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시편 19편을 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지난주부터 ‘성경의 충분성’을 주제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로 다시 돌아가기 전에, 이번주도 같은 주제로 말씀을 드리면서 마무리를 짓도록 하겠습니다. 지난주에는 성경 여러 곳을 살펴봤지만, 오늘은 시편 19편 한 장만 집중적으로 보겠습니다.
저는 청교도 서적을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가끔 서재에 앉아서 읽는데요, 이번주에는 토마스 왓슨이 성경을 주제로 쓴 아주 훌륭한 글을 읽었습니다. 우리에게 꼭 맞는 구절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제가 적어왔습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사탄과 그 수하들은 성경의 빛을 끄려고 했지만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이와 같은 결과는 성경의 빛이 하늘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지난주에 제가 확신하는 바를 하나 말씀드렸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의 빛을 끄려고 한다는 것이었죠. 그리고 가장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가장 염려하는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인정하는 사람들이 그런 시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직면한 가장 교묘하고 위험한 위협이 복음주의 기독교계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의 충분성을 신뢰하지 못할 뿐 아니라 비방하기까지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가르치고, 선포하고, 신뢰하고, 살아내는 것이 영적인 삶에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완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만들어 내는 것 같습니다. 부족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 수혈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느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지난주에도 지적했듯이 이런 태도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중대한 죄악이자 성경의 충분성을 심각하게 불신하는 태도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복음주의 교회가 심리학으로 대거 이동했습니다. 이 심리학을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삼는가 하면, 교회 성장의 방법론을 세속적인 사업과 기업 구조에서 찾고 있습니다. 정치적 힘에서 부흥의 열쇠를 찾기도 합니다. 표적과 기사, 새로운 계시, 초자연적 활동을 갈구합니다. 말씀이 아닌 다른 큰 능력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킨다는 소리를 듣는 유명한 목사들이, 순전한 복음과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번영과 방종과 호색과 성공이라는 일종의 대중적 복음으로 변질시켜 버렸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제게는 배신처럼 느껴집니다. 교회가 끔찍할 정도로 세속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경을 비참할 정도로 약하게 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저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이 정말로 영적인 삶에 충분할까요? 성경이 정말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충만한 삶을 살려는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자원을 제공해줄까요? 아니면 성경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좋게 말해서, 사람의 지혜와 기법으로 하나님을 도와야 하는 것일까요?
이제부터 ‘성경의 충분성’에 대한 문제의 답을 시편 19편을 살펴보면서 찾아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이 시편 19편이 모든 성경 말씀 중에서 성경의 충분성을 가장 간결하게, 또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19편과 119편을 비교하면서 살펴볼 텐데요, 병행구절이 많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말씀드릴 내용은, 시편 19편의 기자인 다윗은 보통 사람이라면 견디기 어려웠을 인생의 큰 곤경과 위기, 우여곡절, 투쟁, 시험, 근심, 시련 등을 직접 겪었기에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다윗은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는 것, 깊은 죄악으로 떨어지는 것, 견고했던 신뢰를 배신하는 것, 자녀의 공격을 당하는 것, 결혼생활을 망치고 가족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깊은 감정을 토로할 수 있는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히 충분하다는 것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시편 19편은 하나님의 계시의 중요성을 개론형식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1절부터 6절에서 우리는 자연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하늘과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궁창에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계속해서 본문은 태양의 움직임에 대해, 우주를 가로지르는 놀라운 궤도에 대해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은 자연계시의 상징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창조세계에 자신을 드러내신 것을 신학자들은 일반계시라고 합니다. 로마서 1장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는 훨씬 더 구체적인 계시가 있습니다. 시편 기자가 7절에서 언급하는 내용입니다. 시편 19편의 후반부인 7절부터 14절은 성경에 나타난 구체적인 계시인 특별계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특별계시를 살펴보면서 성경의 충분성을 확인하겠습니다.
이제부터 성경의 충분성, 성경의 가치, 그리고 성경을 향한 헌신 이렇게 세 가지를 말씀드릴 겁니다. 이걸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여러분, 지금부터 제가 수많은 성경구절을 빠르게 짚어나갈 겁니다. 그러니까 집중해서 들으시면서 깊이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하는 데 기초가 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자 우선, 성경의 충분성에 주목해 봅시다. 7절에서 9절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이 세 절의 구조에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는 여섯 가지 생각의 줄기가 있고, 이 여섯 가지 줄기에는 각각 세 개의 요소가 있는데, 성경의 명칭, 성경의 특성, 그리고 성경의 유익이 그것입니다. 먼저 성경의 명칭으로는 율법, 증거, 교훈, 계명, 경외하는 도, 법입니다. 이 모두를 성경과 동의어로써 사용했습니다.
