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누가복음을 살펴보던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잠시 누가복음 강해를 멈추고, ‘건지심’이라는 방치된 교리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10월에 함께하지 못했던 분들에게는 어느 정도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는 성경의 여러 책 중에서 하나를 정해서 한 구절씩 차례차례 가르칩니다. 그래서 그레이스 교회에 처음 오시거나 방문을 하시면 흐름을 따라가는 데 조금 어려움을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한 구절씩 차례로 살펴보기 때문에 매주 설교가 서로 긴밀하게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강해를 잠시 멈추고 건지심이라는 주제를 지난 한 달 동안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는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저는 복음주의 교회가 건전한 교리를 기꺼이 버리면서도 만족하는 듯이 보이는 것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자유주의 교회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스스로 복음주의라고 고백하는 교회입니다. 대중적으로 영향력 있는 많은 복음주의 지도자들, 저술가들, 목회자들, 교수들, 다시 말해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이들이 분별력의 결여를 마치 어떤 영적인 미덕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면서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펄전(Spurgeon)이 살던 시대였다면 아마 ‘퇴보(downgrade)’라고 불렀을 길에 들어섰습니다. 교회는 지금 미끄러운 비탈길 위에 서 있습니다. 복음주의 교회는 존귀하고 높은 진리와 하나님을 높이는 자리에서 점점 아래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스스로 분별력을 버리고, 성경 강해를 버리고 있습니다. 그 결과 진리를 깊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까지 버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강해하는 것, 풀어서 가르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에게는 반드시 감당해야 할 한 가지 의무가 있습니다. 성경을 강해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설교자가 반드시 감당해야 할 의무는 성경을 강해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해하면 결국 건전한 교리, 진리를 가르치게 됩니다. 그 진리를 이해하면, 하나님이 드러납니다.
성경의 계시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본성과 본질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설교자에게는 반드시 감당해야 할 한 가지 의무가 있습니다. 뭔가요? 성경을 강해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에서 이런 일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설교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을 강해하는 일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건전한 교리에 대한 관심, 명확한 진리에 대한 관심에서도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 대신 명목상 기독교라고 내세우기만 하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 들고 외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교회는 계속해서 이런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정확하게, 끊임없이 전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참된 위엄을 볼 것입니다. 말씀과 함께 참된 이해력도 찾아옵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 설교자는 누가 되었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겁니다. 설교자로서 저의 임무는 아주 간단합니다. 성경의 깊은 진리를 가르쳐서 여러분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찬양하게 하는 겁니다. 오늘 우리 교회를 방문하신 분들 중에 다른 교회 환경에 익숙하신 분이라면 아마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 교회는 옛날 찬송을 정말 많이 부르는군. 코러스 팀은 어디로 갔지?” 우리가 이렇게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찬송학(hymnology)은 신학(theology)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깊이가 있는 곳에는 높이도 있습니다. 신학이 얕으면 찬송학도 얕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피상적으로 이해하면 표현하는 방식도 피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를 깊이 있게 제대로 깨닫고, 하나님의 진리가 지닌 심오함을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알게 되면, 피상적인 표현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옛날 찬송가를 사랑하는 이유는 가사에 심오한 진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학 깊숙이 파고들어 그 신학을 표현해 주는 특별한 시적 천재성이 그 옛 찬송가에 잘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술집에서나 들을 법한 선율에 현혹될 필요가 없습니다. 위대한 가사를 부르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같은 말을 반복할 필요도 없습니다. 진리에 대한 생각과 하나님에 대한 생각 자체가 우리를 찬송의 자리로 힘차게 끌어올립니다. 따라서 설교자의 책임은 진리를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풀어 가르치고, 진리의 깊은 뜻을 이해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면 찬양합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진리의 깊은 뜻을 풀어 하나님의 백성을 찬양의 경지로 높이 끌어올립니다. 진리의 깊은 뜻을 풀어 찬양의 높은 경지로 올라가게 합니다.
