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시작하면서 이번 시간의 주제를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쟁점을 전도해야 하는 의무와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신입니다. 우리에게는 화목하게 하는 직분이 주어졌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이는 화목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고, 압도하고, 동기를 주고, 지배합니다.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구원받을 모든 이들에게 흘러갑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나아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 11절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사람들을 권면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두려우신 분이며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것과, 영원한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충실하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주권과 투쟁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미리 정하셨고 성령이 모든 것을 행하신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님은 구원하실 자들을 미리 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충실한 복음 전도가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가 되도록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을 성취하는 데 있어 우리가 하나님의 쓰임에 합당하게 되는 것은 하나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는 도구가 되고, 하나님이 사용하기에 적당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그릇이 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삶과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에서 복을 받는 길이 됩니다.
하지만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조화시키는 것을 가장 큰 쟁점으로 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저의 답은 이 쟁점을 명확히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이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결책을 주지 않기 때문이고,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초월적이기에 하나님의 생각 안에서는 완전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딜레마입니다. 우리의 책임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수행하며 우리의 삶을 죄인들을 회개하게 하는 데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어떻게 서로 병치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본문은 바로 로마서 9장, 10장, 11장입니다. 이번 주 내내 겨우 몇 구절만 다루었다고 놀림 아닌 놀림을 받았는데, 오늘 이 45분 동안에는 세 장을 다룰 수 있는지 한 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나단이 말했던 것처럼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성경이 말하는 바를 단순하게 여러분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스스로 증거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성경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은 성경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성경을 주의깊게 읽는 것만으로도 분명해질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러한 점을 보게 될 것입니다. 각 절을 깊이 분석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큰 그림을 그리는 정도로 마무리해 보겠습니다.
로마서 9장부터 11장에서 바울은 복음을 죄인에게 적용하는 것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특히 바울의 마음에 가장 가까이 있는 유대인들을 향한 마음이 드러납니다. 바울은 복음을 이해하고 있을까요? 분명히 그렇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책임을 이해하고 있을까요? 네, 그렇습니다. 우리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임을 이해하고 있을까요? 네, 그 점을 분명히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죄인에게도 회개하고 믿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을까요? 네, 확실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부터 8장에서 제시되는 복음을 살펴보면, 바울이 복음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온전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9장에서 바울은 복음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 9장이야말로 바울의 복음을 자세히 살펴봤던 이번 컨퍼런스를 마무리하기에 좋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일 아침에 좀더 살펴보겠지만 말이죠. 로마서 9장은 바울이 화목하게 하는 영광스럽고 주권적인 복음을 적용하는 것에 어떤 관심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로마서 9장 1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그 누구도 바울의 동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열정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할 수 없습니다. 바울의 순수함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할 수 없습니다. 이 구절은 또한 가슴아픈 심정을 표현하는 부분입니다. 바울은 죄인들의 구원에 열정을 쏟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열정의 진실을 알기 원했습니다. 바울의 열정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바울의 양심은 성령 안에서 떳떳했고, 자신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저도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날 개혁신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그런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고통이 있습니까?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습니까? 근심이 있습니까? 고통으로 몸부림을 칩니까? 잃어버린 영혼들 때문에 괴로워하느냐는 말입니다. 때로는 주권 교리를 너무 확실하게, 편안하게 여긴 나머지 이러한 열정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바울에게 이 열정은 얼마나 강력한 것이었을까요? 3절입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저도 하나님께 이 정도로는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제가 정죄를 받아서 다른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가 지옥에 감으로 다른 사람이 천국에 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말이죠. 하지만 이러한 열정이 바울의 삶을 지배했습니다. 바울은 실제로 자신이 정말로 절절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대신 정죄받을 가능성을 고민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교리를 바울보다 더 잘 이해한 사람은 분명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와 동시에 바울은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열정을 품었습니다. 특히 3절부터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아시다시피 바울은 자주 송영을 토해냅니다. 3절에도 송영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언급하며 송영을 고백합니다.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바울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잃어버린 바 된 것에 대해 계속해서 근심하며 고통스러워했던 사람이었습니다.
