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는 신약성경의 첫 두 장, 그러니까 마태복음 1장과 2장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장을 펴십시오. 이 두 장은 왕의 탄생을 소개합니다. 참으로 경이로운 이야기입니다. 복된 이야기입니다.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신 하나님이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는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가 않습니다. 읽을 때마다 기쁨이 차오르죠. 오늘 아침 저는 마태와 함께 왕의 탄생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 그 왕권과 위엄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마태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마스에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알려줍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찬송가는 “주님이 오셨으니 만 백성 맞으라”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 맑고 환한 밤중에> 찬송가는 “평강의 왕이 오시니” 이렇게 말하죠. 또 <천사 찬송하기를> 찬송가는 “영광 받을 왕의 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천사들의 노래가> 찬송가는 “영광을 새로 나신 왕께”라고 하죠.
<동방 박사 세 사람>이라는 찬송가도 있죠. “베들레헴 들판에 나신 왕” 이렇게 노래합니다. “영원히 다스리실 왕”이라고도 합니다. “왕이요 하나님이요 제사장”이라고도 고백합니다. 또 <이 아기 누구인가>라는 찬송가는 “이는 그리스도 왕이라”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이라는 제목의 찬송가는 “아기로 나신 왕”이라고 찬양합니다. <천사들아 땅 위에 내려와>라는 제목의 찬송가는 “나신 왕께 경배하라”라고 선포합니다.
이 모든 찬송은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위대한 진리를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왕으로 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찾으러 왔던 동방 박사들은 예루살렘에 들러 이렇게 물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예수님은 최고의 통치자, 최고의 군주로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저자 요한은 예수님을 두고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왕 중에서 가장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왕에게는 다스리는 주권적 권리가 있습니다.
왕에게는 최종 판결을 내릴 권리가 있습니다. 생명의 권세와 죽음의 권세를 손에 쥐고 있습니다. 모든 결정을 내릴 권리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으로 나셨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왕과도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왕권, 탁월한 위엄, 탁월한 나라와 통치와 권세와 능력이 있으시지만, 여전히 왕이십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왕이심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왕의 탄생임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자, 그러니까 마태복음 1장과 2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왕으로 나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장 1절부터 17절에는 예수님의 계보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그리스도까지의 계보이죠. 마태는 이 족보를 통해서 예수님께 왕의 자격이 있음을 증명합니다. 왕이 되려면 왕가의 유산이 있어야 합니다. 혈통이 정통이어야 합니다. 왕의 피를 이어받아야 합니다. 왕위에 오를 자격을 가지려면 왕가의 후손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유대인의 민족적 계보는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은 유대 민족의 조상이죠. 따라서 예수님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 가운데 왕족의 계보는 다윗에게서 시작됩니다. 따라서 왕의 자격, 왕적 혈통을 가지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자손이어야 합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민족적 계보를 약속하셨죠. 사무엘하 7장에서는 다윗을 통해 왕적 계보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자격을 갖추려면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어야 하고, 다윗의 자손이어야 합니다. 1절을 보면 계보가 이렇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계보에서 가장 중요한 두 이름이 맨 앞에 나옵니다. 민족적 계보를 위한 아브라함, 그리고 왕적 계보를 위한 다윗이 나옵니다. 그리고 2절부터는 그 계보를 더 자세히 제시하죠. 아브라함으로 시작하여 6절에서는 다윗을 거쳐서, 마침내 16절에서는 그리스도께 이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시며 다윗의 자손이십니다. 왕적 요구 조건을 모두 충족하십니다.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왕적 계보가 필요했습니다.
이제 이 계보의 세부 내용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마태는 무엇보다도 혈통, 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자격을 증명하는 일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필수적인 문제였습니다. 문화 전체가 그 위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서,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은 거할 땅을 주시면서 각 지파에게 영토를 나눠주셨습니다. 어떤 지파에 속했는지가 곧 어디에 살 것인지, 어떤 땅을 소유할 것인지를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각 지파의 영토 안에서도 가문마다 일정한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어느 가문에 속했는지가 곧 자기 집이 어디에 있는지, 소유한 땅이 어디인지와 직결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계보는 거주지와 소유권을 확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지파와 가문과 조상의 집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사회적 관계와 권리와 특권을 이해하는 데 매우 필수적입니다.
재산을 팔거나 이전하거나 교환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그 재산이 실제로 누구의 것인지를 분명히 하려면 가계에 대한 지식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희년, 그러니까 오십 년째 되는 해에 모든 땅이 원래의 가문으로 소유권이 돌아갔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그 땅의 상속자라고 주장하려면, 처음 그 땅을 받았던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을 때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기원전 600년경부터 586년까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땅이 완전히 황폐해졌고 소유권도 빼앗겼죠. 70년이 지난 뒤에 다시 돌아왔을 때, 에스라서를 보면, 한 세대 혹은 두 세대가 지난 상황에서 땅이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하려면 반드시 계보를 증명해야 했습니다.