다음으로 성경의 6가지 특성은 완전하고, 확실하고, 정직하고, 순결하고, 정결하고, 진실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의 6가지 유익은 성경이 영혼을 소성시키고,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 하고, 영원까지 이르고, 모두 다 의롭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이 모든 영적 자원을 제공한다는 겁니다. 이 세 구절에, 성경에 대한 절대적으로 탁월하고 포괄적인 진술이 단 몇 개의 단어로 함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생각, 무한하신 지성과 일치합니다. 이 세 구절의 방대함은 우리의 이해력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여섯 개의 요소도 함께 살펴봅시다. 이 세 구절에는 ‘여호와의’라는 말이 6번 나옵니다. 여호와의 율법, 여호와의 증거, 여호와의 교훈, 여호와의 계명,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 여호와의 법, 이렇게 6번입니다. 이 모든 표현은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언약의 하나님을 이르는 ‘여호와’라는 단어가 여섯 번 등장해서 성경의 충분성의 근원을 밝히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편 19편을 통해서 모든 영적 필요에 대해 성경만으로 충분하다는 하나님 자신의 증언을 확인한 겁니다.
이제 이 여섯 번의 여호와 호칭을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7절은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입니다. 성경을 일컫는 첫 번째 명칭은 ‘율법’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의 한 부분을 강조한 것인데, 바로 ‘토라’입니다. 기본적으로는 성경적 가르침 또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가르침이나 교훈으로서의 본성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가르치신다는 뜻입니다.
율법이라는 용어는 가르침을 일컫는 말로, 성경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교리로 규정합니다. 이것은 신조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바에 대한 것이죠. 또 성품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것이죠. 또 행위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행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결국 율법은 인간의 삶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가르침을 온전히 설명하는 단어입니다. 삶을 위한 하나님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7절에 따르면, 성경을 통해 주어진 이런 가르침은 완전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완전합니다. 야고보는 실제로 완전한 율법이라고 불렀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것을 인간의 불완전한 사고와 대조시킵니다. 이 “완전한”이라는 단어는, 온전하다, 완성되었다, 충분하다를 의미하는 보편적인 단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사실 구약을 연구하는 한 신학자는 이 완전성을 “사물의 모든 양상을 완전히 아우르는 모든 면”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즉 포괄성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성경이 모든 것을 아우른다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가르침인데, 모든 것을 포괄하는 근원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7절 앞부분에서 특히 강조하는 점은 성경의 완전함이 영혼의 소성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6가지의 유익한 점들 중에서 첫 번째입니다. 성경은 영혼을 소성시킵니다. ‘소성시키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소생시키다, 회복시키다, 새롭게 하다, 완전히 변화시키다 이런 의미가 있는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의미는 ‘완전히 변화시키다’입니다. 이 ‘소성시키다’라는 단어에 담긴 개념은, 성경이 모든 것을 담고 있어서 한 사람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영혼의 모든 측면에 온전한 생명을 부여합니다. 영혼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우리에게 친숙한 ‘네페쉬’입니다. 인격이나 자아, 마음을 의미하죠. 이 모든 뜻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종합해보면 영혼이란 내면의 인격, 전인격, 실제 우리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말씀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담고 있어서 실제 우리를, 우리의 전인격을 전적으로 변혁시킬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전인격의 소성과 완전한 변화, 회복, 영적 탄생과 성장에 충분합니다. 디모데후서 3:15-17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말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는 말씀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모든 선한 일”을 행하여 “온전하게” 만든다고도 했죠.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는 전적으로 완전한 변화의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것을 담고 있어서 영혼, 즉 살아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모습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회심’, ‘거듭남’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베드로전서 1:23에서 같은 증언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다시 말해서 거듭남, 회심, 그리고 완전한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 바울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영혼을 소성시키는 것은 바로 말씀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6절에서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말씀에 담긴 능력은 한 인생을 완전히 바꿀 수 있습니다. 말씀은 거듭나게 하는 힘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하지 않고 무능력하기 때문에 일종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터니티>라는 잡지에 실린 “세속적인 섹시한 락 가수가 오래된 옛 이야기에 자신의 표현을 섞어서 약간 천박하게 표현하는 것”이라는 글처럼, 말씀을 잘 포장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 약하고 그 자체에 능력이 없어서, 유명한 슈퍼스타를 통해서 전해질 때에만 설득력이 있는 걸까요? 경건하거나 말씀에 실력이 있어서 유명한 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이루었거나 성품이 뛰어나서 유명한 게 아니라, 대중매체가 유명하게 만들어줘서 유명해진 그런 사람이 말씀을 전해야만 설득력이 있는 걸까요?
