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주 동안 누가복음 공부를 잠시 쉬면서 어느새 오늘 여섯 번째로 ‘건지심: 방치된 교리’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은 주님 앞에서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여러분이 꼭 이해하시도록 해야 할 책임이 저에게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도 온전하게 기쁜 마음으로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저도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그렇게 기쁘지 않고 오히려 슬픕니다. 제가 지금까지 지적해 온 많은 것들을 굳이 지적해야 한다는 것이 참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실이고, 하나님 앞에서 말하는 것이 제 책임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계속 말씀드려 온 것은 오늘날 복음주의가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참된 그리스도인인지를 분별하지 못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진정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라는 말은 넓은 의미의 복음주의를 가리킵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우리, 건전한 교리를 붙드는 우리는 일어나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 문제가 얼마나 광범위한지를 여러분에게 보여드렸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특별히 한 가지에 초점을 맞추어서 여러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우리는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의 영향을 받아 왔습니다. 복음주의 기독교 대변자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복음 전도를 상징하는 인물이죠. 설교와 연합 전도 사역을 통해, 그리고 휘튼 칼리지(Wheaton College), 풀러 신학교(Fuller Seminary),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를 비롯한 수많은 기관에 영향력을 미침으로써 복음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한 기독교 간행물에 그레이엄의 자서전 <내 모습 이대로(Just As I Am)>에 대한 논평과 서평이 실렸습니다. 여러분에게 소개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이 들어서 말씀드립니다. 이 문제가 얼마나 큰지를 이 서평이 잘 보여줍니다. 편집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레이엄은 온유하고 동정심 많고 사랑이 넘치는 복음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지만, 동시에 조심스럽고 정치적이고 비신학적인 복음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기도 했다. 그레이엄은 현대 복음주의가 가진 모호하고 비신학적인 실용주의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 금세기의 그 어떤 인물보다도 빌리 그레이엄은 자신의 압도적인 영향력을 통해 오늘날의 복음주의적 위기를 만들어 내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그 위기는 그레이엄이 55년이 넘도록 자신의 삶과 힘을 쏟아부었던 바로 그 기관들과 사역들을 파괴할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참으로 슬픈 말이지만, 사실을 놓고 보면 적절한 평가입니다. 최근에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과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가 공개적으로 나눈 인터뷰가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레이엄은 슐러의 사역을 아무런 비판 없이 높이 평가해 왔습니다. 그러나 슐러는 참된 역사적 기독교가 아니라, 이른바 신정통주의와 심리학이 결합된 사역을 했죠.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그대로 제가 인용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몇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슐러 박사가 빌리 그레이엄에게 묻습니다. “기독교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그레이엄 박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글쎄요. 기독교와 관련해서 참된 신자가 된다는 것에 관해서 말하자면, 저는 그리스도의 몸을 예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는 전 세계의 모든 기독교 집단뿐만 아니라 기독교 집단 밖에서 나오기도 합니다. 저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거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이라면, 본인이 의식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모두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 세계를 그리스도께로 돌이키는 대대적인 부흥이 가까운 시일에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 여기서 잠깐 멈춰봅시다. 비기독교 집단에 속한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랍니다. 사람들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알 수 있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될 수 있답니다. 따라서 전 세계를 그리스도께로 돌이키는 대대적인 부흥이 가까운 어느 때에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랍니다. 아마도 그런 부흥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뜻일 겁니다. 그레이엄은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세상에서 사람들을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이슬람 세계에서 나오든, 불교 세계에서 나오든, 기독교 세계에서 나오든, 불신의 세계에서 나오든, 하나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이름조차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에게 없는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마음으로 알고 있고, 자신들을 향하고 있는 유일한 빛을 향해 돌아섭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고 천국에서 우리와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슐러 박사가 말합니다. “제가 듣기에 목사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둠 속에서 태어났고 성경을 접해 본 적이 전혀 없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의 마음과 영혼과 삶 속에 들어오실 수 있다는 말씀이시죠?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겁니까?” 그레이엄이 그 말에 확답을 줍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저는 세계 여러 지역의 부족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성경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성경에 대해 들어 본 적도 없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전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었고요, 자신들이 속해 살고 있는 주변 공동체와는 상당히 다른 삶을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말에 슐러 박사가 말합니다. “정말 놀랍군요. 목사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니 정말 기쁩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참으로 넓습니다.” 