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에도 <생명의 기원: 창조인가 진화인가>를 계속해서 다루겠습니다. 오늘 처음 오신 분들도 계시고, 지난 설교를 놓친 분들도 계시기 때문에 잠시 간단히 요약을 하겠습니다. 오늘 다룰 내용이 많기 때문에 짧게만 정리하겠습니다. 오늘은 한 시간을 꽉 채워서 말씀을 드릴 수가 있어서 참 기쁩니다. 가장 먼저 진화는 불가능합니다. 제가 하는 모든 말의 대전제입니다. 이것만 기억하시면 창조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화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난 몇 차례의 설교에서 왜 진화가 불가능한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특히 정보 이론의 관점에서 진화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다루었습니다.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모든 생명체는 DNA 암호, 그러니까 유전 암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안에 그 생명체의 존재, 보존, 회복에 필요한 정확한 정보가 담겨 있습니다. 필요한 것보다 적지도 많지도 않고 아주 정확한 양의 정보가 들어 있습니다. 모든 유전자는 그 생명체의 한계를 정합니다. 자신보다 적을 수도, 자신보다 더 클 수도 없습니다. 다른 종으로 변화될 수 있는 유전 정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각 생물이 그 종류대로 번식한다고 말합니다. 정보 이론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한 종류 안에서의 다양성은 있을 수 있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과학은 진화를 돌연변이가 일어나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살아있는 생명체에게 돌연변이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합니다. 변화와 같은 뜻으로 보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꼭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돌연변이는 생명체의 본질이나 종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돌연변이가 생명체를 다른 종으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돌연변이가 일어나면 항상 기존에 있던 정보가 손실됩니다. 새로운 정보가 생겨날 수는 없습니다. 돌연변이는 결코 새로운 유전 정보를 더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돌연변이는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상향적 진화 과정으로 작용할 수 없습니다. 돌연변이는 상향적 진화 과정을 위한 기제가 될 수 없습니다. 독일 연방 물리·기술연구소(German Federal Institute of Physics and Technology) 소장이자 교수였던 베르너 기트(Werner Gitt) 박사는 “돌연변이를 통해 생명체 안에 새로운 정보가 생겨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돌연변이는 기존 정보에 변화만 일으킬 수 있을 뿐이다. 정보가 증가할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돌연변이의 결과는 해롭다. 새로운 기능이나 새로운 기관을 위한 새로운 설계도가 생길 수는 없다. 돌연변이는 새로운 정보의 근원이 될 수 없다."
정직한 과학자라면 모든 생명이 하나하나 위대한 지적 존재에 의해 설계되어 전체가 질서 있게 지어졌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복잡성을 생각해 보면 정말 놀랍습니다. 잠시 인간의 뇌를 떠올려 보십시오. 인간의 뇌는 보잉 747 비행기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보잉 747 기종은 6백만 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고철 더미에서 저절로 진화해서 그런 보잉 747이 되었다고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생명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면 할수록 그 복잡성은 점점 더 커집니다. 예를 들어 인체는 수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수조 개 중 단 하나의 세포만 보더라도, 그 안에 500쪽 분량의 책 천 권 이상을 채울 수 있는 유전 정보가 담겨있다고 추정됩니다. 한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수조 개의 세포 중 하나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정보일 뿐인데도 말이죠. 심지어 많은 과학자들은 이것조차도 복잡성을 과소평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정보는 어디서 온 겁니까?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모든 정보는 누구에게서 온 것입니까?
진화를 해답으로 삼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우연이 에너지의 원천이라니 말도 안 됩니다. 정신병원에 가야 할 만큼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왜 과학자들은 여전히 이런 터무니없는 우연에 근거한 진화론을 주장하는 걸까요? 왜 그럴까요? 결론은 이겁니다. 하나님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기준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헨리 모리스가 적절하게 표현한 것처럼 진화론은 “오래 전부터 이어진 하나님을 향한 전쟁”일 뿐입니다.
