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 로마서 8장을 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은 사도 바울이 복음과 그 모든 측면을 주제로 기록한 소중하고 훌륭한 논문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로마서 8장을 살펴보는 이유는 성령님에 대한 장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령님의 사역, 곧 신자 안에서의 성령님의 사역에 관한 시리즈 설교 중 여섯번째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에 대한 것이죠. 제가 이 시리즈를 시작한 이유는 현대 기독교계가 성령님을 너무나도 왜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끔찍할 정도로 왜곡되고 모욕을 당하시면서 슬퍼하고 계십니다. 성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성령님을 소멸하고 모독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은사주의 계통에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자들을 보면 도대체 어떤 점이 성령님의 역사인지 전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성령님, 곧 거룩하신 영의 역사를 경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러운 영에게 희생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성령님은 사람들을 세속적이고 육신적이며 교만하고 교활하며 무책임하고 포악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성령님의 유일한 목적은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말이죠. 그러므로 만일 누군가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말한다면 거룩한 모습이 명백하게 드러나야 합니다. 거룩이 바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령님은 거룩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천사들이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라고 했다고 합니다. 삼위일체적 표현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거룩하신 아들, 거룩하신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거룩하다”를 세 번 외친 겁니다. 이는 천사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거룩하시다는 것을 드러낸 겁니다. 따라서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본질적으로 인간 안에서, 우리 안에서 거룩함을 만들어내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로마서 8장 14절부터 16절을 보겠습니다. 먼저 읽어드리고 내용은 잠시 뒤에 다루겠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여기서도 성령님이 여러 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1절부터 13절까지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계속 말씀드리지만 바울의 위대한 서신인 로마서 8장은 신자들의 삶에서 행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 출발점으로 돌아가 봅시다. 성부도 거룩하시고, 성자도 거룩하시며, 성령도 거룩하십니다.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 레위기 19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하나님은 구약에서만 수십번 반복해서 자신의 거룩함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누가복음 1장에서 거룩한 이로, 거룩한 아기로 불립니다. 그리고 히브리서에서는 거룩하고 더러움이 없는 분으로 불립니다. 그리고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이신 하나님의 영에 대해서는, 로마서 1장 4절을 보면, 그 이름 중 하나가 성결의 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는 찬송은 삼위일체적 고백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모두 거룩하십니다.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모든 구성원은 본성과 본질과 실체가 모두 거룩하십니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께는 신자들 안에서 거룩함을 재생산하는 것과 관련된 특별한 역사가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성화라고 부르는 것, 즉 죄로부터의 분리를 통해 신자들을 거룩하게, 달리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변화시키십니다. 성령님의 사역은 육체적인 사역이 아닙니다. 몸을 꿈틀거리거나 움직이거나 흔들거나 뒤로 넘어지거나 중얼거리거나 손을 허공에 내젓는 식으로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사역은 영적인 일,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구약에서는 성령님의 사역이 경건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를 닮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과 같이 되라고 말합니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와 같이 되라고 말합니다. 이 일을 이루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아마도 이 주제를 가장 명확하게 설명하는 구절은 고린도후서 3장 18절일 겁니다. 한번은 제가 “신약성경에서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구절에 대해 소책자를 써 주실 수 있나요?”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죠. “글쎄요, 그 구절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떠오르는 구절이 있긴 합니다.” 그때 제가 고른 말씀이 이 고린도후서 3장 18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령님은 우리가 주님을 바라볼 때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변화시켜 주시는데, 우리를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한 수준의 영광에서 다른 수준의 영광으로, 또 다른 수준의 영광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이 일이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그래서 성령, 곧 거룩한 영이라고 불리시며, 우리 안에서 거룩함을 이루십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구약에서는 이를 경건이란 용어로 표현했습니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성령님은, 신학자들은 이걸 아마 이런 방식으로 말할 텐데, 유효한 동인이십니다. 성령님은 유효한 동인이시고, 성경은 성령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적 수단입니다.
