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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사야 53장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구약의 예언자이죠. 성경 이사야 53장을 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이사야 53장을 구약 성경에서 가장 놀라운 장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구약에서 메시아를 가장 자세하게 예언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3장은 단어 단위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절 한 절 자세히 살펴봐야 할 만큼 중요한 장입니다. 깊은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함께 이사야 53장을 공부하시는 동안 저절로 암송이 될 정도로 익숙해지시기를 바랍니다. 벌써 이번주가 네 번째 시간인데요, 오늘 우리가 살펴볼 곳은 2절과 3절입니다. 53장 전체를 살펴보려면 시간이 좀더 걸릴 겁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서 이사야 53장을 깊이 알게 되고 이 장이 여러분의 삶의 일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께 보다 새롭고 풍성한 예배를 드림으로써 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 장을 통해서 우리 구주의 영광에 대해 묻는 이들에게 대답할 말을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이사야 53장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먼저 몇 가지 질문을 드리면서 전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보려고 합니다. 이제부터 제가 드리는 질문은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이 예언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이 장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바로 고난입니다. 무시무시한 고난, 끔찍한 고난, 혹독한 고난, 충격적인 고난, 괴로운 고난, 고통스러운 고난, 치명적인 고난입니다. 이 장의 주제가 고난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고 합니다. 4절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절입니다. “그가 찔림은… 그가 상함은…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6절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절입니다.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 같이…” 8절입니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이 모든 것이 가리키는 것은 끔찍한 고난입니다. 10절은 그가 상함을 받고 질고를 당했다는 것을 반복합니다. 11절에서는 이 고난을 ‘영혼의 수고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극심한 고난을 과연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고난을 감당할 만한 사람이 어딘가에는 있지 않을까요?” 있다고 치더라도 두 번째 질문이 생깁니다. ‘그’는 고난받을 만한 사람이었을까요? 이 고난받는 사람은 이런 종류의 가차없는 고난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본문의 고난은 당하는 자에게 부당한 것이었습니다. 잠시 9절을 보겠습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오기 때문이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던 이유는 그의 마음에 악독과 거짓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입에 거짓이 없는 정도가 아닙니다. 11절을 보면 이 고난받는 사람은 ‘의로운 종’입니다. 이 예언은 끔찍하고 무섭고 혹독한 고난을 받는 사람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 고난은 마땅한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러면 세 번째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의로운 종을 고난으로부터 보호하시려고 하셨나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정말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의로운 종이 엄청난 고난을, 그것도 부당한 고난을 당하는데도 의로우신 하나님은 보호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네 번째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실패하신 걸까요? 의로운 자를 고난에서 지켜주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본성과 모순되는 것 아닌가요? 의로운 자를 고난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본성과 일치하나요?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그 이유가 5절부터 나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절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8절 하반절입니다.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종의 고난은 백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11절입니다.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12절입니다.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그’는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은 겁니다. 우리 대신 고난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질문이 생깁니다. 주의 종은 왜 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복종했을까요? 왜 의로운 자가 그토록 끔찍한 고난을 받고, 하나님께 버림받으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지은 죄를 대신 짊어져야 했을까요? 주의 종이 기꺼이 그렇게 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10절을 보면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속건제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람 아닙니까? 이렇게 심한 고난을 부당하게 받는데도 의로우신 하나님은 보호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의로운 자였지만 기꺼이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것이 다음 질문입니다. 왜 우리 대신 고난을 받았을까요? 그 결과는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11절에 따르면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합니다. 고난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의롭게 하고 자신도 높아집니다. 또한 그는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깁니다. 다른 번역본에는 “고난을 받은 후에 생명의 빛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그가 빛을, 생명을 보게 될 것이고 그것으로 만족하리라는 겁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다시 말해서 그가 상급을 받고 존귀하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까요? 다 기억하고 계시죠? 52장 13절로 가보겠습니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15절입니다.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여기서 말하는 그는 누구일까요? 누구일까요? 그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분뿐입니다. 다름 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상은 왜 이 사실을 모를까요?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이 태어나기 700년 전에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이심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증거입니다. 하나님만이 미래를 자세히 아실 수 있기 때문이죠. 세상은 왜 이걸 모를까요? 이사야 53장의 ‘그’는 예수님이 틀림없습니다. 모든 세부사항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성경이 없습니다. 있다 해도 읽지도 않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세상 나라에 속한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거라고 기대하기는 어렵죠. 이방인들은 이사야 53장, 구약성경, 신약성경의 진리, 예수님에 대한 기록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어떤가요? 유대인들은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적어도 자신들이 예수님을 거부한다는 것을 확실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말이죠. 마치 자신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예수가 메시아가 아님을, 구세주가 아님을 밝혀야 하기 때문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왜 유대인들은 믿지 않을까요? 왜 유대인들은 이사야 53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 내용이 복음서와 같지 않다고 주장하는 걸까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과 대조시키면서 “여기에 나오는 사람만 예수다”라고 말하는 걸까요? 왜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요?

