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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 이사야 53장을 보겠습니다. 이사야 53장, 벌써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몇 주에 걸쳐서 이사야 53장과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면서 저는 이 장이 얼마나 깊이있는 장인지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이 위대한 장이 암시하거나 설명하는 모든 것을 확장하여 연구하면서 평생 이사야 53장만을 연구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사야 53장은 모든 설교자에게도 도전이 되는 장입니다. 설명을 지나치게 복잡하게 해서 요점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잘 구성해야 하기 때문이죠. 저 역시도 그렇게 잘 구성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조금 더 도전이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보통 저는 한 편의 설교를 서론, 본론, 결론으로 구성하여 준비하죠. 지난주에 4절부터 6절까지를 보려고 했지만 4절부터 5절까지만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3분의 2는 다루었지만, 6절까지 다루기에는 시간이 부족해서 나머지 3분의 1 정도가 남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이 관련있고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다룰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필요하기 때문에 옆길로 잠시 새는 것이지 충동적으로 결정한 게 아닙니다. 오늘은 그런 시간을 한번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어떤 한 구절을 살펴볼 때 높은 곳에서 바라보곤 합니다. 더 높이 올라갈수록 더 넓게 볼 수 있죠. 비행기가 비행하는 4만피트, 만 2천미터 상공까지 올라가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부 다 내려다본 후에 그 구절로 다시 착륙해서 살펴보는 겁니다. 바로 오늘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과 일정 고도의 높이로 올라갈 것이고, 마지막에는 이사야 53장에 착륙해서 4절부터 6절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좀 더 폭넓은 관점에서 시작하겠습니다.