여기서 조금 앞으로 돌아가서 설명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큰 그림을 보시면 좋겠습니다. 성령님의 이러한 성화 사역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화는 구원의 일부나 하위 범주가 아니라 구원의 목적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목적은 거룩하고 경건하며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위로부터의 부르심의 상입니다. 구원의 목표입니다. 이 목표는 칭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완전한 거룩에 이르게 되는 영화의 때에 이루어집니다. 그 동안에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를 금생에서 점점 더 거룩해지게 하셔서 내생에서 완전한 거룩에 이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고 계시는 이 일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의 주된 내용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겁니다. 창세기 1장 26절, 27절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타락하면서 이 목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가 말하듯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된 겁니다. 이는 타락한 인류 전체에 해당하는 보편적 진리입니다. 우리는 창조된 목적대로 살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표현하기 위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지만, 죄에 빠져 타락하고 부패하고 손상되고 왜곡되고 변질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아담 이후의 고대 역사를 보면 이러한 상태에서 건짐을 받아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된 사람이 몇몇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그대로 하늘로 올려져 죽음을 겪지 않은 에녹이 있습니다. 셋의 후손들도 경건했습니다. 그러나 손상되고 변질되고 부패한 인류 중에서 극히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몇 세대가 지난 후에, 하나님은 전 인류를 홍수로 멸하셨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여덟 명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수백만 명 중에서 8명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류를 모두 물로 쓸어 버리시고 다시 시작하셨습니다. 타락으로 인한 부패가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보여주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여덟 명으로 시작해서 인류 안에서 끔찍하게 뒤틀리고 손상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주권적이고 초자연적이며 은혜로운 방식으로 죄인들을 변화시킴으로써 그렇게 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피상적인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겉을 칠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도록 인간을 재창조하셔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매우 중요하고 명확한 말로 표현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입니다.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너희가 손상된 상태에서 벗어나서, 부패한 상태에서 벗어나서, 잘 들으십시오,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이 거듭남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이것이 구원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게 된 인류를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목적은 타락을 뒤집어서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인간을 재창조하셔야 했습니다. 인간은 영적으로 완전히 다시 태어나야만 합니다. 새로운 본성을 가져야만 합니다.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입니다. 인간은 새로 태어나야만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고린도후서 5장 17절이죠. 이 모든 것을 행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찬양합니다. 마땅히 그래야 하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합니다. 찬송가를 부르면서 찬양합니다. 십자가에 대한 찬양도 부릅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중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모든 것의 진정한 동인, 신성한 근원이 성령님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는 부패한 죄인들, 그럴 능력이 없는 자들, 그렇게 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된 자들을 취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손상의 정도는 매우 심각합니다. 얼마나 심각한가 하면, 거듭나지 않으면, 이 손상된 자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목적에 전혀 쓸모가 없기 때문에 우주의 쓰레기장에 던지십니다. 이 쓰레기장은 ‘게헨나’라고 불리는 영원히 타오르는 구덩이로, 예루살렘에 있는 쓰레기장 이름입니다. 쓸모없는 자들은 그곳에서 영원히 불타게 될 것입니다. 탈출의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손상의 정도가 얼마나 심각합니까? 완전히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 쓰레기장에 던질 만큼 심각합니다. 영원히 소멸되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구속의 계획은 이러한 자들 중에서 일부를 구원하여 다시 만들고, 새 생명을 주며, 거듭나게 하고, 재창조하며, 회복시키고, 변화시키며, 영적 변형을 거치게 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위대한 선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시작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렇게 하심으로 진정으로 거듭나서 신성한 성품에 온전히 참여하게 된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마디로 답하자면,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볼 때 우리는 인간의 형태로 나타난 하나님의 완벽한 형상을 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실 수 있었을까요? 요한복음 1장 14절입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어떤 영광이었나요?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방식으로 드러내셨습니다. 만약 한 개인 안에서 이뤄지는 성령님의 완벽한 역사를 보고 싶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은 예수님 안에 계신 성령님의 역사였습니다. 그렇죠? 