말씀의 능력이 할 수 없는 일을 유명인사가 할 수 있다고 믿어야 되는 겁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감정이나 상처받은 자아나 낮은 자존감에 감정적으로 호소해야 하는 겁니까? 그렇게 해서 어려운 복음을 굉장히 쉽게 바꿔서, 사람들이 받아들이긴 하지만 무엇인지 모르게 만들어야 할까요?
아니면 복음 그 자체가 약하기 때문에 물질적 성공이라는 약속으로 더럽혀져야만 하는 것일까요? TV에 나오는 복음주의 설교자들은 왜 우리가 큰 돈을 보내고 믿기만 하면, ‘겨자씨’만한 믿음이 상상할 수도 없을 더 큰 돈을 가져다 준다고 말하는 겁니까? 복음 그 자체로는 영혼을 살릴 수 없기 때문에, 복음에 돈을 더해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춰야만 하는 겁니까?
한 나라가 구원받기에 성경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일까요? 그래서 기독교 정당이 필요하고, 정부의 통치가 필요한 것일까요? 측량할 수 없이 풍성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부름받은 자들이 말씀을 제쳐두고 정치 활동가와 로비스트가 되는 것이 정말 주님의 뜻일까요? 그것도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경의 부족함을 인간의 힘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말입니다. 말씀 그대로의 복음을 전하면 거부감을 느끼니까 고객의 입맛에 맞는 방식으로 세련되게 바꿔서 전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 모든 것은 결국 무슨 뜻일까요? 제가 보기엔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 완전하지 않기에 사람들을 회심시킬 수 없다고, 그래서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 그런가요? 아닙니다. 말씀은 값진 진주 되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는 바다입니다.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보물을 감춰두신 들판입니다. 시편 기자는 구원이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시편 119편이 이 사실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119편에서 몇 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먼저, 시편 119편 41절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구원을 내게 임하게 하소서.” 구원과 말씀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편 기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죠.
50절입니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81절입니다.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146절입니다.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증거들을 지키리이다.” 155절입니다. “구원이 악인들에게서 멀어짐은 그들이 주의 율례들을 구하지 아니함이니이다.” 풀어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구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사람들이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158절입니다. “주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는 거짓된 자들을 내가 보고 슬퍼하였나이다.” 174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니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충분합니다. 바울이 한 말, “말씀을 선포”하라는 말이 이상한 말입니까? 아닙니다. 말씀은 영혼을 회심시키기에 충분합니다.
둘째로,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어리석은 사람을 지혜롭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증거’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성경의 충분성을 설명하는데 있어 또 한 걸음을 내딛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저 가르침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증언으로 본 겁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증언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거죠.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증언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펴보면, 시편 기자가 말한 대로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증언은 확실합니다. 인간의 말은 확실하지 않고, 불안하고, 흔들리고, 변화하고, 바뀌기도 쉽고, 믿을 수 없고, 신뢰할 수 없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은 흔들리지 않고, 확고하며, 실수로 된 것이 없기에 신뢰할 수 있으며 의지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과 영원한 운명을 세울 수 있는 토대입니다. 주저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1장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신 예수님을 직접 뵈었을 때를 떠올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었을 때에 나도 거기에 있었다. 구약의 엘리야와 모세가 등장한 그 놀라운 장면 속에서 예수님의 장엄한 영광을 보았다. 우리는 경이롭고 신비한 영광 속에서 그 산에 함께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19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무슨 말인가 하니,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일종의 초자연적인 체험이죠. 체험, 초자연적인 경험, 표적과 기사도 나름의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이 예언은 바로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거룩한 사람들을 감동시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성경 말씀은 그 어떤 것보다도 확실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하나님과 도덕에 관한 인간의 추론이나 사색, 견해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확실한 성경의 토대 위에 서야 합니다. 성경의 토대 위에 서면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어리석은 자가 지혜롭게 됩니다. “어리석다”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어근에는 열린 문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분별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문을 언제 닫아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것까지 받아들입니다. 분별하지 못합니다. 배우지 못했고 경험도 없으며 무지하고 순진합니다.
하지만 이 어리석은 자들도 지혜롭게 될 수 있습니다. 지혜를 얻는 근원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순진하고, 경험도 없고, 분별도 못하고, 지식도 없는 사람을 사로잡아서 지혜롭게 해 줍니다. 저는 “지혜롭다”라는 단어를 좋아하는데요, 이 히브리어 단어에 담긴 의미가 매우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지혜롭다”는 기본적으로 경건한 삶과 실제적인 삶의 문제에 능숙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날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적용하여 통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그 근원이 언제나 하나님께 있다고 말합니다. 야고보는 이 지혜를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라고 말했습니다.