누가복음 2장으로 가 보십시오. 조금 전에 읽어 드린 본문입니다. 그때에도 팔레스타인에 있던 모든 유대인은 호적하기 위해서 자기 조상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어느 지파에 속했는지, 어떤 가문 출신인지, 조상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삶에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오늘날의 유대인 중에서 자신의 계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지파 출신인지, 어떤 가문에 속했는지, 어떤 땅을 소유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주후 70년에 티투스 베스파시아누스(Titus Vespasian)가 예루살렘을 함락했을 때 모든 기록을 파괴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날에 누군가가 자신이 메시아로서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다윗의 자손이다, 이렇게 주장을 한다고 해도, 정당한 계보를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메시아, 다윗에게 약속된 왕권에 대한 자신의 계보를 입증할 수 있는 마지막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그 누구도 왕위에 대한 권리를 입증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지 불과 몇 년 뒤에 모든 기록이 파괴되어 버렸으니까요.
이 계보는 그리스도께로 이어지는 왕적 계보입니다. 흥미롭게도 마태는 요셉을 통해서 예수님의 계보를 기록했습니다. 누가는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님의 계보를 기록합니다. 그런데 마리아 역시 다윗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마리아는 다윗의 아들 나단을 통해서 그 계보가 내려옵니다. 나단은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왕의 혈통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에서 나단을 거쳐 마리아에 이르기까지 왕의 피가 이어집니다. 마리아는 다윗의 아들 나단의 후손입니다. 선지자 나단하고 다른 나단입니다.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님은 참된 다윗의 자손이 되십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은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요셉은 그 탄생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몸에 씨를 심지 않았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하셨죠. 예수님의 인간적 출생의 근원은 오직 마리아 뿐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 역시 반드시 다윗의 계보에 속해 있어야 했죠.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님에게는 왕의 혈통이 없었을 겁니다. 반면에 요셉의 계보는 왕위에 대한 법적 권리를 잇는 계보입니다. 왕위 계승의 법적 권리는 언제나 아버지를 통해서 이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요셉 역시 다윗의 자손이어야 했죠. 그리고 단지 다윗의 자손일 뿐 아니라,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이어지는 계보에 속해야 했습니다. 왕위에 오른 계보는 솔로몬을 통해서 이어졌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은 마리아를 통해 왕의 혈통을 받으셨고, 요셉을 통해 왕위에 대한 법적 권리를 받으셨습니다. 비록 요셉이 예수님의 출생에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요셉의 아내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법적으로 요셉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왕으로 다스릴 권리가 있는 분이 되십니다.
요셉 시대에 만일 이스라엘에 정당한 왕이 있었다면 그 사람은 바로 요셉이었을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셉은 법적인 상속자였습니다. 그래서 마태의 계보는 요셉을 통해 내려옵니다. 왕위에 대한 법적 권리가 있기 때문이죠. 아버지를 통해서 이어집니다. 반면에 누가는 마리아를 통해 계보를 제시합니다. 예수님에게 법적인 권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피를 이어받은 참된 권리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강조점이 매우 분명합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여기의 야곱은 구약에 나오는 족장 야곱이 아니라 유대인들 사이에 흔히 쓰이는 야곱이라는 다른 사람입니다. 이 인물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예수라 칭하는 그리스도가 나시니라.” 성경은 요셉을 두고 마리아의 남편이라고만 하지 예수님의 아버지라고 하지 않습니다.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표현을 통해서 동정녀 탄생을 강조합니다.