그레이엄이 화답합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 인터뷰에 대해 편집자는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Billy Graham Organization)에 편지를 보냈는데, 이런 답변을 받았습니다. “그레이엄 목사의 견해는 언제나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그레이엄의 견해는 언제나 이슬람교도들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고, 불교도들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고, 불신자들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고, 성경에 대해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도 주변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는 것이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는 겁니다. 그런 것을 믿는 사람이 복음 전도자로서 수백만, 수천만 달러를 모금해서 전 세계 사람들을 대형 경기장에 모아 놓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말하고,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고,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구주를 믿으라고 촉구하고, 믿지 않으면 심판을 받는다고 경고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까? 거의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모순입니다. 도대체 이런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러니 그레이엄이 로마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회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신학적 자유주의자들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별로 놀랍지 않습니다. 래리 킹(Larry King)의 방송에 나가서 몰몬교도들에게도 아무 문제가 없고, 예수님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에게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들 무슨 놀랄 일이겠습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저는 지금 이름없는 그리스도인의 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광범위하고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 대학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교수들도 있고 믿지 않는 교수들도 함께 있습니다. 신학교에 가 보아도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모든 사람을 다 포용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날 이런 종류의 복음주의가 곳곳에 퍼져 있습니다. 조직적으로 발전하고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 지적하기를 꺼립니다. 그렇게 하면 사랑이 없는 사람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지적의 말을 할 수 있는 자리를 얻는 것도 정말 어렵습니다. 제가 여기서는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 밖으로 나가서 이런 말을 하면 아무도 저를 초청하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교회의 라디오 사역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계속 진리를 전하고, 계속 전하고, 또 전하면, 오늘날 복음주의의 분위기가 그 진리에 너무나 강하게 저항하기 때문에 결국 우리 방송을 내보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이 그렇게 불분명합니까? 복음이 그렇게 모호한 겁니까? 복음을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습니까? 신약성경이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지 않습니까? 누가 그리스도인인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천국에 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경이 말해 주지 않습니까? 성경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하지 않나요? 성경은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하지 않나요? 성경은 구원이 믿음으로 말미암고,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며, 그 들음은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전파하는 사람이 없이 어떻게 듣겠습니까? 또 누군가가 가지 않으면 어떻게 복음을 전파합니까? 그렇다면 정말 모든 선교사들을 집으로 불러들여야 하는 겁니까? 어디에 사는 누구든 하나님에 대해 좋은 생각을 품고 자기가 속한 사회의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게 살려고 노력하기만 하면 천국에 갈 것이니 정말 전도를 그만두어야 하는 겁니까?
이런 행위는 교회의 심장을 도려내는 것입니다. 우리 사역의 심장을 도려내는 짓입니다. 반대로 신약성경이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답을 주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신약성경을 무시할 권리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인정받기 위해서 우리 마음대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다시 정의할 권리도 없습니다. 역사 속의 참된 기독교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에 혼란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역사 속의 참된 기독교는 신약성경이 이 문제에 대해 너무나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언제나 알고 있었습니다. 신약성경은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우리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확실히 알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것을 말해 줍니다. 분별에 필요한 정보가 조금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과 거짓 그리스도인, 이름뿐인 그리스도인과 실제 그리스도인을 구별하는 데 필요한 정보와 진리가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누가 참된 그리스도인인지를 이해하는 아주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로, 바로 이 위대한 건지심의 진리를 이해하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건지심을 이해하면 이 문제를 이해하게 됩니다. 누가 참된 그리스도인인지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그리스도인은 건지심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건짐을 받은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오류에서 무엇으로 건지심을 받았습니까? 진리로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믿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슬람교도는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믿지 않습니다. 불교도도 믿지 않습니다. 불신자도 믿지 않고, 몰몬교도도 믿지 않고, 유대인도 믿지 않고, 부족 사회에 사는 이교도도 믿지 않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있고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계신다면,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믿을 수 있도록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 없이는 구원이 없습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지 않습니까?