진화론은 오래 지속된 하나님을 향한 전쟁의 현대적 표현입니다. 구약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창조주를 부인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우연을 동인으로 삼는 것도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한 생명체가 다른 종류의 생명체가 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도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합리적이지도 않고 지혜롭지도 않은데, 그렇다면 왜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걸까요? 그 이유는 죄를 사랑하고 어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행위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하고 죄를 사랑할 뿐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하나님의 말씀과 법에 순종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성경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세상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있습니다. 피조물에 대해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창조주께서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경에만 나옵니다. 진화론은 하나님을 향한 전쟁입니다. 사탄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오랫동안 벌여온 전쟁으로써 공격 방식을 현대적으로 바꾸었을 뿐입니다.
1989년에 헨리 모리스라는 과학자가 <하나님을 향한 오랜 전쟁(The Long War Against God)>이라는 아주 훌륭한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모리스는 진화론이 세상에 끼친 영향을 보여줍니다. 거의 온 세상을 지배하는 진화론적 사고가 인간의 모든 사고 영역을 관통하고 있고,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주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아주 잘 드러냈습니다. 단지 물리 세계를 보는 시각만이 아니라, 단지 생물학 학문만이 아니라, 사회과학, 행동과학, 심리학, 인문학, 자유학문, 철학, 심지어 종교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모리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진화의 거짓은 현대 사상 모든 분야에 스며들어 지배한다. 그렇다면 치명적으로 불길한 정치적 발전과 도처에서 가속화되고 있는 혼란스러운 도덕적·사회적 붕괴의 근본적인 책임이 진화적 사고에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모리스는 집단학살, 음행, 동성애, 낙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존엄성 파괴와 관련된 모든 문제, 범죄, 마약,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 없는 물질주의적, 인본주의적 세계관의 결과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이유들로 모리스는 진화론이란 단지 시대마다 이어져 온 갈등의 현대적 형태일 뿐이며, 하나님을 향한 오랜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진화론은 공허한 철학입니다. 헛된 속임수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공격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계시를 부정합니다. 우주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를 부정합니다. 인간의 존엄을 부정합니다.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부정합니다. 교묘하게 꾸며낸 가상의 이야기입니다. 영적 음행입니다. 사탄, 곧 거짓의 아비가 가장 최근에 만들어낸 가증한 것일 뿐입니다. 만일 제가 더 세게 말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속이는 자를 믿었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거짓말쟁이 사탄을 믿고 사탄과 함께 하나님을 향한 오랜 전쟁에 동참했습니다.
세계 열방의 역사, 세상이 반복해서 같은 멸망을 되풀이하는 순환적인 이야기가 바로 로마서 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직접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아주 익숙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지는 않겠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로마서 1장 18절 이후의 말씀은 어떻게 하나님을 향한 오랜 전쟁이 계속해서 반복되는지를 보여주는 시나리오입니다. 세계 역사 속에서 열방이 겪어온 순환적인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8절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분명한 진리입니다. 창조주가 계시다는 것은 분명한 진리입니다. 우리가 인격을 가진 존재이기에 인격적인 하나님의 존재는 분명한 진리입니다. 우리가 도덕적 감각과 양심을 가지고 있기에 도덕적이신 하나님의 존재는 분명한 진리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새겨진 옳고 그름을 세우신 하나님의 존재는 분명한 진리입니다. 이 거대한 우주라는 결과를 보면 반드시 창조주라는 첫 원인의 존재는 분명한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원인과 결과에 기초한 이성은 결국 첫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분명한 진리를 억누르는 것입니다.
1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성을 주셔서 알게 하셨습니다. 이성은 기본적으로 원인과 결과, 인과관계를 따라가는 능력입니다. 어떤 연구를 하든지 원인과 결과를 다룹니다. 어떤 원리를 이해할 때에도 그 인과관계를 확인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이성은 사물을 연결해서 올바른 결론에 이르게 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속에 합리적인 사고를 심어 주셨기 때문에 결국 첫번째 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고, 그러면 거기에서 하나님께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2장에서 말씀하신 대로 사람의 마음속에 도덕법을 새겨 주셨습니다. 그래서 19절이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라고 한 것입니다. 20절 말씀대로 하나님이 세상의 창조주입니다. 세상의 창조를 바라보면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이 드러납니다. 창조를 바라보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를 바라보면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있습니다. 창조를 바라보면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크고 얼마나 광대하며 얼마나 무한히 복잡한지를 깨닫습니다. 창조를 바라보면 하나님이 아름다움과 질서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를 바라보면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을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강력하고 압도적인 손길로 죽이고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창조를 통해 하나님의 참으로 다양한 속성을 알 수 있습니다.
