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디모데전서를 함께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연말 휴가철이라서 많은 성도님들이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디모데전서를 함께 공부하는 게 망설여집니다. 왜냐하면 디모데전서 2장이 정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또 이런 결정을 하게 된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지난달부터 제 생각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 있는데요, 그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꼭 해야겠다는 마음이 제 속에서 불같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앞으로 몇 주간은 제 가슴을 이렇게 뜨겁게 달군 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오늘 그리고 다음주에는 ‘성경의 충분성’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성경의 충분성. 정말, 정말 중요한 주제입니다. 아마도 오늘 설교를 듣고 나면 몇 번이고 다시 들어보고 싶어질 겁니다. 또, 다른 성도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설교 테이프를 가져가게 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주제에 대한 저 개인의 관점을 말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철학적 관점이나 경험적 관점으로도 다루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히려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그 성경이 스스로 밝히는 충분성을 살펴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 위에 세워진 교회요, 그 기초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어 성경의 충분성이라는 주제는 매우, 매우 중요하게 공부해야 할 주제입니다.
제가 이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는데요, 소위 ‘복음주의자들’이라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성경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런 경향이 매우 보편적이면서 강력하고, 다소 교묘하면서도 미묘한 전략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슬픈 사실은 성도에게 가장 큰 적인 사탄이 주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 교회 안의 사람들이 여기에 깊숙히 빠져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교묘하고도 미묘한 전략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충분성을 아주 강력하게 공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계속해서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의 충분성을 공부할 때, 정말 신중하게, 때로는 경계심을 갖고, 또 조심스럽게 분별을 해야 합니다.
성경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성경이 믿음과 행위의 문제에 충분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복음주의 신학은 성경이 모든 믿음과 행위의 문제에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점이 오늘날 성경이 받는 공격의 핵심입니다. 자, 이제 다양한 관점의 예를 몇 개 들면서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가장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가 ‘세상적 경영 기법’이라고 부르는 것인데요, 지난 몇 년간 교회의 지도자들이 여기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가 어떤 성공한 기업의 경영방식 혹은 성공한 사람의 리더십에 관한 책을 읽고는, 교회 목회에 그것을 가지고 들어와서 그 책이 말하는 것이 마치 교회의 생명인 것처럼 귀를 쫑긋하고는 그대로 따라합니다. 이처럼 세상적 경영 기법이라는 신에게 절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교회에서 이런 방법이 마치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핵심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 말씀이 가르치는 원리를 이해해서 그 원리가 교회 성장에 관해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정말로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원한다면, 세상의 기업이 사용하는 경영 기술과 성공 시스템을 교회 안으로 가져와야 합니다.”라고 말이죠. 이것이 바로 교회 성장과 발전 문제에 있어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교묘하게 공격하는 겁니다.
제가 두 번째로 우려하는 부분은 오락과 여흥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경으로는 충분한 양식이 되지 못하므로 성경과 함께 어느 정도의 오락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교회가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적지 않은 재정을 투여하고 있습니다. 오락을 즐기는 사회의 영향을 받아서 일종의 기독교 유명인 명단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오락에 깊이 빠져서는 수많은 돈을 교회가 거기에 쏟아 붓습니다. 기독교 오락 방송을 포함한다면 아마도 수십억원에 달하는 돈이 그저 즐기는 오락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정이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고, 각자의 삶에 적용하는 것은 삶의 양식으로 충분하지도 즐겁지도 않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루하게 여기면서 오락을 갈구합니다. 영적 전쟁의 문제에서부터 시작해서 기쁨, 만족에 이르기까지 성도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죠. 저는 이런 태도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충분성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음으로 제가 괴로워하는 부분은 신비주의 혹은 미신과 같은 영역입니다. 저는 복음주의자입니다. 이 복음주의에 관해서는 화요일 저녁에 데이브 헌트가 여러분에게 더 자세하게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복음주의자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많은 사람이 미신에 몰두하고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는 미신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미신입니다. 초자연적인 힘, 초자연적인 경험, 황홀한 경험 같은 것을 추구하면서 영매나 악한 영, 심지어 사탄의 세계에 자신의 팔을 내밀면서 그런 것들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표적, 기사, 불가사의한 일들을 찾아서 헤매 다닙니다. 표적을 가르치는 학교도 생겼죠. 만일 우리가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지 못한다면, 예를 들어서 죽은 자를 살려내지 못한다거나, 병든 자를 치료하지 못한다거나, 하늘에서 불을 내리지 못한다면 결코 복음을 세상에 전할 수 없다고까지 말합니다.
