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바울이 전해준 복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복음의 여러 측면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복음의 여러 측면들을 서로 교차, 중첩시키면서 살펴보는 중입니다. 바울과 다른 사도들이 전해준 복음, 예수님이 전해주신 복음, 하나님의 복음,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에는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요소가 있습니다. 바울 역시 이 요소를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바로 주권적인 복음입니다. 복음의 능력, 복음의 구원 사역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뤄집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의는 하늘로부터 주어집니다. 그뿐만 아니라 믿음과 확신도 하늘로부터 주어집니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회개로 이끄시는 것도 성령이십니다. 믿음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의 모든 요소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옵니다.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서 시작된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의지, 우리의 행위, 우리의 직관, 우리의 선한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주어지는 구원을 받을 뿐입니다. 구원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이 점을 분명히 밝힙니다. 먼저 에베소서 1장을 통해서 주권적인 구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이 주권적인 구원이 인간의 책임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아볼 것입니다. 저는 세계 곳곳에 집회를 갈 때마다 질의응답 시간을 갖는데요, 항상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나요? 구원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때에 의한 것이면서 동시에 인간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질문은 필연적인 질문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말은 이 질문을 편하게 생각하시라는 겁니다. 이 땅에서는 그 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편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편하게 생각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 여러분이 불편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더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누가 에베소서를 기록했을까요?’라고 묻는다면 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바울이라는 두 가지 대답이 있을 겁니다. 누가 에베소서를 기록했을까요?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누가 에베소서를 기록했을까요? 이 질문에 간단히 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물론 바울이 기록했다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대답이 적절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에베소서는 바울이 사용하는 어휘로 기록되었나요? 네, 그렇습니다. 바울의 이성이 반영되었나요? 네, 그렇습니다. 바울의 판단이 작용했나요?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모든 단어를 정하시고 권위를 부여하신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경을 누가 기록했느냐는 간단한 질문에도 답하기 어렵습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기계처럼 받아쓰는 방식으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마음, 지성, 영혼, 어휘, 경험이 사용되었지만 동시에 성령님이 주관하셨습니다.
또 다른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삶은 도대체 누가 살아내는 것입니까? 아주 기본적인 질문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은 매일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갑니다. 누가 사는 것입니까? ‘나 자신’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건 너무 단순한 대답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간다면, 그건 여러분이 한 걸까요 아니면 성령님이 하신 걸까요?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여러분의 공으로 돌리고 싶지 않을 것이고, 나쁜 일을 했다고 해서 성령님의 탓으로 여기고 싶지도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누가 한 걸까요? 이 문제에도 동일한 딜레마가 있습니다. 제가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노라 그러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바울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문제의 실상이 이렇습니다.
이것은 풀 수 없는 문제를 풀려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긴장상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를 받는다는 성도의 안전 교리를 논하면서, 그것을 뒤집어 성도의 견인 교리를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 안에 거하면 영광 가운데로 들어갑니다. 성경에 담겨 있는 구원과 그 이후에 관한 모든 주요 교리에는 인간의 측면에서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이 담겨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을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록하셨다는 증거가 됩니다. 만약 인간 스스로 기록한 것이라면 해결할 수 없는 역설은 모두 제거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 같지만, 이 역설의 문제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쟁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 역설을 해결할 날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지금 이 세상에서는 커다란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이 문제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마음을 편하게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에베소서 1장을 보겠습니다. 3절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왜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는지 아시겠나요? 복음을 믿을 만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은혜로 여러분을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택하신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칭의, 전가된 의입니다. 우리가 고린도후서 5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를 예정하고 양자로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표현은 3절에서 14절로 이어지는 하나의 긴 문장에서 여러 차례 반복됩니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문헌 중에 이렇게 긴 문장은 없을 겁니다. 12절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은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14절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은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6절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은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 계획 전체를 창세 전에 세워진 하나님의 목적의 산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구원하실지 미리 정하셨습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는 그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린 양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4절에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죠.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 전체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요한복음 15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했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것은 위대한 예정 교리, 선택 교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교리를 반대하고 거부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성장한 사람들, 즉 개인의 자유로운 의지와 선택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교리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군주제 국가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개인의 삶에 대해 누군가가 주권적 힘이나 권위를 가진다는 의미를 더 잘 이해합니다. 세계 역사상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미국에 태어나 이 위대한 민주적 경험 속에서 성장한 사람은 자신이 스스로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주권자 밑에서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 우리는 주권자의 통치 아래에서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주권자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우리가 거룩하고 흠 없게 되는 것, 그분 앞에서 완전하게 되고 의롭게 되는 것은 그분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된 목적에 기초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 곧 자녀가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자비로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입니다. 바울이 3절부터 6절까지에서 사용하는 표현은 실수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속량을 받았습니다. 7절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후하게 주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9절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미래에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것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은 그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미래의 소망을 완전히 이해하게 하셨습니다. 11절에 따르면 이제 우리를 기다리는 것, 우리에게 주어진 기업은 자기 뜻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계획의 결과입니다. 이 설명은 14절까지 이어지는데, 우리는 아직 그 기업을 받지 못했습니다.
