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동안 이곳 그레이스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설교를 전하는 것은 제게 도전이자 기쁨이었습니다. 어떤 해에는 두세 편을 전하기도 하면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여러 가지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구하면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꼭 “크리스마스의 추악함”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제목을 이렇게 정했다고 해서 완전히 부정적인 내용만 전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 특별한 시기에 누리는 여러분의 기쁨을 깎아내리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구세주 탄생의 이 경이로운 또 하나의 측면을 이해함으로써, 우리의 기쁨이 더 커지고, 진정한 기쁨이 샘솟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마 크리스마스에 관한 가장 유명한 대중 가요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일 겁니다. “꿈속에 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 이렇게 노래하죠. 하지만 오늘은 크리스마스의 어두운 면, 크리스마스의 또 다른 면을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크리스마스를 생각하면 아름다운 장면만 떠오를 겁니다. 우리는 실제로 그런 아름다움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빛나는 전구, 장식물로 꾸며진 사랑스러운 나무, 형형색색의 장식품들, 아름다운 촛불, 화환, 눈이 내리는 풍경,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따뜻한 불꽃, 정성스럽게 포장된 선물들, 이런 것들 말입니다.
모든 것이 밝고 환하고 즐겁고 행복해 보입니다. 저는 우리가 주고받는 크리스마스 카드가 이런 모든 아름다움의 상징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크리스마스 카드는 우리에게 환상적이고 아름답고 경이롭고 사랑스러운 세계를 선물합니다. 분명히 크리스마스에 이런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면이 있습니다. 어두운 면이죠. 여러 관점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둡고 추운 어느 날 밤, 팔레스타인의 이름 없는 작은 한 마을에서, 사랑스러운 한 젊은 여인이 가장 비위생적이고 비참한 환경에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마구간의 오물, 거름 더미 사이에서 말이죠.
또 헤롯의 추악함에 대해 말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지배력과 권력을 잃을까봐 두려워했던 헤롯은 그 지역의 모든 아이들을 학살했습니다. 예루살렘의 무관심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을 능가하는 더 심각한 것이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카드에 담긴 모든 아름다운 장면들 뒤에는, 크리스마스에 느낄 수 있는 모든 사랑스러운 감정 뒤에는, 매우 비열하고 매우 추한 것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온 우주에서 가장 비참하고, 가장 흉악하고, 가장 끔찍한 현실입니다. 저는 크리스마스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크리스마스의 이면에 있는 그 추악함을 올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말씀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요한일서 3장 5절입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요한일서 4장 14절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자, 이제 구체적으로 한 구절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크리스마스의 어둡고 추악한 면은 바로 죄입니다. 죄입니다.
크리스마스의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없애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크리스마스의 참된 아름다움은 크리스마스가 죄라는 추악함을 어떻게 치유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하고자 하는 것은, 죄의 권세를 드러내고, 인간의 삶 전체를 황폐하게 만드는 그 죄를 다루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태어나시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 권능을 보여 드리려는 겁니다.
이 죄는 모든 영혼을 지옥으로 향하게 합니다. 죄가 온 세상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죄 때문에 눈물과 고통과 전쟁과 다툼, 불안, 불화, 혼란, 두려움, 염려, 질병, 죽음, 기근, 지진, 오염이 생겼습니다. 우리의 존재를 더럽히고 파괴하는 이 모든 것은 죄의 직접적인 결과입니다.
죄는 모든 인간관계를 흔들고 깨뜨립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든, 사람과 창조 세계의 관계든,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든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위대한 청교도 작가 토마스 왓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는 아름다움을 추함으로 변질시켰고, 악인은 자기 죄를 고치기보다 덮는 데 더 몰두한다.” 사람은 자신의 죄를 살피기보다 변명하는 데 훨씬 더 익숙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크리스마스의 모든 아름다움으로 자신의 죄를 덮으려 하는 이 시기에, 잠시라도 그 덮개를 벗겨버리고 그 모든 것 뒤에 숨겨진 추악함을 드러내는 것은 매우 합당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이유는 사람들을 죄에서 건져내실 구주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었다면 크리스마스도 필요하지 않았을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둘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크리스마스의 환상 뒤에 숨을 수도 없습니다. 크리스마스 카드와 그 밖의 모든 것들이 만들어 내는 연막 뒤에 그저 가만히 숨어 있을 수도 없습니다. 죄가 전면에 드러나야 합니다.