피터 와그너가 미국성서대학협회의 총회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복음은 이제 표적과 기사 없이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면서 기적을 행하고 표적과 기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초자연적인 힘의 근원을 찾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와그너의 이 말은 더 이상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가지고 세상에 복음을 전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요즘에 일종의 주문과도 같은 기독교 만트라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탄에 맞서는 주문이라거나 악마를 상대하는 공식, 긍정적 자기 최면을 건다거나, 형상화하는 종교의식을 행하기도 합니다. 이런 의식과 행동이 치료를 위한 것이든, 새 차를 위한 것이든, 사귀고 싶은 여성을 위한 것이든, 새 집을 위한 것이든, 아니면 (좋게 말해서) 예수님을 전하기 위한 것이든, 사역을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든, 이 모든 것은 자기 최면 시각화 기법에 깊게 빠진 모습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얻기 위해서라는 허울을 쓰고, 실제로는 하나님의 적인 사탄의 능력을 얻는 미신의 한 종류에 불과한 것입니다. 새로운 종교 과학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정신적 복음주의 과학이라고 할까요. 동양 사상이나 힌두 사상이 가진 방법으로 동양 세계의 힘을 얻어서 사용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며, 이런 사상에 사람들이 깊게 빠져들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비주의에 심취해 있습니다. 초능력이 점점 강화되고 있습니다. 사탄, 악마, 질병 등에 권위를 가진 존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탄과 그 무리들 뿐 아니라 질병이라든지,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좋지 않은 사건들, 상황들 이런 것들이 초능력이 가진 권세라는 주장을 하면서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성경의 충분성을 믿지 않는 또 다른 우리의 영역은 바로 결혼과 가족 문제입니다. 성경이 결혼과 가족 문제에 있어 충분한 통찰력을 제공한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면 가정에서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고, 성경의 원칙대로 살면 결혼 생활도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때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성경의 원칙대로 살아간다면 가정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 모습이 됩니다. 하지만 현실은 속이고 감추고, 성관계 기법이 확산되는 등 가정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성경 이외의 것들이 너무나 많이 추가되었습니다. 아주 모호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성경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성경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동성애나 여성의 역할과 같은 영역에서도 성경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때가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성경이 다소 단순하고 또 정교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현대의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 지침을 줄 수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성경으로 현대 사회학적 현상을 다루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 성경에는 그런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자유주의 교회가 동성애를 다루는 방식이라든지, 복음주의 교회에서 여성의 역할을 재정의하는 것을 볼 때 이런 생각이 교회로 빠르게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교회가 가장 크게 영향을 받고 있는 영역은 심리학 분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정말 무서운 기세로 심리학이 교회 안으로 파고들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성경신학의 땅에서 심리학과 심리치료라는 새로운 언약의 땅 같아 보이는 곳으로 출애굽하는 복음주의 교회들이 있습니다. 목사, 전도사, 성경교사를 고용했던 교회가 이제는 심리학자들을 고용하고 있습니다.
신학교와 성경대학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성경에 통달하고자 연구하던 목회자들이 심리학과에 들어가서, 인류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사람의 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뿌리 깊은 감정적 불안을 다룸에 있어 성경이 정교하게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이 또한 교묘하게 성경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신학교가 교과과정을 전격적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신학교에서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를 채용해서 가르치게 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입니다. 심리학을 가르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심리학 강의를 개설하기 위해서 성경 과목을 줄이고 있습니다. 일반대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학교나 일반대학이나 단체로 신 출애굽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신비주의에 심취하고 미신을 신봉하는 것, 정신 과학과 시각화 기법, 최면술 등 모든 자아상과 관련한 것들의 출발점이 바로 이 심리학입니다. 교회에 들어온 이 모든 것이 새로운 하나님을 창조해냈습니다. 우리 교회가 겪었던 지난 소송들을 보십시오. 성경이 사람들이 직면한 심각한 문제에 답을 줄 수 있다는 믿음은 미개하며 원시적이라고 조롱을 당했던 사건들 말입니다.
세상은 성경이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고 꾸준히 말해왔습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이제는 교회가 여기에 맞장구를 치면서 심리적인 문제를 다루기에 성경이 불충분하다고 말합니다. 저는 거듭남의 문제를 심리적 구원으로 대체하는 것을 사람들이 옹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사이비 복음주의적 인본주의일 뿐입니다. 심리학이 교회로 끌고 들어온 자존감, 자기애, 자기 성취, 자아실현과 같은 것에 집착한다면 성경의 가르침을 알 수 없습니다.
