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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감사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집회를 위해서 기획하고, 봉사하고, 의견을 제시하고, 설교를 하고, 또 인터뷰에 응해주신 모든 분들이 저희가 진정으로 다루고 싶었던 주제를 담아낼 수 있도록 참 잘 해주셨습니다. 단상에서 말씀을 전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성실하게 오랜 시간 준비해서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늘 사역으로 바쁜 중에도 이번 집회를 위해 기도로 말씀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참 감사합니다. 설교 시간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이면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잘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집회를 도와주셨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사역을 이어가실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어제만 해도 전 세계 127개국에서 실시간으로 집회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실시간 접속자 수가 2만 5천명이었는데 함께 모여서 보신 분들까지 합하면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정말 놀라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과거였다면 진리를 이렇게 먼 곳까지 전파하는 데에는 수백 년이 걸렸을 겁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만 보더라도 몇 년, 몇 달, 몇 주가 걸렸을 겁니다. 그런데 실시간 방송이라니, 정말로 놀랍습니다.

말씀을 전해주신 모든 설교자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전한 모든 설교가 세계로 뻗어 나갔습니다. 우리의 막중한 책임이기도 하죠. 모든 설교자분들은 주님의 종으로서 맡겨진 책임을 고귀하게 수행해 주셨습니다. 전해야 할 것을 올바르게 전해 주셨습니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또한 여러분이 이번 집회의 주제인 <다른 불> 책을 가지고 계심에 매우 감사합니다. 이렇게 책으로 정리되는 게 참 중요합니다. 제가 오늘 질의응답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께서는 소통하시고자 하실 때 책을 쓰셨습니다. 영상을 만드신 게 아니라 책을 쓰셨습니다. 그래야 진리를 한 자리에 붙들어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책을 읽으시면서 이번 집회에서 배운 것들을 되새기실 수 있으실 겁니다. 이 메시지를 주님이 보내시는 땅 끝까지 전할 전문가가 되실 겁니다. 이 자리에는 최소 30개국에서 오신 분들과 북미 전역에서 오신 분들이 계십니다. 여러분들은 이 진리를 전할 군대가 될 것입니다. 신중하고 주의깊게 쓰여진 이 책이 여러분을 도울 것이니 집중해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이번주에 저희가 말씀드린 주장들은 가장 엄격한 검증도 견딜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희가 드린 말씀을 믿기 어려우시다면, 성경과 이 책을 펴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저희의 주장을 신중하게 검토해보시기를 간곡히 권합니다. 우리는 그런 검증을 환영합니다.

이 집회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교회를 돕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을 비신자들이 이해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말씀드렸듯이 이 운동에는 많은 비신자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진리를 이해하거나 갈망하거나 찾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지 않는 한 불신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저희가 도우려는 대상은 교회입니다. 저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명확하고 일관되게 모순 없이 계시하셨다고 믿는 분들을 향해 말씀드리는 겁니다. 참된 교회, 진정한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분별할 수 있도록, 오류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그리고 교회 밖의 다른 이들에게 진리의 원천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곡식과 가라지가 섞여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참된 교회를 향해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이 집회에 대한 반응으로 지난 며칠 동안 몇 가지 공격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인터넷에 올라오기 때문에 피하기는 어려웠고, 아마 여러분 중에도 알게 되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이와 관련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오늘 밤에는 제 개인적인 생각을 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스티브 로슨 목사님이 제가 말씀드릴 것에 대해 제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셨는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뭐라고 답할지 아직 생각을 정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제 마음속에 있는 생각들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제기된 비판에 잘 답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 가지로 나누어서 간략히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사랑이 없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랑의 가장 큰 표현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실을 알려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을 어둠과 미혹 속에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야말로 사랑이 없는 겁니다. 우리는 사랑하기에 진리를 말합니다. 단지 말하는 태도나 어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말하는 것 자체가 사람들을 미혹에서 구하는 사랑입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을 만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실제로 교회의 목사, 장로에게는 책무가 있습니다. 디도서 1장에 목사의 자격이 나오는데,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양들을 돌보는 방법입니다. 보호하는 방법이기도 하죠.