이제 반드시 이해해야 할 아주 중요한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0절과 11절을 보면 이름의 흐름이 나옵니다. 1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그리고 그 다음에 계속 이어지죠. 그런데 이 계보의 한가운데, 이 왕의 계열, 곧 왕위에 대한 권리가 이어지는 흐름 속에 여고냐라는 왕이 등장합니다. 여고냐는 고니야라고도 불렸습니다. 악한 왕이었습니다. 예레미야 22장 30절은 여고냐에 대해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이 사람이 자식이 없겠고 그의 평생 동안 형통하지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의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왕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여고냐의 자손 중에서 그 누구도 이스라엘에서 왕위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을 아들이 없을 거라고 하신 겁니다. 그런데 여고냐는 메시아 계보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여고냐의 왕적 계열을 통하지 않고 어떻게 왕이 되실 수 있을까요? 또 여고냐의 계열이 저주를 받았다면, 어떻게 예수님이 왕이 되실 수 있을까요? 이 절망적으로 보이는 문제는 동정녀 탄생에서 해결됩니다. 예수님은 그 계열을 통해 왕위에 대한 법적 권리를 받으셨지만, 여고냐의 혈통을 물려받은 자식은 아니었습니다. 그 계열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여고냐의 혈통에서 다윗의 왕위에 오를 자는 결코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여고냐의 피가 전혀 섞여 있지 않습니다. 요셉에게서 피를 받지 않으셨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속에서 요셉을 통하지 않고 동정녀에게서 예수님이 태어나심으로써 여고냐에게 내려진 저주를 비켜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여고냐의 법적 계열 안에 계셔야 했습니다. 그 계열이 바로 다윗의 왕위에 대한 권리를 지닌 계열이었기 때문이죠. 모든 세부사항이 아주 정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예수님의 계보가 예수님의 왕위의 실체를 분명히 드러낸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된 왕이십니다. 왕의 계열로 태어나셨고, 동정녀 탄생을 통해 여고냐의 저주를 비켜가셨습니다. 흠잡을 데 없는 자격을 지니신 분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왕적 유산입니다.
두번째입니다. 예수님의 왕적 본성, 그러니까 왕적 성품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왕은 단지 왕의 계보에 속해 있기 때문에 왕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본성과 성품 때문에도 왕입니다. 왕에 관한 이야기나 영화를 떠올려 보면 왕을 “전하”, 이와 같은 특별한 존칭으로 부르는 장면이 나오죠. 우리 사회는 왕에 대해서 많이 알지 못합니다. 왕정 사회에 반기를 들고 세워진 그런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이라는 개념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왕에 대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왕은 ‘절대적인 통치자’라는 사실입니다. 대법원도 없고, 의회도 없고, 주 정부의 입법 기관도 없는 상황을 떠올려 보십시오. 오직 한 사람이 전적으로, 일방적으로 다스립니다. 왕의 통치입니다. 왕은 백성 위에 있는 유일한 권위이고 유일한 권력입니다. 그리고 덧붙여 말씀드리면, 좋은 왕이라면 이것이 정말 가장 좋은 정치 형태이지만, 나쁜 왕이라면 가장 끔찍한 형태가 됩니다. 우리는 장차 천년왕국과 영원한 나라에서 바로 이 형태의 통치 아래에 살게 될 겁니다. 오직 한 분의 왕,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 그 나라입니다.
과거에는 왕이 최고의 통치자였습니다.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지혜로 판단하든, 변덕으로 결정하든, 공의로 다스리든, 편견으로 치우치든, 어떤 상황에서든 누구에게든 삶과 죽음을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왕은 은혜의 근원이었습니다. 긍휼을 바란다면 왕 앞에 엎드려서 간청해야 했습니다. 은혜를 구한다면 왕 앞에 엎드려서 간구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선한 왕, 고귀한 왕, 공의로운 왕, 의로운 왕은 긍휼, 친절, 사랑, 은혜를 베푸는 왕입니다. 왕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긍휼을 구하는 모든 사람이 마지막으로 통과하는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계보를 보아도 예수님께서 은혜의 왕이 되실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이 사죄, 용서, 은총을 구하며 나아갈 수 있는 왕이십니다. 율법을 어기고 이름을 멸시한 자들조차 용서를 구하기 위해 나아갈 수 있는 왕이십니다.
어떻게 압니까? 계보 안에 그 답이 담겨 있습니다. 이제 이유를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16절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계열 가운데 온 세상 수많은 여인 중에서 단 한 사람을 택해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마리아가 죄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마리아는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죄 없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하고 똑같이, 마찬가지로 죄인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죽음과 지옥에서 구원을 받아야 할 그런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자기 아들이신 구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나님 없는 영원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신약성경의 기록을 보면, 마리아가 특별히 거룩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특별히 성화된 상태에 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마가복음 3장 3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만일 마리아가 어떤 의미에서든지 죄가 없는 사람이었다면,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누구든지 내 뜻을 행하는 자가 내 어머니요 자매요 형제다”라고 않으셨을 겁니다. 어머니가 특별하고 독특하고 거룩하고 죄가 없는 존재였다면, 예수님은 어머니를 분명히 다르게 구별하셨을 겁니다. 만일 어머니가 부르셨다면, 예수님은 곧바로 그 부름에 응하셨을 겁니다. 완전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곧 하나님의 완전한 뜻이라는 것을 아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머니의 요구를 따르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의 말이 예수님의 말씀을 넘어설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어머니는 예수님보다 아래에 있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하십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완전하지 않다는 뜻이 되죠. 그리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라고 하신 말씀은 마리아를 모든 사람과 똑같은 자리로 내려오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만 예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육신의 어머니라는 사실이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어떤 특별한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마리아 역시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장 46절에서 마리아 자신의 입으로 고백한 내용을 보십시오. 흔히 마리아의 찬가라고 불리는 그 찬송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절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마리아는 구주가 아닙니다. 마리아에게도 구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을 “내 구주”라고 부릅니다. 죄에서 건져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죠.