저한테는 도구가 하나밖에 없습니다. 도구가 하나밖에 없는 직업을 상상하실 수 있으세요? 제게는 도구가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유일한 저의 도구입니다. 잘 알려진 장로교 목사가 쓴 인기 있는 책이 있는데, 복음이 별 속에 담겨 있다고 주장합니다. 칭의를 포함한 복음 전체가 별자리 속에 계시되어 있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타락하기도 전에 별을 통해 아담에게 복음을 전하셨답니다. 새로운 주장이 아닙니다.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신학을 잘 아는 사람이 이런 책을 썼다는 사실이 저는 참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제게는 도구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별이 아닙니다. 바로 이 책,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진리를 단 한 권의 책, 성경에 계시하셨습니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진리가 성경에도 있고 별에도 있다고 한다면, 로마 가톨릭이 진리가 성경에도 있고 교황과 교회 공의회에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가 될까요? 그렇다면 메리 베이커 에디(Mary Baker Eddy)도 진리가 성경에도 있고 <성경의 열쇠가 되는 과학과 건강(Science and Health with Key to the Scriptures)>에도 있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 몰몬교도들도 진리가 성경에도 있고 <교리와 성약(Doctrine and Covenants)>, <값진 진주(Pearl of Great Price)>, <몰몬경(The Book of Mormon)>에도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진리는 교회에 있지 않습니다. 교황도, 주교도, 교단도 아닙니다. 어떤 체험도 아니고, 사람의 직관도 아니고, 별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한 권의 책, 바로 이 성경에 있습니다. 교회가 이 사실에서 벗어날 때마다 언제나 재앙이 생겼습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라는 가톨릭 사제가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진리라는 확신에 이르렀기 때문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혁명입니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그렇게 믿지 않았기 때문이죠.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하나님이 오직 성경에만 말씀하셨고, 성경에 모든 진리가 담겨 있다고 말했습니다. 교황도 아니고, 주교도 아니고, 교회 공의회도 아니고, 교도권도 아니고, 전통도 아닙니다. 오직 성경입니다. 오직 성경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마르틴 루터는 기독교 역사에 등장한 인물 중에서 예수님과 사도 바울 다음으로 큰 분열을 일으킨 사람이 되었습니다. 엄청난 균열이 생겼습니다. 성경을 믿는 사람들과 로마 가톨릭 체제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성경에만 말씀하셨다는 바로 그 확신이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루터는 오직 성경만이 진리라는 확신에 이르자, 성경 속으로 들어가서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진리를 성경에서 발견했습니다. 교황이 무슨 말을 했든, 주교가 무슨 말을 했든, 공의회가 무슨 말을 했든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모든 진리가 성경에 있었고, 성경은 아주 명확하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1539년에 루터는 시편 119편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이 시편에서 다윗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말하고,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듣고, 읽겠다고 말한다. 밤낮으로 끊임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루터는 이것을 ‘외부의 말씀(the external word)’이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이 표현이 정말 좋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외부에 있습니다. 루터는 구원하고, 거룩하게 하고,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외부의 말씀’이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외부에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외부에 존재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들어 낼 수 없고, 진리를 만들어 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상상의 산물이 아닙니다. 공상의 산물도 아니고, 체험의 산물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직관의 산물도 아니고, 은사주의적 감정의 산물도 아니며, 실존주의의 산물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여러분 외부에 계십니다. 마음대로 손댈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원한다고 마음대로 빚는 그런 찰흙 장난감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성경도 여러분 외부에 있습니다. 성경은 외부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지만, 함부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본래의 모습과 다르게 만들 수도 없고, 성경이 말하는 것과 다르게 말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성경은 유일한 책입니다. 글자도 정해져 있고, 단어도 정해져 있고, 문장도 정해져 있는 확정된 책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바꾸어 놓은 루터의 위대한 확신이었습니다. 루터는 죽기 일 년 전인 1545년에 매우 힘 있고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자 하는 사람은 성경을 읽으라.” 오늘날 기독교계에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기독교 도서 박람회에 가 보면 그런 책들을 볼 수 있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훈련하는 법,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배운답니다. 한 가지 제가 말씀드리죠.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을 통해 들으십시오. 가만히 서서 기다린다면 무슨 소리를 듣게 될지 어떻게 장담합니까? 무엇을 듣든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은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설교자의 임무는 뭡니까? 존 파이퍼(John Piper)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사역의 핵심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씨름하며 찾아내는 것이다.” 맞습니다. 루터는 1533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필요하고, 가장 중요하다.” 정말 그렇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에서 돌아서면 끝없는 문제에 빠지고 맙니다. 성경에서 돌아서면 예수님은 찰흙 장난감이 되어 버립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예수님을 빚어 만들 수 있게 되어 버립니다.