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진리를 알고,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믿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를 사랑합니다. 진리 이외의 모든 것을 구원의 수단이 될 수 없다고 거부합니다. 그리스도인에 대해서는 한 가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진리를 알고,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의 하나님을 예배하고,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높이고, 진리의 성령께서 그 안에 거하시고, 진리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진리는 구원하는 복음의 심장이며 생명입니다. 삶의 변화는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지는 신분의 변화에서 시작됩니다. 골로새서 1장 12절과 13절에서 어둠은 오류를 가리키는 비유이고, 빛은 진리를 가리키는 비유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 구석구석까지 가서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구원하는 유일한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만일 이 모든 사람들이 이미 그리스도의 몸에 속해 있고 이미 천국에 가게 되어 있다면, 도대체 왜 우리는 수십억, 수백억 원을 들여 사람들을 보내면서 불필요한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까? 그러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요?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복음주의의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글쎄요, 사회적인 압력 때문입니다. 세상이 가하는 압력 때문이죠.” 아닙니다. 세상의 압력 때문도 아니고, 사회적인 압력 때문도 아닙니다. 문화가 이런 일을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닙니다. 불신자들이 이런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 안에 있는 거짓 가르침이 문제입니다. 이언 머레이(Iain Murray)는 자신의 저서 <분열된 복음주의(Evangelicalism Divided)>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영적으로 쇠퇴하는 이유는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다. 진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거짓이 존재하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이다.” 바로 이겁니다. 우리가 거짓을 계속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다 보면 아주 빨리 깨닫게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시고 사탄은 거짓말쟁이라는 거죠.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처음 만났을 때 사탄은 거짓말로 온 인류를 죄에 빠뜨렸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온통 거짓 교사들에 대해 경고합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거짓 교사들이 속이고 속이고 속이고 속인다고 합니다.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 물 없는 구름입니다. 이사야 56장 10절입니다.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이런 사람들이 나타나서 예레미야 8장 11절에서처럼 “평강하다, 평강하다”라고 합니다. 자기들에게 평강의 길이 있다, 평강의 길이 있다고 말하지만 없습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길, 하나님과 화목하는 길을 제시하지만 거짓말입니다. 속임수입니다. 예레미야 23장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보내지 않은 선지자들입니다. 가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보내시진 않으셨습니다. 말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거짓 가르침은 교회를 무력하게 만들고, 혼란에 빠뜨리고, 이단으로 끌고 갑니다.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설교자 호라티우스 보나르(Horatius Bonar)는 사탄과 복음에 관해 이렇게 썼습니다. “사탄은 광명의 천사로 온다. 인도하는 척하면서 잘못된 길로 이끌고, 눈을 열어 주겠다고 하면서 눈을 멀게 하고, 밝혀 주고 인도하겠다고 하면서 오히려 진리를 흐리게 하고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럴듯한 말들을 입에 담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관용, 진보, 문화, 자유, 확장, 향상, 자비라는 말들이다. 이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자신이 목적하는 바에 맞는 만큼 세상에 이런 것들을 준다.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도, 그리스도 없이도, 성령 없이도 만족할 만큼 준다. 온갖 방법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들을 대적한다. 복음을 부인할 수도 있고, 희석할 수도 있고, 흐리게 할 수도 있고, 무력하게 만들 수도 있다. 사탄은 하나님을 맹렬히 대적한다. 때로는 노골적이고 거칠게 대적하고, 때로는 차분하고 정중하게 대적하면서 자신이 진리의 친구라고 사람들이 믿게 만든다.”
여러분은 참된 그리스도인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알고,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위해 살아갑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이 때 진리란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관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고 거룩하시고 주권적으로 온 우주를 영원히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관한 진리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시고, 죄 없는 삶을 사셨고, 아무런 죄가 없으셨지만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고, 사흘 만에 육체로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하늘로 올라가셨고, 그곳에서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지금은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시고, 언젠가 다시 오셔서 영원한 영광과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어떤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는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주변 사람들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진리는 이것입니다. 그리고 이 진리 없이는 아무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진리를 알고, 이 진리를 깨닫고, 이 진리를 믿고, 이 진리를 받아들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은 오류에서 진리로 건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죄에서 의로 건지심을 받았습니다. 로마서 6장을 기억해 보십시오. 잠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로마서 6장 17절과 18절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건지심 교리가 무엇인지를 아주 핵심적으로 보여줍니다. 로마서 6장 17절 중간 부분을 보면, 헬라어 원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너희가 건지심을 받아 들이게 된 그 교훈의 본, 그 교리의 체계, 그 진리의 체계에 마음으로 순종했다.” 우리는 이렇게 구원받았습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오류에서 진리로 옮겨졌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관한 그 교리, 그 가르침의 체계에 순종했습니다. 그것을 믿었습니다. 우리는 그 진리 안으로 건지심을 받았습니다.