10장 1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우리는 바울에게 이렇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누가 구원을 받을지 이미 예정되었다면, 무엇을 위해 기도하냐고 말입니다. 바울은 무엇을 위해 기도한다고 합니까?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열정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다. 이 열정으로 인해 계속해서 근심과 고통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기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명령을 받았다.” 심지어 바울은 디모데에게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죄인들의 구원에 열정을 쏟았고, 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았습니다. 공적인 사역과 개인적인 중보 사역을 통해 이들을 구원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11장 1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여기에서 ‘그럴 수 없다’라는 ‘메 제노이토’는 헬라어에서 가장 강한 부정을 의미합니다. ‘결코 아니다’ 이런 뜻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인 이스라엘의 상태가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는 복음 전도자가 반드시 지녀야 할 태도입니다. 복음 전도자는 잃어버린 영혼의 상태에 안타까워해야 합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의 구원을 갈망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로마서 9장, 10장, 11장에서 바울은 자신을 움직이는 열정이 무엇이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죄인들의 구원을 향한 열정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두 해당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은 유대인의 구원을 향한 특별한 갈망이 있었고, 동시에 이방인의 사도였기 때문입니다. 이 세 장에서는 복음전도에 관한 네 가지의 필수적 요소들, 네 가지의 현실, 네 가지의 진리가 드러납니다. 모두가 필요한 것이면서도 매우 역설적으로 보입니다. 죄인들의 죄를 긴장상태에 놓이게 합니다. 이제부터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합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믿지 않았다는 사실과 이스라엘이 구원받지 않았다는 사실,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거부했다는 사실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에게서 난 자들이 모두 다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유대인들을 구원하려고 의도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입니다. 바울의 설명은 하나님의 주권을 확립합니다. 7절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보시다시피 첫 다섯 구절을 보면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유대인 전부를 구원하시려고 하셨으나, 그 계획이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렇게 답합니다.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 그리고 약속과 전적으로 조화를 이룬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능력이 무위에 그친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택하셨다.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렇게 하셨다.”
14절은 이에 대한 비판을 전제로 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하나님께서 일부만 택하시는 것이 공정하지 않고 의롭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불의하시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시편 119편은 하나님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하나님의 의는 영원한 의라고 합니다. 시편 7편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여.” 의를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어서 바울은 주권에 대해 설명합니다. 로마서 9장 15절입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사람의 의지나 사람의 회심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베푸는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겁니다. 성경은 바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과연 이렇게 하는 게 공평한 겁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공평함을 따진다면 모든 사람은 지옥에 가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이 공평하시길 정말 원하십니까? 저는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바울의 설명은 전혀 모호하지 않습니다. 명확합니다.
19절을 보면 또 다른 비판이 나옵니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믿지 않는 것을 탓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그 답은 20절에 나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입을 다물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의문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토기장이가 원하는 대로 토기를 만들 수 없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절대적 주권자이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께 질문합니까? 왜 하나님께 의문을 품습니까? 이에 대해서 22절은 “만일”로 시작합니다. 마치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엇이 문제가 되느냐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진노를 보이시고, 능력을 알게 하시고,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신다고 할 때,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따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말할 권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를 드러내려고 하신들 어쩌겠습니까? 그럴 권리가 하나님께 없단 말입니까? 거룩한 정의를 드러내실 권리가 하나님께 없단 말입니까?
여기에서 흥미롭게 사용되는 동사가 있습니다.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동사가 수동태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멸하기로 준비된 자들에 대해 관용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행위자로 등장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에서 동사는 수동태입니다. 이것은 이중예정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죄로 인해서 멸망하도록 준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멸망의 과정에서 주체가 누구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동사가 수동의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주체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행위자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행위자는 사람 안에 거하는 죄입니다. 반면에 23절부터 24절에서는 동사가 능동태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하십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가운데서 영광을 받을 사람들을 준비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구원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영원한 선택에 근거한,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선택에 근거한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구약을 인용해서 증명합니다. 25절 이하를 보면 바울은 호세아와 이사야를 인용합니다.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27절부터 29절입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구약성경의 호세아 선지자와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합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미래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보았고, 남은 자들의 구원도 보았습니다. 27절은 핵심 구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하나님은 남은 자를 구원하십니다. 이사야 6장에도 나와 있습니다. 이사야는 환상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사야가 말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는 불타는 숯으로 입이 깨끗하게 되어서, 다가오는 바벨론 심판을 유다에 전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이 백성을 위해 가서 전할 것인가?” 이사야가 말합니다. “나를 보내소서.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귀가 막혀 듣지 않을 것이고 눈이 감겨 보지 못할 것이다. 돌이켜 회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이사야는 제가 묻고 싶은 질문을 합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이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목사 안수를 받고 사역을 시작하려 하는데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 봅시다. “이제 준비가 되셨군요. 그런데 뭐라고 당신이 말하든 아무도 듣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언제까지요?’라고 묻고 싶지 않겠습니까? 6장을 보면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리고 하나님은 6장을 마무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이것이 바로 남은 자 교리입니다.
언제나 그러했습니다. 심지어 미래에 있을 종말의 날에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믿게 될 때, 유대 인구의 3분의 1만이 믿게 될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에 따르면 3분의 2는 배도합니다. 3분의 2는 멸절될 것이고, 3분의 1만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찌른 바 못 박은 분을 바라볼 것이고, 속량을 받을 것입니다. 정결하게 하는 샘이 열릴 것이고, 구약에 약속된 하나님 나라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실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부분에서 이스라엘에게 인간적 책임이 전혀 없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30절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이방인이 되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겁니다.
