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마태복음을 펴시고 이 위대한, 참으로 위대한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부터 2장 4절까지 읽겠습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주신 말씀을 전하기 위한 배경을 먼저 마련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자, 오늘 아침 저는 ‘크리스마스 진리의 능력’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저는 우리 사회 속에서 크리스마스의 장엄함과 경이로움이 흐려지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저의 이런 기도는 희망사항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크리스마스는 너무 복잡해졌습니다. 너무 혼란스러워졌습니다. 너무 많은 것들로 뒤섞여 버렸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실제 사건은 수많은 환상과 섞여버려서 그 의미를 잃고 말았습니다.
크리스마스는 단순해야 합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정말 단순해야 합니다. 크리스마스의 모든 장식, 겉모습을 벗겨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이 하나의 진리만이 남아야 합니다. 이 진리만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크리스마스의 지속적이고 유일한 능력입니다. 산타클로스에게서는 참된 능력도, 참된 평안도, 위로도, 소망도, 사랑도, 약속도, 미래에 대한 확신도 결코 찾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선물로도, 어떤 감정 표현에도 영원한 가치는 없습니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결국 시들고 맙니다. 애초에 살아 있는 나무가 아니라면 더욱 그렇죠. 처음부터 가짜였으니까 말입니다. 그 어떤 선물이나 파티도 꺼져가는 생명을 살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불빛이라도 낙심한 영혼을 더 높은 영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없습니다. 산타클로스에게는 능력이 없습니다. 트리에도 없습니다. 사람들과의 교제에도 없습니다. 불빛이나 감정에도 없습니다.
비참하다고 느낄 때, 필요한 것은 능력입니다. 간절함을 느낄 때, 크리스마스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의심이 들 때에 소망으로 채우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슬플 때에 변하지 않는 기쁨으로 채우실 수 있는 분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두려울 때에 평안을 주시는 분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절망의 순간의 유일한 소망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어떤 면이 이런 소망을 줄까요? 어떤 점이 이런 기쁨, 깊은 슬픔 속에도 흔들리지 않는 위로를 주는 것일까요? 무엇이 도대체 외로울 때 위로를 주는 것일까요? 무엇이 두려울 때 평안을 주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을 바라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제 마태복음 1장과 2장으로 다시 돌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는 네 가지 호칭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네 가지 호칭은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충분한 분이신지, 그리고 왜 크리스마스의 유일한 참된 능력이신지를 보여줍니다. 네 가지 호칭입니다. 무엇일까요? 21절에 나오는 ‘예수’입니다. 23절에는 ‘임마누엘’이 나오죠. 2장 2절에서는 ‘왕’입니다. 또 2장 4절에서는 ‘그리스도’입니다. 이 네 가지 호칭 모두가 바로 한 아기를 부르는 이름입니다. 예수, 임마누엘, 왕, 그리스도, 이렇게 네 개입니다. 예수, 임마누엘, 왕, 그리스도.
자, 이 호칭들은 크리스마스의 아기가 어떻게 낙심한 마음을 회복시키는 능력을 가졌는지를 보여줍니다. 먼저 ‘예수’라는 이름을 살펴보겠습니다. 21절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예수라는 호칭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2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요셉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 이름을 ‘예수’라 불렀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사실 가장 달콤한 이름입니다. 적어도 이 땅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이 이름은 신약성경에 700번 이상 사용됩니다. 히브리어 예슈아(yeshua), 여호슈아(yehoshua, Joshua)에서 왔습니다. 뜻이 무언가 하니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 이런 뜻입니다.