모든 것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낮추심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특권을 모두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과 성령의 역사에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도 성령님의 역사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성령님 사역의 완전한 모델이 되셔야 하고, 그 사역의 최종 결과는 완전한 인간을 만드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인간이란 어떤 모습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가 천국에 가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몸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있는 그대로 볼 때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것이 목표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 같은 인류를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인간이 된다는 것이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완벽하게 지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예수님이 보여주셨으며, 성령님이 수행하십니다. 결국 우리를 일으키시는 분은 성령님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장에서 그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를 일으키시는 분은 성령님임을 11절이 말해줍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영광으로 일으키실 것입니다. 앞으로 더 자세히 살펴볼 겁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영광으로 일으키시고 결국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게 만드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완전히 회복되어 영광스럽고 완벽하며 의롭고 거룩한 인류가 될 것입니다. 그것도 영원히 말이죠. 하지만 그때가 이르기까지 성령님은 우리를 이 땅에 남겨두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전도의 사역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전도의 사역을 수행하기로 정하신 도구가 바로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이 세상에 남겨두시는 동안에는 우리가 성화의 과정을 거치게 하십니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단계별로 조금씩, 영광의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의 영광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이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즉시 완전해집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성령님이 점진적으로 성화의 과정을 이루어 가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다시 태어나게 하셔서 이 모든 것을 시작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태어납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를 부패와 타락과 악에서 구원하십니다. 영원히 지옥의 쓰레기 더미에 버려질 정도로 절망적으로 망가진 상태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새 생명을 주시며, 우리를 다시 창조하십니다. 성령님은 이 일의 유효한 동인이시며, 사용하시는 도구적 수단은 성경입니다. 우리는 진리로 다시 태어납니다. 진리로 성화됩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역사이고, 성령님은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성화시키시며 영화롭게 하십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령님은 완전해진 구원받은 인류를 하나님께 드리시는 분입니다.
자, 이것이 대략적인 큰 그림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사역은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될 때 천국에서 완전한 영광에 이르는 것이죠. 하지만 그 사이에,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성령님은 우리를 한 단계의 영광에서 다음 단계로, 또 그 다음 단계로 계속해서 이끄시는 일에 전념하고 계십니다. 이 개념을 조금 더 확장해서 설명할 텐데, 여러분이 이해하셨으면 하는 또 다른 요소가 있습니다. 이 개념으로 다시 돌아가서 조금 더 확장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여러분이 구약성경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한다고 해 봅시다. “구약에서는 성화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성화의 목표를 구약에서 찾는다면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는 내용은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구약 시대에는 그리스도를 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구약의 성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용해야 할 단어는 경건, 경건입니다. 구약의 목적은 하나님과 같은 백성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레위기에서, 이것이 핵심인데, 11장 또는 그 이전부터 시작해서 20장 정도까지 약 10장 정도에 걸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하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이 말씀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경건하라, 즉 하나님과 같이 되라,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라.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레위기 여러 곳에서 이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얻을 수 있지만, 저는 그 중 두 곳, 아니 우선 한 곳을 인용하겠습니다. 레위기 20장 8절입니다. 7절에 익숙한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그런데 8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
8절이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되시나요? 성화, 즉 거룩하게 되는 것은 순종의 맥락에서 주님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너희는 내 규례를 알고 지켜 행해야 한다.” 따라서 다시 말하지만, 성경은 주님이 자신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는 도구적 수단이며, 이는 구약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에게 말씀을 주셨고, 백성들은 그 말씀에 순종해야 했으며,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실천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자신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는, 성화시키는 수단이었습니다.
21장 8절도 같은 말씀입니다.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나 여호와는 거룩함이니라.” 다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의 반복입니다. 또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믿고 순종하면 내가 너희를 거룩하게 할 것이다.” 성화의 도구적 수단은 말씀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구약에서의 성화를 이해하려면 한 가지 기본적인 진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역사를 통한 성화의 과정에서 백성들 안에 가족이 서로 닮는 것처럼 하나님을 닮은 백성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입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만일 여러분이 원수, 여러분을 해치는 자들을 용서한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닮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에 대한 구약의 관점입니다. 하나님을 닮으라. 하나님을 닮으라는 겁니다.