<선택된 자들을 향한 사역> 이라는 단체의 대표인 미치 글레이서는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유대인입니다. 글레이서는 『이사야 53장의 복음』이라는 책에 글을 한 편 실었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글입니다. 전 세계에는 약 천 4백만명의 유대인이 있는데, 그 중에서 10퍼센트만이 정통 유대교인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성경을 살펴봤을 수도 있고, 성경에 대해 알 수도 있습니다. 나머지 90퍼센트는 정도만 다르지 성경에 무관심하고 성경 해석에도 관심이 없답니다. 그러니까 글레이서에 따르면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이나 이사야서, 그 안에 있는 이사야 53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전혀 익숙하지 않다는 겁니다.

글레이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성경의 예언을 믿지 않는다. 죄를 믿지 않는다.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어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죄성, 곧 타락을 믿지 않는다. 따라서 속죄를 믿지 않는다. 희생제사를 믿지 않는다. 우리의 죄 때문에 피를 흘리셨다는 것을 믿지 않고, 성육신을 믿지 않고, 조상들이 예수를 거부했다는 것을 믿지 않고, 신약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여러분이 유대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할 때, 유대인이 이사야 53장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가정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사야 53장의 놀라운 내용들을 유대인들은 전혀 모릅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이 우리에게 전해진 메시지를 누가 믿었느냐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믿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겁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세상은 이 메시지를 믿지 않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수많은 국가의 수많은 사람들은 대체로 이 메시지를 믿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를 믿지 않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제외한 세상의 종교인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를 믿지 않습니다. 이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유대인이지만 이것을 알았던 바울은 로마서 10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너희들은 기록된 내용을 이미 알고 있다. 그리스도에 관한 주장들을 알고 있지만 믿지 않는 것이다.” 상상해 보십시오. 유대인들은 하늘에 계신 사랑의 하나님이 죄인들을 지옥에서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좋은 소식울 믿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믿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믿음을 통해 보이지 않는 복을 주시기 위해 보이지 않는 구원자를 보내셨다는 좋은 소식을 믿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죄와 진노와 심판으로부터 용서받고 구원받는다는 좋은 소식을 믿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구세주가 구원의 방법이라는 좋은 소식을 믿지 않습니다. 죄인이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 없이 거룩하게 설 수 있게 하는 의로움을 주신다는 좋은 소식도 믿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죄악에 사로잡혀 죽음을 선고받은 죄인을 용서해 주신다는 좋은 소식을 믿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치료자이신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는 모든 영혼의 질병을 확실하고 영원히 치료받을 수 있고, 예수님은 값없이 치료해 주시며 그 어떤 환자도 거부하지 않으신다는 좋은 소식을 믿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굶주린 영혼에게 무한한 잔치가 준비되어 있고, 그 잔치의 주인이시자 떡이신 예수님께서 언제나 환영해 주신다는 좋은 소식을 믿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값을 매길 수 없는 보화가 있다는 좋은 소식을 믿지 않습니다. 그 보화는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이미 값을 치르시고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선물에는 무한한 축복과 마르지 않는 기쁨이 담겨 있습니다. 이 선물을 받는 자들은 바로 지금 그리고 영원히 그 복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사탄과 죽음과 세상에 맞서 승리하셨으며 모든 믿는 자들은 이 승리를 누릴 수 있다는 좋은 소식을 믿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아무런 가치가 없고 하나님을 거역한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피로 값을 치름으로써 하나님과 영원한 화평을 이루셨다는 좋은 소식을 믿지 않습니다.