누가복음 2장 11절은 예수께서 “구주”로 나셨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은 인자가 구원하러 오셨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10절도 구원하러 오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영광스러운 진리입니다. 또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말씀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그리고 그 죄는 사람을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반드시 구원받아야 하고, 건짐받아야 하고, 구조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여러분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자,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의 죄가 가져오는 궁극적인 결과인 영원한 멸망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현재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죄의 권세에서도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리고 가장 본질적으로는 죄가 요구하는 그 영원한 멸망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건지시고, 저를 건지시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멸망에서 구원하십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구원에서 가장 핵심은 죄 사함입니다. 구약과 신약 전체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진리죠. 구원이라는 것은 정의상 죄의 결과에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시던 마지막 만찬, 그러니까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잔을 드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잔은 ‘언약의 피를 상징한다’라고 말이죠. 바로 예수님 자신의 피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6장 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사도행전 13장 38절과 3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예수님은 죄 사함을 주시기 위해 태어나신 아기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욤 키푸르’(yom kippur), 그러니까 속죄일이라는 거룩한 날이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은 매년 이 날을 지키면서 지난 한 해 동안 지은 모든 죄를 위해 큰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날이 되면, 레위기 16장에 기록된 대로 대제사장은 염소 두 마리를 선택합니다. 이 두 마리 염소는 희생 제물입니다. 그 가운데 한 마리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죽여서 그 피가 제단 위에 뿌려졌습니다. 죄를 위한 제사죠. 죄에는 반드시 죽음이 따른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마리는 죽임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은 그 염소 위에 손을 얹고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그 염소에게 옮기는 것을 상징하는 의식을 행합니다. 그리고 그 염소를 광야로 끌고 가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고 다시는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보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단순하면서도 매우 분명한 의식을 통해, 죄를 위한 희생과 죄의 제거를 함께 보여주셨습니다. 죄는 다시는 기억되지도, 드러나지도 않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죽임을 당한 그 염소는 죄의 값을 실제로 치를 수는 없었습니다. 상징일 뿐이었죠. 또한 광야로 죄를 짊어지고 나간 그 염소도 실제로 죄를 제거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그 일을 이루실 예수님을 보여주는 상징이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두 마리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했죠. 예수님은 죄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를 완전히 제거하신 분이십니다.
사실 ‘용서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피에미(aphiēmi)’는 ‘보내다, 떠나보내다, 내보내다’ 이런 의미입니다. 법적인 용어로는 빚을 탕감해 주거나 사면을 베풀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지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피의 제사로 죽으심으로써,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리만큼 죄를 멀리 옮겨버리셨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분명히 말합니다. 시편 103편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동쪽이 서쪽에서 얼마나 멉니까? 무한히 멉니다. 유대인들이 무한대를 표현할 때 사용하던 방식입니다. 이사야 44장 2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짙은 안개 속에서 산을 볼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더 이상 보지 않으십니다. 완전히 지워버리셨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7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우리는 지금 이 위대한 진리를 듣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아기는 죄를 제거하기 위해 태어나셨습니다. 우리가 치러야 할 죄의 값을 대신 치르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우리에게는 심판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심판이 그리스도께 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값을 완전히 치르셨습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그 죽음을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아주 멀리 옮겨버리셔서 하나님께서 다시는 그 죄를 기억조차 하지 않으십니다. 요한일서 2장 12절에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오직 예수님의 정체성, 오직 예수님의 뜻에 의해, 오직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죄를 용서하셨다니 얼마나 복된 진리입니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죄를 더 이상 짓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가 이 땅에서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죄는 여전히 우리 삶에 해로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결코 죄에 대한 궁극적인 형벌을 치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 값은 이미 지불되었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지옥에서 보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삶을 마치면 곧바로 천국으로 갈 겁니다.
잘 들으십시오. 궁핍이 얼마나 심하든지, 삶이 얼마나 외롭든지, 얼마나 슬프든지, 상황이 얼마나 고통스럽든지, 크리스마스가 얼마나 우리에게 어둡게 느껴지든지, 감옥이나 감방에 갇혀 있는 것 같은 처지에 있든지, 얼마나 무섭든지, 미래가 얼마나 두렵게 보이든지, 만약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면, 여러분은 모든 죄를 용서하신 그분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면 기쁨이 충만합니다. 여러분이 겪는 어려움이 하나님께서 여러분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라며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이 잘못되었든지,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일이 무엇이든지, 아무리 큰 공허함을 경험하든지간에, 여러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여러분의 모든 죄가 완전히, 온전히 용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결코 자신의 죄값을 치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 값을 치르셨기 떄문이죠. 그리스도께서 이미 다 이루셨습니다.
크리스마스의 아기에게 주어진 두 번째 호칭이 23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을 부르는 매우 위대한 호칭 가운데 하나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은 구원자이실 뿐만 아니라 임마누엘이십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에 임마누엘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진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23절은 구약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사야 7장 14절입니다. 주의 사자가 이사야 7장 14절을 인용해서 요셉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아니 왜 갑자기 이렇게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등장하는 것일까?’ 하고 말이죠.