이제 17절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리고 18절로 내려가 보면,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건지심의 두 번째 측면입니다. 단지 오류에서 진리로 건짐받은 것만이 아니라 죄에서 의로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의를 행합니다. 죄에서 의로 건짐받았기 때문이죠. 지난주에 우리는 요한일서 3장을 살펴보았습니다.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요한일서 3장 4절부터 시작해서 10절까지를 살펴보았죠.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죄를 계속해서 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죄를 반복해서 짓는 삶의 방식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여러분은 살면서 일관되게 의를 행합니다. 요한일서 3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사람들이 여러분을 미혹하고 여러분에게 거짓말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분명히 다르게 행합니다.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이보다 얼마나 더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의란 무엇입니까? 의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거룩한 기준입니다. 여러분이 의를 행한다면 여러분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에서 의로 건지심을 받은 것이죠.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간단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전혀 짓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를 짓는 것이 일관된 삶의 방식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죄를 습관적으로 짓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의사가 ‘진료를 한다(practice)’라고 말할 때, 의사가 지속적으로 전문적인 일을 수행하는 방식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인 여러분에게도 지속적으로 행하는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의를 행하는 삶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삶이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고 마귀의 자녀들이 따로 있습니다.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누가 그리스도인입니까? 의를 행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The Gospel According to Jesus)>이라는 책을 썼을 때, 이 문제를 놓고 논쟁에 휘말렸던 일을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의로운 삶을 산다고 말했죠. 그러자 말 그대로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고 해야 할까요. 사람들이 저를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말을 반박하는 책들을 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잠깐만요. 그리스도인도 의롭게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믿지는 않지만 신자’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저주하며 죄 가운데 살아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일 수 있습니다.” 아니, 뭐라고요? 오늘날 복음주의의 한 모습입니다. 구원을 하나의 사건으로 보는 겁니다. 강단 앞으로 걸어 나가고, 손을 높이 치켜들고, 카드를 작성하고, 기도문을 따라서 하고, 어떤 감정적인 체험을 하고, 그런 것이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이러고 난 뒤에 남은 평생을 어떻게 사느냐는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는 그들의 삶을 보면 분명히 드러납니다. 야고보는 야고보서 2장 14절부터 2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은,” 뭐라고 했습니까? “죽은 것”입니다. 그런 믿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살면서 새 생명의 증거가 지속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죽은 겁니다.
여러분은 말 그대로 옛 생명이 죽고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다시 살아나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새로운 피조물이고, 그 새로운 피조물은 의를 행하는 삶으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의를 행하는 삶이 없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마귀의 자녀입니다. 의를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교훈의 본에 마음으로 순종할 뿐만 아니라, 그 교훈이 요구하는 의로운 기준에도 마음으로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은 바른 것을 믿고 바르게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를 지을 때는 그 죄 때문에 슬퍼합니다. 왜냐구요? 의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건지심에는 또 하나의 요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일시적인 세상에서 영원한 나라로 건짐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일시적인 세상에서 영원한 나라로 건지심을 받았습니다. 요즘 정치인들을 보면 그저 헛웃음만 나옵니다. 어떤 정치인은 마치 “집집마다 차 두 대씩을 갖게 해 주겠다, 냄비마다 닭 한 마리씩 넣어 주겠다”는 식의 옛 정치 구호를 오늘날 사람들이 쓰는 말로 바꾸어서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해 주겠다, 저것도 해 주겠다, 또 이것도 저것도 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엄청난 군중을 이루어 모여서 소리를 지르고, 환호하고, 피켓을 흔듭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궁극적으로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두 지나가 버리는 일시적인 것들이죠. 제가 편지를 보낸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가장 가까운 신념을 가진 후보에게 투표하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성경의 가르침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정치인은 찾을 순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정치적으로 그 위치까지 갈 수도 없을 테니까 말이에요. 세상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 모든 문제를 놓고 얼마나 격렬하고 열정적으로 말하는지 한번 들어 보십시오. 결국 세상의 일일 뿐입니다. 그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을 보십시오. 이 모든 것은 결국 다 불타 없어질 겁니다. 그저 침몰하고 있는 타이타닉호의 갑판 의자를 이리저리 옮겨 놓는 것에 불과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 3절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제가 우리 라디오 프로그램의 이름을 바울의 말에서 따 왔습니다. 