비를 통해, 햇빛을 통해, 우리가 누리는 음식과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아름다움과, 삶 속에 부어주신 사랑과 사랑의 신비와 자녀의 축복과 모험의 짜릿한 기쁨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우시고 친절하시고 선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0절 말씀처럼, 만일 이런 것들을 보고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핑계할 수 없게 됩니다. 창조는 어떤 원생액이라고도 하는 원시 수프 속의 단세포 생물로 우리를 이끄려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다 보여주려는 것이지, 우연에 의해 움직이는 상상 속의 진화 과정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점진적 창조론이든, 유신진화론이든, 모두 하나님의 창조에 나타난 위대한 능력을 훼손하는 것입니다. 유신진화론자들이 말하듯 하나님이 단순히 우주를 출발시켜 놓고 그 다음은 진화가 이어받았다고 한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적자생존’이라는 개념에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적자생존’이라는 사상은 찰스 다윈과 동료들이 당시의 지식 부족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것일 뿐입니다. 오늘날의 과학적 사실과는 맞지 않습니다. 우리가 창조의 복잡성, 우주의 광대함, 가장 작은 미시 세계의 정밀함, 또 가장 큰 거시 세계 질서의 원인을 진화에 돌린다면 하나님은 영광을 받지 못하십니다. 창조의 모든 공로를 오직 하나님께 돌릴 때에 하나님께서 영광과 존귀를 받으십니다.
21절은 이성과 도덕이 인간의 삶에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성과 도덕은 필연적으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끕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로 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빛이 꺼져 버린 겁니다. 22절입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박사 학위를 받고, 책을 쓰면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뒤죽박죽 섞여서 불가능하고 일관성이 없는 비이성적인 관점입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어리석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23절은 그들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훔쳤다고 말합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 초자연적인 하나님, 피조물보다 크시고 피조물을 초월하여 계신 하나님을 떠나고, 그 자리에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의 형상”을 대신 세웁니다. 25절에 따르면 그들은 창조주 대신 피조물을 경배하고 섬깁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버리고 거짓을 믿습니다. 사탄이 퍼뜨려 온 하나님과의 전쟁의 거짓말을 믿고 피조물을 섬깁니다. 진화론자는 진짜로 피조물이 창조주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절대 잊을 수 없는 경험이 하나 있습니다. 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그러니까 남캘리포니아 대학교의 한 교수님이 뱀이 새가 된 과정을 강의하는 것을 직접 들었습니다. 강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제가 제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뱀은 땅을 기어다니면서 벌레를 잡아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벌레들이 눈치를 챘습니다. 그래서 뱀을 보면 구멍 속으로 도망가 버렸고, 뱀들은 먹이를 잡기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그러자 벌레를 기습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방법으로 나무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뱀은 나무를 타는 능력을 발전시켰고, 가지에 매달려서 벌레가 자신들을 보지 못하게 기다리다가 밑에 벌레가 지나가면 잡아먹었습니다. 그런데 벌레들도 곧 눈치를 챘습니다. 그래서 나무 근처에 가지 않게 되었고, 뱀들은 다시 먹이가 줄어들어 좌절했습니다. 그러자 결국 뼈를 비우고, 날개를 만들고, 날아다니면 유리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USC 박사가 정말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뱀이 새가 되었답니다. 바로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결국 피조물을 높이고, 스스로 새로 변한 뱀의 능력을 칭찬하는 꼴이 됩니다. 그러나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뱀에게는 날 수 있는 유전적 정보도, 뼈를 비울 수 있는 유전적 정보도, 발이나 부리를 만들 수 있는 유전적 정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로마서가 바로 이 점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지혜를 버리고 어리석음과 우매함을 받아들였습니다. 어리석은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헛되고 공허하고 쓸모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에 대한 유일한 합리적인 설명이신 하나님을 등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하나님의 도덕적 기준이 자기들을 억누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새와 짐승들을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25절 하반절입니다.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셨습니다. 성적 죄와 동성애와 28절부터 32절까지 나열된 온갖 죄악 가운데 그들을 내버려 두셨습니다. 결국 끔찍한 죄악의 깊은 구렁텅이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이것이 진화론의 실체입니다. 진화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오랜 전쟁의 일부입니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하나님을 모독하고 조롱하는 수많은 진화론자들의 인용문을 모두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그런 말들까지 들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반면에 성경은 분명하게 또 반복적으로 하나님이 모든 것의 창조주라고 말합니다. 잠깐 보여드리겠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보다 더 명확하고 포괄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너무나 분명하고 명확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장도 이렇게 말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잘 보십시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 3절에는 진화가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다시 말해 지금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으신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말합니다. 경험적 분석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즉, 성경을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이 창조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라고 합니다. 이는 진화론을 완전히 부정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보는 창조된 세계는 원래 존재하던 물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에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창세기의 내용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처럼 히브리서 11장 3절은 위대한 구절입니다.