진리도 찰흙 장난감이 되어 버려서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빚을 수 있게 됩니다. 존 파이퍼는 이렇게 말합니다. “루터에게는 비텐베르크의 시장에서 팔리고 있던 그리스도를 구해 낼 단 하나의 무기가 있었다. ‘외부의 말씀’, 곧 성경이라는 채찍으로 돈 바꾸는 자들과 면죄부 판매자들을 몰아냈다.” 보십시오. 사람들은 예수님을 새롭게 만들어 내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빚으려고 합니다. 진리에 대해서도 자기 나름의 견해를 만들어 내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빚으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역사 속에서 주어진 계시인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목사로서, 설교자로서, 사역자로서 저의 임무는 단 하나뿐입니다. 저는 성경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책으로 기록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근본적으로 저는 성경을 읽는 사람이고요,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이고요, 성경을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성경을 먹여야 합니다. 성경의 진리를 먹여야 합니다. 제가 이 일에 신실한 만큼 하나님 앞에서 제 의무를 다하는 것이고, 이 일에 신실하지 못하면 저는 저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엄중한 책임을 질 겁니다. 저는 여러분을 풍성한 말씀의 깊은 곳으로 데려가서 여러분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높은 지경까지 올라가게 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의 깊은 진리를 깨닫게 되면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신 위엄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는 피상적이고 성경에 무관심합니다. 진리가 사람들에게 골칫거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진리가 분열을 일으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제 진리의 깊이도 모르고, 하나님의 영광도 모릅니다. 데이비드 웰스(David Wells)는 그의 훌륭한 책인 <진리가 설 자리가 없다(No Place for Truth)>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존재 자체가 위엄 있고 거룩하신 바로 이 하나님이 현대 복음주의 세계에서 사라져 버렸다.”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은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문득 어떤 사람이 복음주의 기독교의 모든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그 중심에는 근본적으로 자아가 자리 잡고 있고 하나님은 그 자아를 돕는 부차적인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대 복음주의가 표류하면서 인간을 모든 것의 중심에 놓았습니다. 성경보다 인간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님보다 인간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정면으로 맞서 지적하는 겁니다. 제가 지난 몇 주 동안 이 문제를 계속 다루어 온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루터(Luther), 존 칼빈(John Calvin), 스펄전(Spurgeon)이 했던 일밖에 없습니다. 정면으로 맞서서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죠. 저는 최근에 칼빈과 루터를 비롯한 여러 종교개혁자들의 생애를 읽으면서, 어떻게 그토록 엄청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는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떠올리면 기가 세고 지도력이 뛰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하죠. 그러나 그들의 생애를 자세히 연구해 보면, 지칠 줄 모르고 끈질기게 성경을 강해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해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단 한 번도 놓치지 않고 그 기회를 붙잡았습니다. 모든 것을 변화시킨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깊은 진리를 능력 있고 분명하게 선포하는 설교를 계속 들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분별력을 갖게 되었고, 오류가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있는 그대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올바른 선택을 했습니다. 위대한 프린스턴 신학자 벤저민 워필드(Benjamin Warfield)는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된 후에도 저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신학생 시절에 워필드의 <성경의 영감과 권위(The Inspiration and Authority of the Bible)>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워필드는 존 칼빈에 대해서 “그보다 하나님을 더 깊이 인식한 사람은 없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칼빈과 어거스틴(Augustine)을 다룬 글에서는 “존 칼빈보다 하나님을 더 깊이 인식한 사람은 없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존 칼빈은 어디에서 그처럼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되었을까요? 바로 성경입니다. 존 칼빈은 평생 성경을 연구했고, 평생 성경을 강해하며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존 칼빈을 그저 신학자라고 생각하죠. 물론 칼빈은 신학자였습니다. 그러나 신학자가 될 자격이 있는 신학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강해자였기 때문이죠. 그의 신학은 성경 강해에서 나온 결과물이었습니다.
칼빈을 통해 건전한 개혁주의 신학, 그러니까 종교개혁의 신학이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깊은 신학에서 나온 열매가 바로 찬송가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중에서 가장 사랑받고 가장 풍성하고 깊이 있는 것들은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이 지은 겁니다. 여러분은 존 칼빈이 성경 강해 설교만 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칼빈을 사용하셔서 세상의 모습을 바꾸셨습니다.