5장에 있는 같은 설교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께 속했다면,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가족이 닮는 것처럼 닮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구약에서 성화를 이해하는 본질입니다. 구약에서의 성화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언약 관계의 일부로 여겨지며, 그 언약 관계는 가족 관계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고, 성화의 과정을 만드신 이유는 점점 더 아버지를 닮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구약에서의 성화, 즉 하나님을 닮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의 의미입니다. 그 목표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일어나는 일은 매우 중요하면서도 구약보다 이해하기 쉽습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을 닮으라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닮으라고 합니까? 그리스도를 닮으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게 다른 걸까요?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완전히 하나님을 닮은 인간이 어떤 모습인지를 완벽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렇죠? 인간이셨지만 하나님을 닮은 인간이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입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으셨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셨습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령님은 경건한 사람들을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로 만드십니다. 성화는 경건함과 같고, 그리스도를 닮음과 같습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죄에서 분리되어 경건함으로, 그리스도를 닮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삶이 놀라운 것은 경건함이 어떤 모습인지, 인간의 형태로 완벽한 경건함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본보기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나를 따르라, 내가 본보기니라.” 하나님은 과거에 구약성경의 저자들을 통해 계시하셨지만, 마지막 때에는, 히브리서 1장에 따르면 그 본체의 형상이신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저는 경건해지고 싶어요. 도대체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까요?”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해드리고 싶습니다. “정확히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입니다.” 인간의 형태로 경건함을 보고 싶으신가요? 그리스도를 보면 됩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3장 18절이 주의 영광을 바라보라고 하는 겁니다. 주님이 거룩함과 성화의 기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가 정말로 주님을 닮고자 한다면, 우리를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또 다음 단계로 이끌어 가십니다. 거듭남이라는 신성한 기적은 성령님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영화라는 신성한 기적은 성령님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있는 성화라는 신성한 기적 또한 성령님에 의해 이루어지며 이 또한 놀라운 기적입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그리스도의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다락방에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왜일까요?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만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만 경건함과 거룩함, 성화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고, 이 모든 것이 완전하게 인간의 형태로 나타난 모습을 바라볼 때 그것이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빚으시는 본보기와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나는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믿는 자 안에서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님의 목표는 가족처럼 닮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형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자녀들, 예수님이 형제라고 부르시기에 합당한 자녀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목표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목표, 부활의 목표는 충분한 속죄를 이루시고 하늘로 돌아가 성령님을 보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의 목표는 믿는 자들을 거듭나게 하고 성화시키고 영화롭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령님을 보내시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가족과 가족끼리 닮는 것에 관한 겁니다. 로마서 8장으로 돌아가 보면, 드디어 다시 8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주된 주제가 성령님의 입양 사역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4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15절에서는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16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합니다. 이것은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만드시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사역은 우리를 가족 구성원과 닮게 만드시는 겁니다. 아버지를 닮고 완벽한 형제를 닮게 만드는 것입니다. 가족끼리 닮아가는 것입니다.
존 칼빈만큼 신학을 깊이 이해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양자됨의 선물이야말로 구원의 가장 높은 특권이며 성령의 주된 사역이다.” 존 칼빈은 이것이 성령의 주된 사역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감히 말하자면, 영감을 주셔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사역조차도 백성을 성화시키고 영화롭게 하는 사역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그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구원의 가장 높은 특권이며,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고, 영화롭게 하고, 그 중간에 성화되게 하여 신자들의 간증을 믿을 만하게 만드는 것이 성령의 주된 사역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입니다.
이것은 강력하면서도 근본적인 진리입니다. 우리는 이걸 알아야만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뿐만 아니라, 고린도후서 6장 끝부분에서도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시급하고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이사야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가족을 만들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가족을 구속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가족을 거듭나게 하고 계십니다, 잘 들으십시오,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가족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다시 창조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과 새로운 탄생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입양의 본질을 이해해야 합니다. 아마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글쎄요, 입양이라고요, 물론 양자됨에 대해 15절에서 말하고 있지만, 그건 친자녀보다는 아래 단계 아닌가요?” 신문에서 가끔 아이들을 입양했다가 원하지 않아 비행기에 태워 돌려보내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아이를 얻게 될지 절대 알 수 없고, 법적 절차를 거쳐서 아이를 입양할 수는 있지만 아이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다고 말이죠. 그래서 주어진 대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잘 되지 않을 수도 있고, 입양된 아이들이 가정에서 재앙이 되고 공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내면을 실제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외적으로는 모든 법적 절차를 밟을 수 있다고 해도 말이죠.