정말이지 놀라운 메시지가 아닙니까?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기 이사야 53장에 유대인들의 고백이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은 마지막 절까지 모두 유대 민족, 이스라엘 국가의 미래 세대가 하는 고백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기쁜 소식을 믿지 않았다.” 누가 이 복음을 믿었을까요? 매우 소수의 사람들만 믿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복음을 믿기만 한다면 어느 때든 구원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이 복음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바로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이 장이 과거형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장에 있는 동사들은 모두 과거형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장이 예수님께 일어날 일을 예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어느 정도 맞습니다. 예수님께 일어날 일 즉,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부활, 승천 등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과거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예수님께 일어났던 일을 뛰어넘어 역사의 끝에서 그것을 돌아본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마침내 자신들이 찔렀던, 못박았던 분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독생자로 여기며 슬피 울며, 자신들이 메시아를 거부했음을 깨닫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나라에 죄를 씻는 샘이 열리고 구원이 도래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의 국가적 회개가 일어나기 전에도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받습니다. 하지만 미래의 어느 시점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전체적으로 회개하고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그것을 깨달았을 때, 열방들이 이스라엘을 파괴하려고 에워쌌을 때, 포위되어 사라질 위기에 놓였을 때, 바로 그 때 주님이 오셔서 이스라엘의 보호자가 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사야 59장이 이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언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니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한단 말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한단 말입니까? 이것이 미래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지금의 이스라엘은 스스로를 어떻게 지킬까요? 이 세상이 이스라엘을 쫓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도우러 오시지 않습니다. 이사야 59장에서 이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는 인간 지도자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거부하였기에 받는 형벌,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형벌에서 말이죠.

전 세계가 핵무기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9장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둘러보시고는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가 없다는 사실에 하나님은 가장 아름다운 언어를 사용하여 반응하십니다. 59장 16절입니다.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 팔은 누구일까요? 바로 메시아입니다. 메시아가 주님의 팔입니다. 매우 극적인 장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메시아를, 예수님을 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시며 구원을 자기의 머리에 써서 투구로 삼으시며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십니다. 오셔서 자기 백성을 대적한 이들에게 분노하시고 자기 원수들에게 보응하십니다. 그리하여 서쪽에서는 주님의 이름을 두려워하게 하시고, 해가 뜨는 곳에서는 주님의 영광을 보도록 하십니다. 주님은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강물 같이 오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오십니다. 이스라엘을 둘러싼 대적들로부터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 오십니다. 이제 일어날 일은 예수님이 불경건한 자들을 벌하시리라는 것입니다. 20절입니다.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이것이 이스라엘의 구원의 때입니다. 그리스도가 이 구속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2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것은 이스라엘 국가의 구원이요, 새 언약의 구원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찔렀던 분, 못박았던 분을 바라볼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애통해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구원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자신이 이스라엘을 지키는 용사가 되실 것입니다. 그때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해 메시아를 보내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 구원을 가져다주실 것입니다. 미래에 그 때가 오면, 이스라엘은 과거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저희는 믿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팔, 메시아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도 믿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대대로 이어져 온 끔찍했던 불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할 것입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이 질문을 통해 이사야 53장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을까요? 왜일까요? 이스라엘은 그 이유를 고백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이유를 말해줄 것입니다. 하나님께 그 이유를 말씀드릴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미래에 하게 될 고백은 지금도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고백해야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53장 2절과 3절을 읽겠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이 대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던 이유입니다. 그리스도께 돌아올 미래 세대가 할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반역자들을 이스라엘에서 추방하실 것입니다. 스가랴에 따르면 이때 전세계 유대인들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4-5백만명 정도가 예수님을 주로 시인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대대로 예수님을 거부했던 이유입니다.”