조금 더 긴 안목으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세상은 우리보다 빠르게 심리학의 오류를 인정하고 있는 반면에, 교회는 불가피하다는, 정말 불가피하다는 말로 심리학을 교회로 사 들여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 정신과 의사, 정신분석학자, 그리고 심리학자가 한 자리에 모인 학회에 관한 기사가 이번달 18일에 LA 타임즈에 실렸는데 혹시 읽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약 7천 명이 참석한 역사상 가장 큰 규모였다고 합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 최고의 정신분석학자, 심리학자, 그리고 정신과 의사가 한 자리에 모인 그런 자리였습니다. 칼 로저스, 앨버트 엘리스, R.D. 랭, 브루노 베텔하임, 조셉 울프, 토마스 스자스… 정말 유명한 분들이죠. 심리치료의 기술과 방법 면에서는 가장 유명한 분들이 모두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학회 모임에 관한 기사가 정말 놀라웠습니다.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심리학계의 영웅들이 지난 100년간 심리치료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갈 것인지 평가하기 위해 모였다”라고 기사를 작성했지만, 참석자들의 실제 발언 내용은 달랐습니다. 정신분열증 연구 전문가인 랭은 “지난 한 세기 동안의 심리치료의 결과를 살펴보아도 인간 관계에 관한 어떠한 근본적인 통찰을 얻을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어떠한 근본적인 통찰도 얻을 수 없었답니다.
실습생, 학생 심리치료사, 정신과 의사, 사회복지사등 7천여명의 참석자들이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사람에게 사인을 받는 것이 최우선이었다고 하네요. 한 저명한 정신분석가가 이런 말도 했습니다. “불안을 치료하는 최고의 치료법은 콧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이런 치료법을 교회가 마구 들여와서는 마치 인류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그런 모습은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벨상 수상자인 리처드 파인만은 “정신분석학은 과학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정신분석에는 어떤 규칙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저 방대한 인간의 의견일 뿐이라는 겁니다. 그 속에서 어떤 규칙을 찾을 수 없다는 거죠. 뉴욕대 교수인 폴 비츠는 “교회는 세상 전문가들의 어떤 사상이 유행이 지나서야, 사람들이 비판을 시작할 즈음에야 교회에 적용하려고 안달한다. 이는 유행이 막 끝나갈 무렵에야 시류에 편승하려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기독교를 “고가 매수 저가 매도”라는 증권가 속담에 빗대어 비판했습니다.
교회는 심지어 시작한 사람들조차 실패를 인정하는 세상 풍조에 뛰어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세상 풍조가 지금도 여전히 현대 기독교 교회에 엄청나게 침투하고 있습니다. 신비주의, 정신과학, 초자연주의, 미신, 심리학 이런 것들이 교회, 대학교, 신학교에 침투해 들어와서는 성경신학과 성경의 충분성을 더럽히고 있는 작금의 풍조가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 모든 것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심히 죄악되게 대하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가 성경의 충분성을 믿지 않는 것, 즉 성경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믿음을 죄라고 생각합니다. 패커 박사가 이 문제에 대해 지적한 부분을 한 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기독교 신앙과 행위의 중요한 문제에 대한 확신이 전반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외부 관찰자들의 눈에는 우리가 속임수에서 속임수로, 묘기에서 묘기로 이리저리 비틀거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안개 속에 있는 수많은 술 취한 사람들처럼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설교가 흐릿하고 불명확합니다. 머리는 혼란하고, 마음은 초조하고, 의심이 힘을 빼앗아가고, 불확실성이 행동을 마비시키고 있습니다. 3세기만에 로마를 이겨낸 1세대 그리스도인들이나 그 후에 나타난 그리스도인들의 종교개혁과 청교도들의 각성운동, 복음주의의 부흥, 지난 세기에 일어난 위대한 선교운동 때와는 달리 지금 우리는 확신이 부족합니다.” 우리에게 확신이 부족한 이유는 우리가 성경을 죄악된 관점으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의 삶과 행위에 있어 성경이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고 믿는 관점 말입니다. 이것은 그냥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충분성을 부정하는 매우 중대한 죄입니다.
자, 이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이 심각한 공격에 맞서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더 자세히, 또 길게 말씀드릴 수 있지만 그 이야기는 화요일 밤에 들으실 기회가 있으니까 이제 해결책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성경에서 우리 삶의 모든 행위에 충분한 지침을 과연 찾을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저의 분명한 대답은 “네, 그렇습니다.”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대답이 ‘예’인 증거는 우주 최고의 권위자이신 하나님의 증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충분성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증언을 이번 주와 다음 주에 여러분과 함께 살펴볼 것입니다. 다음 주에 시편 19편 한 편에만 집중할 것인데요, 저는 이 시편 19편이 성경의 충분성을 증거하는 가장 위대한 성경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그에 앞서 이 중요한 진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몇 개의 성경구절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부터는 제가 여러 성경 구절을 말씀드릴 겁니다. 지금 일일이 찾아보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하고 또 기초적인 성경 구절들이므로 어떤 구절들인지는 적어두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녹음된 테이프도 꼭 가져가셔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중에서도 정말 중요한 구절들은 지금 함께 찾아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알아보려는 것의 큰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 중요한 출발점이 되는 말씀은 고린도후서의 말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한 구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5절, 고린도후서 3장 5절 말씀입니다. 아주 짧은 구절이니까 귀를 기울여서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뭐라구요? 다시 읽겠습니다.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이 한 구절 만으로 한편의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만, 오늘은 핵심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의 만족은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만족은 사람의 지혜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만족은 인적자원으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이 때 우리의 만족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최대한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에서 우리가 사는 삶의 모든 자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겁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 삶의 자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영역, 계층은 사람의 지혜가 양식이 될 수 없는 곳입니다. 사람의 지혜가 자원이 될 수 없는 곳입니다.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성경 이외의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가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 즉 모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것들은 우리가 삶을 사는데 있어 매우 유익한 것들입니다.