죄는 우주적 혼란을 만들어 냅니다. 누구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출산 중에 죽든, 심장병이나 암으로 죽든, 전쟁이나 살인이나 사고나 노환으로 죽든, 무슨 원인으로 죽든지 간에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모두가 죄 때문에 죽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이죠.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죄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입니다. 죄가 크리스마스의 추악함입니다. 죄는 모든 세대에 걸쳐서 인간을 질병과 재앙과 고통과 죽음과 지옥에 이르게 하는 원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죄가 크리스마스의 이유입니다. 깨어진 모든 결혼, 무너진 모든 가정, 산산이 부서진 우정들, 모든 논쟁과 불화, 모든 악한 생각과 악한 말과 악한 행실과, 행하지 못한 선한 생각, 말하지 못한 선한 말,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죄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7장 13절을 킹제임스 버전으로 보면 죄를 “저주받은 것”이라고 부릅니다. 또 성경은 죄를 뱀의 독과 무덤의 악취에 비유합니다. 이처럼 죄는 음흉하고 강력합니다. 인류 전체를 완전히 무력하게 만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사람을 자신에게로 이끄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를 처리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죄를 없애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바라보면서 그 주변적인 요소만 기뻐해서는 안 됩니다. 그 중심에 죄의 추악함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오래전에 토마스 거스리(Thomas Guthrie)는 죄에 대해서 도발적인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의 덕을 훔쳐 가는 분칠한 유혹자는 누구인가? 우리의 생명을 파괴하는 살인자는 누구인가? 처음에는 속이고 그 다음에는 우리 영혼을 정죄하는 이 마녀는 누구인가? 죄이다. 차가운 숨결로 청춘의 아름다운 꽃을 시들게 하는 자는 누구인가? 부모의 마음을 무너뜨리는 자는 누구인가? 노인들의 머리를 슬픔으로 희게 하여 무덤으로 내려가게 하는 자는 누구인가? 죄이다.”
“오비디우스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끔찍하게 변신하여 순한 아이들을 뱀으로, 다정한 어머니들을 괴물로, 아버지들을 헤롯보다 더한 자로, 자기 자신의 순결을 죽이는 자로 만드는 자는 누구인가? 죄이다. 누가 가정에 불화의 씨앗을 던지는가? 누가 전쟁의 횃불이 타오르게 하고 그것으로 온 땅을 누비는가? 교회 안에 분열을 일으켜 그리스도의 옷을 찢는 자는 누구인가? 죄이다.”
“나실인을 잠들게 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할례받지 않은 자들의 손에 넘겨주는 들릴라는 누구인가? 얼굴에는 매력적인 미소를 띠고, 혀에는 꿀 같은 아첨을 담고, 거룩한 환대를 베푸는 것처럼 문간에 서 있다가, 의심이 잠들면 배신하여 우리의 관자놀이에 배신의 못을 박는 이는 누구인가? 죽음의 물가 바위 위에 앉아 미소로 속이고, 노래로 유혹하고, 입맞춤으로 배반하며, 우리의 목을 감싸 안고 함께 멸망으로 뛰어드는 아름다운 사이렌은 누구인가? 바로 죄이다.”
“부드럽고 온유한 마음을 돌처럼 굳게 만드는 자는 누구인가? 이성을 높은 보좌에서 끌어내리고, 죄인들을 거라사 돼지처럼 미치게 하여 불못을 향한 낭떠러지로 내모는 자는 누구인가? 죄이다.”