어쩌면 마리아는 죄인 가운데서도 가장 고귀하고, 가장 순결하고, 가장 아름다운 처녀였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여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도 구주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라는 사실이 마리아에게 영적인 특권을 보장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 지위로 인해서 예수님의 시간이나 관심이나 삶에 대해 어떤 권리를 주장할 수도 없었습니다. 마리아 역시 구주가 필요한 죄인이었을 뿐입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분께서 한 죄인을 자신의 땅의 어머니로 삼으셨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정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은혜의 왕이십니다. 아직 태어나시기도 전에, 어머니를 정하시고 죄인을 택하시는 그 선택 속에서 이미 은혜가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왕권에서 또 하나의 측면, 곧 은혜로운 성품과 관련된 두 번째 모습은 한 여인이 아니라 두 사람의 선택에서 나타납니다. 1절로 돌아가 봅시다. “다윗의 자손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안다면, 아브라함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 겁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라고도 불렸고 또 그에게 놀라운 점도 많이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믿는 큰 믿음의 사람이 되었죠. 그러나 동시에 죄로도 알려진 사람입니다. 애굽에 내려갔을 때 자기 아내를 보호하려고 노골적으로 거짓말을 했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실 것을 믿지 못하고 간음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여종과 관계를 맺고는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여러 면에서 저주의 씨앗이 된 그 아들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죄인이었습니다. 거짓말도 했고, 의심도 했고, 간음도 했습니다. 아들 이삭 역시 메시아 계보에 포함되어 있지만 연약했습니다. 실망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메시아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을 택하신 선택, 이 선택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납니다.
다윗은 어떻습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다, 이렇게 불렸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큰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충격적인 죄를 저질렀습니다. 전쟁을 치르면서 피를 매우 많이 흘렸습니다.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수많은 여인과 결혼하고 방탕의 씨를 뿌렸습니다. 아버지로서도 실패했습니다. 자녀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자녀들이 방탕하고 악하고 반역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었죠.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죄는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 남편을 죽여버린 겁니다. 또 한번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건져내지 못하실 것처럼 생각하면서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기도 했죠.
아들 솔로몬은 더 심했습니다. 훨씬 더 어리석었습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여인과 아내와 첩을 두었습니다. 수많은 이방 여인들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고, 부와 재물에 집착했습니다. 결국 나라를 악으로 몰아넣어 버렸죠. 마침내 나라를 둘로 갈라지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다윗과 솔로몬이 모두 왕의 계보 안에 있습니다. 메시아의 계열 안에 있습니다. 무엇을 말해 줍니까? 왕의 은혜를 말해 줍니다. 왕의 성품이 은혜롭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계보에는 마리아와 아브라함과 다윗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 시대가 담겨 있습니다. 이 계보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입니다. 이 마지막 세 번째 열네 대는 그리스도로 끝납니다. 왜 성령님께서 이 14라는 수를 택하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세 묶음은 각각 다른 시대를 보여 줍니다. 첫 번째 열네 대에는 족장들이 포함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인물들이죠. 두 번째 열네 대는 왕입니다. 왕정 시대입니다. 다윗, 솔로몬, 르호보암, 아비야, 아사, 여호사밧, 요람, 웃시야, 요담, 모두 왕입니다.
세 번째 열네 대는 포로 시대입니다. 첫 번째 시대는 족장과 사사들의 시대이고, 두 번째 시대는 왕정 시대입니다. 이제 세 번째 시대는 바벨론 포로에서 그리스도까지입니다. 약 600여년에 이르는 기간입니다. 이 시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아비훗, 엘리아김, 아소르, 사독, 아킴, 엘리웃이 누구인지 잘 모릅니다. 역사 속에 가려진 인물들입니다.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저 이름 없이 지나간 사람들입니다.
