니다. 이방인이자 이교도였지만 포로 생활 중에 있던 다니엘과 유대인들의 영향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참으로 오실 메시아, 장차 오실 위대한 왕을 찾고 있었습니다.
최근 몇 해 동안 통치하던 왕이 폐위되고 새 왕을 찾을 때가 이르렀던 겁니다. 그때 별이 나타났고 동방 박사들은 그 별을 따라서 갔습니다. 아마도 포로 시절의 다니엘을 비롯한 믿는 유대인들을 통해 전해 들은 예언의 성취를 보려는 그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다니엘 시대 이후에 여러 세대가 지났지만, 그 메시지는 전승이 되고 전승이 되어서 여전히 그들 가운데 살아 있었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이 왕을 찾으러 간 겁니다. 그리고 마태가 우리에게 주목하게 하려는 핵심은 이겁니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 세계, 그러니까 동방의 공식적인 왕을 세우는 자들이 와서 아기 예수님이 진정한 왕이시다, 이런 사실을 인정했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마태는 유대 세계 역시 예수님을 왕으로 인식했음을 독특한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바로 헤롯의 적대감이죠. 만일 예수님이 왕이 아니었다면 헤롯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을 겁니다. 헤롯이 그 지역의 어린 아기들을 모조리 학살하면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엄청난 참극을 일으켰다는 사실 자체가, 헤롯이 예수님을 왕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태는 적대적인 유대 백성을 대표하는 헤롯조차 예수님의 왕 되심을 인정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도록 제거하려 했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동방 박사들의 경배를 통해서든, 헤롯의 적대를 통해서든, 예수님이 진정한 왕이시라는 사실이 확인됩니다. 예수님은 다스릴 권리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족보가 말해주죠. 요셉을 통해서도 말하고, 마리아를 통해서도 말합니다. 예수님을 둘러싼 모든 일들이 이것을 증언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유일한 통치자이십니다. 영원히 최고의 주권자로 다스리실 분이십니다. 성경은 이러한 선언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입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피조물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 앞에 복종하게 될 겁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가 아이를 낳았을 때 어떤 사람이 와서 이 아이가 장차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말해준다면, 혹은 한 기업의 총수가 될 것이라고 말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일일 겁니다. 위대한 지도자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벅찬 일입니다. 그러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신다는 말씀은 마리아가 감당하기에 벅찬 일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 말하듯이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고 깊이 생각했습니다. 마리아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이죠.
찬송가 작사가들도 이 진리를 노래합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 때마다 찬송을 부릅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온 세상 기뻐하라 구주 오셨네.” “와서 경배하라 천사들의 왕으로 나신 주.” “엎드려 경배하라 그리스도 주 나신 왕.” “천사 찬송하기를 영광을 새로 나신 왕께.” 어떤 작가는 또 이렇게 노래하죠. “베들레헴 들판에 나신 왕께 황금을 드려 면류관 씌우세. 영원히 다스리실 왕.” “이는 그리스도 왕이시라. 만왕의 왕이 구원을 베푸시니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왕좌에 모시세.” “영원히 우리 안에 다스리시네.” “와서 경배하라, 와서 경배하라, 나신 왕 그리스도 주 예수를.” “베들레헴 구유에는 한 왕이 누이셨네.” “땅에는 평화, 하늘에는 영광.” 이렇게 노래하죠. 자, 다시 마리아와 요셉이 놀란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시고, 죄가 없으시고, 주권자이실 뿐 아니라, 이제 다섯번째죠, 그 아이가 구주가 되실 것이라는 선언을 들었습니다. 구주입니다. 1장 31절에서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라고 했죠. 요셉에게도 마태복음 1장 2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구원하신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시고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분이시고 우주의 주권자이신 예수님이, 이제 믿음으로 나아오는 모든 인류의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듣는다는 것은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선언입니다. 누가복음 2장 11절에서 천사는 목자들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공관복음서, 마태, 마가, 누가 가운데 예수님을 ‘구주’ 이렇게 정확한 표현으로 부르는 곳은 바로 이 한 구절뿐입니다. 물론 신약의 다른 곳에서는 이 칭호가 사용됩니다. 예수님은 구주로 나셨습니다. 2장 30절에서 시므온은 그 아이를 안고 기뻐하면서 말합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8절에서는 오랜 세월 과부로 지내면서 성전에서 금식하고 섬기며 속량을 기다리던 안나가 예루살렘에 임한 속량을 보고 기뻐하면서 그 소식을 모든 기다리는 자들에게 전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구주로 오셨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9장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히브리서 10장 5절부터 7절은 황소와 염소의 피와 모든 짐승의 제사가 죄를 없이 하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다고 말합니다. 그 몸으로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제거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의 죄를 없이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의 원수를 멸하시고 우리를 영적으로 온전하게 이끄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를 새 피조물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온전하게 됩니다. 단 한번의 제사로 우리를 영원히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구주이십니다. 세상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기 위해 나신 분입니다. 