하지만 성경이 입양에 대해 말하는 방식은 너무나도 완전하고 포괄적이기 때문에 비판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이제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1세기에는 친자보다 못한 자를 입양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기본입니다, 아시겠죠? 솔직히 말해서 가정에 아이가 태어나면 주어진 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렇죠? 아이들을 보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머리가 좀 더 좋았으면 좋을텐데, 반항심이 좀 덜했으면 좋을텐데, 인내심이 좀 더 있었으면 좋을텐데, 그래도 받아들여야지 어떡하겠어.” 저는 많은 부모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만일 아이에게 바라는 점을 기록해서 그대로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정자 은행에서 정자를 사는 사람들은 일종의 유전자 프로필을 원합니다. 갖게 될 아이의 특성을 결정하고 싶어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현실은 주어진 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도 괜찮죠. 다 이해하고 자녀를 사랑하니까요. 하지만 고대에 누군가를 입양한다고 한다면 대부분의 경우 아들을 입양했습니다. 거리에서 아이들을 구해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구제하는 마음으로 거리의 아이들을 입양한 게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자녀보다 능력이 뛰어난 아이를 발견했기 때문에 아들로 입양했습니다. 친자보다 더 나은 경우입니다. 입양된 아들은 입양하는 아버지가 자신의 이름을 영속시키고 재산을 상속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한 사람이었습니다.
입양은 방탕한 자녀를 다루는 방법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반듯한 젊은이를 입양하여 아들로 삼는 겁니다. 그 입양된 아들, 양자가 친자보다 못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때로는 딸일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재산과 가문을 이어갈 책임을 물려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입양이었습니다. 입양될 아들을 택한 이유는 가족을 대표하여 가족의 미래를 책임지고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입양된 아들은 아버지의 눈에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이면서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친자보다 더 많이 사랑받고 더 좋은 교육을 받았을 것이며, 심지어 다른 자녀들보다 더 완벽하게 아버지의 덕목대로 양육받은 모습을 드러냈을 겁니다.
요점은 이겁니다. 우리는 입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셨습니다. 하지만 입양되기 전부터 너무나 고귀해서 하나님이 우리 없이는 하나님 나라를 계속 이어가실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권적이고 신성한 택하심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호의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택하심입니다. 정말이지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고대에 입양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로마의 입양은 매우 공식적인 행사였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기도 했는데, 로마 법에는 '파트리아 포테스타스(patria potestas)'라는 규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권력'을 의미하는 라틴어입니다. 아버지의 권력이란 가족에 대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로마 제국 초기에는 아버지가 자녀들에 대한 절대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었고, 원한다면 자녀들을 죽일 수도 있을 만큼 절대적인 통제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년이 되었다고 해서 결코 아버지의 권력으로부터 독립할 수 없었습니다. 로마의 자녀들은 나이가 얼마나 많든, 결혼을 했든 안했든 상관없이 항상 아버지의 절대적인 권력 아래에 있었습니다. 아들이든 딸이든 아버지의 절대적인 소유와 절대적인 통제 아래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절대적 권력은 입양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원하는 아들을 찾았다면 그 이유는 자신의 사업과 재산, 가족의 미래에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원래 아버지, 생부가 아들을 보내도록 할 수 있을까요? 만일 그가 여러분이 그토록 원할 만큼 고귀한 아들이라면, 어떻게 입양이 가능할까요? 여기에는 몇 가지 협상이 필요했습니다. 공식적으로 그는 생부의 파트리아 포테스타스에서 벗어나 입양하는 아버지의 파트리아 포테스타스로 넘어가야 했습니다. 두 단계가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첫 번째 단계는 ‘만치파티오(mancipatio)인데, 해방(emancipation)이라는 단어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만치파티오는 상징적 매매 행위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실제로 저울과 구리 조각을 사용한 상징적 매매였으며, 이 작은 의식이 세 번 반복되었습니다. 상징적인 세 번의 매매를 했습니다. 먼저 소년을 자리에 두고 돈을 저울에 답니다. 이 때 생부는 ‘싫습니다, 안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아들을 데려갑니다. 두 번째도 동일하게 반복합니다. 아버지가 주저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아들을 버리는 것이 아님을 표현하기 위함이죠. 그러나 세 번째에는 데려가지 않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아이는 생부의 ‘파트리아 포테스타스’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빈디카치오(vindicatio)라고 불리는 의식이 이어졌습니다. 입양하는 아버지는 로마의 관리나 치안 판사인 프래터(praetor)에게 가서 아이를 자신의 가족으로 옮기는 법적 소원을 제출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끝나야 입양이 완료되었습니다. 매우 공식적인 절차였습니다.