유대 민족의 역사는 세계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역사입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들의 역사는 아주 길고 놀라운 생존의 대서사시입니다. 전 세계에는 여전히 1,400만에서 1,500만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모든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지금껏 살아남은 겁니다. 여기에 계신 그 누구도 히위 족속이나 여부스 족속, 브리스 족속, 아모리 족속을 비롯한 구약성경에 나오는 다른 ‘족속’들을 만나본 적이 없으실 겁니다. 모두 오래전에 사라졌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은 지금 이 자리에도 계시고 전 세계적으로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역사를 거치며 오늘날까지 내려온 순수한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유대인의 역사는 위대한 생존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관점에서 볼 때는 더 놀라운 ‘보존’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인간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유대인들이 끝까지 살아남으려 노력했던 것은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민족적 생존 의지에 대한 강력한 증거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생존이나 국가로서의 존속을 위한 인간의 의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보호와 보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 아직 유대인들이 남아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지금까지 세상에 남겨 두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여전히 지파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비록 주후 70년에 로마가 성전을 파괴했을 때 기록이 사라졌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지파에 속하는지는 모르지만 말이죠. 반면에 하나님은 각 유대인이 어느 지파에 속하는지 정확히 알고 계시고, 각 지파를 다시 세우실 것입니다. 각 지파에서 12,000명을 선택하여 인류 역사의 마지막에 복음을 전할 144,000명을 구성하실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 대환란 때에도 자신의 원래 지파를 인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생존 이야기에는 인간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하지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보호와 보존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섭리를 통해 유대인들을 보호하셨고 보존하셨습니다. 살아남게 하기 위해 모든 상황을 주관하셨습니다. 여러 차례 기적을 통해, 즉 일반적인 역사의 흐름과 세상의 이치를 잠시 멈추셔서 유대인들을 보호하기도 하셨습니다. 출애굽 당시 홍해를 갈라 마른 땅을 건너게 하신 것처럼 말이죠. 이처럼 하나님은 상황을 주관하는 섭리와 자연을 멈추게 하는 기적의 능력으로 유대인들이 멸망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소수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소수 민족입니다. 또 모든 면에서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인류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존재입니다. 매우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유대인이 특별해진 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 자격이 있어서 선택받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선택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을 택하셔서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에 복을 주시고 그 나라를 통해 세상에 복을 주기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유대인을 택하신 목적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대적들은 유대인들을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대적인 사탄의 표적입니다. 악마와 그 조력자들, 세상에 초자연적 악을 퍼뜨리는 자들의 표적입니다. 또한 어둠의 왕국 권세 아래에 있는 인간의 표적입니다. 유대인을 제거하려는 악마적, 인간적 차원의 노력이 역사에서 계속 반복되어 왔습니다. 성공하지는 못했죠. 하지만 유대인들은 여전히 지옥의 권세와 그 권세를 섬김으로 하나님의 최종 목적을 좌절시키려는 사람들의 표적입니다. 결코 성공하지 못할 노력이지만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유대인들은 중동의 취약한 지역에 살았던 소수 민족이었습니다. 온갖 이교도 세력이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었고, 역사 내내 이스라엘을 말살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살아남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없어질 뻔한 위기가 몇 차례 있었습니다. 야곱과 그 자녀들 시대에 있었던 기근으로 아사할 수도 있었죠. 말 그대로 굶어 죽을 뻔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놔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아들 중 하나인 요셉이 배반을 당해 애굽으로, 즉 이집트로 가게 하셔서 모든 권력을 그에게 주셔서 식량을 분배하게 하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요셉이 꾼 꿈 덕분에 애굽은 기근에 대비할 수 있었고, 다른 나라에 식량을 공급하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세우셔서 꿈을 해석하는 자가 되게 하셨고, 애굽으로 하여금 기근에 대비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야곱과 이스라엘을 구하셨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식량을 구하려고 애굽으로 내려왔을 때, 요셉은 형제들이 자신을 배신하고 노예로 판 것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에 불타서 형제들을 죽이려고 결심할 수도 있었죠.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놔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마음에 연민과 용서를 일으키시는 방식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요셉이 형제들을 용서하고 가족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요셉의 가족은 이집트의 고센 땅에 머물렀고, 한 작은 가족에서 시작해서 2백만명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400년이 걸렸습니다. 그 기간이 끝날 무렵 이집트에 재앙이 닥쳤습니다. 열 가지 재앙은 이집트인들에게 치명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이스라엘 자녀들에게도 치명적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유대인의 장자도 죽었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구할 수 있는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제물로 바친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게 하셨습니다. 뒤쫓아온 파라오가 탈출한 유대인들을 집단 학살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바다를 가르셔서 유대인들을 통과하게 하지 않으셨다면 그렇게 됐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갈라졌던 바다를 다시 합치셔서 유대인 대신 파라오의 군대 전체를 바다에 수장하셨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광야에서 40년을 헤매다 역사에서 사라질 수도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께 불평하고, 반역하고,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다 한 세대 전체가 죽어 시체가 광야에 말라 비틀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남은 자’가 있었습니다. 남은 자들은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남은 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멸절될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보잘것 없는 민족이었는데, 유대인들이 마주한 적은 자신의 땅과 재산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던 엄청난 세력의 이교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려 했을 때 그 땅을 차지하고 있던 적들에 의해 얼마든지 멸절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을 은유적으로 입증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거인 골리앗이 양치기 소년의 물매에 맞아 죽은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그런 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물매를 들고 거인에 맞서는 양치기와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살아남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생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존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도착해서 정착했을 때, 이스라엘은 지파별로 땅을 나누어 흩어졌습니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배교했습니다. 거짓 신들을 예배하는 것에 빠져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종교가 피상적이고 위선적인 것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교 문화에 동화되기 시작했기에 이스라엘은 말 그대로 여러 나라에 흡수되어 사라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교도와의 통혼으로 민족성을 잃고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었습니다.