하지만 영적 생활에 있어서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가르치십시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을 성경 밖에서 찾아보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시도가 바로 죄입니다. 세상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삶과 행위와 사역에 관한 문제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충분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충분합니다.
신자인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룰 수 없는 문제라거나, 네가 가진 영적인 문제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거나, 다른 곳에서 해결책을 찾는게 낫겠다거나, 심리치료나 정신분석 같은 것을 받아보면 좋겠다거나, 우리가 감당할 수 없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문제인가요? 신자의 삶에 관한 문제인가요? 교회와 연관된 것인가요? 인간 영혼에 관한 문제인가요? 인류 투쟁의 문제인가요? 삶의 모든 난관의 문제인가요? 성경이 이 모든 것에 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성경에 답이 있습니다. 성경만으로 충분합니다.
고린도후서 9장의 다른 구절도 살펴봅시다. 8절과 11절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고린도후서 9장 8절입니다. 여러분, 잘 들어보십시오. 들으시면서 최상급 표현이 어디에 나오는지 한번 확인해보십시오. 그러지 말고 지금 고린도후서 9장 8절을 찾으셔서 최상급 표현에 밑줄을 쳐보십시오.
최상급 표현들을 잘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9장 8절입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만족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만족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이 능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한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은혜를”, 자 여기에 첫 번째 최상급 표현이 나옵니다. 모든 은혜라고 했습니다. ‘약간’도 아니고 ‘많은’도 아니고 ‘모든’입니다. 모든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또 최상급 표현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여기에 또 최상급이 있습니다. “항상… ” 가끔이 아니고, 대부분도 아니고, 항상입니다. “모든 것이 넉넉하여” 여기 또 최상급이 나오죠.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몇 가지가 아니고, 대부분의 것도 아니고, 뭐라고요? “모든 것이.”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복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거나,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거나 그래서 이런 저런 철학과 세상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 생각이 죄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 그런가요? 하나님께서 우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에 넉넉하게 하시려고 능히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넘치게 하신다는 성경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계속 보십시다.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또 나옵니다.
이번에는 11절을 봅시다.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여기 또 나오죠. 잘 보셨습니까? 모든 최상급 표현들이 정말로 놀랍습니다. 저는 정말로 놀랍습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성경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합니까? 성경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합니까? 성경이 개입할 수 없는 문화라고 합니까? 그래서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까?
성경이 인류가 겪는 더 깊은 문제에 답할 수 없다고 합니까? 이런 말들은 오늘 읽은 성경의 증언을 거스르는 것들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자원을 공급하실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충분하게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고 또 주시고 충분하게 주십니다. 하나님만으로 충분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자원을 충분하게 주신다는 생각을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과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자원을 주신다고 믿습니다. 성령 하나님과 성경 말씀 중에서 오늘은 성경 말씀에 초점을 맞춰 말씀드리겠습니다. 잘 들으시고, 성경구절이 어디인지 적어두었다가 나중에 꼭 다시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첫째로 살펴볼 구절은 요한복음 17장 17절에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하신 말씀입니다. 신자의 완전한 성화, 즉 신자의 완전한 거룩, 죄로부터의 완전한 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읽습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거룩하게 한다는 말은 죄에서 하나님께로 구별해 냈다는 뜻입니다. 이 거룩은 영적 완전, 영적 완성의 개념인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오 하나님이여, 그들을 정결하게 하옵소서, 거룩하게 하옵소서, 죄에서 구별하여 주께로 돌리시고 오직 주의 진리로 행하소서.”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그러면 신자의 완전한 거룩은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라는 결론에 쉽게 도달할 수 있습니다. 신자의 완전한 거룩은 하나님의 말씀이 하시는 사역이라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다른 것을 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이단이 되는 겁니다. 실제로 수많은 이단들이 해왔던 방식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메리 베이커 에디의 ‘성경에 비춰본 과학과 건강’이라는 책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조셉 스미스가 본 환상과 브링햄 영의 글이 필요하다는 식 말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교회의 칙령같은 것들이 필요하다고 오랜 세월 말해왔습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진행된 성경 말씀과 더불어 이 사람, 저 사람의 글이 필요하다, 성경 말씀과 더불어 사람의 지혜와 철학이 필요하다, 이런 종류의 말들은 성경의 충분성을 향한 공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진리로 신자들을 완벽하고 정결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신자의 완전한 거룩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완성됩니다.