또 골로새서 1장 16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주 되심을 분명하게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성경이 반복해서 "만물"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 곧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포함됩니다. 그리고 땅에 있는 것, 우리가 사는 작은 세계인 이 지구 안에 있는 모든 것 역시 포함됩니다. 하늘과 땅, 이 지구 바깥에 있는 모든 것과 지구 안에 있는 모든 것, 모두 다 예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또 이렇게 말합니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여러분, 산이 보이십니까? 예수님이 지으셨습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그것 역시 예수님이 지으셨습니다. 바다도 보이죠? 이것도 예수님이 만드셨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류 역시 예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는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로 불리는 천사들의 세계까지 포함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느니라."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분명한 진리입니다.
성경 전체를 따라가다 보면 이 진리를 계속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4장 32절에서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날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인류는 수십억 년에 걸친 진화 과정의 마지막 종착지가 아닙니다. 창세기가 말하듯이 여섯째 날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시편도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시편 104편이 좋은 예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진화론은 지극히 비합리적이고 어리석은 관점입니다. 지구에 생명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서만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한한 우주는 어떻게 설명이 가능합니까? 하나님이 펴신 것입니다. 3절입니다.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5절입니다. “땅에 기초를 놓으사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옷으로 덮음 같이 주께서 땅을 깊은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로 솟아올랐으나.” 하나님이 바다를 만드셨고 땅을 만드셨습니다. 시편은 계속해서 설명합니다. 10절, 여호와께서 샘을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셨습니다. 들짐승과 새들을 만드셨습니다. 14절, 풀과 사람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2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시편의 설명에는 어떤 비합리적인 우연과 관련한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24절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잘 들어보십시오.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또 여기 “다”, “모든” 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우리가 과학적으로 더 깊이 알면 알수록, 창조의 놀라운 신비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가 더욱더 위대하게 드러납니다.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이 말 그대로입니다.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이어서 “거기에는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는 생물 곧 크고 작은 동물들이 무수하니이다 그 곳에는 배들이 다니며 주께서 지으신 리워야단이 그 속에서 노나이다.” 그리고 계속 이어집니다. 31절, 이렇게 선언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지으셨습니다. 다른 설명은 전혀 없습니다.
시편 148편도 이렇게 시작합니다.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그를 찬양할지어다 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 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어떻게 되었다고요?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반복해서 선포합니다. 이사야 40장 28절, 정말 위대한 말씀입니다. 표시해 두십시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진화론자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입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하나님의 지혜와 명철은 우리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차원입니다. 이어서 이사야 42장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사야가 말하는 하나님은 언제나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45장에서도 이사야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창조주로 선포합니다. 5절입니다.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7절입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8절입니다. “하늘이여 위로부터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장차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때, 곧 그 나라의 재창조를 바라보게 하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에, 언제든지 원하실 때 하나님의 뜻대로 하실 수 있습니다.