구약성경은 이 지혜를, 삶의 올바른 순간에 올바른 것들에 대해서 올바른 선택을 하는 능력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놀라운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진하고 경험이 없는 사람, 분별력 없고 잘 알지 못하며 무지한 사람을 사로잡아서 지혜로운 사람으로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경건한 삶을 살아내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뜻을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는 근원입니다.
이런데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하지 않다고 믿어야 할까요? 사회학, 심리학, 철학, 인간의 지혜와 같은 인간적 근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부족한 것을 채울 만한 것을 찾아야 한다고 믿어야 하는 겁니까? 제가 종종 듣는 것처럼 소위 “진리를 실제적이고 실용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설교자가 성경 밖으로 나가는 것이 정말로 필요한 일입니까? 아닙니다. 어리석은 자가 지혜롭게 되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도록 하기에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충분하다고 하나님께서 직접 증언하셨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는 시편 119편으로 돌아가 봅시다. 시편 기자는 27절에서 “나에게 주의 법도들의 길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가르쳐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걸어야 할 올바른 길을, 우리가 살아야 할 올바른 방향을 아시기 때문이죠. 34절에서는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하고 말합니다. 말씀이 지혜의 근원이라는 겁니다. 66절에서는 “내가 주의 계명들을 믿었사오니 좋은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라고 합니다. 98-99절입니다.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우리가 인간 지식을 전하는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이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100절입니다.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 104절입니다.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125절입니다. “나는 주의 종이오니 나를 깨닫게 하사 주의 증거들을 알게 하소서.” 169절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시편 기자는 지혜의 근원이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으로 충분합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은 영혼을 완전히 변화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성경은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문제에 참으로 지혜로운 자가 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이제 세 번째입니다. 시편 19편 8절을 함께 보실까요?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믿는 자는 어디에서 기쁨을 발견해야 할까요? 믿는 자는 어디에서 위안과 행복을 발견하고 슬픔과 근심, 우울에서 벗어나야 할까요? 믿는 자는 어디로 가야 하는 겁니까? 이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있는 근원은 무엇입니까?
시편 기자의 진술에 의하면 말씀 안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것은 바로 말씀입니다. 8절에서는 “교훈”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직접 의미하지는 않습니다만,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가르침 혹은 하나님의 증언의 개념을 내포하고는 있습니다. 좀 더 분명하게는 하나님의 원칙, 하나님의 계율, 하나님의 지침, 이런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는 삶을 위한 하나님의 지침들로 가득합니다. 이제 8절에서 그 지침들이 “정직하다”고 한 말을 살펴보겠습니다. 그 지침들이 올바른 길을 보여준다는 의미입니다. 올바르게 안내한다는 겁니다. 올바른 길로 안내하여 참된 이해에 이르게 한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리스도인이 된 지 오래되신 분 계십니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앞날을 계획해야 했던 과거를 한 번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참된 길이 놓여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유산인지를 실감하실 겁니다.
우리는 지도나 나침반 없이 남겨지지 않았습니다. 삶의 원칙 없이 남겨지지도 않았습니다. 인간의 의견이라는 안개 속에서 길을 헤매도록 남겨지지도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따라야 할 참된 말씀이 있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올바른 길을 걷고, 기쁜 마음이 생깁니다. 참된 기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그 원리들을 적용하고, 그 교훈과 길을 걸을 때 주어집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예레미야가 전하는 말뿐 아니라 예레미야 자체를 거부했으며, 나라 전체에 재앙이 임박했기 때문입니다. 그 와중에 예레미야는 말씀이 주는 기쁨에 대한 위대한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15장 16절입니다.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이고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사도 요한은 요한1서 1장 4절에서,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쁨이 어떻게요? “충만하게” 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쁨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말씀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올바른 길을 갈 때, 우리 마음이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는 겁니다.
하늘에서 나는 음성을 듣고, 천사와 대화하고, 초자연적인 경험을 하고, 기적을 체험해야만 하는 걸까요? 하나님이 주시는 완전한 기쁨을 얻기 위해서 신비한 정신 과학에 의존해야만 하는 걸까요?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없는 겁니까? 꼭 어디가 아파서가 아니라, 갈 바를 알지 못해 우울하거나 불안하거나 두렵거나 의심이 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눈을 돌려 그 안에서 해결책과 응답과 안내와 방향을 발견하여 슬픔을 기쁨으로 바꿀 수는 없는 걸까요?