이 죄가 크리스마스의 추악한 면입니다. 크리스마스의 배경 뒤에 숨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 때문에 구주가 오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말씀에 대한 온전하고 참된 설명입니다. 죄가 문제의 핵심입니다. 자, 이제 그 죄에 대한 다섯 가지 질문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 질문입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죄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세상을 이처럼 황폐하게 만들었을까요? 존 번연은 직설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공의에 도전하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의 긍휼을 유린하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조롱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업신여기며, 하나님의 사랑을 멸시하는 것이다.”
좀더 간결하게 말하자면 죄는 무엇일까요? 저는 요한일서 3장 4절이 가장 잘 설명한다고 생각합니다. “... 죄는 불법이라.” 죄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위반하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헬라어로 보면 죄는 무법이고 무법이 곧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도 없고 법도 없고 권위도 없고 기준도 없는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같습니다. 사실 인류는 언제나 그렇게 살기를 원해 왔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법이 있다는 것을 부인합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제한하는 규칙을 정하실 수 없다고 말합니다.
죄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경계를 벗어나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는 생각을 하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는 말을 하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셨고, 그 율법을 우리 마음에 새겨 주셨습니다. 로마서 2장에 나와 있죠. 그리고 로마서 7장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율법에는 불공정한 것이나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살기 원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기 원하고, 하나님의 정당한 지위를 거부한다는 사실 외에는 하나님의 법을 어길 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율법은 인간의 복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모든 율법은 인간의 선을 위하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모든 율법은 인간의 행복, 구원, 그리고 영원한 기쁨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리석습니다. 마치 아름다운 초장에서 마음껏 풀을 뜯어 먹을 수 있는데도 울타리를 뛰어넘어 결국은 진흙탕에 빠져버리는 말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틀 안에 있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그 아름다움을 거부했습니다. 울타리를 넘어섰습니다. 경계를 넘었습니다. 자기 죄의 수렁의 진창 속에 깊이 빠져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여러 가지 죄의 모습을 표현하는 다양한 용어들을 발견할 수 있지만, 가장 간결한 정의는 이것입니다. 죄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이제 두번째 질문입니다. 죄는 어떤 모습일까요? 죄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죄의 속성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께서 구주로 태어나시게 한 이 죄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죄는 더럽힙니다. 우리는 죄의 본질이 더럽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죄는 단순한 이탈이 아닙니다. 죄는 거역하고, 단순히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거나 경계를 넘어서는 것만이 아닙니다. 죄는 오염시킵니다. 죄는 더럽힙니다. 귀금속에 생기는 녹과도 같습니다. 아름다운 얼굴의 흉터와도 같습니다. 비단 옷의 얼룩과도 같습니다. 맑고 푸른 하늘에 있는 매연과도 같습니다. 죄는 우리를 더럽게 만듭니다. 영혼을 죄책감으로 붉게 물들이고 악으로 검게 만들어 버립니다.
열왕기상 8장 38절에서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죄를 치명적인 전염병, 재앙에 비유합니다. 스가랴 3장 3절에서는 더러운 옷에 비유합니다. 죄는 더럽히고 오염시키고 얼룩지게 합니다. 죄는 영혼을 더럽히고 하나님의 형상을 흐리게 합니다. 그리고 스가랴 11장 8절에 따르면 죄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싫어하시게 만듭니다. 에스겔 20장 43절에 따르면, 죄인은 자신을 바라보며 스스로 미워합니다.
죄는 모든 것을 오염시키고 더럽히고 얼룩지게 하고 훼손합니다. 인간의 모든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고린도후서 7장 1절에서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이라고 한 바울의 말은 결코 이상하지 않습니다. 청교도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는 ‘독’이라고 불리고, 죄인들은 ‘뱀’이라고 불린다. 죄는 ‘토한 것’이라고 불리고, 죄인들은 ‘개’라 불린다. 죄는 ‘무덤의 악취’라 불리고, 죄인들은 ‘썩은 무덤’이라 불린다. 죄는 ‘진창’이라 불리고, 죄인들은 ‘돼지’라 불린다.” 이 모든 성경적 개념들은 죄의 오염성, 더러움, 추함을 말해 줍니다. 자, 그러니까 죄는 더럽힙니다.