이제 그 배경을 조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사야 7장은 유다 왕 아하스가 다스리던 시대입니다. 솔로몬 이후로 나라가 둘로 나뉘었다는 것, 여러분 기억하시죠? 북쪽에는 이스라엘, 그러니까 열 지파가 있었고, 남쪽에는 유다 그리고 베냐민 지파로 이루어진 유다 왕국이 있었습니다. 북쪽 왕국은 하나님을 떠나서 배교한 상태였습니다. 남쪽 왕국은 때로는 여호와 하나님께 신실하게 서 있기도 했습니다. 이사야는 바로 그 남쪽 왕국에서 예언했는데, 아하스가 왕으로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아하스는 위대한 왕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웃시야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위대한 왕 웃시야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우상으로 가득 채워버렸습니다. 이방 신 몰렉(molech) 숭배를 다시 시작했죠. 아기를 불에 태워 제물로 바치는 아주 끔찍한 의식을 행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까지 몰렉의 제단 위에 불태워 바쳤습니다. 너무나 악하고 타락해서, 주변의 악한 왕들조차도 그의 행위에 분노를 할 정도였습니다.
그 가운데 시리아의 왕 르신(Rezin), 그리고 이스라엘 지역을 다스리던 베가(Pekah), 이렇게 두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두 왕은 아하스를 제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아하스를 공격하려고 했죠. 이런 위협 앞에서 아하스는 하나님께로 돌이켜 다윗의 계보와 백성을 지켜 달라고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tiglath-pileser)에게 의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강력한 앗수르 왕과 동맹을 맺으면, 그 막강한 군대와 세력을 두려워해서 르신과 베가가 쉽게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하스는 이 일에 너무나 집요하게 매달렸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약탈하고 금과 은을 모두 빼앗아서 디글랏 빌레셀에게 바치면서 도움을 얻고 동맹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이사야야, 가서 아하스에게 이야기하라.”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보내셔서 아하스를 책망하셨습니다. 앗수르를 의지하지 말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하스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네 백성을 지키실 것이고, 다윗의 계보도 보존하실 것이다. 그 두 왕으로부터 너를 건지실 것이다. 앗수르와의 동맹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아하스는 듣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도대체 맥락이 어떻게 연결되는 겁니까? 이런 말입니다. “보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누구도 하나님의 백성을 멸망시킬 수 없고, 누구도 다윗의 왕조를 끊을 수 없다. 처녀가 잉태해서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게 될 것이다.”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르신과 베가의 군대가 공격을 해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아들, 임마누엘이 반드시 처녀에게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잘 들으셔야 합니다. 이사야가 전하는 핵심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보잘것없는 두 왕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더 나아가 메시아는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 임마누엘로 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버리지 않으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우리 가운데로 오십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게 바로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가운데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임마누엘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아기이신 예수님은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날 태어나신 그 아기는 완전한 인간이셨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막에 임재하셨죠. 성전에 임재하셨죠. 그러나 이제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 곧 예수님 안에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진리입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이름과 마찬가지로, 이 ‘임마누엘’이라는 이름도 매우 강력한 크리스마스의 진리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히브리서 2장 14절입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우리는 혈과 육을 가지고 있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혈과 육을 취하신 것입니다. 우리와 동일한 육체를 가지셨습니다. 친히 육체를 취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메테코(metechō)’라는 단어는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가지게 됐다,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부터 혈과 육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러나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은 본래는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혈과 육을 취하셨습니다. 우리의 본성을 자신에게 더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죽음을 대신 죽으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2장 17절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는 모든 면에서 완전한 인간이 되셔야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제사장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고, 우리의 형편을 아뢰고,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언제나 사람 가운데서 택했죠. 사람의 필요를 알기 때문에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신하실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히브리서 2장 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예수님은 유혹을 아셨습니다. 시험도 아셨습니다. 고난도 아셨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은 결코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유혹을 그대로 경험하셨습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유혹을 아십니다.
이 말이 우리에게 알려 줍니까? 잘 들으십시오. 크리스마스에 그 아기를 바라볼 때, 예수님의 정체성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배고프셨습니다. 목마르셨습니다. 피곤하셨습니다. 주무셨습니다. 배우셨습니다. 기뻐하셨습니다. 슬퍼도 하셨습니다. 분노도 하셨고, 분개도 하셨고, 근심도 하셨습니다. 마음이 괴로우셨고, 실망도 경험하셨고, 눈물도 흘리셨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생각하며 깊이 눌리기도 하셨습니다. 믿음을 보이기도 하셨습니다. 성경도 읽으셨습니다. 기도하셨습니다. 가슴 아파하며 탄식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 느끼셨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예수님은 언제나 생명의 위협을 느끼셨습니다. 여러분이 오해를 받고 부당하게 대우받는다고 느끼십니까?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무관심한 우주의 그런 신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을 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도 아십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그리스도이실 뿐만 아니라 공감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크리스마스의 관점입니다. 그날 태어나신 그 아기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것을 그대로 느끼시고, 우리가 경험하는 것을 그대로 경험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받는 유혹과 시험을 그대로 겪으셨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깊이 공감하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그런 분이 되신 것입니다.