칼빈은 1536년에 제네바로 갔는데, 제가 잠시 후에 말씀드릴 3년간의 추방 기간을 제외하고는 1564년까지 계속해서 성경을 강해했습니다. 성경 강해 설교를 했습니다. 저는 칼빈이 주일마다 설교했던 성 베드로 교회(St. Peter’s Church) 옆에 있는 아주 작은 공간에 직접 서 본 적이 있습니다. 예배당처럼 생긴 곳인데, 콘시스토리(consistory)라고 부릅니다. 칼빈은 매일 그 작은 예배당에서 설교했습니다. 성경을 강해하는 동안 앞줄에 다섯 명이 앉아서 칼빈이 하는 말을 모두 받아 적었습니다. 그 다섯 명이 기록한 내용을 모아 하나로 정리한 뒤 칼빈에게 주면, 칼빈이 편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칼빈 주석이 만들어졌습니다. 칼빈은 날마다, 날마다, 또 날마다 성경을 강해하며 가르쳤습니다.
R. L. 댑니(R. L. Dabney)는 이렇게 썼습니다. “독일이든 스위스든 영국이든 스코틀랜드든,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모든 주요 종교개혁자들은 끊임없이 설교했다. 대부분 강해 설교였다.” 여기서 강해한다는 것은 성경의 의미를 설명한다는 뜻입니다. 계속 읽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이라는 위대한 혁명의 영적 능력이 주로 무엇을 통해 나타났는지 묻는다면, 성경적 설교의 회복이었다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댑니는 또 역사를 보면 세 단계에 걸쳐 퇴보가 일어난다고 지적합니다. 우리는 바로 지금 그 퇴보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교하는 시대를 ‘황금시대(Golden Age)’라고 부릅니다. 황금시대는 성경을 강해하는 시대입니다. 저도 그런 시대에 자랐습니다. 당시에는 성경 강해가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목회자들이 실제로 성경을 강해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단계가 있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그 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을 알지 못하지만 말이죠. 복음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성경의 진리를 믿는다. 여전히 건전한 교리를 믿는다. 우리는 여전히 복음주의자이다.”
“다만 성경은 너무 옛날 책이다. 사람들이 성경에 공감하지 못하고, 성경을 지루하게 여긴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고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문화적 맥락 속에 넣었다. 그래도 여전히 진리이다. 우리는 여전히 그 진리를 믿는다. 성경이 너무 오래되었고 고루해서 사람들이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진리를 붙들면서 그 진리에 새로운 옷을 입혀 주는 것뿐이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과도기입니다. 황금시대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과도기입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하나님의 진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교합니다. 하나님께서 진리에 입혀 주신 옷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리에 그렇게 옷을 입히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시는 역사에서, 사람의 영혼과 영과 마음에 무엇이 가장 좋은지를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어떤 방식으로 진리가 사람에게 가장 강력하게 전달되는지를 하나님은 아십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신 겁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진리를 성경에서 떼어 내어서 다른 옷을 입히고, 다른 모습으로 포장합니다. 성경에 따라붙는 부정적인 인상을 없애고, 성경이 주는 거슬림을 없애서, 어떻게든 좀 더 부드럽고 거부감 없는 방식으로 이 문화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성경을 제쳐 놓았습니다. 성경을 내세우는 것이 부끄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댑니(Dabney)는 이 현상을 ‘과도기적 상태(transition state)’라고 부릅니다. 이 단계에서는 여전히 성경의 교리를 가르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교리들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를 당시 널리 통용되는 인간의 사고방식에 맞도록 바꿉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진리는 사람의 영혼에 미치는 능력의 일부를 잃어버리죠. 그리고 세 번째 단계로 넘어갑니다. 성경이 사람들에게 거슬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경을 없애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교리 자체도 사람들에게 거슬린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교리마저 없애 버립니다.