이제 입양된 자, 양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네 가지 매우 중요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첫째, 입양된 사람은 이전 가족에게서 모든 권리를 잃었습니다. 이전 가족에서는 어떤 권리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새로운 가족에서의 모든 권리를 얻었습니다. 이전 가족으로 돌아가서 뭔가를 얻으려고 할 수 없었습니다. 과거와의 모든 연결이 완전히 끊어졌고, 새로운 가족에게 완전히 합법적인 아들로서의 모든 권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둘째입니다. 양자는 새로운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는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는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과정이 행해진 이유입니다. 그리고 양자가 새로운 아버지의 재산 상속자가 된 후에는 다른 아들들이 태어나더라도 친자라는 이유로 양자의 상속권에 대해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태어난 친자가 입양된 아들의 권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세번째는, 양자의 과거 삶은, 잘 들으셔야 합니다, 완전히 지워졌습니다. 마치 전에는 없던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모든 빚도 즉시 탕감되었습니다. 모든 기록은 말소되었습니다. 마치 입양된 날 태어난 것처럼 되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마치 이제 막 인생을 새로 시작한 사람과 같았습니다.
네번째로, 법적으로 볼 때 입양된 사람은 영원히, 완전히 새로운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마치 구원처럼 들리지 않나요? 이것이 바로 입양이라는 개념이 묘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 가족과 옛 아버지인 마귀로부터의 모든 권리는 취소됩니다. 우리는 새로운 가족에서 완전히 정당한 아들로서의 모든 권리를 얻게 되며, 그리스도의 상속자가 되고, 아버지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에 대해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유산을 상속받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옛 삶의 모든 것이 지워졌습니다. 우리가 지고 있던 모든 빚이 십자가에서 탕감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아버지의 진정한 아들이 되었습니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일 아닌가요? 아직도 약간 막연하게 느껴지신다면 도움을 좀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아이를 입양할 수는 있지만, 그 아이의 본성까지 바꿀 수는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이런 문제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이 아이를 입양했는데 완전히 구제불능이에요. 반항적이고, 화만 내고…” 그러면서 ADD, ADHD, 양극성 장애, 정신병 등등 별의별 말을 다 갖다 붙입니다. 입양과 관련된 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절차를 거쳤지만 마음을 바꿀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가 세상적 입양과 다른 점입니다. 우리는 입양을 통해, 양자의 영을 받아서 아들이 될뿐 아니라, 또한 거듭남을 통해 아들이 됩니다. 입양은 우리에게 이름과 호칭과 권리를 주고, 거듭남은 우리에게 새로운 가족의 본성, 새로운 가족의 영적 유전자를 줍니다.
입양이 강조되는 것은 우리가 택하심을 받았음을 보여주기 위한 겁니다. 그리고 과거의 모든 것이 취소된다는 비유입니다. 마치 우리가 다시 태어나서 삶을 새로 시작한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입양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인데, 선별, 선택, 택하심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과거의 모든 것을 취소하고 새로운 가족이 된다는 뜻이지만, 거듭남을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입양은 이름과 호칭을 부여하고, 거듭남은 본성을 부여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제 단순히 입양된 자녀가 아니라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정말이지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이 모든 것을 행하고 계십니다. 이 모든 것을 말이죠.