율법에 따른 의를 추구하는 데 열중했던 모든 유대인들은 멸절되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자 했던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해 이르지 못했던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라는 걸림돌에 부딪쳤습니다. 여기서 다시 이사야서가 인용됩니다.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따라서 로마서 9장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이방인은 믿음으로 의를 얻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행위로 의를 얻으려 했지만 결국 얻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행위를 의지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구원을 받을지는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에 달려 있지만, 동시에 구원을 잘못된 방식으로 추구할 때 정죄를 받습니다. 아시겠나요? 이스라엘은 믿음으로 주어지는 의를 얻지 못했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의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지는데, 이스라엘은 그리스도 때문에 넘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죠? 우리가 돌아오는 주일 아침에 살펴볼 고린도전서를 보면 복음은 이방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고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 24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으면 모든 것이 변화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인 줄 믿지 않으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믿어야 합니다. 구원은 항상 믿음으로 주어지고,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집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넘어졌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버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걸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이스라엘을 참 이스라엘로 만들려고 계획하신 적이 없고, 남은 자를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에게 은혜를 보여주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는 그럴 권한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죄받을 죄인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거룩을 보여주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는 그럴 권한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쟁점을 발견합니다.
로마서 10장을 보겠습니다. 10장에서는 큰 변화가 발견되는데, 주제가 인간의 책임으로 바뀝니다. 9장 끝에서부터 조금씩 조짐이 보였죠. 10장 1절입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여기에서 ‘원하는 바’는 열정적인 간청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9장의 주권 교리 때문에 자신의 열정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선택과 예정 교리가 인간의 책임과 양립한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두 교리는 10장에서 웅장하게 펼쳐집니다. 놀라운 것은 이 둘이 서로 마주하고 있지만, 서로 대립하지 않고 평행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10장에서 쟁점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자기 민족 이스라엘이 구원받기를 원했습니다.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9장에서는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괜찮다고 했죠. 자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바울은 2절에서 그 문제를 설명합니다. 그런데 택함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지식을 따랐습니까?
3절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의, 거룩, 절대적 완전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본래의 하나님보다 덜 의롭게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이런 식인 겁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덜 의롭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하나님이 요구하는 만큼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자신들이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한 의를 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결론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었고, 자신들의 죄에 대해서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과소평가하고 자신들의 의는 과대평가했던 겁니다. 하나님의 의를 받들어 자비를 부르짖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의를 내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없었습니다. 죄에 관한 지식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목적임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모든 믿는 사람의 의를 위해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신 유일하신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대목에서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인 그리스도의 능동적 의로 돌아갑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의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타락한 본성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구원이 믿음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4절에 나오는 “모든 믿는 자에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5절입니다.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야 할 책임이 주어지고 그렇지 못할 경우 정죄를 받게 될 겁니다. 그렇기에 6절을 보면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여러분은 자신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하늘로부터 모셔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은 그리스도를 땅 밑으로부터 모셔 올려서, 여러분 스스로 세운 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늘로 올라가서 그리스도를 모셔 내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모셔 올릴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자기 의입니다.
이 관점의 위험성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의는 과소평가하고 자신의 의는 과대평가한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여서 자신에게 의를 주도록 할 수 있다고 믿는 겁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불가능한 꿈”을 쫓는 영적 돈키호테와도 같습니다.
이어서 8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새로운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30장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이것이 바울이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인들로 하여금 자기 입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라는 부르심이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9장에서는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관한 교리를 설명한 이후에, 10장에서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는 죄인,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삶과 사역의 완전하심을 인정하는 죄인은 구원을 받으리라 말하고 있습니다. 10절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우리는 의를 원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는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 의를 하늘로부터 내려오게 할 수도, 땅 밑으로부터 올라오게 할 수도 없습니다. 의는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이는 9장 33절의 메아리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모든 복음 전도자는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인해서 잃어버린 바 된 영혼에 대해 무관심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잃어버린 영혼들로 인해서 가슴 아파하고 눈물을 흘렸고, 끊임없이 분투하고 슬퍼했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의 겉모습만 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제 살펴본 것처럼 바울은 사람의 겉모습을 보지 않았습니다. 영혼을 봤습니다. 잃어버린 바 된 영혼들을 말입니다. 바울은 잃어버린 자들로 인해 가슴아파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믿는 모든 자들을 위해 죽으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복음 전도자가 가져야 할 열정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어서 성경에서 정말 중요한 내용이 나옵니다. 14절부터입니다. 제가 오늘 아침 여러분과 나누고자 하는 세 번째 요점입니다. 그 전에 다시 요약을 해 보면 첫째,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말했습니다. 둘째, 인간의 책임, 즉 믿어야 할 책임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바로 복음을 전할 책임입니다.