두번째, 죄는 본질상 반역합니다. 레위기 26장 27절에서 하나님은 “내게 대항할진대”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죄는 하나님께 반항합니다. 주먹을 움켜쥐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치는 것과 같습니다. 크리스마스에 아무리 예수님께 경의를 표하려 한다 해도, 죄가 예수님의 얼굴을 강타합니다. 예수님의 손에 못을 박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씌운 가시관을 짓누릅니다.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릅니다. 예수님께 침을 뱉습니다.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그러면서 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거야. 당신이 무엇을 주장하든, 당신이 누구이든 상관없어.” 시편 12편 4절은 말합니다.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이 말의 뜻은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그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속박되지 않겠다는 겁니다. 원하는 대로 말하겠다는 겁니다.
예레미야 2장 3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악을 고발하실 때 백성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놓였으니 다시 주께로 가지 아니하겠다.” 모든 죄인들의 선언입니다. 킹제임스 버전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주인이니 다시는 주께로 돌아가지 아니하리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에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가 다스립니다. 자기가 주인입니다.
히브리어로 죄를 가리키는 단어는 ‘페샤(pesha)’ 인데요, 반역을 의미합니다. 모든 죄인의 깊은 곳에는 이 반역의 심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44장 17절입니다.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반드시 실행하여...” 다시 말해, 죄인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합니다.
보십시오. 죄는 하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죄는 하나님을 보좌에서 끌어내리려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 되지 못하게 하려 합니다. 죄인이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다면, 하나님 없이 죄인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 될 겁니다. 이것이 죄의 반역입니다. 하나님께 어떤 경의를 표하는 것처럼 보이나, 죄는 하나님을 향해 일격을 가합니다. 죄는 구주께 침을 뱉습니다. 죄는 하나님을 거스르며 자기 뜻대로 하겠다고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죄는 첫째, 더럽힙니다. 둘째, 죄는 반역합니다.
자, 이제 셋째, 죄는 감사할 줄 모릅니다. 배은망덕입니다. 사도행전 17장 28절입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지금 존재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지으신 덕분에 여러분이 지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여러분이 가진 것, 여러분이 누리는 것, 여러분이 소유한 모든 것은 하나님 덕분입니다. 긍휼이 많으시고 친절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섭리 덕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좋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은혜로 우리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숨을 쉬는 것도 하나님 덕분이죠.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죄 많은 인간 세상에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은혜를 베풀고 계십니다.
죄인이 먹는 모든 음식, 그 모든 별미, 우리가 즐기는 맛난 모든 것들, 모든 아름다운 풍경, 모든 좋은 감정,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 모든 아름다움을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마음에 지혜를 주시고, 우리 몸을 조화롭게 하셔서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일하고 즐기고 쉬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이 충만하고 유익하게 되도록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웃음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에 기쁨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어린 자녀를 주시고, 친구를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각 사람들에게 특별한 재능을 주시고, 고유한 능력을 주셔서 그 사람이 되게 하시고, 그 누구와도 같지 않게 하시며, 특별한 영역에서 뛰어나게 하셔서 자존감과 자기 가치를 알게 하시는 분도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기본적으로 자신을 돌보고 서로를 돌보는 마음을 갖게 하셔서 우리 모두가 누리는 선한 것들로 삶을 채우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질병에 걸리지 않게 하시고 죽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문자 그대로 배은망덕한 죄인을 하나님의 섭리로 돌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계속 죄 가운데 머물 때에, 우리는 그 선하심을 거스르고 그 인자하심에 대해 배은망덕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압살롬을 보십시오. 아버지 다윗이 입맞추고 품에 안아주자마자 곧바로 나가서 자기 아버지를 대적하여 반역을 도모했습니다. 이런 죄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선한 것을 기꺼이 두 팔로 받아 안으면서도, 돌아서서는 하나님의 얼굴에 일격을 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무엘하 16장 17절의 질문을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죄는 이처럼 지독하게 배은망덕합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 그분을 보좌에서 끌어내리고 멸하려 합니다. 아주 기가 막힌 일입니다.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누군가가 용기를 발휘해서 여러분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면, 악으로 갚을 생각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을 향해 반역의 주먹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죄는 더럽힙니다. 반역합니다. 감사할 줄 모릅니다.