이제 이 세 구절을 살펴봅시다. 어디를 봐야할지 아시겠죠? 좋습니다. 성령님은 어떻게 이 입양을 보여주시나요? 첫째, 우리를 인도하심으로써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또는 뒤집어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인 사람은 누구나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입양된 아들의 첫 번째 표시는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성령님의 지시를 받습니다. 성령님의 통제를 받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우리 삶 속에 거처를 마련하시고 내적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놀라운 현실 속으로 들어갑니다. 성령님은 폭력적으로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잘 들으십시오, 폭력으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성향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 안에 성향을 만들어내시고, 우리의 의지를 굽히고 변화시키시며, 욕구를 바꾸시고, 갈망을 바꾸시며, 좋아하는 것을 바꾸시고, 관심사를 바꾸십니다. 말 그대로 기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갑자기 신성한 본성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사랑합니다. 시편 119편에서 다윗이 175번이나 말했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기뻐합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령님은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시나요? 두 가지 방법으로 하십니다. 외적으로는 성경을 통해서 인도하십니다. 외적으로는 성경을 통해서입니다. 시편 119편 18절입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성경의 진리를 보여달라는 겁니다. 외적으로는 성경을 통해서, 내적으로는 성화를 통해서 인도하십니다. 이 두 가지 방법입니다. 외적으로는 성경, 내적으로는 성화입니다.
성령님이 마음을 움직이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기적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죠, 그렇죠? 이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여러분은 살아있는 기적입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은 것만이 기적이 아니라, 성화되고 있는 것도 기적이며, 영화되는 것도 기적입니다. 여러분은 영화의 기적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가서 영화로운 몸을 받고 주님 앞에 있게 될 때, 그 기적에 대해서는 아무도 논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듭남의 기적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성화의 기적도 똑같이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성령님에 의해 한 단계의 영광에서 다음 단계로, 또 그 다음 단계로 옮겨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외적인 도구적 수단은 성경이며, 내적으로는 여러분을 성화되게 하기 위해 일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이 시편 143편 10절에서 이렇게 기도한 겁니다. “주의 뜻 행하기를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뜻 행하기를 내게 가르치소서. 제 안에서 선생님이 되어 주소서.” 시편 119편 35절에서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로 하여금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나를 그 길로 가게 하소서.” 이것이 바로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시편 119편입니다. “나의 발걸음을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나를 밀어서 주의 말씀대로 행하게 해 달라는 뜻입니다. 이는 성령님의 내적 역사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전입니다. 동사의 시제를 보면 우리는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다. 항상, 계속해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은 일시적인 황홀경의 순간이나 감정적으로 고양되는 순간의 일도 아닙니다. 삶의 방식을 말하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기적으로 여러분의 의지와 욕망을 굽히셔서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만드시는 겁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두 번째 일은 우리가 하나님께 친밀하게 나아가게 하시는 겁니다. 15절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여러분이 거듭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형상이 끔찍하게 손상되어 우주의 쓰레기장, 즉 지옥이라는 영원한 쓰레기장에 던져질 운명에 처해 있었을 때, 여러분은 두려움 속에 살았습니다. 공포 속에 살았습니다. 심판의 두려움 속에 살았습니다. 죄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죄책감, 불안, 두려움, 공포, 심판에 매여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거듭나고 성령님이 성화의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일어난 일은 이것입니다. 양자의 영, 또는 아마도 더 적절하게는 양자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일부 신학자들은 이것이 성령님을 부르는 최고의 호칭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성령님께 모든 이름 중 가장 좋은 이름을 돌리고 싶다면, ‘양자 삼으시는 영’이라고 불러야 할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가족으로 삼으시고 가족의 모습으로 만드시는 성령님의 사역이 하나님이 성령님에게 주시는 일, 아버지께서 성령께 주시는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성령을 말하는 것인지 인간의 영을 말하는 것인지 결정하기 어렵지만, 저는 둘 다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양자 삼으시는 영에게서 양자의 영을 받았고, 이는 우리를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합니다. 우리가 무한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달려가서 ‘아빠’라고 부르짖을 수 있는 것은 거저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아바의 의미입니다, 아빠라는 뜻이죠. 하나님과 이토록 친밀하다고요? 유대인들은 경악할 일입니다. “뭐라고? 하나님은 멀리 계신 거룩하신 분인데 ‘아빠, 아빠, 아바 아버지'라고 하면서 달려간다고?” 우리는 아무 두려움도 없습니다, 그렇죠? 두려움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친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할아버지가 될 때 얻는 가장 큰 기쁨은 손주들에게서 오는 그 놀라운 꾸밈없고 거리낌없는 애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제가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제 손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제가 알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제 손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제 손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모나 조부모로서, 아무 제약도 거리낌도 없는 순수한 애정을 가진 작은 아이들이 달려와 여러분을 껴안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을까요? “아빠!” 손주들은 사방에서 제게 달려옵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이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달려가는 그런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입양하셔서 아들로 만드셨고, 아버지께 온전히 나아갈 수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세 번째 사역은, 이 양자 삼으시는 사역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시고 하나님께 친밀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확신을 주시는 겁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확신을 주십니다. 16절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성령님은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안에 거처를 마련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우리 마음에 확증해 주십니다.