또 살펴볼 성경은 선지자 미가의 증언 기록입니다. 미가서 2장 7절입니다. 이 구절에서 미가는 정말 중요한 성도의 삶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의 말이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유익하지 아니하냐?” 풀어 말씀드리면 신자가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간다면 신자의 삶에서 유익을 만들어 내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신자의 삶에서 복을 만들어 내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말씀의 요점은 하나님의 말씀이 삶을 유익하게 하는 근원이라는 겁니다. 정직하게 행하여 말씀에 순종하는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유익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모든 유익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번째 편지에서 이 주제에 관한 중요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바울은 성령 하나님께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드러내셨다고 했습니다. 정말 놀라운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으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충만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지혜를 나누어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그 가르침을 드러내십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사람이 가르치는 말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지혜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 지혜가 매우 포괄적이고, 효과적이고 완전하다고 11절에서 말합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드러내시는 성경말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살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포괄적입니까?
성도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살피고 평가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 16절에서 말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에 어떤 부족한 게 있을까요? 예수님께 한계가 있을까요? 예수님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배울 것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완전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모든 것을 아는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그 어느 것 보다 탁월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부족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그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을 판단하고, 평가하고, 살피고, 이해하고, 추론할 수 있게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우리에게 주기 때문입니다. 제 말을 잘 들어보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마음은 충분합니다. 부족하지 않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마음보다 더 충분한 것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나 필요나 쟁점을 대할 때 우리가 가져야 하는 것은 이러한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것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하나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시는지를 아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마가복음 12장 24에서 예수님께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성경도 알지 못해 사람들이 오해했다고 하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성경을 알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능력을 원하기 때문에 성경만으로는 안된다고 합니다. 표적도 있어야 하고 기사도 행해야 한다고 합니다. 성경대로 살 것을 기대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악마와 사탄을 대적하고 질병을 물리치려면 이런 저런 초자연적인 힘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저런 영매도 부르고 영적 능력으로 묶기도 하고 풀기도 하고, 우리 환경을 통제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경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을 상대하러 산 위에 올라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할 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내가 널 묶고, 저주하고, 너를 구덩이로 보내겠다”라고 하셨나요? 어떻게 하셨습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세 가지 유혹을 오직 한 가지 방법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기록되었으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같은 공식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사탄이 실패하여 떠나자 천사들이 나아와 수종들었다고 했습니다. 그 능력은 어떤 신비한 정신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그곳에 충만한 능력이 나타납니다. 어떤 필요에도 대처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은 믿는 자 안에서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활력을 얻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구절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입니다. 여러분 아주 잘 아는 구절이지요. 제가 한 번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이 구절을 보면 검이라는 무기가 등장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어떤 것보다 날카로운 무기입니다.
세상에 이런 하나님의 말씀같은 무기가 또 있을까요? 계속해서 말씀을 보십시다.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이 혼과 마음과 인간의 본질 가장 밑바닥까지 들어가서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 심각한 문제군요. 정신과 치료를 받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에게 가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병원에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다른 환경에서 도움을 주실 분에게 보내드리겠습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잘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고, 능력이 있고, 그 어떤 무기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 가장 깊숙히 들어가서 가장 깊은 생각과 의도를 드러내고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정결하고 진실하도록 그 마음을 쪼갤 것입니다. 그래서 13절의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될 것입니다. 어떤 정신분석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의 말씀은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을 열어, 그 곳을 관통해서 그 마음을 산산조각냅니다. 감추인 것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관통하기에 충분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과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 또 이 말씀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깊이 관통하는 힘을 가졌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성경이, 즉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강력하고 충분한 것이 있을까요?
예수님도 누가복음 11장 28절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모든 영적 충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복이 있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사람들은 “복”을 마음이 설레고 흥분된 상태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복”은 더없이 행복한 삶을 의미합니다. 더없이 행복한 삶 말입니다.
평온하고 기쁜 삶이고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이자 소망으로 가득 차서 만족하는 삶입니다. 행복한 삶입니다. 성취감이 있고, 기쁘고, 의미 있고, 그래서 더없이 행복한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하신 증언의 말씀입니다. 더없이 행복한 삶으로 향하는 문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분합니다.
지난 몇 주 동안 한 자매 성도님과 두 번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 번은 직접 만났고, 한 번은 전화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자매는 불치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아주 사랑스럽고 귀한 자매였죠. 자매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전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어요. 너무나 두려워요.” 그래서 제가 “왜 두려운가요?”하고 물어보았더니, “천국에 가지 못할까봐 너무 두려워요.” 라고 하더라구요. 제가 또 “복음을 믿나요?”하고 물었더니 “네, 믿습니다.” 라며 망설이지 않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몇 가지 질문을 더 했습니다.
