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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계속해서 바울의 복음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몇 가지 주제로 좁히는 게 굉장히 어렵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도 마음을 정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성경 여기저기를 왔다갔다 하더라도 조금만 양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시간에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은 고린도후서 5장입니다. 어제 저녁에는 복음의 영광에 대해 말씀드렸고, 오늘 아침에는 복음의 본질과 관련해서 칭의 교리를 깊이 살펴봤습니다. 복음의 본질은 하나님의 의가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며 이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구원받는 방식이죠.

이처럼 복음은 참으로 영광스럽습니다. 또한 오늘 아침에는 복음의 대속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저녁에도 좀 더 살펴볼 것입니다. 그 전에 먼저 화목이라는 개념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번 시간의 주제가 ‘화목하게 하는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죄인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합니다. 이번 시간에 다룰 고린도후서 5장 끝부분을 보시면 바울의 복음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 나옵니다. 바울은 복음을 일컬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복되신 하나님의 복음, 화평과 은혜와 구원의 복음, 나의 복음, 심지어 우리의 복음이라고 불렀습니다.

18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 ‘화목’이라는 단어가 총 다섯 번 나옵니다. 18절입니다.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리고 20절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대립 상태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적대 관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화목해져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이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말씀도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말씀은 하나님과 사람들을 화목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화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화목하게 하는 복음의 핵심을 알기 위해서는 좀 더 앞부분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는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20절에 따르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신은 공식적으로 파견된 대리자로서 자신이 대표하는 국가를 대신해 메시지를 전하는 임무를 수행합니다. 20절은 우리가 이 ‘사신’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방 문화권에 파견된 겁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은 이방 문화권 사람들에게, 본질상 하나님의 대적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한번은 비행기에서 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저의 직업을 물었습니다. 뉴욕에서 이곳 LA까지 오는 비행기였던 것 같은데요,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복음 설교자입니다.” 제 옆에 앉은 사람은 굉장히 놀랐던 모양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가더니 비행하는 내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5시간짜리 비행이었는데도 말이죠. 너무 솔직하게 말할 필요는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때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아주 좋은 직업을 갖고 있습니다. 죄인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입니다. 혹시 관심 있으신가요?”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죠. 저는 늘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화목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기에 화목의 수단도 제공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사신에게는 이 화목의 메시지를 전할 책임이 있습니다. 화목은 불화, 적대감, 대적관계 등을 전제로 하지만, 온전하고 완전한 화목으로 바뀔 수 있는 가능성도 제공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화목하게 하는 직분에는 몇 가지 구성 요소가 있습니다. 실제적인 화목에는 몇 가지 구성요소가 있다는 겁니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14절로 돌아가서 몇 가지 사항들을 고찰해야 합니다. 14절에서 발견되는 화목의 첫 번째 요소는 화목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화목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이 점은 너무 자세히 다룰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바울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14절에서 바울은 이 점을 명확히 밝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강권’이라는 동사는 어떤 행동을 하도록 압박을 가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스리시는도다.” 저는 개인적으로 “강권하다”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향한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바울을 움직였습니까? 어제 우리는 고린도후서를 통해 바울이 복음의 영광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을 살펴봤습니다. 복음의 초월적인 영광에 대해 다뤘고, 그 영광의 비할 데 없는 장엄함이 바울의 동기가 되었음을 살펴봤습니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바울을 구원해 주셨고, 바울은 이 구원을 주시는 사랑에 압도되어 다른 것을 위해 살지 않고 그 사랑을 선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사랑이 바울을 강권했고, 지배했으며, 다스렸고, 동기를 주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랑을 개인적인 측면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기적이거나 독단적인 측면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을 통해 바울에게 행하신 일, 그리스도께서 이 장엄한 구원과 용서와 은혜의 사랑을 통해 바울에게 행하신 일은 바울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무엇이 바울을 움직였습니까? 무엇이 바울을 강권했습니까? 무엇이 바울의 동기가 되었습니까? 넓은 의미로 보자면 복음의 영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바로 복음에 무가치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장엄한 표현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신성모독자였다고 고백할 정도로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달았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이 사랑이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변화시켰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사랑은 바울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두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 죽으실 뿐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위해 살도록 변화를 받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모두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은 정확히 무슨 뜻일까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믿는 이들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14절 하반절입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너무 신학 용어를 사용해서 설명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그리스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자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자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세상 전체를 위해 죽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 전체를 위해 죽으셨다면, 세상 전체가 구원을 받았어야 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세상 전체를 위해 형벌을 다 받으셨다면, 형벌이 다 끝난 것이니까 세상 전체가 구원을 받았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께서 세상 전체를 위해 죽으셨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살면서 세상 전체를 위해 죽으셨기에 그리스도의 죽음은 현실적 죽음이 아니라 잠재적 죽음이라고 가르칩니다. 실제적 속죄가 아니라 잠재적 속죄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한다면, 특별히 어느 누군가를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게 됩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을 위해서만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 즉 믿는 자들을 대신해서 죽었다가 살아나셨습니다. 그렇기에 실제적 속죄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몸으로 우리 죄를 실제로 대신 지셨습니다. 형벌을 실제로 다 치르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잠재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죽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구원의 길이 열린 것이 아니라 반드시 구원받게 된 겁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믿음으로 선택받은 백성의 죽음입니다. 믿는 자들에 대한 죄값을 그리스도께서 이미 다 지불하셨습니다.