단지 공감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염려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2장 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험을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은 무엇을 하십니까?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염려를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십니다. 염려를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염려를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믿음을 주십니다. 아무리 멋지고 큰 크리스마스 트리도 이런 것을 줄 수 없습니다. 크리스마스 카드도 이런 것을 줄 수 없습니다. 산타클로스도 줄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임마누엘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은 단지 우리를 이해하신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를 도우신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단지 이해만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이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초자연적인 도움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시고,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의 싸움 속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자, 이제 세 번째 호칭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와서 헤롯을 만났을 때에, 마태복음 2장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여기서 예수님은 ‘왕’으로 소개됩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을 공감하시고 도우시기 위해 오셨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6절을 보면 예수님을 “다스릴 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동방 박사들이 도착했을 때는 예수님이 태어나신 지 이미 몇 달이 지난 뒤였습니다. 마태복음 2장 11절을 보면 가족이 이미 집에 거하고 있었죠. 동방 박사들은 먼 길을 여행하여 이 왕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헤롯 왕에게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헤롯 왕은 극도로 불안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매우 잔혹하고 광기 어린 통치자죠. 사실 진정한 왕도 아닙니다. 그래서 더욱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에돔 출신으로 로마에 의해 임명받은 정치적인 왕입니다.
헤롯은 이미 오랜 기간 왕으로서 그 자리에 있었지만, 자신의 지위를 잃어버릴까봐 끊임없이 두려워했습니다. 그 두려움의 수준이 매우 극단적이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그 즉시 제거해 버리고, 자신의 자리를 위협한다고 느끼면 죽여 버렸습니다. 대제사장을 물에 빠뜨려 죽이기도 했고, 자기 아내도 죽이고, 아내의 어머니도 죽이고, 자신의 왕위를 위협한다고 생각한 세 아들도 죽여버렸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전역을 돌면서 시민 중에 유력한 자들을 모두 찾아내서 병사들에게 명령합니다. “이 사람들을 전부 감옥에 가두어라. 그리고 내가 죽는 순간, 모두 처형하라.” 사람들이 왜 그래야 되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죽어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을 때 예루살렘이 반드시 애곡하게 하겠다. 사람들이 나를 위해 울지 않으면, 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울게 될 것이다.”
헤롯은 아기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두 살 이하의 남자아이들을 모두 죽이라고 했습니다. 온 지역의 아기들을 모두 학살했습니다. 극도로 불안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광기 어린 사람이었습니다. 진짜 왕도 아니고, 왕의 계보에서 나온 사람도 아니고, 심지어 유대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가짜 왕과 대조되는 분이 바로 참된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크리스마스의 이 장면을 볼 때,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 우리를 공감하시는 대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은 왕, 다스리시는 분이시요 주권자이십니다. 왕이신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왕에게 합당한 예물을 드렸습니다. 황금, 유향, 그리고 몰약이죠. 예수님은 왕이셨습니다. 그러나 왕의 시작은 매우 보잘것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아기는 왕 중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아도 사람들이 기대했던 그런 왕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조차 예수님이 언제 나라를 세우실지 매우 궁금해했죠. 언제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실지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이렇게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네가 왕이냐?”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예수님의 나라는 영적인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변화산 사건을 통해서 장차 자신의 영적인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미래의 나라가 도래할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단순히 다른 왕들 같은 그런 왕이 아니라, 어떤 왕과도 비교할 수 없는 왕이십니다. 모든 왕 위에 계신 왕이십니다.
시편 2편에서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도다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요한계시록은 미래를 바라보게 합니다. 미래를 바라볼 때에, 이미 영적인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의 왕권을 취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1장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요한계시록 12장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리고 요한계시록 19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오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께서 백마를 타고 오십니다. 다시 오시는 예수님의 이름은 충신과 진실입니다.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예수님은 반드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은 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는 분으로 오실 것입니다. 공의를 이루시는 분으로 오실 것입니다. 왕으로 오실 것입니다. 이 세상의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왕들,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다스리는 것처럼 교만하게 행동하는 이들은 결국 누가 참 통치자요 왕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처럼 말이죠. 느부갓네살은 스스로 나라를 세웠다고 생각하면서 참된 왕의 영광을 가로채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미쳐버려서 들판에서 풀을 먹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왕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의 영광 가운데 오실 때에 그 앞에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나라의 왕이십니다. 그리고 장차 온 세상과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왕이 되실 것입니다.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를 보십시오. 크리스마스의 실체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아기입니까. 예수라는 이름,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이해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공감하시는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지금은 영적인 나라를 다스리시지만, 장차 그 나라가 완전히 드러날 때 온 세상을 다스리실 왕이십니다.