여기서 댑니는 이렇게 호소합니다. “우리가 언제나 성경의 교리를 성경이 입혀준 그대로의 옷을 입혀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하게 하소서.” 그래서 제가 그저 성경을 설교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겁니다. 성경은 명료하게 하고, 분별력을 주고, 이해력을 주고, 깊이를 줍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초월적인 찬양의 높은 자리까지 끌어올립니다. 우리가 설교해야 할 모든 내용은 오직 성경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설교는 도구가 하나뿐인 직무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역사 아래 있는 사람의 영혼과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시기 때문에, 모든 진리를 하나님이 가장 좋다고 여기시는 맥락과 비중과 상호 관계 속에 제시하셨습니다. 진리를 제시하는 데 있어 가장 좋은 방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싫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진리를 믿지만, 성경을 통해 그 진리를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성경을 버렸다면, 진리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왜 진리를 계속 붙들겠습니까? 저는 성경에 대한 철저한 헌신 없이는 사역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대한 철저한 헌신 말입니다. 사람들은 저를 과격한 사람으로 봅니다. 제가 모든 문제에 관한 온갖 견해를 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적이지도 않고 수준도 낮은 기독교 목사라고 여깁니다. 반지성적인 사람으로 봅니다. 뭐, 그래도 괜찮습니다. 저는 정말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제 지성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제 지성을 사용해서 성경을 이해하고, 그렇게 이해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길뿐입니다. 제가 온갖 잘못된 견해를 모두 이해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사역하려면 성경에 대한 철저한 헌신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철저한’ 헌신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복음주의 안에서조차 그런 헌신이 거부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의 의미가 곧 성경입니다. 안개를 걷어 내고 성경의 의미를 드러내면, 바로 그것이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이고, 하나님을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분별력을 주고 교회에 능력을 줍니다. 저는 그저 힘들게 수고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칼빈을 보십시오. 엄청난 양의 글을 썼습니다. <기독교 강요(Institutes)>를 썼고요, 주석도 썼습니다. 제 서재의 책장 몇 칸이 칼빈의 저서로 가득 차 있습니다. 2주마다 열 편을 설교했는데, 그 모든 설교가 성경 강해였습니다. 루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510년부터 1546년까지 3천 편의 설교를 했습니다. 일주일에도 여러 날을, 하루에도 여러 차례 설교를 했습니다.
어려운 가정 상황 속에서도 그 모든 일을 다 해냈습니다. 루터의 아내인 케이티는 자녀를 여섯 명 낳았는데, 몇몇은 세상을 떠났죠. 살아남은 자녀에게는 루터가 주일 오후마다 교리문답을 가르쳤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전형적인 주일이 어땠는지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새벽 5시 첫 번째 예배에서는 서신서를 강해합니다. 오전 10시에는 두 번째 예배에서 복음서를 강해했습니다. 오후에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오후 5시에는 구약을 강해했습니다. 월요일과 화요일에도 계속해서 성경을 강해했고, 수요일에는 마태복음을 가르쳤고,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서신서를 가르쳤고, 토요일에는 요한복음을 강해했습니다.
여러분, 침대에서 뒹굴다가 느지막이 일어나서는 종교개혁을 이끌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이들이 그토록 큰 영향력을 끼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고, 성경을 이해하고 선포하는 일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루터가 한 일은 설교하고, 또 설교하고, 또 설교하는 것뿐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루터는 진리의 깊은 곳으로 내려갔고요, 사람들은 찬양의 높은 곳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제가 몇 주 전에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드린 겁니다. 빨리 가는 것보다 천천히 가는 것이 낫고요, 얕게 다루는 것보다 깊이 들어가는 것이 낫고요, 피상적으로 다루는 것보다 철저하게 다루는 것이 낫습니다. 칼빈도 그랬습니다. 거의 25년 동안 강해 설교를 계속했습니다.
칼빈은 1536년부터 1564년까지 제네바(Geneva)에서 성경을 강해했습니다. 심지어 성탄절이나 부활절을 비롯한 그 어떤 특별한 날에도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성경을 강해했습니다. 특별한 절기 설교를 따로 하지 않고 자신이 하던 강해를 계속 이어갔습니다. 칼빈이 강단에서 다룬 성경의 범위는 정말 놀랍습니다.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사도행전을 6년에 걸쳐 설교했고, 데살로니가전후서로 46편, 고린도전후서로 186편,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로 86편, 갈라디아서로 43편, 에베소서로 48편을 강해 설교했습니다. 1559년 봄에는 복음서 연구를 시작해서 4복음서를 조화시키는 방식으로 강해했는데, 1564년 5월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끝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주일에 했던 설교들이고, 주중에는 욥기로 159편, 신명기로 200편, 이사야로 353편, 창세기로 123편을 강해 설교했고, 그 밖에도 계속해서 강해 설교를 했습니다. 모든 설교에는 준비와 연구가 필요합니다. 1538년 부활절에 칼빈이 설교를 마치고 성 베드로 교회(St. Peter’s Church)의 강단에서 내려오자 사람들은 칼빈을 도시에서 쫓아냈습니다. 시의회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칼빈을 추방한 겁니다. 그곳에서 설교한 지 불과 2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의 설교가 너무나 강력하고 힘이 있었기 때문에 설교를 마친 그를 도시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리고 3년이 조금 지난 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이 강해하다가 멈췄던 바로 다음 절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전기 작가들에 따르면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이 유일한 등불이고, 그 등불이 교회에서 사라져 버렸다고 믿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믿습니다. 칼빈은 강단에서 자기 생각을 설교하는 사람들을 끔찍하게 여겼습니다. 성경을 풀어 가르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유일한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위엄이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설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칼빈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2주에 열 번씩 설교하고, 신학 강의를 세 번 하고, 금요일에도 성경 공부를 인도하고, 아픈 사람들을 심방하고, 사람들을 상담하면서, 동시에 여러 개의 글을 읽고 써야 했습니다.
