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우리는 24절과 25절, 즉 땅의 짐승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두 절에 등장하는 동물들이 세 가지 부류로 나뉘어 있음을 보았습니다. 24절과 25절에 걸쳐 세 가지 부류를 언급하고 있는데, 26절에서도 일부가 반복됩니다. 첫째는 길들일 수 있는 동물인 ‘가축’입니다. 인간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집짐승을 말합니다. 둘째는 땅에 가까이 사는 모든 생물을 포함하는 ‘기는 것’입니다. 곤충에서부터 설치류, 파충류 등의 여러 가지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마지막으로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이 있습니다. 네 발로 땅을 활보하는 야생동물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한 환경에, 마지막 손길로 동물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이제 26절과 27절로 넘어갑니다. 지난번에 이 부분을 조금 살펴보았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온 우주가 사람이 그 안에서 살아가며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을 통해 하나님의 손길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지음받았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 들짐승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온 세상, 온 환경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적 지혜를 보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을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질서를 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환경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준비되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사람을 위해 집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바로 창조의 절정, 인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먼저 이 말씀의 첫 부분,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라는 선언에서 멈춰 생각해 봅시다. 여기에는 인간 창조의 네 가지 특징이 드러납니다. 그 중 첫번째이자 가장 근본적인 특징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와 “우리의 모양대로”라는 같은 말을 반복하셨습니다. 27절에서도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라고 말씀하십니다. 혹시라도 우리가 이 진리를 놓칠까봐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네 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습니다. 창세기 5장에서도 다시 반복됩니다. 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여러분이 그저 동물적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더 높은 단계의 동물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원숭이나 긴팔원숭이나 개코원숭이 같은 것으로부터 진화한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존재입니다. 단순히 물질적이고 땅의 형체만 가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모양을 본뜬 존재로 지음받았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자면, 시간과 공간 속의 모든 생명체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사람은 초월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의 가장 참된 본질은 그 어떤 화학식으로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가장 참된 부분은 DNA 속에서도, 염색체 속에서도, 뇌를 해부해도, 심장을 열어보아도, 신경계를 연구해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해부학적 구조를 아무리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실험해도 결코 찾아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인간이 물질로만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라, 화학적 성분으로 구성되지 않은 초월적 실재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다른 어떤 피조물과도 구별되는 독특한 존재입니다.
전도서 3장 11절에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정말 위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에 영원을 두셨습니다. 오직 사람에게만 해당됩니다. 전도서 3장 21절입니다.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전도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영은 위로 올라가지만, 다른 모든 피조물의 영은 아래로, 곧 땅으로 내려가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영원을 두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몸을 잃어도 영원히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어떤 물리적인 형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동물에게는 전혀 없는 속성을 의미합니다. 그 핵심은 ‘인격(personhood)’입니다. 인간은 인격적 존재입니다. 인간의 뚜렷한 특징입니다. 인간은 자의식이 있습니다. 동물도 의식은 있지만, 자의식은 없습니다. 동물은 환경을 인식하고 그에 반응하지만, 자신이 환경에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단지 본능적으로 반응할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의식이 있고 환경에 반응하며,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지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본능이 아니라 이성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추상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느끼고 감정을 느끼고 도덕적으로 의식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앞서 말씀드렸듯이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특히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인격입니다. 인간은 사랑할 수 있고, 교제할 수 있고,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시공간 안에서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언어를 가진 유일한 존재입니다.
26절은 삼위일체를 가리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죠.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는 표현이 바로 그 사실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복수형으로 소개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시고, 인격적 관계를 맺는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삼위일체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성경 전체, 특히 신약을 통해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이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삼위일체 안에서의 관계는 곧 인간 관계의 본입니다. 인간의 존재론적 본질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윤리적 본질은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거룩함과 의로움을 추구할 수 있는 능력, 성화의 능력, 하나님께 순종하는 능력,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인격과 관계를 의미한다는 점을 간단히 복습했습니다. 이제 여기서 인간에 대해 묘사된 세 가지 특징 가운데 남은 부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두번째,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을 뿐 아니라, 이 땅의 왕으로 세워졌습니다. 26절과 28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26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28절 하반절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이 땅의 주권자로, 이 땅의 왕으로 설계하셨습니다. 26절에서는 “그들로 다스리게 하자”고 하셨고, 28절에서는 “정복하라, 다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6절에 나오는 명사 ‘사람’은 복수 개념입니다. ‘사람(man)’이라는 단어가 집합적인 의미를 갖기 때문이죠.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고…”라고 하신 다음에 “그들로 다스리게 하자”라고 표현한 이유입니다.