자, 이제 마지막입니다. 4절은 또 하나의 익숙한 호칭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여기서 이 ‘그리스도’라는 말은 곧 메시아를 의미합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메시아’는 히브리어이고, ‘그리스도’는 헬라어입니다.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우신 기름 부음 받은 자입니다. 이 호칭은 예수님께서 다스리실 권리, 권세,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이 호칭 안에는 너무나 많은 의미가 담겨 있어서 다 다룰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한 가지를 붙잡아 보려고 합니다. 이사야 9장에서 오실 메시아에 대한 위대한 예언이 등장할 때, 한 아기, 한 아들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이렇게 불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곧 영원하신 아버지, 영원의 아버지라고도 번역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메시아는 영원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아버지라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요한복음 1장의 핵심이죠.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고, 그가 없이는 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그리스도’라는 말을 들을 때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생명을 낳으시는 분이다,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생명의 근원이신 분이다, 생명을 창조하시는 분이다,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한복음 11장 25절과 2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4장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한복음 14장 1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바로 여기에서 예수님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어떻게 그것을 증명하셨습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증명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생명의 주’라고 부른 것이죠. 예수님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군주’라고 번역된 이 단어, ‘아르케고스(archēgos)’에는 ‘시작하는 자, 시작하게 하는 자, 창시자, 창조자’,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표현은 ‘기원자’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기를 바라볼 때, 생명의 기원이 되시는 분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생각할 때, 이 놀라운 역설을 생각해 보십시오. 생명을 주시는 분의 생명을 사람들이 빼앗아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영적인 의미에서 생명을 주시는 분을 거부한다면, 결코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임마누엘이시고 왕이신 그분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고, 생명을 붙드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36편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그리고 성경은 말합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그러므로 여러분, 상황이 아무리 감옥처럼 어둡게 느껴지더라도, 삶이 아무리 외롭더라도, 상황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눈앞의 현실이 아무리 냉혹하더라도, 사람들에게 아무리 오해받고 거절당하고 멸시를 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할지라도, 살면서 어떤 일이 닥쳐오더라도, 아무리 노력해도 부족하더라도, 우리는 장차 올 생명의 소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예수, 임마누엘, 왕, 그리스도’는 단지 우리의 본이 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선생이시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의 길잡이이시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의 친구이시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이 되시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예수’이신 이유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때문이고, ‘임마누엘’이신 이유는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공감하시고 붙드시는 분이시기 때문이고, ‘왕’이신 이유는 우리의 주권자이시며 온 우주의 주권자이시기 때문이고, ‘그리스도’이신 이유는 우리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알고, 이 모든 것을 믿고, 이 모든 것을 고백할 때,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둘러싼 겉모습을 넘어 그 본질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크리스마스가 진정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의 말씀처럼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왕이신 예수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여러분에게도 가장 의미 있는 크리스마스가 될 것입니다. 이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예배를 마무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경배를 올려드립니다. 주님,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는 저희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배우자와 자녀와 가정과 친구들과 이 땅의 많은 좋은 것들을 누리고 있는 저희들이, 그 모든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 버려서 하나님께 집중하는 묵상과 예배의 시간을 놓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깊이 생각하는 그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이번 크리스마스가 우리 모두에게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있지만 예수님을 자신의 죄를 구원하시는 구주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 아직 죄 사함을 받지 못하고 죽음에서 건짐을 받지 못한 사람들, 회개함으로 주님께 나아온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오늘이 그날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죄에서 돌이켜 용서하시는 구주 앞에 엎드리는 날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임마누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공감하시고 긍휼을 베푸시고 능력으로 도우시는 대제사장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오늘이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 충분하심을 경험하는 날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나라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 주님의 선하신 통치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이 모두에게 오늘이 주님께 복종하고 그 나라에 들어가는 날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생명이 없는 사람들에게 오늘이 생명을 얻는 날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우리 모두가 예수님, 임마누엘, 왕, 그리스도를 온 마음으로 예배하게 하시고, 우리가 드리는 모든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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