이사야 45장 9절은 진화론자를 향한 경고입니다.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이어서 12절을 보면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친히 하늘을 펴고 그 만상을 명령하였느니라”라고 하십니다. 18절입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말라기 선지자 역시 같은 진리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시라는 사실입니다. 말라기 2장 10절입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가 아니냐….” 사람은 진화의 긴 사슬 끝에서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마가복음 10장 6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지 진화된 것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13장 19절에서도 같은 부분을 강조합니다, 성경이 거듭 강조합니다, 모든 성경 구절을 말씀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마가복음, 마가복음 13장 19절입니다. “이는 그 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하나님이 창조하신”이라고 성경은 거듭거듭 강조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에게서 보았던 것처럼, 마가복음에서도 동일한 선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신서에서도 똑같습니다. 에베소서 3장 9절입니다. “...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사도 베드로 역시 똑같이 강조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9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실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이제 요한계시록으로 가겠습니다. 모든 것이 결국 요한계시록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으로 가서, 하늘에서는 진화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겠습니다. 11절입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왜 그렇습니까?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5장의 강조점도 동일합니다. 위대하신 주권자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있고, 하나님께 권능이 있고, 하나님께 권세가 있습니다. 또 예수님이 하신 일을 선포합니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러자 온 하늘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마지막으로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이것이 전부입니다. 진화된 존재는 없습니다. 단지 창조된 것, 피조물만 있을 뿐입니다. 성경은 “모든 피조물과 모든 진화된 것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라고 합니다. 바로 모든 창조된 우주입니다.
요한계시록 10장을 보십시오. 참으로 멋진 장입니다. 힘센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그 위대하고 힘센 천사가 작은 두루마리를 가지고 내려옵니다. 작은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록한 책을 상징합니다. 요한은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본 바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가 하늘을 향하여 오른손을 들고.”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듯 하나님의 심판이 바다와 땅 위에 임할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천사는 하나님을 두고 맹세합니다. 하나님을 “세세토록 살아 계신 이”라고 소개합니다. 이어서 다시 하나님을 “하늘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라고 드러냅니다. 조금도 틀림이 없는 말씀입니다.
이제 성경을 따라가면서 마지막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입니다. 환란의 때가 오면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끔찍하고 무서운 심판들이 쏟아집니다.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에서는 마치 전쟁 기계가 시동을 거는 것처럼 하늘에서 전쟁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에스겔 1장에 나오는 묘사와 비슷합니다. 과거에 하나님의 전쟁 병거가 움직였듯이, 장차 다시 전쟁 병거로 심판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심판을 쏟아내시는 그 7년 동안, 특별히 마지막 후반부 3년 반 동안 복음이 동시에 전파될 겁니다. 요한계시록 11장에서 말하는 두 증인을 통해 전파될 것이고, 요한계시록 7장에 언급된 14만 4천 명의 유대인들을 통해서도 전파될 뿐 아니라 이후에도 계속 이어질 겁니다.
요한계시록 14장을 보면 또 다른 위대한 설교자가 등장합니다. 6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아마 미식축구 경기에서 작은 비행기가 현수막을 달고 하늘을 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아니면 비행 풍선에 커다란 메시지가 붙어 있는 것도 보셨을 겁니다. 지금 본문은 그런 장면을 떠올리게 하지만, 정확히 똑같지는 않습니다. 공중을 나는 천사가 등장하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장면입니다. 복음을 알고 싶다면 하늘을 올려다보라는 겁니다. 그리고 천사가 전하는 영원한 복음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언제나 변하지 않는 동일한 메시지이지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복음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곧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복음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복음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천사는 이 오래된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이고, 그 오래된 복음의 핵심은 창조주께서 우리의 구속자시라는 것입니다. 창조주께서 우리의 구속자시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심판을 가져오시는 분은 창조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십니다. 새로운 창조를 준비하는 심판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동일하게 증언합니다. 창조주가 곧 구속주이시며, 구속주가 곧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저는 느헤미야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느헤미야에 이 진리가 분명하게 요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 9장 5절에 모든 레위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 주여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송축하올 것은 주의 이름이 존귀하여 모든 송축이나 찬양에서 뛰어남이니이다.” 그리고 이렇게 찬양합니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성경은 언제나 이렇게 말합니다. 언제나 창조의 영광과 공로를 하나님께만 돌립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창조하셨습니까? 시편 33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9절입니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이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드러낸 두 가지 장면이 나옵니다. 먼저 사도행전 14장 15절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했던 곳은 이방인의 우상 숭배가 가득한 환경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어떤 하나님입니까?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입니다.