‘인간’이라는 단어는 집합명사입니다. 인류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이며, 거룩한 하나님을 본따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온 피조 세계를 다스릴 책임과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그 다음, 하나님은 창조의 순서를 다시 되짚어 주십니다. 여러분이 기억하듯, 다섯째 날에 바다의 물고기가 먼저 만들어졌고, 그 다음에 하늘의 새가, 그리고 가축과 기는 것들, 마지막으로 짐승들이 나왔습니다. 28절 끝부분에 나오는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이죠. 이 순서가 다시 반복되어 나옵니다. 식물을 제외한 모든 고등 생명체들이 인간의 다스림 아래 놓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실제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창세기 2장 19절로 가보면, 동일한 창조 사건이 조금 더 구체적인 설명과 함께 다시 등장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우리는 이미 이것이 앞서의 창조 내용을 요약하고 반복한 것임을 배웠습니다.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사람이 해야 할 첫번째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만물의 주권자로 세우셨기 때문에 창조된 피조물들을 식별하고 분류해야 했습니다. 아담은 실제로 그렇게 했죠. 각 생물의 특징을 관찰하고 그에 맞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두번째 책임은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 15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아직 저주도 없고, 죄도 없고, 타락도 없고, 죽음도 없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동산을 돌보는 일, 즉 ‘하나님의 동산을 가꾸는 일’이 있었습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동산을 돌보는 사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이었는지 다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동산을 잘 경작하고 번성하게 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이제 8절로 돌아가서 이 동산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이미 1장에 나온 내용이죠. 여기서는 같은 내용을 더 자세하게 반복하고 있습니다.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두 나무가 특별한 나무로 구별되어 있습니다.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식물은 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사람의 책임은 모든 것이 적절하게 돌봄을 받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타락 이전의 상태가 정확히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죽음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생존을 위한 돌봄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나 아마 사람의 손길을 통해 더욱 풍성하게 자라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각 생물의 이름을 짓는 책임도 맡기셨습니다. 이미 살펴본 내용이죠. 여기서 잠시 16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단 하나의 금지 명령입니다. 그 후에 하나님은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시고 동물들의 이름을 짓는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사람의 인지적 능력을 보여줍니다. 또한 동산을 돌보는 일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책임은 피조세계를 배우고, 그 안에서 보고 깨달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피조세계를 분류하고, 나아가 그 피조세계가 모든 면에서 창조주를 영화롭게 하도록 다스릴 책임을 주셨습니다. 그때는 두려움도, 죽음도, 피흘림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 하나님의 동산을 돌보아야 하는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저희 집 마당이 생각났습니다. 저희 집 마당은 타락한 곳입니다. 죽음이 가득합니다. 저는 사실 식물을 잘 키우지 못합니다. 열심히 키워보려고 노력은 하는데, 그냥 죽일 뿐입니다. 그러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동산 안에 살고 있지만 죄와 죽음과 타락으로 인해 동산이 심각하게 훼손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설계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동산을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저는 집에 있는 정원에 나가서 아름답게 자라난 식물들을 볼 때면 즉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하게 됩니다. 저희 집에 매주 와서 식물을 돌봐주는 정원사가 있습니다. 정말 일을 잘 하십니다. 그래서 언제나 정원이 아주 아름답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언제든 멋진 장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저희 집에는 언제나 작은 꽃병마다 아름다운 장미가 가득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일을 맡은 정원사를 볼 때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동산을 돌보는 그 모습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고 느낍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제가 식물이나 우리 집 정원에 찾아오는 새들을 숭배하는 건 아닙니다. 며칠 전에는 어린 사슴 한 마리가 우리 마당에 와서 한참을 머물다 갔습니다. 가끔 그런 일들이 있습니다. 근처에 사는 큰 타조같이 생긴 에뮤도 종종 찾아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대하는 데 있어서 균형 잡힌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작은 공간,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한 부분을 맡기셨다면, 그곳으로 하여금 창조주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식물을 생각해 보십시오. 왜 그렇게나 많은 식물을 만드셨을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이 그것들을 가꾸고 돌보는 일은 곧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땅이 저주 받은 상태라서 쉽지 않지만, 죄를 지은 후의 아담처럼 땀을 흘리며 수고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맡은 청지기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책임을 느낍니다. 물론 이 세상은 잠시뿐이고 결국 다 불타 없어질 겁니다. 그러나 그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제 삶을 통해 드러나시기를 원합니다. 아담이 그 책임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도 같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지금 우리는 죄 이후의 세상, 타락 이후의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동산을 완전하게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세상은 너무나 거칠고, 곳곳에 죽음이 있습니다. 심지어 독을 품은 식물도 있지 않습니까?