족장과 사사들의 시대는 죄의 시대였습니다. 모두가 죄인이었습니다. 왕정 시대는 쇠퇴의 시대였습니다. 타락의 시대였습니다. 배도의 시대였습니다. 포로와 멸망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포로에서 그리스도까지는 악의 시대였습니다. 속임수의 시대요, 적대와 전쟁이 가득한 시대요, 슬픔과 영광이 뒤섞인 시대였습니다. 영웅도 있었고, 수치도 있었습니다. 이름난 사람도 있었고, 이름 없이 사라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이름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모두가 죄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죄 많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메시아의 계보 안에 선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된 여인이든, 계보 속에서 두드러지는 두 사람이든, 역사의 세 시대이든, 모두가 한 가지를 말해주는데, 아직 태어나시지도 않았지만, 창세 전에 예수님이 자신들의 조상들을 택하시는 그 선택 속에서 이미 은혜를 보여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는 네 명의 버림받은 사람을 통해서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네 명의 버림받은 여인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네 명의 죄인입니다. 이 계보에 놀랍게도 여인이 네 명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3절에 나오는 다말입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창세기 38장을 읽어 보십시오. 다말은 근친상간의 죄를 범했습니다. 다말에게서 태어난 베레스와 세라는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아들입니다. 추하고 악한 죄이죠. 다말은 말하자면 창녀였고 근친상간이라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 죄 가운데서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계보 안에 있습니다. 그 두 아들 역시 계보 안에 있습니다. 무엇을 말해 줍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말해줍니다.
5절을 보십시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살몬이라는 사람이 가나안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이방 여인이죠. 라합이라는 이름의 여인입니다. 라합은 여리고의 창녀였습니다. 여호수아 2장을 자세히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을 믿게 되어 여리고를 정탐하러 온 정탐꾼들을 숨겨 준 여인입니다. 그러나 직업은 창녀였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메시아의 계보 안에 들어 있습니다. 구속자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는 보아스를 낳는 특권을 받았죠.
그리고 계보에 세 번째 여인이 등장합니다. 역시 5절에 나오는 룻입니다. 룻은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모압 민족 자체가 근친상간에서 시작된 민족입니다. 저주받은 민족입니다. 그런데 그 저주받은 민족 출신의 이방 여인이, 우상 숭배하던 여인이 계보 안으로 들어옵니다. 기업 무를 자인 보아스와 결혼해서 다윗의 증조모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명의 창녀와 한 저주받은 모압 여인을 메시아의 계보 안으로 불러들이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새는 다윗 왕을 낳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누구입니까? 밧세바입니다. 사무엘하 11장에 나오는 그 여인입니다. 간음한 여인입니다. 창녀 두 명, 저주받은 여인 한 명, 그리고 간음한 여인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솔로몬의 어머니가 되고 다윗의 아내가 됩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한 여인을 택하시고, 두 명의 중요한 인물을 택하시고, 세 시대의 사람들을 택하시고, 네 명의 버림받은 여인들을 택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왕이십니다. 왕의 계보, 왕의 성품입니다.
세번째, 이제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18절 이하도 예수님이 왕으로 태어나셨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계보는 왕이 되실 자격을 증명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로운 성품도 왕이 되실 자격을 증명합니다. 이제 특별한 탄생을 통해서 왕이 되실 능력을 증명합니다. 18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정혼은 오늘날의 약혼과 다릅니다. 그 당시의 정혼은 법적 계약입니다. 지금은 약혼했다가도 쉽게 파기할 수 있죠. 감정은 오가지만 법적 구속력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달랐습니다. 신명기 20장 7절의 원칙에 따라서 법적으로 구속력이 있는 약속입니다. 정혼 기간은 보통 9개월에서 18개월이었습니다. 그 기간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면, 장차 신부가 될 여인이 자신의 순결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임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서 자신의 정절을 증명하는 시간이죠.
다시 말해서, 당시 남성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일은 이겁니다. 결혼했는데 아내가 임신 중이고, 또 그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법적으로 혼인 관계에 묶여 있는데 그런 일이 드러난다면 얼마나 충격이 크겠습니까? 그러니까 여인은 자신의 순결을 분명히 보여줘야 했습니다. 약혼자도 알고, 공동체도 알도록 보여줘야 했습니다. 그래서 9개월에서 18개월의 그 기간 동안 임신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자신의 순결을 증명하는 것이죠. 그 후에야 후파(chupah), 결혼을 완성하는 예식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정혼한 상태였죠. “동거하기 전에,” 곧 후파 이전에, 육체적 연합이 이루어지기 전에 마리아가 잉태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현실이 된 겁니다. 충격 중의 충격입니다. 마리아는 성품으로 보나 모든 면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을 겁니다. 요셉으로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도저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정혼 기간 중에, 아직 함께 살기도 전에, 마리아가 아기를 가진 사실을 요셉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 아기는 성령으로 잉태가 된 것이죠. 그러나 처음에는 요셉이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19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하나님의 율법은 이런 경우에 이혼이 가능하다고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법적으로 구속력이 있는 정혼도 파기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신뢰하고 순결을 약속했던 여인에게서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에, 의로운 사람으로서 정혼을 끊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혼란스러웠죠. 사랑했기 때문이죠. 마리아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을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드러내서 수치를 주기보다는, 조용히 관계를 끊기로 결심을 한 것입니다. 당시의 법에도, 아마 신명기 24장을 비교적 느슨하게 해석한 관습에 따라서, 공개적인 절차가 아니라 사적인 절차로 파혼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요셉에게는 공개적으로 마리아를 수치스럽게 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간음으로 고발할 수도 있었습니다. 