저는 우리의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은 하나님의 말씀이 정한 길을 따라가는 데서 온다는 성경의 증언을 믿습니다. 이 기쁨은 우리의 자존심과 자기만족, 방종을 이기적으로 추구하는 데서 오지 않습니다. 제가 염려하는 것은 이런 겁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세상으로 갑니다.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거나, 세상이 제공하는 근원으로 향하거나, 세상의 모든 물질적인 것들을 찾아갑니다. 사람들은 기쁨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부터 멀어지는 겁니다. 기대했던 것에 미치지 못할 것이고, 말씀을 떠나기 전보다 근원으로부터 더 멀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성경 자체의 증언에 의하면 믿는 자들에게 기쁨을 주는 근원은 성경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이 바로 그 근원입니다.
자, 다시 시편 119편에서 계속 증언을 확인해 봅시다. 14절입니다.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들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물질적인 것들을 좋아하는 만큼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물질의 번영으로써의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복음을 즐거워하여 자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54절입니다. “내가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들이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시편 중에서도 정말 아름다운 구절입니다. “내가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들이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인생 전체가 주의 율례에 대한 노래로 가득하다고 고백합니다. 주의 율례가 가져다주는 기쁨으로 흘러넘쳐서 마음의 노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계속해서 76절입니다. ”구하오니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 111절입니다. “주의 증거들로 내가 영원히 나의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 114절입니다 “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궁핍과 비탄과 슬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겁니다. 성경은 첫째로 영혼을 소성시키기에 충분히 완전하고, 둘째로 어리석은 자를 깊이 있게 만들기에 충분히 지혜롭고, 셋째로 슬픔을 기쁨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제 네 번째입니다. 8절 마지막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주님의 계명은 순결합니다. 원문의 뜻을 보다 잘 살려 번역을 해 보면, 주님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한다는 겁니다. 이 때 계명은 성경을 바라보는 또 다른 방식입니다. 성경은 계명이고, 교훈이고, 증거이면서, 또한 하나님의 칙령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의 권위, 그리고 성경에는 선택권이 없다는 특성입니다. 성경은 수많은 제안으로 가득한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계명입니다. 구속력이 있고 권위가 있는 계명인 것입니다. 이 계명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고, 이것에 반응하는 사람들에게는 축복이 있습니다. 반면에 이것에 반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있습니다.
시편 기자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으로 주시는 말씀은, “순결합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애매하지 않습니다. 혼란스럽게 하거나 당혹하게 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불명확한 요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읽어보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전체적으로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에 분명한 방향을 줍니다.
구약은 나그네가 어리석을 수는 있어도 방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말씀은 어두움을 밝힙니다. 세상이 어두워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을 때에, 왜 그런 일이 발생하는지 알 수 없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게 알려주십니다. 이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혼탁한 사색과 분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서 진실을 볼 수 있고, 진리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고군분투할 수 있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이해할 수 있고, 마치 욥이 견뎌냈던 시간처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시대에 이해할 수 있고 위로받을 수 있는 이유는, 쉽사리 보이지 않는 모든 지식이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이 충분히 밝아져서 분별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게 계시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진리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계시입니다. 필수적인 진리에 관한 한 그 어떠한 의문의 여지도 남기지 않습니다. 잠언 6장 2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런 의문을 가진 분들이 계실 수 있습니다. 성경이 이러한 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기에는 너무도 불충분하니 세속적인 지혜에 의존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을 듣기 위해 사람들을 찾아가야 하지 않을까? 추가적인 계시가 필요하지는 않나? 진리의 근원이 되는 성경의 진리를 거부함으로써 발생하는 영적 문제인데도, 이것에 대해서 정신분석이 필요하지 않을까? 성경은 충분하지 않으니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과학자에게, 삶에 대해서는 철학자에게, 죄에 대해서는 사회학자에게 물어보아야 하는 건 아닐까?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의 모든 빛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담겨 있습니다.
다시 시편 119편으로 돌아가 봅시다. 52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옛 규례들을 내가 기억하고 스스로 위로하였나이다.” 고통의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갔고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59절도 보겠습니다. “내가 내 행위를 생각하고 주의 증거들을 향하여 내 발길을 돌이켰사오며.” 가던 길을 돌아보며 주님과 보조를 맞췄다는 겁니다.
81-83절에서도 성경이 우리 갈길을 밝혀준다고 분명하게, 강력하게 증언합니다.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나의 말이 주께서 언제나 나를 안위하실까 하면서 내 눈이 주의 말씀을 바라기에 피곤하니이다 내가 연기 속의 가죽 부대 같이 되었으나 주의 율례들을 잊지 아니하나이다.” 앞을 전혀 볼 수 없고, 안개로 가득 뒤덮였을 때, 말씀을 바라보십시오.