식물 가운데에는 독이 되는 것도 있습니다. 살아 있는 세균도 있고,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실제로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전염병을 만들어낸 존재들도 있습니다. 또 살생하는 동물들도 있습니다. 더 이상 원래의 동산이 아닙니다. 타락과 저주로 인해서 이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히브리서 2장 7절입니다.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이어서 8절입니다.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진리의 말씀입니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이 땅의 왕이십니다.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그 다음 말씀이 매우 중요합니다.
“...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스도는 참된 땅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천사보다 잠시 낮아지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다스림의 명령을 직접 감당하셨고, 하나님이시기에 만물을 자기 발 아래 두실 능력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바라보면 아직 완전히 복종하지 않는 모습이 보입니다. 만물이 예수님께 복종하게 되어 있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8절은 모든 것이 예수님께 복종한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아직 그 모든 것이 복종하는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십시오. 온전히 다스려지는 모습이 아닙니다. 식물 체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돌보는 손길이 없으면 아름답게 자라나거나 번성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전쟁, 증오, 살육, 질병, 고통이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 만물이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는 모든 것이 예수님께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는 예수님이 저주를 거두시고 이 땅의 왕이 되실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예수님을 위할 것입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예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죽음을 통해 예수님은 이 땅의 주권자가 되실 권리를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권리를 가지고 영광에 들어가셔서 세상을 다스리시고, 이 세상을 복종시키시며, 많은 아들들을 영광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말하자면, 타락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다스림의 명령’을 인간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모든 동물과 에덴동산을 다스릴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해 그 권세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잃어버린 권세를 언젠가 예수님께서 다시 회복하실 것입니다. 아직 만물이 예수님께 복종하지는 않았지만, 그날이 오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다시 복종시키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천년왕국, 다시 회복된 에덴, 뒤집힌 에덴의 모습입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백 세에 죽는 자를 젊은이라 하며…”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죽음조차도 그 힘을 잃고 약화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아 있는 상태로 천년왕국에 들어가면 천 년 동안 죽지 않고 살아 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죽음이 완화되고, 저주가 완화될 겁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땅에는 저주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천년 동안에도 여전히 죄의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 태어나고, 하나님께 반역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죄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대부분 억제된 상태가 될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천 년이 찰 때, 온 세상이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죄도 없고 타락도 없을 것입니다. 그때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피조세계를 복종시키실 때, 우리도 그 복종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두번째 특징은 이 땅의 왕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을 다스리는 자입니다. 인간은 단순히 다른 피조물의 생물학적 연장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른 본질로 지으셨고, 이 우주를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러운 천년왕국에서 통치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든 피조세계를 복종시키실 때, 인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자로 설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선지자들과 신약의 말씀을 통해서 천년왕국이 시작될 때 이 땅이 새롭게 정화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때 저주의 일부가 완화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인간에게 이 주권을 주셨습니다. 인간은 모든 피조 세계 위에 세워졌고, 이 땅의 주권자요 왕으로 지음받았습니다. 창조의 기록에서 우리는 인간에게 주어진 세번째 책임을 발견합니다. 창세기로 돌아가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28절 상반절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27절에서는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자, 이제 인간에게 주어진 세번째 책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야 합니다. 인격과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야 하고, 또 이 땅의 왕으로서 다스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드신 동산을 가꾸며 창조 세계를 이끌고 다스리는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을 드러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번식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이유입니다. 결혼과 생육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생육이라는 것은 동물 세계 전체에 존재합니다. 심지어 식물도 번식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씨나 열매 속의 씨를 통해서 스스로 번식하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인간에게 관계를 맺는 능력을 주신 하나님은 돕는 배필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조금 더 내려가 보면 18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왜냐하면 계속해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돕는 배필을 지으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건 집안일을 도와줄 사람을 뜻하겠지. 설거지를 하고, 쓰레기를 버리고, 침대를 정리해 줄 사람 말이야.’