또한 죄라는 병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고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고칠 수가 없습니다. 불치병입니다. 예레미야 13장 23절입니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이 수사적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할 수 없다’ 입니다. 구스인은 자기 피부를 바꿀 수 없습니다. 표범도 아무리 애를 써도 자기 반점을 바꿀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구스인이 피부색을 바꿀 수 없고 표범이 반점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악에 익숙한 사람은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결심도, 모든 자기 노력도, 모든 종교적 행위로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죄는 인간 스스로는 고칠 수 없습니다.
이사야 1장 4절부터 읽겠습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하나님께서 죄인을 이렇게 묘사하십니다. ‘완전히 병들었다.’ 죄는 영혼의 불치병입니다. 영혼의 나병입니다. 법으로 없앨 수 없습니다. 철학으로 제거할 수 없습니다. 심리학으로 몰아낼 수 없습니다. 바란다고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노력으로 없앨 수도 없습니다.
존 플라벨(John Flavell)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회개하는 죄인이 세상이 창조된 이래로 내린 빗방울만큼 많은 눈물을 흘린다 해도, 그 눈물로는 단 하나의 죄도 씻어 낼 수 없다. 영원히 불타는 지옥 형벌도 단 하나의 죄도 깨끗하게 할 수 없다. 슬픔으로 고칠 수 없고, 형벌로도 고칠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고치실 수 있다.”
그러므로 크리스마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하시려고 세상에 오신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죄를 없애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다른 치료법도 없습니다. 죄를 고치는 오직 한가지 처방은 신성한 의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뿐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십니다. 죄는 하나님께 가증한 일입니다. 이렇게만 말해도 분명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영원히 대적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인 외에는 아무도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죄인만 정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 영원히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가난하다고 해서 대적하지 않으십니다. 무지하거나 장애가 있거나 병들었거나 세상에서 멸시를 받거나 능력이 부족하다거나 가진 것이 적어 보인다고 해서 대적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갈라놓는 것은 단 하나뿐입니다. 죄입니다. 죄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대적하십니다.
예레미야 44장 4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미워하는 이 가증한 일을 행하지 말라.” 방황하고 반역하고 거역하고 더러워진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온전히 거룩하시고, 오직 거룩하시고, 전적으로 거룩하시고, 언제나 거룩하십니다. 반면 죄인은 죄로 가득합니다. 온전히 죄 가운데 있고, 오직 죄뿐이며, 전적으로 죄인이고, 언제나 죄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과 죄인이 친구로 만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죄가 제거되는 것뿐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이 일이 성취되었습니다.
자, 그러니까 죄는 더럽힙니다. 반역합니다. 감사할 줄 모릅니다. 죄는 인간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죄는 고됩니다. 죄의 성격 가운데 하나는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죄는 오직 고통만을 낳는데도 사람들은 그 죄를 짓기 위해 고통을 감수합니다. 인간의 본성이 만들어 내는 이상한 충동이죠. 예레미야 9장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악을 행하기에 지치거늘.” 시편 7편 14절은 다윗을 쫓던 원수 구스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악인이 죄악을 낳음이여 재앙을 배어 거짓을 낳았도다.” 죄악을 만들어 내기 위해 힘들여 애쓴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24장 12절은 예루살렘에 대해 “이 성읍이 수고하므로 스스로 피곤하나” 이렇게 말합니다. 죄는 고된 일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맹렬히 죄를 향해서 달려갑니다.