칼빈은 위장이 약했고 심한 편두통에 시달렸습니다. 그 편두통을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루에 한 끼만 먹는 것이었습니다. 거의 쉬지도 못하고 밤낮으로 일했습니다. 그래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53살, 1564년에 칼빈은 의사에게 편지를 써서 복통, 각혈, 오한, 발열, 통풍, 극심한 치질의 고통, 신장 결석 등 자신이 겪고 있던 여러 질병을 설명했습니다. 칼빈의 아내는 아이들을 낳았지만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버렸고, 결국 아내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럼에도 칼빈은 세상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말 그대로 세상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적용한 결과입니다. 잠시 다시 루터의 삶을 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일에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말씀드겠습니다. 루터는 1520년에 133편, 1522년에는 130편, 1523년에는 183편을 썼습니다. 거의 이틀에 한 편 꼴입니다. 1524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치열하게 연구한 결과입니다. 바로 이것이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는 성경의 깊이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이끌어 주는 높은 곳에도 이르지 못합니다. 교회는 피상적이고 세속적이고 연약해지는 경향이 있고, 스스로를 속입니다. 피상적인 성공을 진정한 성공이라고 여기면서 자신을 속이는 겁니다.
이 비극적인 문제의 핵심은 비그리스도인들을 마치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겁니다.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내용입니다. 서론이 길다는 것을 압니다. 이러다가는 본론에 가지도 못하겠네요. 하지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제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제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여러분이 좀 아셨으면 합니다. 성경의 진리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면 분별력이 생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분별력이 없으면 누가 그리스도인이고 누가 그리스도인이 아닌지를 구별할 수 없죠. 그러면 사탄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고, 지도부 안으로 들어오고, 대학과 신학교에 들어와 가르치고, 책을 쓰고, 기독교 방송에 출연합니다. 이런 일이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진리가 없고, 명료함과 분별력을 주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설교가 없으면 끔찍한 일이 생깁니다. 첫 번째 문제는 사람들이 더 이상 누가 그리스도인이고 누가 그리스도인이 아닌지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종교개혁의 위대한 특징 중의 하나는, 종교개혁자들이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는 겁니다. “당신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분명히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지만 당신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도 바로 그 지점에서 분명한 입장을 취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제가 지난 몇 주 동안 계속해서 말씀드리려고 했던 것처럼,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주장하든 참된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은 ‘건지심’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무슨 내용을 말씀드렸습니까? 우리는 건지심을 받았는지의 여부를 통해 그리스도인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건져내시고, 구출하시고, 구원하십니다. 어떤 행동을 했다고 해서, 어떤 사건을 경험했다고 해서, 어떤 기도를 했다고 해서, 어떤 카드에 서명했다고 해서, 앞으로 나와 결신했다고 해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교회에 등록했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한 사건으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건지심으로 확인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건짐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건지심은 구원의 여러 실재를 포괄하는 진리입니다. 먼저 참된 그리스도인은 오류에서 진리로 건짐받은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이해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동안 건지심에 관한 설교를 듣지 못하셨다면 녹음 테이프를 구해서 꼭 들어 보십시오. 정말 중요합니다. 여러분, 참된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상당히 단정적인 말이죠. 그러나 참된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몰몬교도나 로마 가톨릭 체제 안에 있는 사람들처럼 거짓 복음을 믿으면서 그리스도인일 수는 없습니다. 참된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선행과 사회 변화를 강조하는 자유주의의 메시지를 믿으면서 그리스도인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터무니없는 잘못된 견해를 믿으면서 그리스도인일 수는 없습니다.