“자매님의 삶을 예수님께 맡겨드렸나요?” “네.” “자매님의 가장 큰 소망은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인가요?” “네.” “예수님을 사랑하나요?” “네.” “그럼, 무엇이 두렵습니까?” “처음에 이 병에 걸렸을 때 하나님을 저주했거든요. 하나님께서 저를 용서하지 않으실까봐 두려워요. 화도 나고 분해서 막 하나님을 욕했거든요. 제가 생각해도 끔찍한 욕을 했어요. 하나님은 저를 용서하지 않으실 거예요.”
여러분이라면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해주시겠습니까? 죽음이 코 앞에까지 다가와 있는 사람에게 말입니다. “음. 글쎄요, 심각한 문제라서 분석을 좀 해봐야겠습니다.” 그러겠습니까? “의심이라는 악한 영을 묶어야 하니까 방법을 좀 찾아봅시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한 번 상상해 보십시다. 천국에 자신이 가 있는 상상을 해보세요. 그렇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냥 그렇게 상상하세요.” 여러분은 지금 웃고 계시지만 실제로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심각한 상황 앞에 놓인 이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까요? 저는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자매님, 제가 성경에 있는 이야기를 좀 말씀드릴께요. 하나님을 저주했다고 하셨죠? 어쩌면 자매님보다 더 심하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욕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인데요, 신성모독이라는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디모데전서 1장 12절로 시작해서 성경의 내용을 말해주었습니다. “바울은 예전에는 예수님을 비방하고 해를 입혔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목회자로 부르셨고 충성되이 여겨주셨습니다. 바울은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라고 했는데 바울이 이런 간증을 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큰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다면, 이보다 작은 죄를 지은 죄인은 모두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해 싸우고,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성도를 박해하고 죽였던, 어쩌면 지구상에서 가장 극심한 이 신성모독자를 구원하시고 용서하셨다면, 하나님께서 자매님도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자매님의 목소리에 소망이 묻어났습니다.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완전한 용서를 말하는 성경 구절들을 계속해서 말해 주었습니다. 이런 두려움에 싸여있는 사람에게는 그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열어 알려주는 것이 답입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믿을 때 하나님의 살아계신 영이 성경을 능력 있게 하십니다. 절대 부족함이 없습니다. 죽음의 문턱에 있는 사람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더없는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경의 충분성은 야고보서 말씀에도 있습니다.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실천하는 자니.” 여기에서 온전하다는 말은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완성된 율법, 온전한 율법입니다. 성경이 미완성이라구요?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맨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을 보십시오.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말 엄청나지 않습니까?
성경은 완전한 율법입니다. 야고보서 1장 25절에서 “온전한 율법’이라고 하였는데, 2장에서는 “최고의 법”이라고 했습니다. “온전한 율법을 실천하는 자는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더없는 행복과 만족, 성취, 그리고 믿는 자를 위한 삶과 행위에 관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충만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성령 하나님을 통해 믿는 자의 마음으로 전달됩니다.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의 증언도 찾아보십시다. 누가는 그리스의 베뢰아라는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사도행전 17장 11절입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고결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참 멋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는 자들이 영적으로 고결한 사람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받는다는 것은 믿음으로,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성경을 매일 묵상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풍성한 삶은 성경과 함께 수많은 것들을 추가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삶입니다. 성경은 매일 매일의 양식입니다.
사람들이 영적인 삶에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스스로 문제 속으로 빠져들고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범위를 벗어났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고결한 영성은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때 비로소 삶을 대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렇게 할 때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충만하고 풍성한 삶을 추구하고 찾는 사람들이 심리학에서 헤메고 있습니다. 심리학, 정신과학, 신비주의, 황홀한 경험, 초자연적인 미신, 오락, 교회관리 기법 등등을 추구하는 잘못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결국은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얻고 말 것입니다. 충만하고 풍성한 삶과는 아주 정반대인 것들을 말입니다.