여기에서 세 가지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세 가지 이유를 고백합니다. 첫째,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은 주의 종을 경멸했습니다. 예수님의 시작은 미약했습니다. 예수님은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드러난 뿌리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나님은 예수님 삶의 모든 순간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속에서 자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습니다. 누가복음 2장 52절이 그렇게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육신한 아들이 자라는 것을 전부 지켜보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자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랐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자랐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주 산업은 농업이었는데, 농작물을 재배하고 나무와 과수를 심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연한 순’이란 실생활의 비유를 사용한 것으로서, 예수님이 ‘연한 순’ 같았다는 것은 쓸모없는 곁가지 같았다는 겁니다. 히브리어로 ‘요네크’라고 합니다. 곁가지는 원가지에서 돋아난 작은 가지인데 원가지를 위해서 대부분 제거됩니다. 나무의 밑동에서 자라기 시작해서 수분과 영양분을 빨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곁가지는 있어 봐야 도움도 안 되고 성장에 방해가 될 뿐이므로 반드시 제거되어야 합니다.

일부 주석가들은 이 ‘연한 순’을 은유나 알레고리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다윗 왕조나 그런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말이죠. 정말 불필요한 확장입니다. 그냥 단어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시작이 거창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시작이 하찮아 보였고, 시시해 보였으며,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볼 때 무엇이 보였을까요? 요셉과 마리아라는 평범한 부모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유대교의 문화와 종교 중심지에서 한참 떨어진 나사렛이라는 작은 촌에서 자라셨습니다. 여관 한 구석에 있는 마구간에서 태어나 구유에 뉘이셨습니다. 탄생을 축하해 준 사람들은 사회 최하위층에 가까운 목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귀족 출신도 아니었고, 사회적 지위도 없었습니다. 고귀한 가문도 아니었으며, 정규 교육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나사렛에서 목수 일을 하면서 30년을 지냈습니다. 엘리트나 사회적 요직에 있는 그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곁가지로 여겨지는 무의미한 존재였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와도 같았습니다. 중동 지역에 태양이 내리쬐면 땅은 바싹 마르고 건조해집니다. 땅에서 수증기가 증발하면서 토양이 수축하면 뿌리 일부가 흙의 표면으로 드러납니다. 바싹 마른 갈색 뿌리가 되어서 아무도 신경쓰지 않게 되죠. 사람들은 이 나무 뿌리에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이 있었다면 물을 줬을 것입니다. 연한 순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원하지 않고, 볼품없으며, 연약해 보이고, 사람들에게 외면받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잘라버려야 할 연한 순이나, 아무도 경작하지 않는, 신경도 안쓰고 물도 안주는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나 별반 다를게 없다는 것입니다. 시작부터 참 비참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까지 말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예수님은 출신 가문에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하셨습니다. 사회적 지위도 얻지 못하셨습니다. 가족에게서 경제적으로 아무 것도 얻지 못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똑똑하지 않았고, 교육받지 못했고, 힘이 없었고, 영향력이 없었으며, 유력하지도 않았습니다. 랍비나 바리새인, 사두개인, 제사장, 서기관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로 무명의 어부로 이루어진 오합지졸이었고, 세리와 열심당원, 지금으로 말하면 테러리스트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회적 지위가 매우 낮았습니다. 돈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는 천국 복권에 당첨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마음 한켠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큰 보상이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죠.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주목할 만한 업적을 이룬 사람도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광경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잠깐만, 이 사람이 메시아일 리가 없어. 메시아는 이런 모습으로 오지 않아.” 예수님의 모습은 유대인들이 수 세기 동안 기대해 온 메시아의 모습과는 달랐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마가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이 고향 나사렛에 가셨습니다. 동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이 되어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놀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달리 말하면 이런 겁니다. “이런 쓸모없는 가지,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은 자가 어떻게 이런 능력을 행한단 말이냐?”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지혜를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메시아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모든 주장을 배척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능력,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먼저는 예수님의 출생을, 출신 배경을 경멸했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평범한 삶의 모습을 경멸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경멸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경멸로 가득했습니다. 이사야 53장 2절로 다시 돌아가보겠습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유대인들은 외모를 중시했습니다. 이것이 사울을 첫 번째 왕으로 선택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울은 다른 사람들보다 외모가 출중했고 키도 컸습니다. 오늘날에도 이것은 성공을 위한 조건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키가 그렇게 크지도 않으셨고, 잘생기지도 않으셨고,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으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무엘상 9장에서 사울을 왕으로 선택했던 기준과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위대한 정복자가 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왕이라는 생각은 유대인들을 몹시 분개하게 할 정도로 기괴하고 혐오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빌라도를 협박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으면 황제에게 직접 보고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협박했습니다. 빌라도도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빌라도를 협박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복수로, 가장 가혹한 앙갚음으로써 예수님의 십자가 꼭대기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라고 쓴 패를 붙였습니다. 이 문구가 빌라도의 복수였던 이유는,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주장 중에서 유대인에게 가장 불쾌한 주장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진리, 은혜, 거룩을 드러내 보이셨지만, 왕으로서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는 매력적인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의 출생, 그 시작을 경멸했습니다. 다음에는 예수님의 삶을 경멸했습니다.