“그건 마치 예정론처럼 들립니다”라고 말하는 분이 있을 겁니다. 맞습니다. 여러분이 그 질문을 하고 싶어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누구나 궁금해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내일은 바울의 예정론이 바울의 복음적 열정에 어떻게 부합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아시겠죠? 내일 아침에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구원이라는 사랑의 선물, 즉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이 사랑의 선물을 자신만의 것으로 간직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서 죽은 모든 이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아직 복음의 메시지를 듣지 못한 사람들, 즉 미래에 복음을 듣고 믿고 구원받을 사람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삶을 강권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사랑이었습니다. 이는 바울을 비참하고 영원한 정죄로부터 구원하신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이 바울의 삶을 강권했던 이유는, 바울 자신이 그 사랑의 메시지를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바울의 삶 전체가 변화되었습니다. 16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이해가 되시나요? 바울의 삶에 무슨 일이 있어났습니까? 바울은 더 이상 외부적인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물리적인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겉모습만 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생겼는지에 특별한 관심이 없었습니다. 외적인 행동에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16절입니다. “우리가 이제부터는,” 바울 자신이 구원받은 순간 이후를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보이는 모습으로 판단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계속 읽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바울도 한 때 오직 육신을 따라 그리스도를 바라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어떻게 여겼나요? 신성모독자로 여겼습니다. 사기꾼이요, 거짓 메시아요, 유대교의 골칫덩어리 정도로 보았습니다. 바울이 보기에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힐 만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죽어 마땅했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치는 사람들이 옷을 벗어 누구의 발 앞에 두었는지 기억하십니까?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보이는 모습으로 평가했고, 그런 평가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건 이후로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견해는 180도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사람을 외적인 것으로 평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그러한 행동이 바리새인들이, 거짓 종교인들이, 잃어버린 자들이 했던 행동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런 행동으로 생긴 가장 끔찍한 결과가 바로 예수님을 판단했던 방식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모든 사람을 영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주님을 모르는 자녀가 있다면, 멋지게 옷을 차려입고 집을 나서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플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완벽해 보일지 몰라도 여러분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매력적인 배우자가 옆에 있는데, 그 배우자가 그리스도를 모른다면, 여러분은 바로 그 점을 볼 겁니다. 우리는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몇 년 전에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저는 백악관 직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서 많은 문제들이 일어나죠? 하지만 그런 문제가 전부가 아닙니다.” 당시는 부시 대통령이 집권을 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여러분은 민주당을 공격하고, 적들을 공격하고, 선교대상을 적국으로 바꾸는 데 너무 열심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민주당이 하는 정치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지만, 육신의 관점으로 바라봐서는 안됩니다. 그들도 선교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세상을 선교의 대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모든 신자들은 세상을 선교의 대상으로 바라봐야만 합니다. 바울이 17절에서 말하려는 바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여기에서 “누구든지”는 중요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누구든지라는 것은 누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누구를 위해 죄값을 치르셨는지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바울이 아는 것은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그 범주에 부합하게 된다는 것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화목의 직분에 참여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으로 영적으로 변화를 받았고, 영원한 운명이 바뀌었으며, 저주받아 마땅한 인간의 의 대신에 하나님의 의를 부여받았습니다. 이 경험이 바울에게 열정을 불어넣었습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울을 강권했고, “우리”도 강권합니다. 14절에 나오는 대명사를 보십시오. 우리 모두를 강권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현실입니다. 우리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전의 방식으로 사람을 보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 여자, 종, 자유인, 유대인, 헬라인은 하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은 없습니다. 바울은 영원한 영혼이라는 관점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여러분도 경험하셨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제가 누군가를 개인적으로 알든 모르든, 저는 그 사람의 내면을 바라봅니다. 