다음으로 분열을 조장한다고 비난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이 비난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진리는 본질적으로 분열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진리는 본질적으로 오류와 분리됩니다. 오류를 품고 하나가 되기보다는 진리로 나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저는 진리가 분열을 일으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예수님이 전해주신 복음>이라는 책을 썼을 때, 여러분 모두가 아실 만한 저명한 복음주의 설교자가 저를 점심 식사에 초대해서는 이렇게 말을 하더군요. “맥아더 목사님은 그리스도의 몸을 분열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질문을 하나 했습니다. “제가 쓴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진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질문 하나만 했습니다. 확실하게 진리는 분열을 일으킵니다. 오류를 즉시 드러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세번째입니다. 오늘 듣게 된 건데, 이 문제가 성경에 명확히 나와 있지 않다는 비판입니다. 이번 집회에서 나온 주장에 일부 유명인사들, 혹은 유명한 성경학자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면 성경이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이에 대한 저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만약 이 문제가 일부가 주장하는 것처럼 불명확하다면, 오직 거짓 교사들의 영향 아래에서만 그렇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도들에게 이 문제는 아주 명확했습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에게도 명확했습니다. 책 부록에 관련 인용문이 많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종교개혁가들에게도 명확했습니다. 이미 살펴본 바 있죠. 청교도들에게도 명확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같은 신조에도 명확하게 진술되어 있습니다. 벤자민 워필드 같은 학식 있고 고결한 개혁신학자들에게도 명확했습니다. 찰스 스펄전에게도 명확했습니다. 좀 더 최근을 보면 짐 보이스에게도 명확했습니다. R.C. 스프로울에게도 명확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에이미 맥퍼슨이나 캐서린 쿨만, 지미 스와가트, 짐 베이커, 케네스 코플랜드 같은 자들 때문에 불명확해졌다는 겁니까? 말 그대로 어불성설입니다. 참되고 건전한 교리에 기초하면 이 문제는 언제나 명확했습니다.

다음으로는 은사주의자들 중에서도 극단적인 광신도에 대해서만 다룬다는 비난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운동에는 전반적으로 오류가 있습니다. 오늘 질의응답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전 세계 은사주의자들의 90%가 번영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2천 5백만 명 가량이 삼위일체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은사주의자들 중에 1억 명은 로마 카톨릭 신자입니다. 네이선 교수님이 말씀하셨듯이 계산을 해 보십시오. 주변부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급속도로 성장하는 은사주의 운동의 실체입니다.

또 이런 비난도 받았습니다. “당신들은 예배를 풍성하게 만든 운동을 공격하고 있다.” 은사주의 운동에서 나온 찬양이 교회의 예배를 풍성하게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저는 현대 은사주의 찬양을 통해 은사주의 신학이 교회로 들어온다고 확신합니다. 찬양을 받아들이면 신학이 따라 들어옵니다. 같은 찬양을 부르고 같은 작곡가의 찬양을 듣고 같은 감정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비은사주의 교회일지라도 결국에는 은사주의 교회와 같아지게 됩니다. 찬양이 통로를 만드는 것이죠.

강력한 교리 선언서, 역사적인 교리 선언서를 가진 교회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런 교회는 음악을 들여오는 것조차 꺼렸습니다. 위대한 찬송가, 그러니까 위대한 신학을 담고 있는 찬송가를 부르는 교회를 아십니까? 그런 교회는 은사주의 운동의 찬송을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음악이 교회에 들어오지 않기에 그런 신학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특정 찬양을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현대 찬양 중에서도 아름답고 또 우리가 불러야 하고 부를 수 있는 찬양도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경우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성이 아닌 육신에 관한 찬양일 때, 진리가 아닌 감정에 관한 찬양일 때, 그런 찬양은 은사주의 운동과 일치하는 감정을 유도하고 은사주의가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줍니다.

모두가 같은 찬양을 부른다면 어떻게 구별될 수 있을까요? 은사주의 운동은 예배를 현격하게 격하시켰습니다. 은사주의 운동은 예배를 진리와 지성의 영역에서 육체적 감정의 영역으로 축소해 버렸습니다.

집회를 시작할 무렵에는 이런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목사님은 형제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을 공격하고 있어요.” 이것만은 분명히 말씀드려야 할 것 같네요. 이미 이번 주에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은사주의 운동은 주로 비기독교인들로 구성된 운동입니다.

몇 년 전에 NBC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복음주의 세계에 큰 사건이 터졌을 때였죠. NBC 리포터가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십니까? 누가 은사주의 운동을 감시하나요? 누가 감시하나요?” 리포터는 복음주의 교계에 어떤 권위나 중심이 없다는 것에 참 의아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실 아무도 그 운동을 감시하지 않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누가 그 운동을 감시해야 할까요? 누가 감시해야 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신실한 목회자, 모든 신실한 장로, 모든 신실한 신학자, 하나님 말씀을 신실하게 전하고 가르치는 모든 사람입니다. 진리를 알고 복음을 알며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는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감시하지 않는다면, 영적 테러리스트들이 지배하게 될 겁니다.