창세기 19장이 떠오릅니다. 소돔 성의 타락하고 뒤틀린 동성애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두 아름다운 천사가 롯의 집에 들어온 것을 보고 몰려들었습니다. 그 장엄한 존재들을 악하고 왜곡된 자기들의 방식으로 욕보이려고 했습니다. 천사들을 집 밖으로 끌어내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죠.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그 타락한 동성애자들의 눈이 멀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를 충격에 빠뜨리게 한 게 뭔지 아십니까? 그 동성애자들이 눈이 멀었을 때에, 땅에 넘어져 여기 저기 더듬거리면서 기어다니지도 않고, 도망가면서 자비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격렬하게 문을 부수려고 했습니다.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애를 썼습니다. 사건 현장에서 눈이 멀었는데도 엄청난 욕망의 충동을 압도하지 못했습니다. 눈이 멀었다는 사실조차 무시하면서 정욕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며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애를 썼습니다. 이게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죄는 이처럼 너무나 패역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죄로 인한 고통과 결과를 무시하면서까지 악을 따르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지치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그야말로 애를 쓰며 지옥으로 달려갑니다.
죄가 어떻다구요? 더럽힙니다. 반역합니다. 감사할 줄 모르고, 고칠 수도 없고,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고됩니다. 이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어깁니다. 참으로 비참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죄는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까요? 세번째 질문입니다. 저는 여러 해 동안 이런 편지를 받아왔습니다. “목사님이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죄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까요? 그 답은 로마서 3장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을 위해서 하나 더 덧붙입니다. “하나도 없으며.” 죄는 한 사람 아담을 통해서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인들의 문명이 시작되었습니다. 나무를 보면 열매를 압니다.
욥은 욥기 14장 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아무도 없습니다. 시편 58편 3절은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라고 말합니다. 시편 51편 5절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담 이후로는 죄인, 또 죄인, 죄인만 있을 뿐입니다. 오직 한 분만 죄가 없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일서 3장 5절은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아담의 죄에 대한 책임뿐만 아니라, 그 죄로 인한 타락과 부패와 오염도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우리는 다 독이 든 같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마십니다. 우리는 똑같이 타락한 유전적 본성을 물려 받았습니다. 아담의 죄는 열왕기하 5장에서 마치 나아만의 나병이 게하시에게 옮겨 간 것처럼 우리에게로 옮겨졌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 2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자신이…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아담의 원죄가 인류 전체를 오염시켰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의문이 있으시다면, 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여러분이 죽는다면,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단순합니다. 분명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며 자신이 죄인인지 알고 싶으세요? 이렇게 물어 보십시오. 병든 적이 있나? 나는 늙어가고 있나? 결국 죽을 것인가? 만일 그 대답이 ‘죽는다’이면, 죽는 이유는 죄입니다.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죄의 뿌리는 너무도 깊습니다. 너무도 깊어서 구원을 받은 후에도 그리스도인에게 여전히 문제가 됩니다. 바울은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죄를 용서받았고, 죄에 대한 형벌을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로 그 죄를 덮어 주셨다 해도, 죄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죄의 뿌리가 그만큼 깊습니다.