14절을 보겠습니다. 바울이 “택함받지 아니했는데 어찌 주님을 부르리요?”라고 했나요? 아닙니다. 14절입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떻게 들을 수 있단 말입니까? 보내심을 받지 않으면 어떻게 전파한단 말입니까? 바울은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우리도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사람을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복음을 전했다고 해서 칭찬받을 만한 자격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복음을 들은 사람은 복음을 전해준 사람을 향해 기쁨과 사랑이 충만하게 됩니다.
그런데 1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일까요? 이사야처럼 어떤 사람은 회의를 느꼈습니다.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17절에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왜 믿지 않았습니까? 왜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까?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그냥 듣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이해해야 한다는 겁니다. 문제는 그 사람들이 주의깊게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의깊게 듣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복음을 전할 책임이 분명해지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이해합니다. 10장 초반부에서 제시되는 인간의 책임도 이해합니다. 이제는 복음을 전할 책임도 이해합니다. 사람들은 믿지 않는 이를 부를 수 없습니다. 듣지도 못한 이를 믿을 수 없습니다. 전파하는 자 없이는 들을 수 없습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전파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들음에서 나옵니다. 18절부터 읽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바울이 말하려는 바는 이런 겁니다. “너희 유대인들은 듣기를 거부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거부했다. 그래서 복음이 온 세상으로 향하게 되었고, 이제 이방인들이 듣고 믿고 있다. 너희가 먼저 들었으나 거부한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은 이 복음을 전할 책임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겁니다. 복음을 전할 책임을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위대한 진리 사이에 두고 있는 겁니다.
이제 11장입니다. 간략하게 몇 가지만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섭리라는 주제로 돌아갑니다. 이 장을 다 살필 수는 없습니다. 시간이 충분하지 않으니까 전체적으로 윤곽만 살펴보겠습니다. 1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다시 하나님의 주권으로 돌아갑니다.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증거입니다. 교회 시대의 유대인들도 개별적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그러니까 답은 이것입니다.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이지만, 그것이 이야기의 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제시하고자 하는 네 번째 요점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미래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11장에서 주어진 약속입니다. 그 약속은 명확합니다. 전혀 모호하지 않습니다. 이 약속을 비켜갈 수 없습니다. 이 약속은 5절에 있습니다.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바울은 “이스라엘은 어떡합니까?”라는 질문에 답해야 했습니다. 이제 막 10장을 끝냈습니다. 10장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했고, 이제 막 복음에 참여한 이방인들이 복음을 믿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성장하고 번영하고 있으며, 유대인들은 계속 적대적인 거부자로 남아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떡합니까? 이것이 이스라엘의 끝입니까? 이것이 끝이란 말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이스라엘이고, 실제 이스라엘에게는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이스라엘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설명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래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하지 않으신다면,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히위 족속이나 여부스 족속, 아모리 족속, 헷 족속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한 번도 없습니다. 모두 섞여서 이제 족속의 구분이 없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성경 시대, 특히 구약 시대와 마찬가지로 순수한 혈통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시는 걸까요?
그 때가 올 겁니다. 지금은 남은 자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수많은 유대인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이 남은 자의 일부로서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저는 참 기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전체적으로 구원받을 날이 미래에 분명히 올 겁니다.
11절로 내려가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이 거부하자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렀습니다. 바울은 계속 설명합니다. 이방인의 구원은 이스라엘을 시기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시기를 느낀 유대인들이 돌아와 원래 자신들에게 주어졌던 약속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15절입니다.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만일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거부하여 복음이 전체 이방 세계로 흘러갔다면, 이스라엘의 거부가 이방인 전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면, 이스라엘이 받아들일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요한계시록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유대인의 각 지파에서 12,000명씩 총 144,000명이 구원을 받게 될 겁니다. 이들은 전 세계로 나아가 모든 곳에 복음을 전할 겁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고, 세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부흥의 시대가 도래할 겁니다. 그 후에 주님이 다시 오셔서 유대인들에게 약속하셨던 왕국을 세우실 겁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일시적으로 끊어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17절부터 읽겠습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교회도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구절이 말하는 교회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22절입니다.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하지만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날이 오고 있습니다. 25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이스라엘의 일부인 남은 자를 말합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찬다는 것은 교회의 완성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이런 일이 왜 일어납니까? 29절입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귀결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결되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귀결됩니다. 이제 결론입니다. 33절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무슨 뜻인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능력 밖이라는 겁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하나님께는 모사, 조언자가 필요 없습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하나님께는 어떤 것을 설명하실 의무가 없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우리 모두 함께 아멘으로 고백하겠습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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