왕국이 분열했을 때 열 지파가 북쪽으로 가서 북이스라엘을 형성했습니다. 나머지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는 남쪽에 모여 남유다를 이루었습니다. 북왕국에서는 선한 왕이 한 명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반역을 저지르고 악을 행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주전 722년에 앗수르 제국이 쳐들어와 북왕국을 멸망시켰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포로로 데려갔습니다. 북왕국 사람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여러 나라에 흡수되었습니다. 북왕국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제 남왕국의 두 지파만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북왕국이 멸망하기 전에 열 지파의 일부가 남왕국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남왕국에 모든 지파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주전 600년 무렵에 바벨론제국이 쳐들어와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갈대아 문화에 섞이게 되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갈대아식 이름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이름은 갈대아와 바벨론 신들과 연관된 이름이었습니다. 또 그 문화 속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끝날 수도 있었습니다. 바벨론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 전부가 이방인과의 통혼으로 뒤섞이고 인류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갈대아 문화에 전혀 동화되지 않았습니다. 70년 후 남은 자들이 많이 돌아왔고, 땅을 재건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렇게 계속 흘렀습니다.

페르시아에 한 왕이 세워졌습니다. 그 왕의 이름은 헬라어로 크세르크세스입니다. 여러분은 ‘아하수에로’라는 이름으로 알고 계실 겁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페르시아를 주전 486년부터 465년까지 다스렸고, 그때까지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에 온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을 말살하고자 했던 하만이라는 사람이 대량학살을 시도했습니다. 그 이야기가 에스더서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여러분도 그 이야기를 잘 아실 겁니다. 유대인들이 페르시아 땅에서 학살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이 에스더를 페르시아 제국에서 어떻게 사용하셨는지도 잘 아실 겁니다.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에스더를 새 왕비로 뽑히게 하셨습니다.

에스더는 아하수에로 왕의 아내가 되었고, 왕의 호의로 유대인들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매년 유대인들이 지키는 절기가 있습니다. 바로 “부림절”입니다. 성경적인 절기는 아닙니다. 모세오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죠. 모세오경에 나오지는 않지만 유대인들이 지키는 절기인 하누카와도 같습니다. 부림절은 유대인이 하만으로부터 살아남은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에스더와 유대인의 생존을 기념하는 것이죠.

그 후에 그리스 세력이 등장했고,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유대인들을 공격하고 학살했습니다. 주후 70년 무렵에는 로마인들이 와서 유대인 수십만명을 학살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있는 수천 마을과 성읍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주후 70년 이후까지 이런 일이 계속되었습니다. 유대인의 생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주후 250년부터 1933년까지를 간단히 요약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기 역사는 모든 것이 아주 잘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유대인들은 세계 여러 곳에 살게 되었습니다. 주로 유럽에 많이 살았지만, 유대인들은 중동과 아프리카로 이어지는 유럽 주변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언제 어디서나 공격을 받았습니다. 도시에서, 나라에서 추방되기도 했습니다. 목숨을 담보로 개종을 강요받는가 하면, 노예가 되거나 법적 권한을 빼앗기거나 학살당하거나 재산을 몰수당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신분을 나타내는 뱃지를 달고 다녀야만 했고, 그것 때문에 사회적으로 소외되기도 했습니다. 끔찍한 종교재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때때로 산 채로 화형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주후 250년부터 1933년까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1938년부터 1945년 사이에는 히틀러 치하에서 홀로코스트가 발생했고, 수백만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했습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이슬람계에 쌓인 증오가 이스라엘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슬람은 이스라엘을 지구상에서 제거하고 지워버리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생존은 매우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의 생존 의지에 대한 증언 그 이상입니다. 하나님의 보존에 대한 증언입니다. 이것만이 유일한 설명입니다. 이스라엘은 작고 힘없는 민족입니다. 물론 현대 이스라엘에는 강력한 무기가 있지만, 역사 전체를 볼 때 이스라엘은 강대국에 둘러싸인 약한 민족이었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생존에 대한 의지가 강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이것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목적’으로만 설명이 가능합니다. 어떻게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한 민족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그 대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 선지자들에게 하신 약속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구원이라는 복을 베푸실 것이며, 나아가서는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에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국가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때 일어날 일이며, 언젠가 반드시 일어날 일입니다.