86절을 보겠습니다. “주의 모든 계명들은 신실하니이다.” 92절입니다.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105절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130절입니다.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140절입니다. “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말씀이 충분히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주신다고 합니다. 말씀이 어두운 길을 밝혀 줍니다. 말씀이 우리를 이해시켜 줍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게 하기에 충분하고, 삶의 지혜를 얻기에 충분하고, 기쁨과 행복과 만족을 주기에 충분하고, 쉽게 알 수 없는 것들을 명확히 알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이제 다섯 번째를 살펴보겠습니다. 시편 19편 9절입니다. 성경이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게” 한다고 말합니다. 시편 기자는 여기에서 성경의 동의어로 “경외하는 도”를 사용합니다. 왜 이렇게 썼을까요?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를 예배로 이끌기 위해 하나님을 놀랍고도 두려운 분으로 생각하게 하여 경건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고, 두려워하게 하고, 예배하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영혼에는 예배하는 본성이 있기에 성경은 누구를 예배해야 하며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가르치는 성경이 “정결하다”고 말합니다. 정말 놀라운 생각입니다. ‘정결하다’는 단어의 어근은 ‘타헤르’입니다. 이 타헤르의 뜻에는 ‘불순물의 부재, 불결한 것의 부재, 더러운 것의 부재, 불완전한 것의 부재’가 있습니다, 이것은 ‘죄로 오염되지 않은, 악이 없는, 부패가 없는, 오류가 없는 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인간의 악한 상상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정결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어떤 악의 흔적도 없습니다. 성경으로 나아가 알 수 있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바가 절대적으로 순전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전하는 진리에는 어떤 악의 흔적도 없습니다. 시편 12편 6절에서 시편 기자가 전하는 증언은 정말 놀랍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순결하고, 신성하고, 거룩하고, 죄로부터 분리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말과는 분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여러분, 인간은 항상 신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신뢰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지속되기에 언제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이자 영원한 말씀입니다. 제가 앞서 인용했던 베드로전서 1:23에서 베드로가 그렇게 말하고 있죠.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수정되지 않습니다. 어떤 세대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경은 오늘날 첨단기술 과학사회에 적용할 만큼 세련되지 않아.” 성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일 뿐입니다.
성경은 절대적으로 순전하고, 흠이 없고, 오류가 없고, 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업데이트 할 필요가 없고, 편집이나 개선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완전합니다. 우리가 갑자기 성경이 불충분하고 오류와 단점을 가지고 있으니, 수정과 편집이 필요하다고 믿어야 할까요? 성경을 기록한 성령보다 더 세련된 사람들에 의해서 성경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믿어야 할까요?
성경이 우리 마음과 영혼과 생명을 깨끗하게 할 수 없다고 믿어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데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곳에 가서 죄를 없애는 방법을 배우고, 전문가로부터 내적 치유를 받고 영혼을 씻어내야 한다고 믿어야 할까요?
나라와 민족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것을 더 이상 믿을 수 없으니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힘의 정치로 눈을 돌려야 할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잠시라도 이런 생각을 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충분하고 정결하여 사람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정화합니다.
이제 다시 시편 119편 말씀으로 돌아가 봅시다. 시편 기자가 어떻게 증언하는지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시편 119편 2절을 봅시다.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참으로 그들은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말씀의 사람은 정결합니다. 말씀의 사람은 순수합니다. 9절에서 11절을 보겠습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을 어떻게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까? 내적 치유를 통해서요? 초자연적이고 주술적인 능력으로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서요? 현대의 정신과학에 호소함으로써? 그렇지 않습니다. 계속 읽습니다.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38절을 봅시다. “주를 경외하게 하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 말씀으로 자신을 채워달라고 합니다. 67절입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말씀과 순종은 함께 갑니다. 101절입니다.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172절입니다. “주의 모든 계명들이 의로우므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하리이다.” 여러분, 말씀은 정결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말씀은 우리 삶을 정화하기에 충분합니다. 말씀은 우리와 영원히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 영혼을 정결하게 하기에 필요한 모든 것이 이 말씀 안에 있습니다. 다른 전문가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하나님의 말씀만이 필요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매우 중요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시편 19편 9절 하반절입니다.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여기에서 말씀은 법, 혹은 법규라고 합니다. 이어서 그 모든 것이 의롭다고 합니다. “법규”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가르침과 여호와의 율법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거와 증언이 있습니다. 또한 여호와의 교훈과 원칙이 있습니다. 계명에 담긴 하나님의 법령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드리는 예배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온 땅의 재판관이신 하나님이 내리신 판결도 있습니다. 성경은 영원한 최고 재판관이신 하나님이 인간의 삶과 영원한 운명에 대해 내리신 법적 결정입니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법은 진실하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고백의 말씀입니까.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진리를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십니까? 그런데 우리에게는 진리의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진리이며 진실합니다. 언제나 진실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언제나 신뢰할 만하고, 언제나 우리 삶과 관련이 있고 언제나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거짓말쟁이 아비 마귀의 희생양인 인간의 거짓말과 확실한 대조를 이룹니다. 말씀은 언제나 진실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구원에 이르게 하기에 충분하다면, 한 사람의 영혼을 완전히 변화시키기에 충분하다면, 영적인 삶을 살게 하기에 충분하다면, 삶의 고난과 슬픔을 극복하게 하고 온전한 기쁨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하다면, 어둠 가운데 있어 잘 보이지 않는 일들을 이해하는 데 충분하다면, 모든 죄를 정화시키는 데 충분하다면, 그리고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언제나 진실하다면, 말씀은 영적인 삶에 있어서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은 진실로 신뢰할 만합니다.