이제 세 번째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비극적으로 끝났습니다. 예수님은 경멸에 찬 마지막을 맞이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3절을 보겠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이 첫 두 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출생과 삶뿐만 아니라 죽음까지도 경멸했습니다. 다시 기억해야 할 것은,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대신해 죽을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선하고 종교적인 사람이 되어 행위로써 하나님을 만족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메시아가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이자 왕이라고 주장하셨지만 승리 대신에, 영광과 위엄으로 승리하셔서 높아지시고 찬양받으시는 대신에, 멸시받고 버림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슬픔과 비통으로 끝이 났습니다.

유대인들은 공포에 휩싸인 채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다려온 희생입니다. 아브라함이 수풀 속에서 아들 이삭을 대신할 양을 찾아 이삭 대신 양을 죽인 사건이 묘사하는 희생입니다. 이것은 유월절에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희생된 어린 양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벗어난 일이 완전히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최종적인 희생제사입니다. 유대인들이 역사 속에서 동물들을 잡아 날마다 드렸던 수백만번의 희생제사가 묘사했던,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제사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알지 못했고, 희생제사를 필요로 하지 않았으며, 속죄도 구원자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자칭 메시아가 슬픔과 비통에 빠진 인간임을 보았을 때, 비참하게 죽는 모습을 보았을 때, 예수님을 멸시했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거부했기에 유대인들은 지금도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유가 예수님을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센 어조의 단어인데, 말 그대로 업신여긴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업신여겼고, 지금도 여전히 업신여깁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예슈아’입니다. 랍비들은 마지막 ‘아’를 생략시키고는 ‘예슈’로 읽습니다. 일종의 언어유희입니다. 예슈는 “그 이름이 지워지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랍비들의 글에서 ‘예슈’가 그 이름이 지워지게 하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면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를 통치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로 이해하면 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못박기 위해 소리칠 때 했던 말이기도 합니다.