저는 영혼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더 이상 피상적인 수준에서 사람들을 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영혼들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 어디에나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정치 성향이나 행동, 사회적 지위, 성격이 좋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것들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 사람들 중에도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죄에 대한 형벌을 모두 지불하신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그 사람들을 위해 계획하신 구원의 계획에 이르도록 돕는 도구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화목하게 하는 직분이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신자로서 반드시 가져야 할 마음가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이런 방식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우리의 직분은 남성과 하나님을, 여성과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었던 적대감, 증오, 미움이 완전한 화목으로 바뀔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불화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이 기쁜 소식입니다. 죄인들이 전능하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언젠가 들어보셨을 수도 있습니다. 사우스웨스트항공 비행기를 타고 엘파소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모두가 싫어하는 중간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거기에 갇혀서 엘파소 시민회관에서 열리는 남성 집회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신약을 펼쳐서 제가 나눌 내용들을 정리하고 있었죠. 제 옆에는 아랍 사람으로 보이는 남성이 앉아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몇 분이 지나자 그 사람이 저를 쳐다보면서 말을 걸었습니다. “실례지만 그 책이 성경인가요?” “네, 성경책입니다.” “질문 하나 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저는 이란 사람인데 미국에는 처음 옵니다. 이민 수속을 밟고 있는데, 미국 종교를 잘 모릅니다. 제가 사는 나라에서는 모두가 무슬림입니다. 모두가요. 그래서 저는 미국 종교를 잘 모릅니다. 괜찮으시다면, 가톨릭과 개신교, 침례교의 차이점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그는 정확하게 가톨릭과 개신교, 침례교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저에게 물어봤습니다. 최소한 그 세 종류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어 보였습니다. “네, 차이점을 설명드리죠.” 저는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가톨릭은 의식 등으로 이루어진 성례전의 종교이고, 개신교는 그러한 성례전에 저항하며 개인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을 추구합니다. 침례교는 그러한 개신교에 속한 종파입니다.” 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하길래 “이번엔 제가 질문 하나 드려도 될까요?”라고 했더니 “물론이죠”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이미 답을 알고 있지만 그 사람에게 직접 듣고 싶어서 이렇게 물어봤습니다. “무슬림도 죄를 짓습니까?” 물론 저는 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말을 직접 듣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냐구요? 무슬림도 죄를 짓습니다. 그 종류를 다 알지 못할 정도로 많이 짓습니다”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도 그런 죄를 짓나요?” “네, 항상 짓습니다. 지금도 죄를 지으러 가는 길입니다.” “정말로요?” 꽤 솔직한 사람 같았습니다. “네, 제가 엘파소로 이민 준비를 하면서 한 여성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다시 만나서 죄를 지을 예정이에요.” 제가 원하지 않았던 내용까지 듣게 된 거죠. 저는 다시 물었습니다. “다른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그랬더니 그러라고 하더라고요. “그 죄에 대해서 알라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물론 아주 끔찍한 죄입니다. 저는 지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지 않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럴 수는 없어요.” “그럼 죄를 계속 지어서 지옥에 가실 건가요?” “아이고, 하나님이 저를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알라가 저를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데, 아마도 하나님은 당신을 용서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저를 빤히 쳐다보면서 마음속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이 사우스웨스트항공사 비행기 중간 좌석에 앉아 있다고?” 그래서 그 마음을 알아채고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고, 하나님은 용서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자 “그래도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라고 말하길래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제게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저는 당신이 하나님과 온전히 화목하게 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온전히 용서받고, 하나님의 친구이자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지, 하나님이 소유하신 것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살면서 이런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이슬람교에는 속량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비행 내내 계속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비록 그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지는 않았지만, 제가 그 사람의 주말을 망친 것 같았습니다. 그가 만날 여성은 매우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그에게 자료를 보내줬습니다. 여러 물품을 보내줬습니다. 그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어느 교회에 나갈 수 있는지도 알려줬습니다만, 아무런 답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하는 일 아닙니까?