여러분, 행복하고 싶습니까? 기쁨이 가득하고 싶습니까? 행복에 겨워 항상 노래를 흥얼거리고 싶습니까? 모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습니까? 정말로 풍성하고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하고 싶습니까?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가정생활과 보람있는 직장을 원하십니까?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런 행복한 삶의 비결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어떻게요? 풍성하게 … 바로 이겁니다. 이거면 충분합니다. 이게 다입니다. 모든 것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행복한 삶, 기쁜 마음, 노래의 영, 좋은 관계, 풍성하고 안정된 결혼생활, 충만한 가정생활, 만족스러운 직장. 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풍성히 머무는가와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성경만으로 이 모든 것이 가능한가하고 의문을 가질 분이 아마 계실 겁니다. 정말입니다. 성경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비결은 말씀을 따르는 마음이고, 말씀을 따르는 마음은 우리를 충만하고 만족하게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2절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영적인 성장, 영적인 성숙, 영적인 힘, 성숙의 과정,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여러분의 열정과 깊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장합니다. 그리고 이 성장은 어려움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 그렇게 됩니다. 아기가 젖을 먹으면 자라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베드로는 아기가 젖을 찾을 때 혼신의 힘을 다해서 열정으로 찾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고 매일 간절히 원하면 영적인 힘을 발견하게 됩니다. 말씀이 영적 자원을 제공해줘서 우리를 능력있게 해줍니다.
베드로후서 1장 3절에 “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라고 했습니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졌는데, 몇 가지만이 아니라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이 이어집니다.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면 그 어떤 것도 마주할 수 있는 자원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 경건에 필요한 모든 것,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직도 왜 제가 항상 성경을 가르치는지, 우리 교회에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지 궁금하십니까?
성경 이외에 우리를 영적으로 충족시켜줄 다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지식, 우리를 부르시고 말씀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그 하나님의 지식에서 우리의 생명과 경건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받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필요한 자원을 얻기 위해 다른 잡다한 것들을 공부하고 유용한 기법을 익혀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제 마음이 슬픕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드립니다. 성령 하나님으로 활력을 얻은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과 경건을 얻기에 충분합니다.
조금 더 직접적이고 포괄적인 내용이 사도행전 20장에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을 만났을 때, 아주 흥미로운 말을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이야기 하면서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라고 했습니다. 유익한 모든 것을 전했고, 거리낌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장로들은 우리와 같이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와 같이 모든 삶의 문제, 모든 영적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20절에서 바울은 신자에게 이익이 되는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다고 말합니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그리고는 2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신자에게 이익이 되는 모든 것의 내용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뜻에 사람의 뜻을 조금 더한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울을 하나님의 뜻이 성도에게 완전하고 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32절에 또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정말로 성경이 우리를 든든히 세우기에 충분할까요? 정말로 성경이 인생을 사는 동안 겪는 모든 어려움, 필요, 불안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할까요? 네 그렇습니다. 충분합니다. 혹시 누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충분하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기 때문이죠. 작은 죄가 아닙니다. 정말 심각하게 하나님을 배신하는 겁니다. 바울의 말을 다시 들어보십시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만이 우리에게 유익입니다. 성경 말씀만이 우리를 강하게 합니다.
골로새서 2장 3절 말씀도 보십시다. “예수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제 말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골로새 성도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신자인 여러분과 제가 지혜와 지식으로 알아야 하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다른 곳을 찾아 헤매면 안 됩니다. 이어서 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세상이 교묘한 말로 여러분을 속이지 못하게 하십시오.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바로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바울은 7절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우리는 그 말씀 안에 뿌리를 박았으니 세움을 받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의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는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말씀입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 안에 뿌리를 박았으니 그 안에서 세움을 받을 겁니다. 가르침을 받은대로 말씀을 통해 믿음 안에서 세워질 것입니다.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말씀 안에서 드러난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8절입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세상의 철학과 생각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0절입니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예수님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있고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인간의 철학을 멀리하라고 합니다. 인간의 철학은 영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다른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인 우리에게 있어 영적인 차원, 사람의 영혼과 마음 속 깊은 필요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요한일서 2장 20절 말씀의 증언을 보십시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이때 ‘모든’은 무슨 의미일까요? ‘전 세계와 모든 우주에 존재하는’ 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 때 모든은 우리의 영적인 삶과 관련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거룩한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분은 하나님이시지요.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말은 성령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을 가지고 있으므로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이어서 21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계시로 진리를 안다고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27절에서 그러므로 아무도 우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가르침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신자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으로 모든 것을 알므로 다른 어떤 사람의 가르침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데살로니가전서 2장을 펴보십시오. 데살로니가전서 2장입니다. 11절과 12절에 보면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동을 하도록 격려하고 위로하고 경계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정신을 차리고 마땅히 살아야 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했고, 그렇게 살기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알려주었다고 말합니다. 13절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말입니다. 계속 읽습니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역사하신다고 말합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믿는 자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역사하십니다. 성숙의 역사, 능력의 역사, 세움의 역사, 성장의 역사, 무엇보다 신자가 그리스도를 닮게 하는 역사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만 이뤄지는 역사입니다. 실제로 일어납니다. 여러분에게도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면 그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부족함이 없는 충분한 역사입니다.