또 다른 장면은 아레오바고(Areopagus, Mars’ Hill)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나오죠. 그곳에서 바울은 철학자들을 만났습니다. 이들은 혹시라도 빠뜨린 신이 있을까 해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을 세웠습니다. 바울은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고 말을 시작하고 나서 24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입니다. 전혀 모호하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 어떤 진화 과정도 배제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하나님을 창조주로 선포합니다.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창세기 1장 1절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주 간결한 진술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러분은 이 말씀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제가 앞에서 여러 구절을 인용해 드린 것까지 생각한다면, 이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성경 안에서 믿지 못할 말씀들이 수도 없이 많아질 겁니다.
저는 성경을 공격하는 비평가들의 글을 읽을 때마다 지겹습니다. 어젯밤 늦게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미국 시사 주간지 <유에스 뉴스 월드 리포트(U.S. News & World Report)>에 실린 한 기사를 읽었는데요, 사도 바울에 대한 정말 말도 안되는 기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왜곡하고, 바울도 왜곡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의 어리석은 추측일 뿐입니다. 이 사람들은 창세기도 똑같이 왜곡하고 추측합니다. 그러면서 모두가 스스로를 종교학자라고 내세웁니다. “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히브리인들의 시로서 일종의 알레고리, 그러니까 상징적 비유로 이해해야 한다” 이런 식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여러분은 앞서 인용한 다른 모든 구절들도 전부 상징적 비유로 풀어야 할 겁니다. 이른바 학문적인 접근이라고 하지만, 결국은 “우리는 하나님이 실제로 엿새 동안 창조하셨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로 보지 않는다. 이것은 히브리인들의 시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더글라스 켈리(Douglas Kelly)는 제가 이 시리즈를 시작하고 나서 정말 큰 빚을 지고 있는 탁월한 책 <창조와 변화(Creation and Change)>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성경 해석자들이 창세기 본문을 직설적으로 읽을 때 드러나는 명백한 충돌과, 기원에 대한 자연주의적 이론을 피하려고 애써 왔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창세기 1장부터 11장, 특히 처음 세 장을 연대기적 역사,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시적 문학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놀랍게도 이런 입장은 일반적으로 성경의 권위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흔히 나타난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위대한 학자 에드워드 제이 영(Edward J. Young)은 히브리어를 비롯한 관련 언어들에 대해서 학문적 권위가 대단한 인물입니다. 저도 신학생 시절에 이분의 책을 참 많이 읽었습니다. 에드워드 영은 창세기 1장부터 3장을 시가서나 신화로 보려는 주장에 대해서, <창세기는 시인가 신화인가(Is Genesis Poetry or Myth)>라는 책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의 사실적인 진술을 피하기 위해 어떤 복음주의자들은 창세기의 초반부를 시나 신화로 말한다. 이들이 시나 신화라고 말하는 것은 곧 창세기가 사실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이해하면 모든 어려움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현대 과학과의 모든 문제도 사라진다고 말한다.” 이어서 영은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는 시가 아니다. 성경 안에는 더 시적인 창조의 묘사들이 있다. 예를 들어 시편 104편, 욥기의 몇몇 장들이다. 그런데 그것들은 창세기 1장과는 완전히 다르다. 히브리 시에는 분명한 특징이 있는데, 창세기 1장에서는 그 특징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이 시라는 주장은 전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나는 창세기가 역사적 기록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믿지는 않는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나는 창세기가 심오한 진리라고 믿지만 시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보다 더 나은 성경 학자이다.”
그렇습니다. 창세기를 시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그냥 믿지 않는다고 하는 게 더 낫습니다. 그게 더 솔직한 태도입니다. 창세기 1장은 히브리 시 형식이 아닙니다. 구약에는 분명히 시적인 본문들이 많이 있지만, 창세기 1장은 아닙니다. 히브리 시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이고 전통적인 병행법 같은 표현도 전혀 없습니다. 더글라스 켈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주해적으로 억지를 써도 신약성경에서 창세기 1장에서 11장을 시로 본 흔적을 찾아낼 수 없다. 만일 창세기가 시라면 신약 저자들이 당연히 창세기를 시로 전제하고 그렇게 다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약 저자들이 창세기를 인용하는 것을 보면 역사로 받아들인 것이 분명하다.”