택하심에서 영화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에 있는 칭의와 성화 등의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른 것입니다. 로마서 8장도 이 점을 명확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잠시 로마서 8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개론과도 같습니다. 잠시 후에 저는 다른 여러 본문들도 살펴보면서, 아마도 여러분이 그동안 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복음의 주권을 이해해보고자 합니다.
로마서 8장 29절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여기서 미리 아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미리 알고 계신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것을 미리 정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알다”라는 단어는 친밀함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알매 하와가 임신하여.” 여기에서 아담이 알았다는 말은 하와가 누구인지 알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아담이 하와와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그들이 누구인지 아셨다는 뜻이 아니라,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계획하시고 예정하신 친밀한 관계입니다. 이 친밀한 관계로 인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3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예정, 구원으로의 유효한 부르심, 칭의, 영화가 나옵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지난번에 다뤘던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바울 신학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예정 교리입니다. 이 교리는 다른 구절에서도 많이 나타납니다.
이제 오늘 오전에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볼 문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라는 진리가 인간의 의지를 배제시키는 걸까요? 성경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하나님의 주권적인 예정과 선택이 틀림없이 나와 있는데, 이것이 인간의 의지를 배제시키는 걸까요?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질문입니다.
이제 이 주제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어떻게 말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구약의 선지서인 이사야서를 보겠습니다. 이사야 10장입니다. 성경 신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하는 비판이 있습니다. 예정 교리에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쟁점이기도 한데요, 인간의 자유와 인간의 의지를 배제시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정 교리를 가르치면 전도의 열정이 없어질 것이라고 염려하는 목회자들이 많습니다. 예정 교리로 인해서 사람들이 잃어버린 영혼에 무관심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던 고린도후서 5장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나는 오직 한 가지를 위해 살았다. 나를 강권하고 지배하는 것은 나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리스도는 나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이들을 위해 죽으셨다. 나는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전하는 사신이다. 내 삶을 화목하게 하는 직분에 온전히 바친다.” 따라서 예정 교리는 바울의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복음에 대한 열정과 잃어버린 영혼에게 복음을 전파하려는 열정은 바울을 순교자의 삶으로 이끌었습니다.
구원의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한다면 복음전도의 열정이 사라질 것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독특한 상황에 있었던 이사야의 말을 통해서 이 부분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사야 10장 5절입니다.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에게 화가 있으리라는 것은 심판과 정죄, 저주, 하나님의 진노가 앗수르에게 내려진다는 겁니다. 앗수르가 하나님께 심판을 받으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라는 시작과 함께 이상한 표현이 나옵니다.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 정말 매우 이상한 표현입니다. 앗수르가 하나님의 막대기로 묘사되고 있고, 하나님은 그 막대기를 직접 손에 쥐고 변절한 이스라엘을 향해 분노를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앗수르는 변절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인 셈입니다. 이 단락에서 하나님은 앗수르에게 이스라엘의 파괴자가 되라고 주권적으로 명령하십니다.