스가랴서에 잘 나와 있습니다. 12-14장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찌른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릴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왕국을 세우실 때, 유대인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고, 유대인을 통해 세상이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미래적 구원은 구약에 있는 약속입니다. 물론 신약에 있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로마서 11장은 매우 매우 중요한 장입니다. 이 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것을 주제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이것은 교회를 말합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다시 말해서 교회의 선택받은 모든 사람들이 다 모이게 되면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습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이사야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이는 이사야 59장을 인용한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에 따르면 교회가 완성되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완성될 때 이스라엘의 구원이 완성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입니다.

이스라엘이 보존된 것은 미래에 있을 구원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겠고, 구원을 통해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고, 아브라함에게 반복해서 주신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이스라엘만 받게 될 구원과 복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이 복을 받는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때, 메시아가 오셔서 자신의 왕국을 세우고,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과 세상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나라가 될 것이고, 평화와 의로 다스리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복을 받는 데 그치지 않고 세상에 복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여전히 남아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또 다른 현실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굉장히 약하고 공격받기 쉬운 한 나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과 인류의 공격에 둘러싸인 한 나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부분에서 살펴봐야 할 어떤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합니다. 유대인들이 사탄과 인류의 강력한 증오로부터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기록한 신명기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 경계에 도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순종하면 복을 받을 것이다.” 기억하십니까? 신명기 27-28장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순종하면 복을 받을 것이며, 내 말에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축복과 저주의 조건들을 상세히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로 돌아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불순종했고, 계속 그렇게 해 왔습니다. 유대인은 저주받은 민족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자신이 심판하시는 그 민족을 보존하고 계신 겁니다. 하나님은 줄곧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구약에서부터 심판하셨고,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해 심판하고 계십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에서 보존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은 지금까지도 심판받고 있습니다. 유대 민족은 오늘날에도 심판받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스라엘이 과거 역사 속에서 저주를 받은 것은 자신들의 불순종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그 저주가 배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축복을 아직 경험하지 않은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은 변절한 국가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거절한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의 종교는 경건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그럴 수도 없습니다. 아들을 높이지 않고서는 아버지를 높일 수 없기 때문이죠. 이스라엘은 충성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복음의 원수입니다. 로마서 11장 28절이 그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복음의 원수입니다. 이스라엘은 삼위일체를 거부합니다. 유대인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합니다. 구약의 참된 가르침을 거부하고, 신약 전체를 거부합니다. 그러면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은 자신들의 메시아를 거부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신성모독죄를 범했다고 생각합니다. 신성모독죄를 범한 사람을 예배하기 때문이죠. 유대인은 공로와 노력과 자기 의를 통한 구원이라는 거짓을 따릅니다. 그래서 지금은 심판 아래에 있는 저주받은 민족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보존하시는 민족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약하고 작고 오래된 나라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역사만 살펴보아도 얼마나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는지 알게 될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대적했던 초자연적인 힘과 이 세상의 힘을 함께 고려한다면, 생존 가능성은 훨씬 더 희박해집니다. 여기에다 하나님이 수천년 동안 이스라엘을 심판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덧붙인다면, 생존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의 국가로 구원하기 위해 보존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3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우리 주님이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국가를 상징하는 도시와도 같습니다. 34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이스라엘의 집은 여전히 황폐합니다. 유대인은 황폐합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이 있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스라엘 국가 자체,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3장 35절을 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라고 할 날이 올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메시아를 인정할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바로 이것을 기록한 겁니다.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할 것이고,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리라.” 이것이 미래에 있을 이스라엘의 구원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것을 아주 명확하게 기록했습니다. 이제부터 구약의 두 부분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은 시간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겠습니다. 에스겔 36장으로 가보겠습니다. 구약에는 이사야 외에도 두 명의 주요 선지자가 더 있습니다. 바로 에스겔과 예레미야입니다. 물론 여기에 다니엘을 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에스겔과 예레미야는 동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들입니다. 이사야 이후 100년이 지나서 등장했습니다. 바벨론 제국이 공격할 바로 그 무렵에 예언을 시작했습니다. 에스겔은 주전 597년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예레미야는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애굽으로 도망쳤습니다. 따라서 바벨론 제국의 대학살이 시작될 때 두 선지자는 살아있었습니다. 이들의 예언과 메시지는 매우 중요하고 매우 적절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커다란 위기의 때에 널리 퍼졌습니다.