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수 있다고 알려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린도후서 5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19절입니다.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말 그대로 ‘미토스’와 대조되는 ‘로고스’를 우리 안에 두신 것입니다. 로고스는 참된 말씀이고, 미토스는 진리가 아닌 신화나 거짓 이야기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화목하게 하는 로고스를 두셨습니다. 우리는 화목의 직분을 선포하도록 부름을 받았고, 죄인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음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말은 사람들이 현재 하나님과 적대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우리가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대적이 되지 않으려면 화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화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살펴보면서, 이 위대한 진리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사항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화목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화목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18절을 보겠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모든 것이란 바울이 14절부터 말해온 것들입니다. 구원,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예비되는 것,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 옛것은 지나고 새 것이 되는 것들입니다. 이는 칭의가 아니라 중생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19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화목하게 하십니다. 20절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권면하십니다. 화목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이것은 기초적인 사실입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진노를 만족시킬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정의를 제쳐두거나, 하나님의 의를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죄를 범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현존으로부터 영원히 추방된 자들입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어떤 변화가 생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화목도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다시 화목하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과 화목하게 되기 위한 방법과 죄인들을 아들로 만드는 방법도 마련하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화목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종교들을 아무리 연구해봐도 화목하게 하는 신은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어제 저녁에도 말씀드렸던 부분입니다. 그 본질상 화목을 이루고자 하는 신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10절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라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이 모든 자들의 구주시라는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특히 믿는 자들은 무슨 뜻일까요?

어떤 면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구주이십니다. 매우 일반적이고 포괄적이고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구주이십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여기에는 물리적이면서 일시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또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아있습니까? 우리가 왜 여기에 있나요? 하나님이 본래 구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인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은 하나님이 본래 구주시라는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로마서 2장에 나오는 것처럼,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은 하나님이 구주시라는 것과 죄인을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지금 살아있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우리가 살아서 커피향을 맡고, 사랑하는 이들과 입을 맞추고, 자녀를 낳고, 석양을 바라보고, 맛있는 식사를 하고, 즐거운 휴가를 보내고, 성공하고,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죄인도 은혜로 이러한 것들을 경험합니다. 이러한 것들 중 하나라도 경험하고 호흡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본래 구주시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구주가 아니셨다면 죄인들이 숨 한 번 쉬기도 전에 멸절하셨을 겁니다.

따라서 좋은 소식은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하나님을 납득시킬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죄인이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이것을 알면 충분합니다. 로마 가톨릭이 불쾌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불쾌한 것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그 중에서 가장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모독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말라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곤경에서 구해주시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이 관심을 보여주시길 원한다면, 하나님께 가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너무 바쁘시고, 하나님은 너무 거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여러분을 위한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무자비하고 가차없으신 분이랍니다. 하나님께 가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지 말라고 합니다.