그런 종류의 ‘돕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람에게 필요한 도움은 단 한 가지, 바로 생육과 번성, 인류의 번식을 위한 도움이었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사람에게는 함께할 자, 동역자, 완전한 짝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땅의 모든 것을 지으셨는데, 20절을 보면 그 돕는 자는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피조세계를 둘러보셨지만, 아담에게 합당한 짝이 없었습니다. 창조된 그 어떤 것도 아담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계속해서 분명히 선언해야 합니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동물이 조금 더 발전된 형태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영원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때 오직 한 사람, 아담만이 그렇게 존재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방금 읽어드린 2장의 이 부분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니라”라는 1장 27절 하반절의 짧은 말씀을 확장한 내용입니다. 그 말씀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2장은 새로운 창조 이야기가 아닙니다. 1장에서 이미 언급된 내용을 더 구체적으로 풀어주는 설명입니다. 두 본문 모두 남자가 먼저 창조되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니라”에서처럼 순서가 분명합니다. 1장에서는 단순히 남자와 여자를 함께 언급하지만, 2장은 7절에서 남자를 먼저 창조하시고, 18절 이하에서 여자를 창조하신 과정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창조의 질서 속에서 남자가 먼저 세워졌다는 점이 필수적인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가 얼마나 정확한지를 보여줍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유전학 연구가 이 점을 확인해 줍니다. 남성은 여성의 성을 결정하는 X 염색체와 남성의 성을 결정하는 Y 염색체를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남성은 X와 Y를 가지고 있지만, 여성은 X만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에 여성이 먼저 창조되고 남성이 여성의 몸에서 나왔다면, 생식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오직 X 염색체만 존재하게 되어서 번식하면 여성만 태어났을 것이기 때문이죠. 여성은 Y 염색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남자가 먼저 창조되어야만 했습니다. 남자는 X와 Y 염색체를 모두 가지고 있고, 그 중의 Y 염색체가 남성을, X 염색체가 여성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는 일을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뼈 하나를 취하셨습니다.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그 뼈에는 남성을 만들 수 있는 세포 구조 DNA가 담겨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뼈로 여자를 만드셨고, 아담을 위한 동반자를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함께 남자와 여자 모두를 낳을 수 있었습니다. X 염색체와 Y 염색체는 비록 창세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여자를 만드는 유전적 요소가 남자에게 있었고, 여자는 유전적으로 남자와 같은 종류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통해 남자와 여자 모두를 낳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는 함께 창세기 1장 28절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완성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의 기술적인 표현은 ‘다산성(fecundity)’입니다. 즉, 생육하고 번식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합니다. 이 주제는 창세기 전체에 걸쳐서 반복해 나옵니다. 예를 들어서 홍수 이후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아들들을 축복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다시 말해 하나님은 처음 주셨던 명령을 이어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아이를 낳으라’는 뜻입니다. 자녀를 낳으라는 겁니다. 창세기 17장 16절에서도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20절입니다.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여기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출산’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이유는 인간이 생육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놀라운 책임이자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또 다른 존재를 세상에 낳는 일, 얼마나 놀라운 복입니까. 여러분이 아기를 이 세상으로 데려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영원한 존재가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은 없습니다. 정말로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복입니다.