에스겔 36장 16절에 매우 중요한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유대 민족을 향한 메시지가 여기 담겨 있습니다. 16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여기 역사가 있습니다. “인자야.” 이것은 에스겔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그들의 고국 땅에 거주할 때에 그들의 행위로 그 땅을 더럽혔나니 나 보기에 그 행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느니라.” 매우 혐오스러운 묘사입니다. “그들이 땅 위에 피를 쏟았으며 그 우상들로 말미암아 자신들을 더럽혔으므로 내가 분노를 그들 위에 쏟아 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여 각국에 흩으며 여러 나라에 헤쳤더니.”

이 일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이것을 ‘디아스포라’라고 하는데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디아스포라는 바벨론에서 추방된 후에 시작되었습니다. 유대인 일부가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그것은 흩어짐의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고 회복시킨 직후에 세계 구석구석으로 다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일부였습니다. 하지만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이른바 그 여러 나라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말미암아 더러워졌나니.”

어떻게 그렇게 된 걸까요?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라.” 이게 무슨 말일까요? 바로 이런 뜻입니다. 유대 민족이 전세계로 흩어지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다는 겁니다. 자기 땅에서 자기 백성을 지키지도 못하는 신이 무슨 신이냐고 사람들이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조롱했습니다. 열방이 그렇게 하나님을 조롱했습니다. 유대인의 하나님이 유대인이 흩어져 들어가게 된 나라에서 조롱을 받게 된 것입니다.

21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유대인들이 전 세계에 흩어져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과 능력을 열방에 납득시키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이스라엘을 그 땅에서 지키지도 못했으니 말입니다. 오늘날 중동에 가서 누군가에게 “무슬림의 신과 유대인의 신 중에서 누가 더 강력하다고 생각하나요?”라고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답할 것 같습니까? 돈과 군대와 힘과 사람을 가진 신은 알라라고 대답할 겁니다. 역사 속에서 유대인들이 흩어지는 것은 참되신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2절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나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내가 어떤 것을 행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23절입니다.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하실까요? 첫째, 24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우리는 이 일에 대한 예고편을 알고 있습니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돌아갔고, 나라를 다시 세웠습니다. 지금 그 땅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 나라 전체의 구원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고편에 불과하고, 앞으로 있을 일을 암시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나라 전체, 민족 전체를 데려오겠다고 하셨기에 그 일은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 땅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 있는 유대인들이 이주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중에는 지금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국가는 여전히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민족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에 그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과 국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에스겔 36장 25절부터 읽겠습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즉 구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정말로 극적인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한 이름을 위해 유대인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실하심을 확증하고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 언젠가 유대인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유대인을 다시 모으는 과정을 시작하셨고 미래의 어느 시점에 구원하실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요소들을 보십시오. 구원에 관한 요소들입니다. 25절입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중생을 가져오는 죄씻음입니다. 그것은 정결하게 하는 것, 곧 성화입니다.