공적으로 이혼을 제기하고 평생 불명예 속에서 살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두 증인과 함께 비밀리에 이혼하면 조용히 관계를 끊고 더 이상 이유를 밝히지 않아도 되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렇게 하기로 결심한 겁니다. 그러나 그 일을 실행하기 전에, 20절이 말합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여기서 요셉은 상상할 수도 없는 말을 들었죠. 약혼한 사랑하는 여인이 임신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초자연적인 꿈 가운데 천사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임신,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 것이야, 라고 말이죠. 마리아의 태 안에 잉태된 아들은 예수라 불릴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하다”라는 뜻입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합니다. 약혼한 여인의 태 안에 하나님께서 잉태하신 세상의 구주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그 여인이 구주를 낳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들은 겁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맥락을 설명하기 위해서 마태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미 구약에 예언되었던 것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생리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죠.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그러니까 이것은 놀라운 일이기는 하지만, 예고되지 않은 일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구약이 분명하게 말한 것입니다.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그 아이가 요셉의 아들로 여겨지지 않도록, 요셉은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마리아와 관계를 갖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처녀인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문은 아들이 태어난 후에는 마리아가 더 이상 처녀가 아니었음을 암시합니다. 이것이 원문의 의도입니다.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로 남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본문이 분명히 밝히는 내용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이렇게 분명히 말합니다. 마리아는 요셉과의 사이에서 다른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마가복음 3장에서 이미 보았듯이, 예수님의 형제들과 자매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난 이후에는 요셉과 정상적인 부부 관계를 통해서 다른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왕의 탄생입니다.
왕이 되려면 왕의 피가 있어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피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우리 몸에 흐르는 피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영적인 의미에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분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온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분이라면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왕의 계보, 왕의 성품을 가지셨을 뿐만 아니라, 분명히 왕의 탄생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분입니다. 이사야 7장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왕으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구유는 왕궁이 아니었습니다. 마구간도 왕궁이 아니었습니다. 그 곁에 있던 짐승들도, 찾아온 목자들도 왕의 위엄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둘러싼 장면 어디에서도 화려함이나 장엄함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왕의 탄생이었습니다. 무한히 부요하신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가난해지셨습니다.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습니다. 영원한 거룩 가운데 계신 하나님께서 죄로 오염된 인간의 삶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러나 죄에 물들지는 않으셨습니다. 쓰레기 더미 위에 비치는 햇빛처럼, 그 자리에 임하지만 더러움에 오염되지는 않으셨습니다. 완전한 거룩 가운데 계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짊어지셨고, 죄인의 슬픔을 담당하셨으며, 십자가에서 모든 죄값을 치르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진리입니다. 왕의 탄생입니다. 장엄한 탄생입니다. 우주 역사 가운데 이와 같은 탄생은 없습니다.
마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왕이심은 계보로, 성품으로, 탄생으로 증명된다. 네번째입니다. 예수님이 왕이심은 경배 받으심으로 증명됩니다. 마태복음 2장에서 그 사실을 보여 줍니다. 오늘 다 다룰 시간은 없지만, 잠시 배경을 보겠습니다. 1절입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정확히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은 더 이상 마구간에 계시지 않고 집으로 갔을지도 모릅니다. 시간이 지나서 머물 곳을 얻었을 것입니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자, 그렇다면 여기 동방 박사들(the Magi)은 누구일까요? 늘 성탄을 묘사하는 장면에 등장하는 이들은 정확히 누구일까요? 배경을 잠시 보겠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팔레스타인 동쪽, 그러니까 페르시아의 뒤를 이은 파르티아 제국에서 왔습니다. 한때 바벨론이 지배했었고, 또 그 뒤에 메대와 바사가 지배했던 그 동방 지역을 말합니다. 메대와 바사의 후손입니다. 그 지역에 사는 부족으로 매우 특별한 집단이었습니다. 유전 때문이었는지, 하나님의 섭리였는지, 아니면 환경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에게 탁월한 능력과 재능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중동 지역에서 높은 지위에 올랐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무렵에, 박사들은 그 지역에서 사실상 권력을 쥔 지도층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가장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갔고요. 그런 영향력은 메대-바사 제국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겁니다. 박사들은 다니엘 시대에도 이미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서 바벨론 시대를 지나서 메대-바사 시대까지 머무는 동안에, 박사들은 유대인들에게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다니엘이 그 가운데 있었습니다. 예언서를 보면 다니엘은 박사들 위에 세워진 자였습니다. 다니엘이 박사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을 겁니다. 그래서 박사들은 장차 위대한 왕이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다니엘의 예언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르쳐 준 내용을 분명히 그들은 알고 있었을 겁니다.