그 작은 생명에게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가족 안에서 누리는 관계, 이를테면 인생의 끝자락에 계신 아버지와의 관계이든, 아니면 두 팔을 벌리고 달려와 안아 달라며 제게 매달리는 어린 손녀와의 관계이든, 이런 관계들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풍성하고 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결혼을 통해서 서로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하고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 특권과 기쁨을 누립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연합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낳음으로써, 인격적인 교제와 대화와 친밀함을 나눌 수 있는 또 다른 존재를 맞이합니다. 그렇게 태어난 이들과 우리가 서로 누려왔던 것과 같은 인격적 관계를 함께 누릴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너희는 이 땅 위에 나의 주권을 확장하라.” 창세기 9장 1절에서도 똑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땅에 충만하라.” 창세기 1장 28절에서도 동일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을 설계하셨습니다. 이것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라는 창세기 2장 마지막 부분의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리고 한 몸이 되는 가장 진정하고 순수한 표현은 바로 그들 사이에서 생명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한 몸’이라는 말은 성적인 연합을 의미할 수도 있고,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으로 함께 행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 중의 가장 참되고 완전한 모습은, 남편과 아내가 하나 되어 함께 새로운 생명, 한 생명을 낳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생명을 낳을 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세상에 번성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 자녀를 둔 그리스도인 부모들에게 늘 강권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청지기의 책임을 기억하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그 어린아이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자리로 다시 인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육의 능력, 다시 말해 생명을 잉태하고 번성하게 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이루어질 환경으로 결혼을 만드셨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평생의 언약 안에서 함께 살아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단순히 진화적인 과정이나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려는 진화론적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설계하신 질서입니다.
진화론자들은 인간이 왜 대부분 ‘짝을 이루는 관계(pair bond)’를 맺는지를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거의 항상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짝을 이루는 형태로 살아가는데요, 진화로는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문화 속에서는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관계를 맺고, 책임 없는 관계 속에서 수많은 사생아들이 태어나기도 하지만, 사실 전 세계 인류의 98퍼센트가 결국 짝을 이룬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페미니스트들과 동성애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공격하고 파괴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성공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로마서 1장은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임했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땅의 왕으로 창조되었고, 생명을 번성시키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즐거움을 누리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2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은 복을 주실 존재가 필요하셨던 겁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어떤 복을 주셨습니까? 다스림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곧 영원한 존재가 되는 복을 주셨습니다.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복을 주셨습니다. 인격을 소유하는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고, 하나님을 아는 능력과 서로를 아는 능력의 복을 주셨습니다. 또 자신과 같은 존재를 낳아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들로 땅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생육 능력의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혹시 이런 질문을 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왜 이 세상을 이렇게 다양한 음식으로, 식물만 보더라도 끝없이 풍성하게 채우셨는지 말입니다. 과일과 채소만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당시에는 죽음이 없었기 때문에 인간은 처음 창조되었을 때에는 채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식물의 세계에는 한계가 없어 보입니다. 나무마다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고, 사람의 기쁨을 위해서 자라납니다. 저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도, 물도 모두 갈색으로 만드시고 세상을 아무 색도 없는 곳으로 만드셨다면 어떨까? 먹는 것도 평생 쌀 같은 한 가지 음식만 있게 하셨다면 어떨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놀라울 만큼 다양한 식물과 채소로, 수많은 열매로 가득 채우셨습니다. 제가 다른 나라나 다른 문화권을 방문할 때마다 그곳 사람들은 우리와는 다른 종류의 땅의 산물을 꺼내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이처럼 끝없이 풍성하고 놀라운 다양성으로 가득합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어떤 것들은 솔직히 한번만 먹고 더는 손이 가지 않는 것도 있지만, 그건 아마 재료의 문제가 아니라 요리 방법 때문일 겁니다. 아마도 치즈를 듬뿍 얹는다든지 하면 좀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겠죠.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또 하나 놀라운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에 참으로 감탄합니다. 바로 ‘맛을 느끼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그걸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깁니다. 또 ‘냄새 맡는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로 ‘맛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냄새’를 더 많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맛을 구별할 수 있는 감각을 주셨습니다. 얼마나 큰 복입니까. 그 덕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아주 풍성한 먹거리를 마음껏 즐기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는 처음에 채식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땅 위에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있는 열매 맺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거리로 주셨습니다.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위를 기어 다니는 생물에게도 푸른 풀을 주어서 먹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대로 되니라.” 