헨리 모리스는 신약에서 구약을 사용하는 방식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신약은 어떤 의미에서는 구약보다도 창세기에 더 의존하고 있다. 신약에는 창세기를 직접 인용하거나 분명히 언급한 구절이 최소한 165개 있다. 그 가운데 많은 구절이 여러 번 인용되었기 때문에 최소한 200번 이상 인용되거나 언급되었다. 주목할 점은 회의주의와 불신앙의 가장 심한 공격을 받아온 부분이 바로 창세기 1장에서 11장인데, 이 부분이 신약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신약에는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에 대한 직접 인용이나 언급이 100번 이상 나타난다. 게다가 이 열한 장 전체가 신약에서 모두 언급되고 있고, 신약의 모든 저자가 자신들의 기록에서 창세기 1장에서 11장을 인용하고 있다. 예수님도 이 부분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을 최소한 여섯 번 직접 인용하거나 언급하셨다. 1장에서 7장까지의 각 장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셨다. 게다가 구약과 신약에서 창세기를 언급하는 이 많은 경우 가운데 저자가 사건이나 인물을 신화나 비유로 본 흔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오히려 모두 창세기를 절대적으로 역사적이고 참되며 권위 있다고 보았다.” 헨리에게 저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정말 귀한 말입니다.
월터 브라운(Walter Brown)은 신약성경에 인용된 71번의 창세기 초반부 인용 사례를 정리하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모든 신약 성경의 저자들이 창세기 초반부를 언급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세기 1장에서 7장까지를 다 언급하셨다.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요한이서와 삼서를 제외한 모든 신약 성경이 창세기 1장에서 11장을 언급한다.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 중에서 8장을 제외한 모든 장이 신약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모든 신약 저자들은 분명히 창세기 초반부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였다.”
이제 잠시 창세기로 돌아가서, 창세기의 구조가 초반부 장들의 역사성을 더욱 뒷받침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부분을 정리하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사실은 이제부터가 제가 좋아하는 부분입니다. 간단하게 창세기를 개관해 보면 이렇습니다. 1장에서 11장은 원시 역사, 12장에서 50장은 족장 역사입니다. 여기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까지가 나옵니다. 원시 역사에는 창조, 타락, 홍수, 흩어짐이 있습니다. 족장 역사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 있습니다. 매우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12장에서 50장이 역사라는 것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1장에서 11장은 역사라고 하지 않는 걸까요? 사실 홍수가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는 어렵습니다. 증거가 수없이 많기 때문입니다. 또 흩어짐, 바벨탑, 민족과 언어의 기원 역시 역사가 아니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언어와 민족의 다양성을 설명할 근거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정말로 논쟁하고 싶어하는 것은 창세기의 처음 세 장에 관한 것입니다. 최고의 논쟁 주제는 창조입니다. 과학이 성경을 반박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창세기는 역사입니다. 1장에서 11장은 원시 역사이고, 12장에서 50장은 족장 역사입니다. 제가 간단히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창세기 속성 강의입니다. 5장을 보십시오. ‘계보’라는 말은 곧 족보입니다. 역사입니다. 5장 1절입니다.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6장 9절입니다. “이것은 노아의 족보니라.” 10장 1절입니다.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11장 10절입니다. “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27절입니다.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25장으로 가겠습니다. 12절입니다. “이스마엘의 족보는 이러하고.” 19절,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계속 이어집니다. 36장입니다. “에서 곧 에돔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9절에도 다시 “에서의 족보는 이러하고”라고 나옵니다. 37장 2절입니다.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이처럼 창세기를 역사 기록으로서 정리해 나눌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본질입니다. 거꾸로 올라가 보면 요셉의 역사에서 시작해서 야곱, 에서, 이삭, 이스마엘, 아브라함, 데라, 셈, 함, 야벳, 노아, 아담, 그리고 하나님까지 이어집니다. 이렇게 흘러갑니다. 역사입니다. 이렇게 분명하게 역사라고 선언된 부분을 두고도 하나님과 관련된 역사만 신화라고 만드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1절부터 다루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창세기 연구를 통해 우리의 믿음과 주님에 대한 신뢰와 확신이 더욱 굳건해지게 하옵소서. 창조주요 구속자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창조주요 구속자로 알고 예배하고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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