구유 위에는 이미 십자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 그림자는 모든 생애 동안 예수님을 따르다가 마침내 십자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일을 위하여 세상에 왔다. 내가 죽으러 왔다. 처음부터 예수님은 구주로 오셨습니다.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는 유일한 길은 죄의 대가, 그러니까 죽음을 치르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크리스마스 찬송이죠. “구주 나셨네, 구주 나셨네” 이렇게 노래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세상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무슨 말인지는 알고나 있을까요? 그 노래를 들으면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가사에 담긴 모든 진리가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섭리 속에서 크리스마스 찬송들이 다른 익숙한 찬송들보다도 더 깊은 신학적 정직성과 무게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안에는 놀라운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다윗의 동네에 오늘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온 세상 기뻐하라 구주 오셨네.” “땅에는 평화, 하늘에는 영광.”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죄인이 화목하게 되었도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 나셨습니까? “죽을 자를 살리시려고, 다시 나게 하시려고.” “한 목소리로 하늘의 주를 찬양하세. 그가 하늘과 땅을 지으셨고 그의 피로 인류를 사셨도다.” 이런 찬송도 있죠. “만왕의 왕이 구원을 베푸시네.” “기쁜 소식 전하노라, 두려워 말라. 그리스도 나셨도다, 그리스도 나셨도다.”
계속해서 이런 찬송이 또 있습니다. “만백성 기뻐하여라 하늘의 평화가 저 마귀 권세 이기고 우리를 구했네 구세주 탄생하심을 다 함께 기리세 오 기쁘다 반가운 소식 주 오셨네.” 이런 가사도 있습니다. “주가 오셨네 생명의 말씀 우릴 자유케 하시려 조롱과 멸시 가시관 쓰고 갈보리 십자가 지셨네.” 그렇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이 놀라웠던 것은 탄생 때부터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선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부모는 들은 말씀 때문에 놀랐습니다.
이제 마지막입니다. 누가복음 2장 34절부터 35절에서 시므온은 이 아이가 모든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실 분이라고 말합니다. 시므온이 축복하면서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마음을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운명을 결정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넘어질 것인지 다시 일어설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은 그리스도께 달려 있습니다. 지옥의 구덩이로 떨어질 것인지, 하늘의 영광으로 일어설 것인지는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습니다. 자녀가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입니다. “내 아이가 세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쳐서, 모든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그 아이와의 관계에 달려 있다고 들었다면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엄청난 선언입니까? 이 아이는 결코 평범한 아이가 아닙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이렇게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분이십니다.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구속 사역을 힘입어 들어갑니다. 또한 누구든지 지옥에 가는 사람들은 불신으로 인해 그 구속의 사역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의 구약 성도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이렇게 물으실 분이 계실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 전의 구약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죽지 않으셨다면 결코 하늘에 들어가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면 “아직 그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라고 물으실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에 매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 속에는 이미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았습니다. “그 사실을 몰랐는데요?”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그들에게 적용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죄값을 치른 것은 황소와 염소의 제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역이죠. 따라서 모든 사람의 운명은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미 듣지 않으셨습니까? 크리스마스 찬송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그 노래들은 초청으로 가득합니다. “와서 경배하세.” “한마음으로 하늘의 주를 찬송하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반응이 여러분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부한 자도 가난한 자도 나와 그를 왕으로 모시세.” “만왕의 왕이 구원을 베푸시네,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왕좌에 모시세.” “오 베들레헴의 거룩한 아기여 우리에게 오소서.” “우리 죄를 몰아내시고 오늘 우리 안에서 태어나소서.” “오 우리와 함께 거하소서 임마누엘.” “오 내 마음에 오소서 주 예수여, 내 마음에 주 모실 방 있도다.”
그중에서도 제가 정말 좋아하는 노래가 두 개 있습니다. “주 예수여 가까이 계셔서 영원토록 나와 함께 하소서.” “주의 사랑으로 모든 아이들을 품으시고 마침내 우리를 천국에 데려가 그곳에서 주와 함께 살게 하소서. 이것이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올바른 반응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존재했던 아기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아기입니다. 누가복음 2장 33절이 말하듯이 말이죠.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여러분도 이 위대한 진리를 다시 들으시면서 동일한 경이로움과 놀라움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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