이 말은 단순한 끝맺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영구적이고 확정된 질서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채식주의자였고, 동물들 역시 창조 당시에는 모두 채식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아직 죽음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창조 질서의 기본 원리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되니라”라는 표현은 그때 창조 세계가 완전하고 영속적인 상태였음을 보여줍니다. 다만 한 가지 예외가 있었습니다. 창세기 2장 9절을 보면, 동산 중앙에 생명나무가 있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16절로 내려가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생명나무의 열매는 마음껏 먹을 수 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먹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고, 죽음과 부패를 불러오는 일이었습니다. 참으로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3장은 비극적인 이야기를 전합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수십 년이었는지, 수백 년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느 날 결국 하와가 뱀에게 속았습니다. 하와가 뱀의 거짓말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금지된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은 알고도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그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3장 19절을 보면 갑자기 정원을 돌보는 일이 더 이상 쉬운 일이 아닌 것이 되었습니다. 17절로 돌아가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제 아담의 인생은 매우 힘들어졌습니다. 먹을 것을 위해 수고해야 했습니다. 이전에는 쉽게 얻을 수 있었던 식물이 이제는 땀을 흘려야만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21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이것이 바로 최초의 죽음입니다.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은 동물을 죽이셔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최초로 동물을 죽이시고, 그 가죽으로 아담과 그의 아내의 벌거벗음을 가리셨습니다. 그리고 4장 4절로 내려가 보면, 아벨이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동물을 제물로 바쳤다는 뜻입니다. 아벨은 동물을 죽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동물의 죽음을 제물로 받으셨습니다. 동물의 죽음이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희생 제사 제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으로 허락되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이 곧 죽음이라는 진리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하나님은 사람에게 고기를 먹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창세기 9장에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이 방주에서 나온 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9장 2절에서는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땅의 왕으로서 동물 위에 권세를 갖게 되었지만, 동물은 더 이상 사람에게 순종적이거나 온순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니 채식주의가 그리스도인의 방식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창조 초기에는 그랬지만,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에 하나님은 사람들이 고기를 먹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매우 중요한 변화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죽음을 통해 죄에 대한 대가를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죄에는 반드시 죽음이 따르며, 죽음은 희생을 요구하고, 죽음은 대속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가올 영광스러운 천년왕국에서는 어떨까요? 그때도 지금과 같을까요? 아닙니다. 그때는 동물들이 더 이상 사납거나 야생적이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에스겔 40장부터 48장까지의 말씀에 따르면, 천년왕국 기간에도 희생 제사가 드려질 겁니다. 따라서 천년왕국의 성전에서 기념적인 절기나 예식을 위해서 일부 동물이 제물로 드려질 겁니다. 제가 앞서 언급했듯이, 천년왕국에서도 죄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창조의 원래 모습으로 회복될 겁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 점을 우리가 분명히 이해하길 원했습니다. 지금과는 다른 천년왕국의 세상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소와 곰이 함께 풀을 먹고, 새끼들이 함께 누울 것이고, 사자는 소처럼 짚을 먹을 것입니다. 젖먹이는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치고, 젖을 뗀 아이는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해를 입지 않을 겁니다. 분명히 저주가 어느 정도는 거두어질 겁니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부분적인 회복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사야 65장 25절도 이렇게 말합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분명히 변화가 있을 겁니다.
요약하자면, 물론 2장 안에는 우리가 더 깊이 살펴볼 수 있는 부분들이 많이 있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이 땅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또한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들로 이 땅을 채우는 책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누리며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후에, 3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은 지금까지 각 부분을 보실 때마다 “좋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이때 처음으로 “심히 좋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부분이 아니라 자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셨습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이 모든 것의 창조자이시며 주인이심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죄가 없고 악이 없고 타락이 없었기 때문에 죽음도 없었습니다. 진화론의 모든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는 말씀입니다. 죽음을 전제로 한 유신진화론조차 불가능합니다. 이때는 어떤 것도 죽지 않았습니다. 수십억 년 동안 돌연변이와 죽음이 반복된 그런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루”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실제 하루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2장 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바로 이겁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입니다.
모든 것이 이 32구절 안에서 시작되고 끝났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의 완전한 모습을 완벽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난 몇 주 동안 우리가 이 말씀을 함께 살피며 하나님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손길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붙들어주시고 마침내 완성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구원자, 우리의 주님, 우리의 친구,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위대하신 창조주께서 저의 구원자가 되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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