랍비들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불렀습니다. “톨루이” 즉 “매달린 자”로 불렀습니다. 이 ‘나무에 매달린 자’라는 말은 저주를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정말이지 가장 불쾌한 것은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를 범한 벤 스타다와 벤 판디라와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니, 랍비들은 예수님의 이야기가 실제로는 예슈의 이야기로서, ‘벤 판디라’라는 남성 그리고 ‘미리암 벤 스타다’라는 여성과 관련된 이야기라고 주장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벤 판디라는 예슈의 아버지로, 벤 스타다는 어머니로 나옵니다. 예슈의 모친인 미리암 벤 스타다는 미용사인데 로마 용병인 요셉 벤 판디라와 간통을 저질렀고 그 결과로 예슈라는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슈는 미용사와 로마 용병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는 겁니다. 랍비들에 따르면 이 예슈는 이집트에서 마술을 배워 사람들을 미혹했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탈무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랍비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유앙겔’이 아니라 ‘아본-길라욘’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죄로 가득한 글이라고 말했습니다. 랍비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예수님을 멸시했습니다. 정도만 다를 뿐이지 모두 예수님을 멸시했습니다. 3절의 시작 부분과 끝 부분, 두 번에 걸쳐서 이 점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멸시를 받고 계시죠.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 점에 주목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리 간단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할 때 ‘사람’은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 ‘아담의 후손’을 의미합니다. 인간 전체를 말합니다. 또한 ‘남자의 후손’이기도 합니다. 통치자, 지배자, 지도자, 유망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대중들은 뭐라고 말하나요? “하찮은 출생, 하찮은 삶, 하찮은 끝이었습니다. 유력한 사람들은 아무도 예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지도자들을 바라봤지만 예수님이 죽기만을 바랐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 이것을 증명하는 중요한 증언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7장 45절입니다. “아랫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그들이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예수를 잡아오라고 사람들을 보내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성전 경비병이었던 아랫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예수님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기 때문입니다. 47절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48절입니다. 중요한 부분입니다.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따라서 미래의 유대인들은 과거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자 봐라. 예수의 삶의 처음과 중간, 마지막을 봐라. 매력적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예수의 삶은 우리의 기대와 맞지 않았고,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 예수는 버림받았고 멸시당했다. 유력한 사람은 아무도 예수의 편을 들지 않았다. 우리가 뭘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우리는 우리 지도자들을 따랐을 뿐이다.” 권력자들 중 어느 누구도 예수님과 어울리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있어야 했던 몇몇 권력자들은 그 대가가 너무 커서 손을 뗐습니다. 나중에 얼굴을 드러낸 비밀 제자 몇 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위직 사람들은 별 감흥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고위 관료들이나 주요 인사들이 그랬습니다. 굉장히 견고하고 단단한 위계질서였습니다. 백성들은 하층민이었고, 당국자들이 힘과 권위를 가졌습니다. 힘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예수님의 편에는 저명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 예수님의 능력이 사탄에게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했던 바리새인들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했고 순교시켰습니다. 사도들을 배교자라 불렀습니다. 이교도보다 악한 사람들이라 불렀습니다. 초기에는 이런 기도가 횡행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아무런 소망없이 무너지게 하시고, 생명책에서 지워지게 하소서.” 사람들은 그 정도로 예수님을 거부하고 경멸했습니다. 3절을 보면, 예수님은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가 되셨습니다. 정말로 슬픈 삶이었습니다. 그것은 메시아의 삶이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들이 말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원수, 대적들에게 고통을 안기시는 대신에 스스로 간고를 많이 겪으셨습니다. 여기서 ‘간고’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고통, 아픔, 슬픔 등 폭넓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는 육체적 고통보다는 온갖 마음의 고통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질고를, 영혼의 질고를 아는 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슬픔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내면에 슬픔을 품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의 눈에 예수님은 불쌍하고 한심해 보일 정도로 깊은 슬픔을 지닌 사람처럼 보였을 겁니다. 신약 성경에는 예수님이 상심하셨다, 우셨다는 기록은 있지만,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랐던 위대한 정복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승리와 기쁨과 희열과 열정에 가득찬 지도자의 모습은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상심하고, 울며, 슬퍼하고, 고난받는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물론 이 모든 고난의 정점에 실제로 겪으신 육체적 고통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53장 3절을 보면, ‘그’는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몸과 영혼이 겪는 고통이 너무나 극심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얼굴을 외면했습니다. 52장 14절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쯤에는 그 누구보다 심한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가시 면류관이 머리를 찔렀고, 몸에는 피가 흐르고 있으며, 햇빛이 내리쬐는 십자가 위에 벌거벗긴 채 매달려 있는 예수님의 몸을 파리가 온통 뒤덮었습니다. 손에는 커다란 못이 박혀 있고, 채찍질 자국이 선명하고, 얼굴과 몸에는 군인들이 뱉은 침이 말라붙어 있습니다. 얼굴에는 주먹질과 매질로 인해 생긴 멍자국이 선명합니다.

고난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유대인들은 구원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의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대인에게 예수님은 불쾌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서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기괴하고 이상하고 추하고 끔찍해서 쳐다보고 싶지도 않을 정도였습니다. 너무나 당황스럽고, 수치스럽고, 추하고, 끔찍하고, 잊을 수 없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런 얼굴이 되기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계속해서 이런 존재로 여겼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끔찍하기 그지없고 멸시당해 마땅한 존재였습니다.