우리 모두 똑같습니다. 우리 모두 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도 죄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리고 만일 여러분이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을 어떻게 만드는 겁니까?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제 중요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죄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죄가 무엇을 만들어 냅니까? 제가 말씀드리죠. 첫째, 죄는 악이 우리를 지배하게 만듭니다. 죄는 사람을 악의 희생자로 만듭니다. 악이 마음을 지배하게 합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은 말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에베소서 4장은 마음이 허망해졌고, 총명이 어두워졌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깨달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1장은 “상실한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죄가 마음을 지배하여 그 사고 과정을 악으로 가득 채워 버렸습니다. 사람은 악을 생각합니다. 악을 계획합니다. 악을 품습니다. 그리고 악은 의지도 지배합니다. 앞서 인용했던 예레미야 44장 17절 말씀입니다.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반드시 실행하여..” 죄인은 죄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습니다. 죄인의 생각이 악에 압도되어 있다면, 그 의지도 역시 악에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자기가 품은 생각대로 행하려 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생각 자체가 이미 악에게 지배를 당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악은 감정도 지배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합니다. 사랑과 애정과 소원과 욕망과 갈망이 옳지 않은 것을 향해 기울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악에게 사로잡혀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내 속에 거하는 죄”입니다. 밤에 어둠이 달라붙어 있듯이 죄가 붙어 있습니다.
죄는 그리스도인의 본성 안에도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 안에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마치 잠자는 사자와 같아서 작은 자극에도 격분합니다. 죄의 힘은 압도적입니다. 때로는 불꽃처럼 크게 타오르고, 때로는 낮게 타는 불씨처럼 남아 있다가, 유혹의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격렬하게 다시 타오릅니다.
두번째, 죄와 그 결과를 생각할 때 죄는 우리를 사탄의 지배 아래 있게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잘 들으십시오.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죄가 가려지고 옳은 일을 할 자유를 얻은 사람뿐입니다. 죄인은 자유롭지 않습니다. 죄의 완전한 지배 아래 있을 뿐이죠. 사탄의 통제 아래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2절에서 사도 바울은 죄인이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그러니까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행한다고 말합니다. 사탄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통제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흔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죄인들의 얼굴에는 자기 아버지인 사탄의 형상이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분명하죠. 드러난 모습이 마귀의 자녀였습니다. 사탄의 지배 아래 있다는 표지를 지녔습니다. 사람은 사탄의 종입니다. 자유로운 존재가 아닙니다. 완전히 지배받는 존재입니다. 사탄은 사람 안에서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서 역사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그러니까 죄는 사람을 압도하고 사탄의 지배 아래 있게 합니다.
세번째, 죄는 사람을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게 합니다. 죄는 우리를 정죄받게 하고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지옥으로 보냅니다. 에베소서 2장 3절은 우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합니다. 시편 90편 11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잠언 14장 9절은 죄를 심상히 여기는 것은 미련한 자라고 말합니다.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진노는 순간적으로 치솟는 변덕스러운 감정이 아닙니다. 거룩한 증오입니다. 하나님의 순전하고 거룩한 의지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반드시 멸하실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 진노하시고 보복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사람을 하나님의 진노의 상속자가 되게 할 뿐입니다. 사람들은 다모클레스의 연회(Damocles banquet)처럼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머리 위에는 칼이 실 한 가닥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 실이 끊어지는 날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매우 중요한 죄의 결과가 있습니다. 삶의 모든 비참한 고통에 처하게 만듭니다. 죄는 최악의 것들을 초래합니다. 욥기 5장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 사람은 고난을 위해 태어난 존재, 고난이라는 이름을 가진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바울은 아담의 죄가 피조물로 하여금 허무한 데 굴복하게 했다고 합니다. 피조물이 공허함과 무익함에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무언가 빠져 있습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남는 것은 고통과 공허함뿐입니다. 죄 가운데 사는 삶은 결국 고통과 아무것도 없는 것, 허무함만 남길 뿐입니다. 솔로몬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수수께끼이자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은 울면서 세상에 들어오고 신음하며 세상을 떠납니다. 