6절입니다. “내가 그를 보내어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를 치게 하며.” 그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내가 그에게 명령하여 나를 노하게 한 백성을.” 이 백성은 이스라엘의 유대인입니다.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 같이 짓밟게 하려 하거니와.” 앗수르가 이스라엘 왕국을 침략하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앗수르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앗수르에게 이 일을 할 것인지 묻지 않으셨습니다. 앗수르가 이 일을 계획한 것도 아닙니다. 이는 7절에 잘 나타납니다. “그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며.” 앗수르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이스라엘을 파괴하려고 전혀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앗수르는 여호와의 대리자로 행동하는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앗수르는 살아계신 참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었습니다. 앗수르는 마음에 그런 계획을 품지도 않았습니다. 7절 이하에서 앗수르의 목적은 여러 나라들을 파괴하고 멸하려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그의 마음은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는도다 그가 이르기를 내 고관들은 다 왕들이 아니냐 갈로는 갈그미스와 같지 아니하며 하맛은 아르밧과 같지 아니하며 사마리아는 다메섹과 같지 아니하냐.” 앗수르에게는 이 나라나 저 나라나 동일했습니다. 다른 나라보다 이스라엘과 사마리아를 파괴하는 데 특별한 목적을 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손이 이미 우상을 섬기는 나라들에 미쳤나니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신상들보다 뛰어났느니라 내가 사마리아와 그의 우상들에게 행함 같이 예루살렘과 그의 우상들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다시 말해서 앗수르는 무차별적이었습니다. 주변 모든 나라를 파괴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앗수르를 심판의 지팡이로 사용하셔서 북왕국을 멸하셨습니다. 북왕국은 결코 다시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앗수르를 좋게 보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5절에서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라고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문자 그대로 앗수르를 심판의 막대기로 사용하셨습니다. 앗수르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의 막대기가 되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앗수르는 하나님의 목적대로 행했지만 자신은 저주와 심판과 정죄를 받았습니다. 12절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일을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하신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시리라.” 여기에서 우리는 앗수르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봅니다. 반면, 정작 앗수르는 자신들이 행한 행동에 대해 온전히 책임을 졌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나란히 놓인 겁니다. 앗수르는 교만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열국의 경계선을 걷어치웠고 그들의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또 용감한 자처럼 위에 거주한 자들을 낮추었으며 내 손으로 열국의 재물을 얻은 것은 새의 보금자리를 얻음 같고 온 세계를 얻은 것은 내버린 알을 주움 같았으나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는도다.” 마치 새의 둥지를 약탈한 것과도 같다고 합니다.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 다시 말해서 막대기를 휘두르는 자가 아니라 막대기가 힘을 가지려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앗수르를 쫓아가서 멸절하리니 불태워 삼키리라.” 18절입니다. “그의 숲과 기름진 밭의 영광이 전부 소멸되리니.”
앗수르는 이스라엘에게 행하는 일에 대해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에 가한 만행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도 말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여기서도 동일한 딜레마가 등장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에는 자세한 설명이 없습니다. 철학적으로 변증해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그러실 수 있을까요? 앗수르를 자신의 거룩한 정의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시고는, 그 과정에서 저지른 죄악 때문에 멸절하신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이제 요한복음 3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온 땅의 심판자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3장입니다. 매우 중요한 내용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3장을 보면 니고데모라고 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바리새인이고 유대인의 지도자입니다. 유대인들을 가르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명한 교사였습니다. 그런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는 모든 사람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알려줍니다.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같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하고 못박았지만,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코 부정하지 않았고, 부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도처에서, 매일 기적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기적이 모든 곳에서 나타났기에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부정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니고데모가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이러한 사실을 증언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이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베푸시는 기적, 즉 귀신을 다스리시는 능력, 질병을 다스리시는 능력, 죽음과 자연을 다스리시는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마음속에 말하지 못한 질문이 하나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니고데모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그러자 니고데모가 묻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니고데모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처음으로 돌아가 완전히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이해했습니다. 종교적 성장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을 제대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가 이렇게 물은 겁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니까?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나이까? 제가 어떻게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사오리까? 저는 늙었고 평생을 이 율법주의 안에서 살아왔습니다. 제가 어떻게 어머니 태속으로 돌아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니고데모도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비유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육체적인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농담으로 넘기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에스겔에 나오는 새 언약을 인용하시는 것입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이렇게 예수님은 구약을 가르치는 자에게 에스겔서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새 언약을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1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정결하게 되어 새 마음을 받고, 내면에 성령이 심겨져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새롭게 태어나고 변화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처음으로 돌아가서 성령으로 거듭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않으면, 육적인 일들만 계속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에 놀라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이런 대화를 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당신은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구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나요?” 그러면 여러분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겁니다. “기도로 가능합니다. 저를 따라 이렇게 기도하세요.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정말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8절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무슨 뜻입니까? 누군가 여러분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요? “저는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이런 냉혹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저에게는 새로 태어나는 것, 새로운 마음, 새로운 성령이 필요합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건 성령의 일입니다. 성령님은 자신이 원하시는 자들에게만 오셔서 일하십니다.” 이 말은 복음을 전하는 공식, 예를 들면 “저를 따라 이렇게 기도하세요”에서 크게 벗어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그랬습니다. 복음전도 기술을 잘 모르는 초보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자적으로 보자면 아노텐,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하는데, 그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정말이지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난 네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안단다. 하지만 그것은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다. 성령은 자신의 뜻대로 위로부터 오시고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단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가장 강력한 말씀이 되겠네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는 우리가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27절로 내려가 보겠습니다. 세례 요한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칼빈주의자였습니다만 그렇다는 걸 몰랐을 겁니다. 당시 세례자들 대부분은 칼빈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겠습니다. 27절입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요한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마지막 구약 선지자였습니다. 구원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하늘에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제 다시 15절로 돌아가보겠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뭐라고 말합니까? 무엇을 하는 자마다라구요?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왜 사람들이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갑니까? 선택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36절로 내려갑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진노가 왜 사람들 위에 머무른다고 합니까? 믿지 않아서입니다. 두 가지를 하나로 합치기가 어려우신가요? 좋은 현상입니다. 어려움을 느끼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는 말은 여러분이 이 두 가지 모두를 잘 이해하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이 두 가지 진리를 완전히 이해하는 절충점을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요한복음 6장을 보겠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누군가 이런 비판을 했습니다. “왜 목사님은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설교하십니까?” 스펄젼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등에 ‘택함받았음’이라고 찍혀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네요.” 제가 앞서 말씀드렸던 요한복음 6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6장 37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에는 절대적인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구원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역이며, 아버지의 목적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다시 말씀드립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44절로 내려가겠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이해하시겠습니까?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이것이 우리의 구원을 보증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까지 보호하십니다. 우리 중 누구도 잃지 않으십니다. 35절로 다시 가보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읽은 요한복음 6장 중간 부분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아버지의 뜻에 의해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는 한, 아버지로부터 선택되지 않는 한, 영원 전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 한,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예정되지 않는 한,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을 떠나서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믿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47절을 보겠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57절입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63절부터는 지금까지 말씀하신 내용을 요약해 주십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두 가지 진리가 아무런 설명 없이 뒤섞여 있습니다.