동방 박사들은 느부갓네살 시대에 권력을 얻었습니다. 예레미야 39장을 보면, 느부갓네살의 궁정에 “네르갈사레셀(Nergal-sharezer)”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박사들의 우두머리입니다. 그만큼 박사들은 오래 전부터 막강한 권력을 가진 집단이었습니다. 영향력이 아주 크고, 엘리트 계층이죠. 우리가 말하는 “메대와 바사의 법”도 사실은 박사들의 가르침에서 나온 겁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박사들은 다니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박사들의 종교는 조로아스터교와 섞여 있었지만, 동시에 유대인들의 가르침의 영향도 받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그 지역에서 왕이 되려면 반드시 박사들의 인정을 받아야 할 정도의 지위를 가졌습니다.
그러니까 동방 박사들은 통치 집단이었습니다. 왕을 세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동방의 왕을 세우는 자들”이라고도 부릅니다. 사법권도 쥐고 있었습니다. 에스더서를 보면, 궁정의 재판관들도 박사들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왕을 세우고, 재판관을 세우고, 권위를 행사하던 집단이었습니다. 천문학, 점성술, 자연사, 건축, 농업에 대한 아주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죠. 박사들의 종교는 일신론적 요소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선과 악의 대립을 믿었습니다. 세습 제사장 제도와 피 제사, 초자연적 계시, 예언의 가능성도 인정했습니다. 구약의 가르침과 공통점이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다니엘과 유대인에게서 영향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무렵, 동방 박사들은 중동 제국에서 사실상 주도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가장 큰 적은 바로 로마였습니다. 주전 63년, 55년, 40년에 로마하고 싸웠죠. 로마를 넘어설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로마가 차지하고 있던 팔레스타인 땅을 되찾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중동에 위대한 왕이 태어난다는 예언을 듣자, 그 왕을 만나고 싶어했던 겁니다. 정말로 왕이라면 왕으로 세워서 권세를 잡게 하고, 이스라엘 땅을 되찾고, 로마를 무너뜨리기를 기대했을 겁니다. 그 제국에서 다음 왕을 선택할 실질적인 권한이 바로 이 동방 박사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무렵 제국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습니다. 프라아테스(Phraates) 4세라는 왕이 폐위되었고, 왕좌가 비어 있었습니다. 박사들은 왕위를 이을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겁니다. 다니엘이 예언한 신적인 왕이 태어났다는 징조로 하늘에 별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박사들의 시선을 그 별로 이끄셨을 겁니다. 그 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 별을 따라 나섰습니다. 왕으로 오신 분을 찾기 위해서죠. 그를 왕으로 세우고, 권위와 통치를 세우기 위해서 말입니다.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왔을 때의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아마도 잘 훈련된 페르시아 말들을 타고 왔을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세 사람만 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져왔다는 사실이 인원수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수백 명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천 명 가까운 기병이 함께했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거의 군대와 같은 규모였을 겁니다. 그러니 헤롯이 긴장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죠. 동방 박사들은 정치적으로 막강한 세력이었습니다. 동시에 구약의 예언을 믿는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묻습니다. 2절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이전의 그 어떤 왕도 자기 별을 가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보통 왕이 아닌 것이죠.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왜 소동했습니까? 헤롯은 위협을 느꼈습니다. 또 다른 왕이 나타났다는 말에 두려워했습니다. 헤롯이 소동하면 예루살렘도 소동합니다. 헤롯이 불안해지면 사람들은 목숨을 걱정해야 했기 때문이죠. 헤롯이 불안해질 때마다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모두가 두려워했습니다.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이때 미가의 예언을 인용합니다.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그래서 헤롯은 박사들을 은밀히 불러서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말합니다.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우리는 이 헤롯의 속마음을 알죠. 경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죽이려는 것이었습니다. 박사들은 아이를 찾은 뒤에, 꿈에서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갔습니다. 헤롯이 이 일로 인해서 격노했습니다. 두 살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두 죽여 버렸습니다. 혹시 그 가운데 왕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죠.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장면은 11절입니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시간이 흘러서 이제는 더 이상 마구간이 아니라 집에 있습니다. 박사들은 아기를 보고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동방에서 온 이방의 왕을 세우는 사람들이, 이방인들이,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인정한 겁니다. 다니엘과 유대인들의 말을 알고 있던 동방 박사들은 이 아이가 바로 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알지 못했던 것을 이방인들은 알고 있었던 겁니다. 동방 박사들은 예수님을 경배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라는 사실은 경배 받으심으로 증명됩니다. 세상의 왕을 세우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경배했습니다.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황금은 왕에게 드리는 예물입니다. 유향은 하나님께 올려 드리던 향입니다. 위로 올라가는 향기, 신성을 상징합니다. 몰약은 인간의 삶과 함께하던 향품입니다. 고통과 죽음의 자리에도 사용되었던 것이죠. 황금은 왕을 말합니다. 유향은 하나님을 말합니다. 몰약은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신 분을 말합니다. 왕이신 하나님, 사람이 되신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마태는 세상의 왕을 세우던 사람들이 엎드렸다고 말합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심지어 헤롯조차, 예수님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로 예수님이 왕이심을 인정한 셈입니다. 왕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죽이려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왕 되심은 매우 분명합니다. 계보로 드러납니다. 계보 속에 나타난 은혜로 드러납니다. 탄생으로 드러납니다. 경배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선언으로 확정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님을 왕으로 정하셨습니다. 1장 23절로 다시 돌아가 보십시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왕은 처녀에게서 태어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작정입니다. 왕이 오셨습니다.