대신에 그리스도께는 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되어 보셨고, 인간이 겪는 모든 것을 경험하셨고, 인간처럼 유혹을 받으셨으니 하나님보다는 예수님께 가랍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꽤 강경하고 가혹한 분이라서 정말 어떤 문제가 있고 도움이 필요하다면 마리아를 찾으라고 합니다. 마리아에게 가랍니다. 왜 마리아에게 가라고 할까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마리아를 거역할 수 없기 때문이랍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밀어낼 수는 있어도 자신의 어머니를 거역할 수는 없기 때문이랍니다. 마리아에게 가랍니다. 이런 말은 우리와 화목하기를 원하시며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의 본성에 반하는 신성모독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하나님 앞으로 나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기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마리아에게 갈 필요가 없습니다. 마리아는 천국에 있기 때문에 누구의 기도도 들을 수 없습니다. 천국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제외하고 기도를 들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본성상 화목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을 보십시오. 어린 아이들이 한 선지자에게 ‘대머리여 대머리여’라고 놀리자, 하나님은 곰을 보내서 아이들을 찢지 않으셨습니까. 사랑과 화목의 하나님이 어떻게 그러실 수 있단 말인가요? 어떤 신이 그렇게 한단 말입니까? 선지자를 향해 “대머리여 대머리여”라고 외치는 아이들에게 곰을 보내는 신을 정말 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땅이 사람들을 집어 삼키도록 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냐구요? 핵심은 그게 아닙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집을 무너뜨린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냐구요? 무슨 신이 그러냐구요? 가나안 사람들을 진멸하도록 명령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냐구요? 그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죄인들의 생명을 왜 그렇게 잔인한 방식으로 빼앗아 가셨는지가 핵심이 아닙니다. 핵심은 하나님이 왜 대다수 죄인들에게 새로운 삶을 영위할 기회를 주시는가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죄인에게 죽음은 마땅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3장을 보면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합니다. 갈릴리 사람들 몇 명이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빌라도 부하들이 와서 살해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문제는 그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는 겁니다. 자신들이 해야 한다고 믿는 바를 행하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시냐구요? 하나님이 문제가 아닙니다. 인류 역사 가운데 일어난 모든 재앙과 사건은, 하나님이 죄인에게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하신 증거입니다. 죄인들이 일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본래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긍휼과 자비를 죄인들에게 보여주시고, 일반 은총을 통해 죄인들에게 회개하도록 경고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구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이십니다. 믿는 자들을 물리적이고 일시적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영원히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화목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께 죄인을 받아달라고 간청할 필요가 없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아시겠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성전에서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이 휘장은 인간과 하나님의 분리 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찢어 버리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나오는 모든 죄인은 화목하게 하시는 하나님에게 다가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우리와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는 분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화목을 이루는 분도 하나님 자신입니다. 화목을 요청하고 간청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길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화목은 첫째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둘째로 용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어떻게 용서하실 수 있을까요? 그 답은 본문 19절에 있습니다. 19절은 하나님께서 죄인들과 화목을 이루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알려줍니다. 죄인들의 죄를 죄인들에게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어떻게 화목이 가능합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세상과 화목을 이루십니까? 어떻게 모든 나라의 모든 사람과 화목을 이루십니까? 죄인들에게 죄를 돌리지 않음으로써 가능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죄인들의 죄를 따로 떼어 놓아야 가능합니다.

우리는 이 점을 이미 살펴봤습니다. 미가서 7장은 “주와 같이 용서하시는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33장은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구약에는 이런 말씀이 가득합니다. 신약에도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죄를 묻지 않으십니다. 바로 이 사실을 죄인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죄를 영원히 용서하실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실 아닙니까? 이것이 핵심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삶의 목적을 알게 되길 바라시나요?” “더 나은 결혼생활을 원하십니까?” “퍼팅을 더 잘하고 싶으신가요?” “터치다운을 더 많이 하고 싶으신가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삶에서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행복, 만족, 잘 사는 것? 이런게 전부는 아닐 겁니다. 죄 가운데 죽어 영원한 지옥에 가고 싶으신가요? 아니면 온전하고 완전하고 영원한 용서를 바라시나요? 바로 이것이 우리가 전해야 하는 핵심입니다.