그리고 26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곧 중생을 말합니다. 정결하게 하는 것이 성화이고 새로운 마음이 중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마음은 새로운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마음을 주시면 새로운 성향과 새로운 태도, 새로운 본성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회심입니다.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감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능력을 주십니다. 새로운 능력이란 무엇일까요?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새로운 행동은 순종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조건은 성화로서 죄에서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새로운 마음은 중생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성향 혹은 새로운 영은 회심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능력은 성령의 내주를 의미합니다. 새로운 행동은 순종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것이 미래에 이스라엘에게 일어날 일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입니다. 이제 제가 좋아하는 28절부터 29절입니다.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희를 모든 더러운 데에서 구원하고.” 31절로 내려갑니다.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좋지 못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스스로 밉게 보리라.” 진정한 회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은 과거를 돌아보며 자신들의 죄와 죄악들을 기억하게 될 것이고 복음을 듣게 될 것입니다. 누구에게서 복음을 듣게 될까요? 대환난날에 하늘의 천사들과 두 증인으로부터 듣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 144,000명의 유대인들과 모든 족속과 민족과 열방에서 회심한 이방인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기 전 하나님께서 이 땅을 최후로 심판하시는 때에, 복음이 도처에 전해지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복음을 듣게 될 것이고, 자신들의 죄를 보게 될 것이며, 자신들의 죄를 회개할 것입니다. 자신들이 못박은 그분을 쳐다볼 것이고, 독자를 위해 애곡하는 것처럼 그분을 위해 애곡할 것입니다. 깨끗하게 될 것이고, 중생할 것이며, 회심할 것입니다. 성령을 힘입어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일어날 일입니다. 32절입니다.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나님을 위함입니다. 33절입니다. 그 날에 ”내가 너희를 모든 죄악에서 정결하게”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참된 회심입니다.

이제 예레미야 31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이 부분은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예레미야 31장 31절입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절정으로 향하는 부분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어떤 언약인가요? 율법 언약으로, 시내산에서 주어진 모세 언약입니다. 이스라엘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그 언약을 읽어주기도 전에 이미 그 언약을 어겼습니다. 모세가 언약을 두 손에 들고 산에서 내려왔을 때 이미 그 언약을 어기고 있었습니다. 그 언약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누구도 지킬 수 없는 언약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언약을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옛 언약과는 다른 새 언약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새 언약은 어떤 성격의 언약일까요? 33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에스겔이 말했던 것과 동일합니다. 34절입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복음전파는 이스라엘에서 끝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속 읽습니다. “...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것은 나라 차원의 회심입니다. 구원의 요소들이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용서와 중생, 회심, 참 지식, 순종이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비참한 죄인임을 알게 될 것이고, 주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믿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전체적으로 믿게 될 것입니다. 이 자체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한 개인의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한 나라의 구원도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한순간에, 동시에 구원하신다는 약속을 받은 나라는 이스라엘 뿐이기 때문입니다. 자유의지를 통해서는 모든 유대인이 동시에 구원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구원하십니다.

놀랍게도 이 새 언약은 이스라엘과 맺어졌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메시아를 거부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후에 새 언약은 모든 사람에게 열렸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복음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순으로 볼 때 유대인에게 먼저 주어졌고 그 다음에 이방인에게 주어졌습니다. 또는 로마서 10장에서처럼 구원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따라서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비준되었고, 이스라엘을 지나 교회로 확장되었습니다. 언약이 약속될 때 교회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교회가 생겨났고, 우리는 동일한 새 언약을 통해 동일한 방식으로 구원받습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3장 6절에서 우리가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고린도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새 언약을 통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게 되면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작됩니다. 31절은 화목에 대해 말합니다.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3절은 중생에 대해 말합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이스라엘은 참 지식을 갖게 되고 주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이 모든 것이 구원의 요소들입니다.

자 이제 윤곽이 잡히셨을 겁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이사야 53장으로 돌아갑니다. 이스라엘이 미래에 이 지점에 이르면 이사야 53장에 있는 대로 고백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은 이스라엘의 말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4-6절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찌른 그리스도를 돌아볼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던 자신들의 태도를 재평가할 것입니다.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거의 없었습니다. 여호와의 팔에 관한 계시, 즉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호와의 능력을 누가 실제로 이해했을까요? 거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출생에 큰 인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연한 순 같았습니다.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 큰 인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서도 아무런 인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버림을 받았고, 슬픔과 비통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이 너무도 초라해서 그를 바라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경멸을 받았고, 우리는 그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보잘것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그 모든 질고와 슬픔이 우리의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를 지셨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 맞고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성모독을 했기 때문에 징벌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찔리신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예수님이 상하신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임을 압니다. 예수님이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이스라엘은 미래에 자신들의 끔찍한 실수를 인정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역사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찔리셨고 상하셨고 맞으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조롱섞인 재판 끝에 십자가형을 받으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의 일부입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 때문에 죽으셨음을 인정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허물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죄악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 이것은 부정적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허물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께 징벌을 받았다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허물이란 뭔가를 위반했다는 뜻입니다. 선을 넘은 것이죠.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죄악은 다른 단어입니다. 본질적으로 죄악이란 두 번 구부려 프레첼처럼 꼬이도록 하는 것과 같습니다. 곧 죄악은 변절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허물과 죄악으로 인해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정적인 측면입니다.