이 증언이 왜 중요한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대 로마의 입양 과정에서는 일곱 명의 증인이 있어야 했습니다. 증인 일곱명입니다. 그 전체 과정을 목격한 증인 일곱명입니다. 왜일까요? 아버지가 죽고 나서 친자들이 상속인이 된 입양된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면 어떻게 될까요? 분쟁이 일어날 겁니다. 아버지의 친자들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저 사람은 합법적인 아들이 아니다. 불법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이 때 입양 과정의 합법적인 절차를 직접 목격한 7명의 사람들이 그 진실성과 정당성을 확인해주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일곱 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단 한 분, 성령님만 있으면 됩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구속의 날까지 인치십니다. 이는 우리가 구속의 날까지 보호받는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우리가 받을 상속, 우리의 유업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말했듯이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이 우리를 위해 하늘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은 인이시며, 아라본, 즉 약혼 반지, 보증금이며, 첫 열매이십니다. 다시 말해, 완전한 상속에 대한 보증입니다. 이것이 바로 16절이 말하고 있는 겁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우리와 함께 증언하십니다. 우리의 영과 함께 증언하십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다는 내적인 확신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것을 소망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강력한 소망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우리에게 이 강력한 소망을 주시는 것이죠.
저는 천국에 가지 못할까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성령님의 내적 증거가 제게 소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소망을 주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거리에서 살거나 형편이 매우 어려운 가정에서 학대받는 아이라면 무엇을 원할까요? 여러분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안내해 줄 사람, 여러분의 삶에서 모든 두려움과 불안을 없애줄 사람, 여러분이 바랄 수 있는 모든 것, 모든 자원, 필요한 모든 것, 그보다 훨씬 많이 가진 사람, 그리고 미래를 보장해줄 사람일 겁니다. 만약 그런 사람에게 입양된다면 그 아이는 행복해질 겁니다.
여러분은 이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입양을 통해 받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양자로 삼으실 뿐만 아니라, 본성을 변화시키시고, 그 다음에는 아버지를, 형제 되시는 그리스도를 닮게 만들기 시작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의 복된 사역입니다. 이것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만큼 성령님께 마땅한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은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오늘 아침 이토록 복된 시간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서로를 알고 교제하며, 함께 찬양하고, 영광스럽고 황홀하며 아름다운 찬양을 듣고, 우리에 대해 말씀하시는 이 심오하고 놀라운 진리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복을 받았는지요.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상상할 수 없는 복을 받았습니다. 주님께 감사드리며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다윗처럼 기도하기 원합니다. 주님, 주님의 뜻을 행하도록 저를 가르쳐 주옵소서. 성령님, 저를 원하시는 대로 굽혀 주옵소서. 제 마음을 주님의 뜻대로 기울여 주옵소서. 제 애정과 욕망, 갈망을 통제하여 주옵소서. 저를 한 단계의 영광에서 다음 단계로, 또 그 다음 단계로 옮겨 주옵소서. 그리하여 제가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하옵소서. 거듭남의 사역을 통해 회복되어 영화의 날까지 이르게 하옵소서. 이토록 고귀한 부르심과 놀라운 선물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있고 성장하며 발전하는 기적을 주시기 위해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복되신 성령님, 우리가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 항상 감사하게 하옵소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이 일을 이루시니 감사합니다. 자격 없는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주변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셔서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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