이제 3절 마지막 부분을 보겠습니다. “그는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다는 마지막 문장은 상당히 미화된 표현입니다. 우리가 그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경멸의 극치입니다. 우리에게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향한 유대인의 관점이었습니다. 한 가지 감사한 것은 오늘날 많은 유대인들이 교회 시대를 거치면서 하나둘씩 그리스도께 나아와 예수님의 진짜 모습을 보고 있다는 겁니다. 언젠가 이스라엘 국가 전체가 예수님께로 돌아와 이렇게 고백한다니 정말 좋은 소식이지 않습니까?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건 반유대주의적으로 들리는데요.” 아닙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의 고백이 아닙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과거를 돌아보며 자신들이 행한 일을 깨닫고 미래에 하게 될 고백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불신앙에 대한 이방인의 평가가 아닙니다. 이것은 유대인 자신의 평가이고 회개입니다. 그리스도를 거부한 가장 악한 죄에 대해 가슴 아파하며, 이스라엘 나라가 고백하게 될 내용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던 적이 있다면 여러분 역시 고백해야 할 내용입니다. 여러분도 이와 동일한 고백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어떤 민족이든, 이 고백을 통해서 죄를 씻는 샘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유대인들이 믿게 되는 때에,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우리가 이런 고백을 한다면 좋겠습니다. 로마서 1장 16절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이제 마지막으로 1-2분 정도 사도행전 3장 17절을 살펴보고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교회가 시작될 무렵, 베드로가 오순절 설교를 한 이후에 선포한 또 다른 설교입니다. 아주 훌륭한 설교입니다. 13절부터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바라바죠.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달리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너희들이 생명의 주를 거부했다. 생명의 주를 거부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책임은 너희에게 있다.”

그리고 17절로 이어집니다. 정말 중요한 부분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자기의 형제로 여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베드로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베드로가 어떤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이사야 53장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좋은 소식이 아닙니까? 생명의 주를 죽였는데도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이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말씀하셨던 것이기도 합니다. 뭐라고 말씀하셨죠?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너희들이 알지 못해 그렇게 행했으나, 이제는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죄 없이 함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요? 돌이켜 회개하면 죄가 없어진답니다. 새롭게 되는 때가 온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오실 것입니다. 만물이 회복되는 날까지 예수님은 하늘에 계셔야만 합니다. 고대부터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한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 날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하나님 나라는 아브라함 언약과 다윗 언약을 통해서 약속되었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반복되었고, 이 약속된 구원과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임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회복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때에, 그리고 이스라엘이 회개할 그 때에 오실 것입니다.

24절입니다. “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여기에서 “종”은 이사야 53장에서 메시아를 가리키는 호칭입니다.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죽였지만, 하나님께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죄로부터 돌이키시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날에 자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약속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끊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스라엘의 구원은 보장됩니다. 그 날이 이를 때까지 예수님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구원이 열려있습니다.

아버지, 이 놀라운 예배를 마치며 감사한 마음으로 나아갑니다. 이 장에는 정말로 놀라운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두 구절만으로도 역사를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수 세기 동안 그리스도를 거부한 세대들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미래에 약속하신 날이 올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 날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모든 약속이 성취되고 이스라엘의 구원의 때가 올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을 고대합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복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주님,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오늘날에도 영혼들을 주님께로 이끌어 주옵소서.

여러분이 기도하시는 동안, 이것은 가장 중요한 결정과 헌신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미래, 영원이 걸린 문제입니다. 이것은 지옥이 아닌 천국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행하신 것을 붙잡기 위해서는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충분히 선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선하다 하더라도, 아무리 종교 생활을 열심히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이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결코 이르지 못합니다. 여러분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죄의 삯을 치뤄주실 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그 삯을 치르셨다는 것을 여러분이 받아들이면, 하나님은 그것을 여러분에게 적용해 주시고 여러분은 완전히 용서를 받게 됩니다. 이제 여러분에게는 영원한 천국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놀라운 메시지입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이것을 믿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시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우리 마음에 행하실 일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결코 헛되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룹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오늘 이루어져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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