긍정적인 측면은 예수님이 우리의 평화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5절 중간에 평화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평화를 위해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여기에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 위반, 변절로 인해 하나님의 징벌의 무게를 감당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우리의 평화와 나음에 대한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평화는 히브리어로 ‘샬롬’입니다. 샬롬은 곧 화평과 온전한 축복, 나음, 영적 온전함, 영적 강건함 등을 의미합니다. 의사 자신이 죽어서 환자를 건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죄로 가득하기 때문에 아픔과 슬픔과 비통과 죄책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하고, 하나님을 변절한 죄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평화와 영적 건강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죄와 질고, 슬픔, 죄로부터 생기는 모든 결과를 친히 짊어지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스스로 감당하시고는 우리 죄를 대신해 벌을 받으셨습니다. 그렇게 죄값을 지불하셔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하셨고 참된 축복을 얻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스가랴서에 따르면 반역자 3분의 2가 제거된 이후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최소한 3분의 1이 오랫동안 그리스도를 거부해왔음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미래에 있을 놀라운 현실입니다.

오늘 아침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를 통해 6절을 새롭게 보게 될 것입니다. 6절을 보면, 죄에 대한 깊은 인식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태도에 대해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잘못 평가했습니다. 예수님을 잘못 생각했고, 잘못 이해했고, 잘못 대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의 생각이 부패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에 대해 잘못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즉 허물과 죄악에 대해 말합니다. 자신들의 결핍에 대해 말합니다. 죄인은 이것을 인정합니다. 죄인에게는 평화가 없습니다. 샬롬이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이 없습니다. 이사야 54장이 말하는 것처럼, 흔들리지 않는 화평의 언약이 없습니다. 온전함과 영적 강건함도 없습니다. 병들었습니다. 이사야 1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문제가 뭔지 알게 된다는 겁니다. 자신들에게는 부패한 생각과 부패한 행동만 있고, 선한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죄인이 깨달아야 하는 것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하게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한지에 대한 문제도 아닙니다. 바로 죄를 고백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우리 본성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6절이 등장합니다. 문제는 우리 본성 안에 있습니다. 이 부분을 보면 대부분 사람들이 인식하는 것보다 그 문제가 더 심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고백 부분은 드러난 죄가 아니라 죄의 원인을 드러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양과 같아서 그릇 행했고 각자의 길로 걸었습니다. 이사야는 문제가 우리 본성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양은 양처럼 행동합니다. 양이 양 아닌 다른 동물처럼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우리의 본성을 따라 행동합니다. 이스라엘은 양에게서 비슷한 점을 찾을 것입니다. 양은 어리석고,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며, 무력한 방랑자입니다. 양은 거위처럼 떼로 다니지 않습니다. 소처럼 무리를 짓지도 않습니다. 양은 함께 지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양은 좋은 비유가 됩니다. 양이 가지고 있는 성향 중 하나는 보호와 안전, 공급에서 벗어나 떠돈다는 것입니다. 무리를 지어 움직이지 않고, 모두 각자 자기 길을 갑니다. 양은 안전하고 위험이 없고 도움을 주는 것으로부터 멀어지려는 내면의 충동을 따릅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 본성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양과 같이 우리를 지키지 못하고 어리석으며 무력한 방랑자들입니다.