삼위일체를 부정하면서, T. D. 제이크스(T. D. Jakes) 같은 사람들처럼 삼위일체가 아닌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리스도인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골로새서 1장 12절과 13절에서 분명히 보았듯이, 우리는 흑암의 권세에서 건짐을 받아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빛 가운데 있는 성도가 되었습니다. 무지와 오류의 어둠에서 나와 진리의 빛으로 들어왔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리스도인입니까? 오류에서 진리로 건짐받은 사람입니다.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믿고,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둘째로 참된 그리스도인은 오류에서 진리로 건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죄에서 의로 건짐 받은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특별히 로마서 6장을 살펴보았죠. 매우 중요한 본문입니다. 우리는 전에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의의 종이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본문입니다. 이 두 번째 요점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몇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일서 3장을 펴십시오. 이 요점을 마무리하는 몇 가지 말씀만 드리고, 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에 세 번째 요점은 다음 주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일서 3장에서 요한은 이 문제를 아주 분명하게 흑백으로 나누어 보여줍니다. 요한일서 3장 2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라고 말합니다. 좋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인지, 참된 신자인지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4절로 내려가 보십시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5절입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여기서 잠깐 멈추겠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죄를 없애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죄가 제거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보다더 분명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셨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사실은 죄가 의로 바뀌는 겁니다. 요한은 계속해서 설명합니다. 6절입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현재 시제가 사용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동일한 죄의 삶의 방식에 계속 머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결코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1장에서 요한은 죄가 없다고 말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라고 이미 말했죠. 물론 우리에게는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죄를 짓는 동일한 삶의 방식 속에 계속 머물지는 않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동사는 현재 시제입니다. 지속적인 행동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은 이전과 똑같은 죄된 삶의 방식 속에 계속 머물지 않습니다. 그리고 죄된 삶의 방식 속에 계속 머무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본 적이 없고 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합니다. “그 사람이 지금 그렇게 살고 있고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압니다. 그래도 저는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가 경험했던 사건들을 알기 때문에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제가 압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죄된 삶의 방식 속에 계속 머물지 않습니다. 7절에 핵심이 나옵니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아무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이해하기 어려우세요?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의로운 사람입니까? 의로운 일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본성의 문제입니다. 그 사람 안에 있는 생명의 원리와 생명의 능력의 문제입니다. 요한은 아주 분명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8절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여전히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옛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마귀의 일이 뭡니까? 죄를 짓는 겁니다. 5절에 이어 8절에서 두 번째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죄의 삶의 방식을 멸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죄의 원리를 멸하시고, 지배하는 죄의 권세를 깨뜨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9절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끊임없이 계속 죄를 지으면서 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안에 새로운 씨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여기서 출생, 그러니까 인간의 출생을 비유로 사용합니다. 아기는 부모에게서 태어나며 부모의 생명을 이어받습니다. 부모에게서 나온 정자와 난자가 그 아이의 본질을 이루죠. 그 아이는 문자 그대로 자신을 낳은 두 생명이 결합하여 태어난 존재입니다. 따라서 부모의 특징을 그대로 나타냅니다. 체격도 부모를 닮고, 얼굴도 부모를 닮고, 몸짓이나 습관도 부모를 닮습니다. 지적인 능력도 어느 정도 부모를 닮고, 그 밖의 다른 능력도 그렇죠.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적 구조가 그 아이에게 나타납니다. 요한이 본질적으로 말하는 것도 바로 이겁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났다면 거듭남의 결과가 반드시 나타납니다. 계속해서 죄를 지으면서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안에 새로운 씨가 있기 때문에 죄 가운데 계속 머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면 죄의 원리는 이미 깨졌고, 계속되던 죄의 삶과도 단절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처럼 보이다가 어느 순간 죄에 빠져 그 안에 계속 머문다면, 그 사람은 애초에 새로 태어난 적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정말 새로 태어났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이라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누구도 계속해서 죄를 지으면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 한 사람도 이전과 똑같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죄된 삶의 방식으로 계속 살아가지 않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듯이, 여러분이 원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죄를 미워합니다. 우리는 의를 사랑합니다. 로마서 7장의 내용이죠. 나는 옳은 일을 하기 원하는데 육신이 방해합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을 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것을 합니다. 그러나 죄가 비참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죄를 미워하고, 거기서 건짐받기를 부르짖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기를 바라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사람들에게 천국에 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 황금길을 말합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천국을 가장 사모하게 만듭니다. 여러분도 죄에 진절머리가 나지 않으세요? 배우자의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의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누구도 계속되는 죄된 삶의 방식 속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씨가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여러분 안에는 썩지 아니할 씨가 있습니다. 새로운 생명, 새로운 본성,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10절이 이 모든 것을 요약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가 여기에 나옵니다. 아주 분명합니다. 저는 이 표현이 정말 좋습니다. 얼마나 분명합니까?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 이걸로 충분합니다.