“너희는 믿어야만 한다. 너희가 믿지 않으므로 정죄를 받는다. 또한 너희는 내 아버지께서 부르시고 이끄시고 생명을 주시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 여러분, 저는 성경이 말하는 바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 이상을 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모든 열정을 다해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라는 영광스러운 교리를 설교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모든 열정을 다해서 인간의 책임이라는 교리를 설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믿지 않는다면 죽은 후에 지옥에 갈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믿는다면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회개하고 믿어야만 한다는 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바임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믿음도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말하는 다른 구절들도 많이 있습니다. 성경이 예정론에 대해 어떤 설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겁니다. 성경은 두 가지 진리를 모두 함께 말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 좋은 예시가 나옵니다. 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싶어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못박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당신은 십자가를 피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 절만 하신다면, 제가 이 세상 왕국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싶지 않았습니다. 마귀가 원한 것은 예수님을 유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누가 가장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싶어했을까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셨습니다. 베드로는 오순절에 자신의 신학을 정확하게 표현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렸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죄가 있을까요? 그렇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겁니다. 예수님은 고난주간의 마지막 날에 성전을 바라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이 심판은 주후 70년에 로마의 침공이라는 형태로 이뤄졌습니다. 유대인 수십만 명이 학살당했습니다. 이듬해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전역의 985개 마을에서 학살당했고, 로마군은 시체를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엄청난 심판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거부하는 두 가지 현상이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오늘날 이스라엘을 바라볼 때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저는 모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좋게 보시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는 나라입니다. 스가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스라엘은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이스라엘을 위해 열릴 때까지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심판은 속량받지 못한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여 받는 심판과 동일한 심판입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행했지만, 동시에 법 없는 자들이었기에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온전히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 하나님의 신비에 대해 불편한 것이 한 번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저보다 훨씬 큰 분이시고, 하나님의 방식과 저의 방식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4장 27절입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그리스도의 죽음에 모두가 관여했습니다. 유대인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은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 이방인, 이스라엘 백성이 합세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단 일에 누가 책임이 있나요?’라고 묻는다면, 이 구절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이런 행위는 무엇을 위함이었습니까? 28절입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 이방인, 로마인, 유대인,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분명히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이 구절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함께 말하는 대표적인 본문입니다. 이 본문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유다에 관한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유다는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까? 유다가 행한 일은 하나님이 정하신 일이었습니까? 심지어 구약에서 유다를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 41:9).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요 6:70). 그리고 예수님은 유다가 죽어서 자기 곳으로 돌아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믿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안 믿고에 대해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영원히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신자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을 지지만, 우리 안에서 설명할 수 없는 좋은 일은 성령의 사역이고, 나쁜 일은 우리의 행동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믿음으로 인내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손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이것은 심오한 일입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그렇게 말합니다. 저는 이 신비를 찬미합니다. 아시겠지만 저는 오랫동안 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살아갈수록 저는 제 힘으로 풀 수 없는 이 교리가 더 좋습니다. 이 교리에서 하나님의 위대함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가 서론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로마서 9장, 10장, 11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바울에게 이르러야 합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지금까지는 요한복음, 사도행전, 이사야를 오가며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다음 시간에는 바울에게로 다시 돌아가서 성경에서 가장 논쟁이 되는 부분인 로마서 9장, 10장, 11장을 통해 기쁨을 누려보도록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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