바로 “Grace To You”, “은혜가 있기를”입니다. 4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얼마나 위대한 송영입니까? 우리는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짐을 받아 영원한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여기에는 헬라어 가정법이 사용되었는데 목적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신 목적은 우리를 현재의 악한 “아이온(aiōn)”, 악한 세대에서 건지시는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구원의 본질 중 하나이죠. 우리가 구원받은 바로 그 목적이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이 구원받았다면 이 악한 세상 체계에서 구출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제 이 세상 체계가 여러분을 미혹하지 못합니다. 더 이상 여러분의 마음을 끌지 못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가능한 한 의로운 기준에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투표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결국 이 세상 체계 안에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믿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누가 참된 그리스도인인지 알 수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현재의 세상 체계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여기서 “건지다”라는 단어에 관해 한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헬라어로 엑사이레오(exaireō)인데요, ‘구출하다’, 이런 뜻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몇 번 사용되지 않은 희귀한 단어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이 산헤드린 앞에서 설교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스데반은 그 설교 때문에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 10절쯤에서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형들의 손에 팔려가 애굽에서 환난을 겪던 요셉을 어떻게 건지셨는지, 애굽에서 고난 받던 이스라엘 자손을 어떻게 건져내셨는지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34절에도 다시 이 단어가 나옵니다. ‘구출하다’, 요셉과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의 고난에서 건져 내신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도 사도행전 12장 11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감옥에서 건지신 일을 설명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또 로마군 지휘관 글라우디오 루시아도 사도행전 23장 27절에서 예루살렘의 성난 군중에게서 바울을 구출하는 일을 말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매우 위험한 상황에서 누군가를 구출해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건지다”라는 단어는 총 네 번 사용되었고, 모두 육체적인 구출을 가리킵니다.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 한 번 있는데, 바로 갈라디아서 1장 4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신 것은 이 치명적이고 위험한 현재의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서, 구출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입니다. 악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대”라는 단어는 아이온(aiōn)입니다. 단순히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체계, 하나의 시대를 가리킵니다. 현재의 악한 세대는 인간이 타락했을 때 시작됐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의의 나라를 세우실 때까지 계속될 겁니다. 인간의 타락과 그리스도의 나라가 세워지는 그 사이에 바로 현재의 악한 세대가 존재합니다. 이 세대의 특징은 거짓입니다. 속임수입니다. 사탄의 계획이 지배하는 세대입니다. 일시적이고요, 이 세상에서만 존재하는 것, 육체적인 것, 지나가 버리는 것, 결국 모두 멸망할 것들이 이 세대를 특징짓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바로 거기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한 말씀이 갈라디아서 6장에도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바리새인들이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고 자기 의를 내세웠던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을 자랑했던 할례받은 자들과 달랐습니다. 1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나는 내 안에 있는 어떤 것도 자랑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내 안에는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계속 읽습니다. “그러나 내가 자랑한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십자가가 무엇을 이루었습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죽었다는 뜻입니다. 아주 강렬한 표현이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통해 세상은 나에 대해 죽었고 나도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간단히 말해서 세상은 믿는 사람과 아무런 관계가 없고, 믿는 사람도 세상과 본질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세상”은 음식이나 햇빛이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상의 평범한 것들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사상, 이념, 사고방식, 가치관, 명예, 성취, 업적, 그리고 모든 사람이 몰두하는 온갖 것들입니다. 쾌락이며 재물이며 명예며 가치관이며 사상 같은 것들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 5절로 돌아가 보면 아주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거기서 바울은 이념들, 로기스모스(logismos)에 대해 말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모든 이론을 무너뜨린다”고 말하고, 이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사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사상입니다. 저는 저의 집 앞마당을 잘 가꾸어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지닌 아름다움이 드러나게 하는 것을 저의 책임으로 여기고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구를 살려야 한다, 지구를 살려야 한다, 지구를 살려야 한다”라는 식의 환경주의자가 될 생각은 없습니다. 이 지구는 결국 없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되었습니다. 죄가 이 지구를 멸망을 향해 급속히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우리 자신이 이 지구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예수님께서 이 지구를 어떻게 하시는지 지켜 보십시오. 이 세상은 지나갈 존재일 뿐입니다. 이 모든 움직임이며 이 모든 격렬한 논쟁이며 이 모든 문제에 쏟아지는 언론의 관심은, 누군가의 영원한 영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타이타닉호의 갑판 의자를 이리저리 옮겨 놓기 위해서 대학에 가고 대학원에 가서 박사 학위까지 받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께 왔을 때 나는 세상에 대해 죽었고, 세상도 나에 대해 죽었다. 