마태복음 9장 36절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이스라엘은 그저 자신들의 길을 갈 뿐입니다. 자기 본성에 따라 죄로 가득한 길을 갈 뿐입니다. 비참하게 타락한 자신의 직관을 따를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들이 하는 행동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들이 하는 행동입니다. 오늘날의 죄인들에게는 선택지가 얼마나 많을까요? 여러분에게는 선택지가 얼마나 있습니까? 아마 수많은 선택지가 있을 겁니다. 자기 자신의 길을 따르면 되기 때문이죠.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여러분은 그렇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선택하는 죄의 길을 따를 겁니다. 양이 그러는 것처럼 여러분도 자신의 길을 갈 겁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길을 가다가 여러분의 길로 들어옵니다. 그러면 서로 부딪히겠죠. 이 모든 것은 매우 개인적이고 개별적입니다. 이것이 양이 움직이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참된 고백의 한 부분입니다. 이는 죄의 증거가 죄의 본성을 드러낸다는 것을 인정하는 진정한 회개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죄책과 그에 마땅한 벌을 한데 모아서, 말하자면 우리의 행위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성이 갖는 무게를 온전히 스스로 감당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6절 마지막은 바로 그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의 악한 행동과 악한 생각, 악한 결핍, 악한 본성, 그 모든 것 때문에 여호와의 종이 징벌의 무게를 오롯이 감당하셨습니다.

6절 마지막이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희생양으로 종, 메시아를 선택하셨습니다. 메시아 종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드려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속한 모든 죄책을 메시아가 지게 하셨고, 메시아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시키셨습니다. 본문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죽으시면서 우리에게 대리적이고 대속적으로 주시는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보충설명을 하나 더 하겠습니다. 죄가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이셨습니다.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는 어떤 죄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고, 거룩하셨고, 악의가 없으셨고, 더럽혀지지도 않으셨습니다. 죄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계셨습니다. 죄가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전혀 저지르지 않은 죄값을 치르기 위해 예수님을 죽이셨습니다. 그 죄는 저와 여러분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힘을 보여주면서 도덕적 감화를 주기 위해서 죽으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고귀한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모범을 보이기 위해 죽으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승리자 그리스도’로 죽으신 것도 아닙니다. 이는 1930년대에 나온 이론인데 아직도 있습니다. 그 이론에 따르면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는 대적들로부터 승리하고, 인류와 우주를 사회적 불의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는, 우리가 억울한 상황에 갇힌 피해자이기에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해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형벌적 대속이라는 원리를 통해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에 대한 형벌을 감당하시고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시키는 대속물이셨습니다. 신약성경은 바로 이 점을 확증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바로 이것이 이사야 53장에 담긴 진리를 신약이 확증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대로 우리를 다루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허물대로 우리를 다루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간과하지 않으십니다. 대신에 자기 아들이신 종, 메시아를 우리 대신 벌하셨습니다. 은혜가 의를 다스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미래에 해야 할 고백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어떤 죄인이든 바로 지금 할 수 있는 고백이고, 여러분이 오늘 해야 하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을 기억하십시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다시금 이사야의 표현이 등장합니다. 오늘이 그날입니다. 지금이 구원의 때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사야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10장 11-13절입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바로 지금입니다.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을 받아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이 놀라운 장에 담긴 풍성한 보화 앞으로 다시금 나아갑니다. 6절 딱 한 구절만 가볍게 살펴보았는데도 놀라운 현실을 마주합니다. 이것이 이 위대한 부분의 핵심입니다. 머리로 배워야 할 것도 아니고, 새로운 정보를 얻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구원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복음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깨닫게 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오늘이 이들에게 구원의 날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은혜 받을 만한 때가 되게 하셔서 이 아침 이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오게 하옵소서.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게 하옵소서. 주님, 주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죄인들을 바로 지금 구원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죄인들의 심령 속에서 바로 지금 그 구원을 행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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