시편 32편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9절 이면에 있는 내용이 이것입니다. 바울은 아마도 기록하면서 계속 생각하고 있었을 겁니다. 실제로 바울은 로마서 4장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시편 32편을 인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으려 하십니다. 구약은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하나님이 죄를 멀리 옮기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바다 깊은 곳에 죄를 묻으시고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골로새서 2장 13절은 하나님이 우리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복음에 충실할수록, 바울이 전해준 복음에 충실할수록, 죄인들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정말이지 기쁜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니 말이죠. 이것은 화목하게 하는 메시지입니다. 피상적인 것들은 모두 던져 버리십시오. 예수님이 여러분의 건강, 부, 풍요, 성공을 원하신다는 쓰레기와도 같은 번영신학은 모두 던져 버리십시오.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주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구원 받은 후에 그 전보다 더 아프게 될지도 모릅니다. 더 가난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유익과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결정하시는 주권적인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여러분이 천국으로 가는 길에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더 이상 여러분의 죄를 묻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에 참 좋은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바로 바울이 경험으로 알고 있는 화목입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화목은 첫째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둘째로 용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제 셋째입니다. 셋째, 화목은 믿음의 순종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점은 이미 살펴봤기 때문에 길게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화목은 믿음의 순종으로 이루어집니다. 20절에 암시되어 있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려면 죄인이 반응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신입니다. 우리는 대적이었던 신하들과 화목하게 되기를 원하는 위대한 왕의 대리자입니다. 우리에게는 죄인들에게 전할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화목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죄를 여러분에게 돌리지 않으시고 용서하실 것입니다. 이 선물을 받으시길 바랍니다”라는 메시지입니다. 바로 이것이 20절이 말하는 내용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간청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해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우리가 간청해야 한다고 하니 칼빈주의 같게 들리지 않죠? 그렇죠? 여러분은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하고, 회개하고, 믿고, 죄를 고백하고, 죄로부터 돌아서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라고 간청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실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칼빈주의자이기 때문이죠.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우리는 죄인들에게 간청하여 믿음의 행위로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권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그렇게 간청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칼빈주의자가 아니신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화목을 간청하신다니요? 알미니안처럼 들리지만 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이 딜레마에 대해서는 내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을 떠나서는 구원이 없습니다. 죄인의 의지 없이는 구원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는 구원이 하나님의 사역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죄인과 상관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죄인의 의지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간청하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그리고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이 우셨습니다. 예레미야도 예언을 하면서 하나님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너희가 믿지 않으므로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간청하십니다. 우리는 간청하시는 하나님, 죄인들에게 애걸하시고 외치시는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죄인들에게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화목을 이루는 직분, 곧 화목의 사역은 하나님의 용서와 우리의 믿음,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여기서 네 번째이자 마지막 요점이 나옵니다. 우리가 오늘 하루 종일 다룬 내용입니다. 바로 화목은 대신하는 사역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런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기로 결정하실 수 있었을까요?

로마서 4장 5절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은 어떻게 경건하지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실 수 있을까요?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신다는 표현은 바울이 유대교 환경에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사용하기 매우 어려운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경건하지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경건하지 않은 자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정말 격분할 만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그렇게 하셨을까요? 재판정에 앉아서 살인 혐의로 기소된 범인을 바라보는 판사를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범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그 사람들을 다 죽이고 토막내어 사방에 묻었습니다. 네, 제가 다 했습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유가족에게 죄송합니다. 그리고 판사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를 용서하고 풀어주시겠습니까?” 그러자 판사가 “당신이 그렇게 간청하니 죄를 용서해 주겠소. 이제 가도 좋소.” 이렇게 말한다면 그 판사는 더 이상 판사가 아닙니다. 법을 수호하지 않기 때문이죠. 격노할 일입니다. 하나님도 바로 이렇게 하신 걸까요? 하나님이 그저 “그래. 가도 좋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시키셔야만 했습니다. 바로 21절이 말하는 바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속의 사역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루종일 살펴본 내용입니다. 그런 이유로 벤자민 워필드는 “복음의 핵심 중의 핵심은 대속이다”라고 말했습니다. 21절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21절은 15개의 헬라어 단어로 이루어져 있는데, 신약성경에서 속죄의 의미를 가장 압축적이고도 명확하고 포괄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우리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의를 우리 것으로 여기시면서도 하나님은 어떻게 여전히 의로우실 수 있을까요? 여기에 그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누구일까요? 죄를 알지 못하신 이는 오직 한 분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이 구절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대신 죄로 삼으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믿음의 말씀>이라는 운동을 이끄는 케네스 코플랜드와 케네스 해긴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죄인이 되셨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죄인이 되셔서 지옥에 가셨고, 거기에서 3일 동안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을 겪으셨다고 설명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자신의 죄값을 다 치르신 후에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키셨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신성모독입니다. 