세상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고 나도 세상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골로새서 2장을 보십시오. 20절의 한 가지 표현만 보겠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벗어났거든.” 여기서 잠깐 멈추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을 때 세상의 초등학문에 대해서도 죽었습니다. 저는 이 표현이 참 좋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하는 것은 세상이 무엇을 내놓든 하나님의 진리와 비교하면 초등학문에 불과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의 말장난 같습니다. 참으로 깊은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에게는 인간의 차원을 뛰어넘는 진리가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배운 박사라도, 우리 시대의 가장 뛰어난 철학자와 사상가라도 우리가 아는 것과 비교하면 초등학생 수준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우주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압니다.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도 압니다. 누가 우주를 만드셨고 왜 만드셨는지도 압니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끝날지도 압니다. 참된 이해가 무엇인지도 압니다. 우리는 그런 어린아이의 말장난같은, 그런 초보적인 것들에 대해 죽었습니다.
한 구절만 더 보고 마치겠습니다. 요한일서 2장입니다. 우리가 살펴볼 마지막 본문입니다. 요한일서 2장인데 아주 짧습니다. 사실 여기에 짧은 본문 하나를 더 보기는 하겠지만 한두 마디만 언급하면 됩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을 보십시오. 여기서 “세상”은 코스모스(kosmos)라는 단어입니다. “카오스(chaos)”와 반대되는 말입니다. 카오스는 영어의 뜻과 마찬가지로 헬라어로도 무질서를 뜻합니다. 코스모스는 질서를 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화장품을 코스메틱스(cosmetics)라고 부르는 거죠. 말하자면 무질서한 것을 정돈해 준다는 뜻입니다. 제가 만들어 낸 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런 단어입니다. 그런데 코스모스는 하나의 질서, 곧 현재의 악한 세대를 이루는 체계입니다. 하나의 체계입니다. 사상, 이론, 관점, 가치관, 명예, 재물, 쾌락이 서로 얽혀 이루어진 거대한 체계입니다. 사탄이 만들어 낸 체계이고 죄인들의 마음을 끌도록 만들어진 체계입니다. 15절에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바로 이 코스모스, 현재의 악한 아이온(aiōn)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이 세상을 사랑한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세상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누립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작품으로 바라봅니다. 산을 바라보면서 “진화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기를 바라보면서 “예전에 어떤 웅덩이 속에 있던 아메바가 스스로 둘로 갈라지기로 선택한 덕분이니 하나님께 감사하자. 자연선택에 감사하자”,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이 “자연선택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라고 말하는 것을 제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봅니다. 산을 바라볼 때는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작품으로 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지 않습니까?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지 않습니까? 저는 이 세상을 누리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을 누리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두신 놀랍고 풍성한 즐거움을 누립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을 저에게 보여줍니다. 드러냅니다. 저는 꽃 하나하나에서 하나님을 보고, 언덕 하나하나에서 하나님을 보고, 모든 즐거움에서도 하나님을 봅니다. 모든 것, 정말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봅니다. 그 모든 곳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을 사랑합니다. 찬송가 작사가가 말했듯이, “이 세상은 내 아버지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세상을 사랑한다면 아버지의 사랑이 여러분 안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이 이 지나가는 세상이라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여기에 서로 다른 두 부류의 사람이 나오죠.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원히 사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불타 없어질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건지심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사로잡혀 있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다음 세상에서 일어날 일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은 말합니다. “내가 마음을” 어디에요? “위의 것에 두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땅에 있는 것들은 그저 지금 이 시간과 이곳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쓰이는 것들입니다. 저는 그것들을 누리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나 영원히 지속되는 가치는 거기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일반은총일 뿐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이 세상에서 잠시 나타난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첫 번째 이유는 세상이 세상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입니다. 사탄의 체계입니다. 또 우리는 세상이 하는 일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죄로 부추깁니다. 사탄은 세상을 이용해서 우리의 육신을 만족시키려 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부추깁니다. 세상은 물질적인 쾌락과 성적인 쾌락과 학문적인 성취와 명예와 찬사와 권력과 철학을 우리 눈앞에 끊임없이 펼쳐 놓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우리를 끌어당겨서 우리의 성적인 욕망, 탐욕, 교만을 자극합니다. 이 세 가지는 점점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는 유혹입니다. 육신의 정욕, 그러니까 성적인 욕망은 인간의 낮은 차원이 타락한 것입니다. 몸을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안목의 정욕, 그러니까 탐욕은 인간의 더 높은 차원이 타락한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을 잘못 대하여 탐내는 거죠. 이생의 자랑, 교만은 인간의 가장 높은 차원이 타락한 것입니다. 자기를 높여 결국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는 겁니다. 세상은 바로 이런 욕망들을 부추깁니다. 우리는 세상이 세상에 속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본질적으로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고, 세상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그저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끊임없이 부추길 뿐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세상은 지나가고 있습니다. 