우리 손에 있는 이 성경 속의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삶과 의무에 필요한 모든 진리를 확립하시려는 영원한 뜻을 비교적 완벽하게 성경에 표현해주셨습니다. 제가 이 사실을 전심으로 믿는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 자신의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영으로 힘을 얻은 각 개인의 삶에 완전한 만족을 가져다 줍니다. 말씀을 완전히 믿지 않고 조금이라도 덜 믿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타격을 주는 것입니다.
이제 9절에서 말하는 성경의 진실성의 결과에 주목해 봅시다. 모두 다 의롭다고 합니다. 즉 말씀은 전적으로 옳다는 겁니다. 이 구절에 담긴 개념은 말씀이 모든 것을 담고 있다는 겁니다. 말씀은 전부 의롭습니다. 오류가 전혀 없을까요? 그렇습니다. 오류가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완전하고 포괄적이며 충분한 진리의 근원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명기 4장 2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말씀에 어떤 것을 더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것을 빼서도 안 됩니다. 왜 그럴까요? 말씀이 완전히 모든 것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완성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8절과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아무것도 더하면 안 됩니다. 아무것도 빼면 안 됩니다.
신명기 17장 19-20절을 보면, 왕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침을 주시면서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약속된 축복이 주어지는 것은 성경에 순종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계시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언의 말씀과 환상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계시, 예언, 환상…. 이런 것들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생각인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하고 절대적으로 포괄적입니다. 이제 다시 시편 119편으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89절에서 시작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성경의 충분성과 포괄적 완전성을 명확히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128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범사에 모든 주의 법도들을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137절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 138절입니다. “주께서 명령하신 증거들은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니이다.” 142절입니다.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율법은 진리로소이다.” 151절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 주의 모든 계명들은 진리니이다.”
160절입니다.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이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들은 영원하리이다.” 엄청난 증언입니다. 말씀이 영적 삶에 필요한 영적 진리의 완전하고 포괄적인 근원이기에 인간의 모든 영적 필요를 완전히 만족시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는 시편의 세 구절, 즉 19편 7절부터 9절이 성경의 충분성과 관련해서 얼마나 중요한지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두 번째로 성경의 충분성의 결과로서 성경의 가치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0절에서 13절을 보겠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성경은 삶을 위한 총체적 자원으로서 정말로 귀중합니다. 성경의 가치에 필적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성경은 가장 값진 재산이기 때문입니다. 10절입니다.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갖는 것은 모든 보물을 갖는 것보다 더 가치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약속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복음주의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깨닫게 되기를 저는 참으로 바랍니다. 말씀은 그 무엇보다 값진 재산입니다. 말씀이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 까닭은 우리를 기쁨의 길로 안내하고, 영혼을 소성시키며, 어리석은 사람을 지혜롭게 하며, 또 앞에서 살펴본 모든 이유들 때문입니다. 말씀이야말로 가장 값진 재산입니다.
두 번째로, 말씀은 엄청난 기쁨입니다. 10절에서 시편 기자는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라고 말합니다. 세상 그 어디에도 말씀보다 달콤하고 즐거우며 풍성하고 의미있는 것은 없습니다. 말씀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달콤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어디에서 즐거움을 찾고 있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얻을 수 있는 영원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에 필적할 만한 것은 없다는 겁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에 성경은 충분합니다. 성경을 올바르게 적용하면 반드시 찾게 됩니다. 올바르게 부지런히 연구한다면 말이죠. 성경은 가장 값진 재산이자 가장 위대한 기쁨의 근원입니다.