예수님은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아무런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인이셨다면 “왜”라고 물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죄인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죄로 삼으셨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하나님이 죄인이 아니신 예수님을 마치 죄인처럼 다루셨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집중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앞으로 믿을 모든 사람들이 저지른 죄를, 마치 그리스도께서 개인적으로 저지른 것처럼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를 다루셨습니다. 사실 그리스도는 그 죄를 하나도 저지르지 않으셨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하나님은 앞으로 믿을 모든 사람들의 죄를, 그 죄를 하나도 저지르지 않은 그리스도께서 저지른 것처럼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를 다루셨습니다. 좀 다른 방식으로 설명을 드려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마치 우리의 삶을 산 것처럼 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을 사신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마치 저의 삶을 사신 것처럼 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에 대한 진노를 마치 그리스도께 죄책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께 부으셨습니다. 이것이 레위기 1장 1절부터 9절이 그리고 있는 제사 제도가 보여주는 것 아닙니까?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죄인이 아니신 예수님을 마치 죄인처럼 취급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우리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만족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 말씀을 나누며 예수님이 세 시간 동안의 어둠 가운데서 무한한 형벌을 감당하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앞으로 믿게 될 모든 사람들의 영원한 형벌을 전부 감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무한하신 존재이기 때문에 형벌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에 한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지 첫 부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범한 죄를 마치 예수님이 저지른 것처럼 대하셨습니다. 그리고 21절 마지막에서 대리속죄의 다른 측면을 드러내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 위대한 구절의 전체적인 의미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의로우십니까?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해 주셨지만, 여러분은 정말 의로우십니까? 궁금하다면 옆사람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정직한 답을 듣게 될 겁니다. 여러분은 의로우십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영적으로 성숙해졌을 때에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여러분은 의롭지 않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의로운 것처럼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보죠.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이 여러분의 삶을 산 것처럼 대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산 것처럼 대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여러분을 바라보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여러분을 보십니다. 또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서 자신의 아들을 보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는 이유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만일 하나님이었다면 다른 방식으로 처리했을 겁니다. 왜 예수님이 이 땅에서 33년이나 산 후에 그 모든 일을 겪어야만 했나요?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지 않습니까? ‘이번 주말에만 세상에 내려가거라. 금요일에 내려가면 사람들이 너를 죽일거야. 그러면 일요일에 부활해서 사람들에게 얼굴을 조금 보여주고 저녁에 돌아오거라. 구속은 그렇게 성취될 거야. 나는 너를 이번 주말에만 사용할게.’ 여러분, 왜 30년이 필요했나요? 30년이란 시간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죄 없이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모든 면이라는 것은 시간 순서대로 출생부터를 의미합니다. 모든 면에서 죄 없이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온전한 삶을 사셨습니다. 영아기로부터 유아기, 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의 삶을 다 사신 예수님은 모든 의를 성취하셨습니다. 왜 그러셔야 했을까요? 예수님의 삶이 우리의 삶으로 간주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능동적 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삶을 사신 것처럼 다루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삶을 산 것처럼 다루십니다. 너무나도 관대하신 처사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여러분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볼 때 자신의 아들을 통해 보십니다. 이것은 죄인에게 참으로 기쁜 소식입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사람을 볼 때 오직 화목하게 하는 말씀이 절실히 필요한 영적인 존재로만 본다.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과 말씀이 주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이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사신이다. 우리는 사람들을 외모로 평가해서는 안 되고, 존재 자체를 바라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영원한 영혼을 가진 존재로서, 천국이나 지옥 둘 중의 하나에서 영원히 지내야 한다. 우리가 전해야 하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화목하게 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길 간절히 바라시고, 우리의 죄를 없애기를 원하시며, 자신의 아들의 완벽한 삶에서 입증되고 드러난 자신의 의를 주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이 우리의 삶을 산 것처럼 다루시고, 우리가 그분의 삶을 산 것처럼 다루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의를 취하게 하신다. 이것이 복음의 영광이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우리에게 허락하신 진리에 감사드립니다. 이 진리는 우리의 이해를 넘어섭니다. 우리는 너무도 보잘것없고 죄로 가득한 무가치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이 위대한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살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 일을 행하셨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그리스도는 우리뿐 아니라 모두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위해 우리의 삶을 아낌없이 드리게 하시고, 죄인들에게 화목을 전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사랑하시며 용서하시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죄인들에게 전하는 자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자신의 완전한 아들처럼 의로운 자로 대하신다는 것을 전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이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믿음으로 가능한 일임을 고백합니다. 오늘 저녁 귀한 예배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찬양하며 진리 가운데 아버지를 예배했습니다. 우리를 진리로 충만케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아버지를 예배할 때마다 우리 심령에 기쁨이 차고 넘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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