파라게타이(paragetai), 곧 해체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 세상 체계는 지금 붕괴되고 있습니다. 결국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아닙니다. 이미 무너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 안에서는 이미 죽음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죄라는 치명적인 질병에 걸렸습니다. 그 죄가 세상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늘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이 점점 더 나빠지는 것 같습니다. 미국을 다시 살려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더 나빠질 겁니다. 죄가 쌓이고 쌓이고 쌓여 나타나는 결과일 뿐입니다. 이 세상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치명적인 질병에 걸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 31절에서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나라에 속했습니까? 17절 끝부분에서 말하는 것처럼 “영원히 거하는” 나라에 속합니다. 얼마나 오래입니까? 영원히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위의 것에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보면 누가 참 그리스도인인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요한일서 5장 4절을 보겠습니다. 요한일서 5장 4절입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저는 이 말씀이 정말 좋습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이제 세상은 더 이상 그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믿음”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여러분을 이 현재의 악한 세대, 이 세상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이 일시적인 세상에서 영원한 나라로 건져내셨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이겼습니다. 그리고 5절은 말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여러분, 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의 표지가 세상을 이기는 것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고서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여러분에게 예수님에 대해 전해 주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 수 없습니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나라로 건짐 받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믿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믿지 않는다면 건지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처음 출발했던 자리로 돌아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온 세상에 나아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여기에서 니케(nikē)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나이키(Nike)’라는 이름이 바로 이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헬라어로 승리, 이기고 정복한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8장 37절은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정복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정욕과 교만과 성적인 욕망과 탐욕과 자기중심성이 지배하는 악한 세상 체계입니다. 우리는 성적인 욕망을 따라 살아가지 않습니다. 탐욕을 따라 살아가지도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탐욕이 좋은 것이라고 하고, 성적인 욕망도 좋은 것이라고 하고, 자기중심적인 태도는 제일 좋은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것들이 죄가 아닙니까? 이 사회는 온갖 성적인 만족을 얻으려고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탐내면서 움켜쥐고, 아름다운 것들을 자기 욕망을 만족시키는 수단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러면서 그 모든 것 가운데서 자신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합니다. 그것이 세상이고 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이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실체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열망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고, 우리는 자신을 겸손하게 바라봅니다. 아름다운 것을 볼 때도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실제로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믿는 사람들은 일곱 번이나 ‘이기는 자’라고 불립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리스도인인지를 두고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울 이유가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오류에서 진리로 건짐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전히 깨닫게 된 사람입니다. 죄에서 의로 건짐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삶의 일관된 방식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악한 세대, 사탄의 이 세상 체계에서 영원한 나라로 건짐을 받은 사람입니다. 마음을 하늘의 것에 둡니다. 이 세상의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갈망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사람들이 참된 구원에 이르고, 그 구원의 선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게 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 말씀을 마치면서 간구합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진리가 널리 퍼져 거짓을 이기게 하시고, 주님의 진리가 널리 퍼져 오류를 이기게 하시고, 수많은 영혼을 혼란에 빠뜨리고 참된 복음 전도의 사역을 가로막고 있는 속임수를 진리로 밝히 드러내 주옵소서. 진리를 신실하게 선포하는 사람들을 많이 일으켜 주시고, 오류에 빠져 희생된 모든 사람을 불러내 주옵소서. 사람들이 진리를 알게 하시고, 그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진리를 말하는 것이 진리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우리의 구주를 영화롭게 하고, 우리를 위해 진리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복되신 진리의 성령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진리가 높임을 받게 하시고, 주님의 말씀이 주님의 이름과 같이 높임을 받게 하옵소서. 모든 속임수가 드러나게 하셔서 사람들을 오류에서, 죄에서, 그리고 이 지나가는 세상에서 건져내 주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해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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