존귀한 성도인 욥은 어땠나요?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사탄이 모든 것을 앗아가버렸습니다. 모든 재산, 땅, 농작물, 가축은 물론이고 가족까지 죽게 했고 건강도 빼앗았습니다. 욥은 절대 빈곤과 궁핍에 빠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 욥이 이렇게 말합니다. 욥기 23장 12절입니다.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욥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고 합니다. 먹는 음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각종 문제와 씨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디에 기초하여 살아갈 것인가가 정말로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베뢰아 사람들처럼 매일 성경을 찾아 읽고 묵상하십니까? 욥처럼 육신을 위한 음식을 먹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이 중요합니까? 여러분 자신의 위안이 가장 중요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중요합니까? 여러분 자신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십니까? 사람들이 이 삶의 기초를 잘 잡기를 정말 간절히 바랍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자신에 집중하기 때문에 각종 문제들, 감정적인 문제들에 사람들이 빠지는 겁니다. 욥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었고, 마지막까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던 겁니다.
성경 한 곳을 더 찾아보십시다. 구약성경 신명기 6장, 신명기 6장입니다. 이 신명기 6장에서 이스라엘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 말씀이 바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신학의 가장 근본적인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근본적인 진리를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율법이 이것 하나 뿐이었던 것은 아니니까 이 말은 율법을 요약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분이시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 말씀이 모든 율법을 요약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수많은 계명들을 가장 쉽게 요약한 겁니다. 모든 율법이 한 문장으로 축약된 겁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핵심이 무엇인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일어서나 앉으나 길을 걸을 때마다 말씀을 가르치고 손에 적고, 머리에 적고, 문설주에 적고, 대문에 적으라는 겁니다. 어느 때나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의식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삶의 비결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하나님의 백성의 삶입니다. 성경으로 충분했습니다. 성경이 만물의 근원으로서 모든 관심을 지배했던 겁니다.
누가복음 16장에는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내용이 있는데요, 역시 성경의 충분성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상처투성이인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나사로는 죽어서 축복의 장소인 아브라함의 품에 있고 부자는 죽어서 불 속에 던져져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부자가 자기 형제들은 여기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으니 나사로를 보내 증언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28절, 29절입니다.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그들에게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겁니다. 그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 하라는 거죠. 부자가 다시 말합니다. 30절입니다.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정말 놀라운 전도법이 될 겁니다. ‘내가 방금 지옥에 다녀왔는데 정말 거기는 가지 말라고 말해주러 왔어’라고 한다면 정말 심각하게 듣겠죠. 어떤가요? 초자연적인 확증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견해와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들은 단순한 복음을 충분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표적과 기사와 부활이 없으면 절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죽은 자를 살리시고 실제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1절입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산 증거십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기적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모든 영적인 문제에 충분합니다. 그 능력을 우리 사람에게 적용하는 핵심은 말씀을 믿고 순종하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저는 수년간 이렇게 말씀을 드려 왔고 앞으로도 언제나 즐겁게 행복하게 이렇게 말씀드릴 것입니다.
성경만으로 정말 충분합니까? 오늘 마지막으로 살펴볼 디모데후서 3장 15절 말씀으로 결론을 짓겠습니다. 긴 말을 하지 않아도 이 말씀이 분명하게 말씀하실 겁니다. 신약성경에서 성경의 충분성을 말해주는 가장 위대한 구절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 말씀입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성경은 구원에 이르기에 충분합니까? 그렇습니다. 충분합니다. 성경 이외에 다른 무엇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성경은 우리를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합니다. 책망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을 그만해’하는 것이고 바르게 한다는 것은 ‘지금부터는 이렇게 해”하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 성경은 의를 가르칩니다.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이끈다는 겁니다.
이제 17절을 보십시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어떤가요? 성경으로 충분합니까?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충분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여 충분합니다.
몇 년 전, 모드 프레이저 잭슨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만약 내가 성경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고, 완전하고, 영감을 받아 쓰여져서 전혀 흠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날마다 성경을 읽지도 않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면? 만일 내가 말로만 허울 좋게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싶다고 하면서 그 진리를 찾기 위해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어떨까? 내 말이 내 삶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정말로 진지하고 충격적인 질문입니다. 이 진지한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은 ‘아니, 전혀 상관이 없다’입니다. 여러분은 원하는 모든 것을 믿는다고 말을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성경을 공부하지도 않고, 허울 좋게 말로만 하는 그 진리를 찾기 위해 성경을 펴지 않는다면, 무슨 말을 하든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말씀을 믿고 말씀을 순종하면 그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충만하게 채워줄 겁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이름보다 더 높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충분하신 분이신데 그 충분하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또한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흠도 없는 온전한 성경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리이신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기에 아무런 부족이 없으며,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믿는 극악무도한 죄로부터 교회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주님, 이 땅에 사는 모든 인생의 모든 필요를 위해 기도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권능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충만이 모든 인생 가운데 가득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This article is also available and sold as a bookl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