누가 그리스도인인지 어떻게 알 수 있다고요? 옳은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삶에는 의를 행하는 삶의 방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물론 때때로 죄가 그것을 끊고 들어옵니다. 그러나 그 죄를 미워합니다. 그 죄는 옛 자아, 옛 성향이 남긴 잔재이기 때문이죠.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바울이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합니까? “나는 죽었다. 옛 바울은 사라졌다. 옛 삶은 죽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옛 자아, 옛 ‘나’는 사라지고 이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신다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새로운 생명의 원리가 생기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 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가장 중요한 지점에서 혼란에 빠지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누군가의 참된 영적 상태가 어떠한지를 말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 채 지옥을 향해 가고 있을 수도 있는데, 그런 사람에게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해 주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됩니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사탄이 가져오는 끔찍한 결과들을 교회 안으로 불러들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로운 법을 사랑하지 않고, 옳은 것을 갈망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새 마음이 없습니다.
거듭남도 없고, 썩지 아니할 씨도 없고,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지도 않습니다. 건짐받지 못한 것입니다. 마음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되지 않았다면, 마음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게 되지 않았다면, 에스겔 36장이 말하는 것처럼 마음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법 순종하기를 원하게 되지 않았다면, 마음이 변화되어 죄가 아니라 덕을 추구하게 되지 않았다면, 그 마음은 전혀 변화되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의 분명한 표지는 이겁니다.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믿고, 받아들입니다. 진리를 사랑하고 의를 사랑하며 죄를 미워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시편 42편에서 읽은 것처럼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사슴 같습니다. 영혼이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시편 기자는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라고 말합니다. 또 시편 119편 97절에서는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자녀나 배우자나 형제자매나 친구나 아는 사람 중에서 죄를 원하고, 죄를 지을 계획도 세우고, 죄에서 만족을 얻으려고 하고, 의를 향한 열망도 없고 진리에 대한 관심도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건짐받지 못한 겁니다. 그 사람이 무엇이라고 주장하든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날의 복음주의 교회들과 지도자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인이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자유주의자든, 개신교인이든, 은사주의자든, 로마 가톨릭 신자든, 정교회 신자든, 어느 교회에 속하지도 않은 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기만 하면 모두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이런 고백을 한 운동선수가 경기에서 멋진 플레이를 한 뒤에는 매춘을 하다가 붙잡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든 진리와 의로운 삶이라는 기준으로 검증할 수 있습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참된 건지심은 변화된 삶을 만들어 냅니다. 세 번째 요점이 하나 더 있는데, 오늘은 무엇인지만 말씀드리고 다음 주에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죽어 가는 세상에서 영원한 나라로 건짐받은 사람입니다. 매우 깊은 진리입니다.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의 말씀이 얼마나 분명하고 얼마나 정확한지요. 오늘 아침 우리가 살펴본 과거의 인물들로 인해 감사합니다. 그들의 증언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들은 신실했고, 아버지께서 그들의 삶을 그토록 능력 있게 하셨습니다.
교회가 진리에 대한 확신을 회복하게 하시고, 진리에 대한 열정을 회복하게 하시고, 진리의 말씀을 향한 갈급함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사람의 영적 상태를 분별할 수 있도록 분별력을 주옵소서. 진리와 성경에서 멀어지는 퇴보로부터 교회를 지켜 주옵소서.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을 일깨우셔서 신실하게 하시고, 사역하는 모든 세월 동안 성경의 진리를 성경이 입혀 주신 그대로의 옷을 입혀 끊임없이 열정적으로 설교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능력 있고 참된 역사를 이루어 주옵소서. 아버지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건지심을 인해 감사드립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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