2장 6절을 보십시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이렇게 말합니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왕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2장 15절입니다.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호세아 11장 1절 말씀입니다. 헤롯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애굽에서 돌아왔습니다. 이것 역시 예언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언하셨습니다.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아기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애굽에서 불러내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8절입니다. 예레미야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메시아의 탄생과 함께 유대 어머니들의 통곡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3절입니다.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구체적인 한 구절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선지자들은 메시아가 나사렛 사람으로 불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사렛에 가서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작정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왕이 오실 때에는 처녀에게서 태어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실 때에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실 때에는 애굽에서 불러내심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이 오실 때에는 아이들의 학살로 인해 어머니들의 통곡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실 때에는 나사렛이라 불리는 곳에서 거하여 나사렛 사람이라 칭함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하나님의 왕적 선언을 하나도 빠짐없이 이루셨습니다. 성취하셨습니다. 모든 면에서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태어남이 왕이십니다. 하나님의 작정으로 왕이십니다. 계보로도 왕이십니다. 성품으로도 왕이십니다. 경배를 받으심으로도 왕이십니다.
성탄 찬송이 그것을 노래하고 있지 않습니까? “왕으로 나셨다, 왕이 나셨다.” “구주 나셨네.” 그러나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어떤 왕이십니까? 작은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십니까? 여러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십니까? 성경은 예수님이 하늘의 왕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도 하셨습니다. 그 나라는 영적인 나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마음을 다스리십니다. 사랑하는 자들 위에 주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예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들 위에 주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받아들이는 자들의 왕이 되십니다. 그리고 언젠가 온 땅의 왕이 되실 것입니다. 온 우주가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영적인 의미에서 왕이십니다. 미래에는 이 땅에서도 왕이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왕이실 것입니다. 다른 어떤 왕과도 다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죽음에 내어 맡기는 왕이 어떤 왕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자기 백성들이 싸워주지 않는 왕이 어떤 왕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적인 권세도, 힘도, 지배 영역도 없는 왕이 어떤 왕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왕을 알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 왕이십니다. 사랑하고 섬기고 자신의 삶을 드리는 자들의 마음을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언젠가 온 세상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말합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지금의 영적인 나라는 장차 이 땅에서 드러날 겁니다. 마침내 영원한 나라로 완성될 것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영원히 다스리실 겁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할 것입니다. 오래 전에 제니 허시(Jennie Hussey)가 찬양으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삶의 왕이신 주, 이제 주께 면류관을 드립니다. 모든 영광을 주께 돌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왕으로 태어나셨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주권 앞에 무릎 꿇지 않는다면, 그의 나라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어둠의 나라에서 아버지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지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사셨고,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지금도 살아 계시며 영원히 다스리신다는 사실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셔 왕으로 모시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내 삶의 왕으로 모시지 않는다면, 주로 고백하지 않는다면, 내 마음의 통치자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왕으로 태어나신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의 삶에서 왕이 되어 주옵소서. 우리 모두가 무릎 꿇고 은혜의 왕께 나아가 죄 사함을 구하게 하시고, 긍휼을 구하게 하시고, 그 영광스러운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시며, 그 나라에 속한 자들에게 베푸시는 복을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왜 오셨는지를 분명히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왕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이 낮아 보이고, 가려졌고, 숨겨졌고, 많은 사람이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장엄한 탄생을 보았고, 장엄한 성품을 보았고, 장엄한 말씀을 들었고, 기적 속에 나타난 왕의 권능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 면류관을 드리는 자들 가운데 서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은 가시 면류관을 씌우며 왕을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 왕이십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왕이십니다. 그리고 장차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온 우주의 왕이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왕 되심 앞에 모든 마음이 열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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