세 번째로, 말씀은 가장 위대한 보호막입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말씀은 우리를 보호해 줍니다. 유혹과 죄, 무지에 맞서려면 말씀이 필요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보호해 줍니다. 우리는 말씀을 방패로 삼아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네 번째로, 말씀은 큰 유익을 줍니다. 말씀의 진리를 지킬 때 커다란 상급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상급은 이 세상에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상급은 긍정적인 말을 하고 시각화를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상급은 성경에 순종하여 받게 될 영광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쌓아둘 수 있는 것을 위해 살아가는 대신에, 건강과 부와 번영과 즉각적인 성공을 거의 집착 수준으로 숭배하는 대신에, 영원한 상급을 위해 사는 삶의 복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값진 재산이며, 가장 큰 즐거움이며, 가장 좋은 보호막이며, 가장 큰 유익을 줍니다. 다섯 번째로, 성경은 우리를 정결하게 합니다. 12절과 13절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정결하게 합니다. 시편 기자의 반응을 보십시오. 이 모든 것을 경험하고도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다시 말하자면, 성경에 대한 이 모든 고백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왜 죄를 짓는지 깨달을 수 없다는 겁니다. 성경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고, 지혜롭게 만들고,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주고, 눈을 밝혀주고,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필요한 모든 것을 전부 제공해주는데 왜 나는 말씀을 어기는 것일까? 도대체 왜 그럴까? 이렇게 고백하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보겠습니다. 시편 기자는 또 이렇게 외칩니다.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숨은 허물이란 계획하지 않았거나 미리 꾀하지 않은 죄입니다. 감춰진 죄들이죠. 어쩌면 기억나지 않아서 고백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계속 보겠습니다.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이것들은 의도를 가지고 미리 계획한 죄입니다. 알고 있는 죄, 즉 교만죄입니다. 그러니까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모르고 있는 죄로부터 보호하여 주시고, 알고 있는 죄로부터도 지켜주시고, 그것들이 나를 다스리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오 주여 저를 붙들어 주소서. 여기서 큰 죄과라는 말은 은혜의 영역인 하나님의 통치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이 죄를 향하던 마음을 변화시켜 정결하게 해 달라는 외침이 일어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정결하게 하는 근원이 됩니다.
이 다섯 가지를 잘 기록해 두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들여다볼 때, 말씀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떠오르게 할 것입니다. 성경은 가장 값진 재산입니다. 삶의 모든 문제에 필요한 것을 주기 때문입니다. 영광스러운 재산입니다. 성경은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 성경은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가장 위대한 보호막입니다. 우리에게 경고해 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가장 큰 유익입니다. 영원한 상급을 얻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우리를 정결하게 하여 마음을 깨끗하게 합니다.
지금까지 성경의 충분성과 성경의 가치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성경을 향한 헌신을 보겠습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마지막 반응은 무엇인가요? 14절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말은 “하나님, 제 말과 생각을 받아주시길 원합니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말과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계시에 일치하기 때문에 받으실만한 겁니다. 결국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나를 말씀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소서. 내 생각이 성경적이 되게 하소서. 내 말이 성경적이 되게 하소서. 내가 말씀 안에 거하게 하소서.” 이것이 바로 올바른 헌신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슬픈 일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자세히 설명해 드린 바 있습니다. 지난주 예배를 드리지 못하셨다면, 녹음본을 꼭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말씀에서 떠나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다고 느끼며 다른 것들을 좇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귀의 거짓말로 생겨난 일입니다. 성경대로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고, 매일 성경을 상고했던 베뢰아 사람들처럼 고결하게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말씀이 자신 안에 풍성히 거하도록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성경을 피상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 깊은 곳에서 나오는 능력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의 교회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히도록 부를 수 있을까요? 성경에 세상을 더한 메시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충분한 메시지가 되어야 합니다. 아프리카의 한 노인이 위대한 선교사였던 로버트 모팻에게 말한 것처럼 되어야 합니다. 노인은 성경을 들고 모팻 선교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은 제가 마시는 샘물이요, 제 등불을 태우는 기름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엎드려 기도합시다.
지금 이 순간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님의 말씀에 여러분 자신을 헌신하겠다는 새로운 언약을 맺으시겠습니까? 온 마음을 다해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마음에서 우러나와 자발적으로 지키고 싶은 언약을 세우시겠습니까? 이 아침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들은 것보다 신자의 삶에서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에서 자원을 찾고 적용하는 말씀의 사람이 되겠다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시겠습니까? 말씀을 연구하지 않으면 말씀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말씀을 적용하지 않으면 말씀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절대 알 수 없습니다. 말씀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주어지는 궁극적인 영적 자원입니다.
아버지, 제 자신의 삶과 여기에 모여 말씀을 들은 모두의 삶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가 시편 138편 도입부에서 읽었던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하는 말씀처럼, 우리가 말씀에 헌신하게 하옵소서. 주 하나님, 우리가 매일 말씀을 상고했던 그 고결한 베뢰아 사람들처럼 되게 하소서. 아프리카 노인과 같이 우리가 말씀 안에서 마시는 샘물을 찾게 하시고 등불을 켜는 기름을 찾게 하옵소서. 성령 하나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동하게 하셔서, 차가운 정설이나 학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살아있는 진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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