그 사이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공허함뿐이죠. 죄는 사람을 존귀한 자리에서 끌어내렸습니다. 존엄을 잃었습니다. 평안을 빼앗겼습니다. 영원한 기쁨도, 소망도, 의미도, 가치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치는 바다와 같습니다. 잠언 28장 1절입니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삶 속에 평안이 없기 때문에 공허함과 무의미함과 죄책감에 쫓기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팔아버린 유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죠. 죄책감과 공포에 짓눌려서 비명을 지르는 양심을 잠재우기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지옥조차도 쉼을 주지 못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죄는 인생에 가장 나쁜 것을 가져옵니다. 궁극적인 비참함에 노출시킵니다. 죄의 최종 결과는 사람을 지옥으로 정죄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은 마지막 날 큰 흰 보좌 심판에서 주께서 믿지 않는 자들을 모아 영원히 타는 불못에 던지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지옥의 교리를 가르치셨습니다. 복음서에서 지옥을 분명하게 말씀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사도들도 그 가르침을 이어받았고, 신약 전체에서 반복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이 땅에 살고 있는 약 42억 2천 5백만 명의 사람들은 결국 모두 죽습니다. 모두가 죽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없이 죽는다면 모두 지옥을 마주할 겁니다. 올해만 해도 오천만 명이 죽을 겁니다. 하루에 136,986명이 죽습니다. 제가 설교를 시작한 이후에도 이미 오천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1분마다 95명이 죽습니다. 그리고 출생률의 2.5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 것이라는 뜻이죠.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지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스펄전(Spurgeo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지옥 입구 위의 외로운 판자 하나에 매달려 있는데, 그 판자는 썩어 있다.” 죄의 치명적인 결과입니다. 참으로 끔찍한 일입니다.
제가 왜 이 이런 말씀을 드릴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크리스마스의 추악함입니다. 이 추악함이 우리를 크리스마스의 아름다움으로 이끕니다. 크리스마스의 아름다움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죄인을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아름다움 아니겠어요? 추악함을 알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크리스마스의 아름다움은 카드나 나무나 불빛과 선물과 환상, 눈 내리는 풍경, 따뜻한 벽난로, 이런 데 있지 않습니다. 크리스마스의 아름다움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추악함을 고치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오래 전에 에스겔 홉킨스(Ezekiel Hopkins)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을 멸망시키는 것은 할 수 없음이 아니라 하려고 하지 않음이다. 무능이 아니라 완고함이 그를 파멸시킨다.”
인간은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아주 완고합니다. 자신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시며 완전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크리스마스입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크리스마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어떤 감정을 품고 있든, 어떤 따뜻한 느낌을 가지고 있든, 죄의 추악함을 깨닫지 못한다면,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그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크리스마스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조셉 하트(Joseph Hart)는 이렇게 썼습니다. “오라 죄인들아,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아, 연약하고 상한 자들아, 병들고 고통스런 자들아, 예수님은 풍성한 긍휼과 사랑과 능력으로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 준비하고 기다리신다. 능력이 있으시다. 능력이 있으시다. 기꺼이 하고자 하신다. 더 이상 의심하지 말라. 예수님은 능력이 있으시다. 능력이 있으시다. 기꺼이 하고자 하신다. 더 이상 의심하지 말라. 오라, 지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타락으로 상처 입고 찢긴 자들아, 더 나아질 때까지 기다리면 결코 오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것이 진리임을 압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이 말씀은 미쁘고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말씀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아름다움입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영광입니다. 나무도 아니고, 장식도 아니고, 불빛도 아니고, 풍경도 아닙니다. 추악함이 구주의 오심으로 고침을 받는 것, 그것이 아름다움입니다.
잠시 머리를 숙인 채로 계시는 동안,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신다면, 아직 삶을 그리스도께 드리지 못하셨다면, 주님으로,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다면, 지금 하십시오. 오셔서 죄를 깨끗하게 씻어 달라고 구하십시오. 자신을 정결하게 해 달라고 구하십시오.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미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자신의 삶 속에 여전히 죄가 있음을 아셨다면, 오늘 다시 그 죄가 어떤 것인지 새롭게 깨달으셨다면, 다시 씻어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주님은 단번에 구원하시지만, 날마다 우리를 깨끗하게 씻어주십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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