마치 이슬람과도 비슷합니다. “이슬람 교도들 중에 테러리스트가 있긴 하죠. 하지만 극소수일 뿐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묻습니다. “그렇다면 왜 보수적인 무슬림들이 공개적으로 테러리스트들을 거부하지 않는 걸까요?” 아무도 거부하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은사주의 운동을 규탄하고 일어나야 할 무거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누구도 이런 주장을 하지 않죠.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는 걸 저도 압니다. “아, 맥아더? 은사주의 비난에 집착하는 목사?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나봐. 은사주의를 비난하면서 아주 열변을 토하지.”

글쎄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40년간 신약성경을 한번에 한 구절씩 살펴봤습니다. 은사주의 비난에만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1969년에 부임한 이후로 은사주의 운동에 대한 집회를 딱 한번 했습니다. 바로 이번 집회입니다. 사실 너무 늦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훨씬 전에 도려내야 했는데 이제야 칼을 댔습니다. 인내심을 발휘하려고 노력했던 거죠. 저는 은사주의 비난에 전혀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비난을 받은 것은 45년만에 열린 집회가 겨우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다른 문제도 많이 다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을 비롯한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모든 영역들이었죠.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고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비난도 받았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건 아닙니다. 한번은 어떤 은사주의 지도자가 저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존 맥아더 목사님을 소개합니다. 설교로 접할 때보다 실제로 만나면 훨씬 더 친절한 분이시죠.” 저는 항상 그렇기를 바랍니다. 저는 친절한 태도로 진리를 붙들기를 바랍니다. 저는 사랑으로 진리를 붙들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펴서 설교할 때는 성경에 있는 그대로를 전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사람들의 감정을 살핍니다. 불쾌하게 만들지는 않을까 걱정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것만큼은 아닙니다.

은사주의 운동은 이질적인 운동입니다. 이질적인 운동입니다. 그 모든 역사를 살피고 싶지는 않지만 최근 들어 자주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건전한 가르침, 건전한 교리, 건전한 신학의 흐름은 사도들에게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타나시우스, 어거스틴, 루터, 칼빈과 같은 위대한 종교개혁가들, 어제 저녁에 말씀을 들으신 것처럼 청교도들에게로 이어졌습니다. 아주 명확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 찰스 스펄전과 데이비드 마틴 로이드 존스로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S. 루이스 존슨과 짐 보이스 등등으로 계속해서 이어져 왔고, 오늘날의 R.C. 스프로울을 비롯한 신학자들로 이어지고 있죠. 건전한 교리의 흐름입니다.

이 시대에도 건전한 교리의 흐름 속에 있는 영웅들이 있습니다. 이번 집회에서 다루었죠. 우리의 영웅들은 같은 흐름을 따라 내려옵니다. 존 로저스가 있습니다. 영국 메리 1세 여왕때 처형당했던 288명의 순교자들이 있습니다. 이 사건을 기록한 <폭스의 순교사>를 읽으면서 다음 세대에 진리를 전하기 위해 그토록 큰 대가를 치른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보면 눈물이 흐릅니다. 윌리엄 틴데일을 비롯한 믿음의 선조들이 행한 일에 깊은 감사와 사랑을 느낍니다. 이들이 우리의 영웅입니다.

​이와 대조를 이루는 새로운 복음주의 흐름은 19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의 히피들이 오렌지 카운티에 나타나서는 갈보리채플 교회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때부터 격식도 없이 맨발로 해변을 다니면서 마약에 중독된 젊은이들의 교회가 시작됐습니다. 전통적인 찬송가도 사라지고, 정장 차림도 사라졌습니다.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교회가 하위문화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겁니다. 그것도 샌프란시스코에서 환각제와 마리화나로 탄생한 하위문화 말입니다.

완전히 다른 흐름입니다. 이런 흐름이 비격식적이고 문화 중심적인 교회를 낳았고, 결국 구도자 중심 교회로 이어졌죠. 여기서 또 빈야드 운동이라는 갈래가 나와서 무절제한 현대 은사주의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흐름입니다. 이들은 우리의 영웅이 아닙니다.

저는 로니 프리스비를 중요한 인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예수 운동을 이끌다가 동성애로 인한 에이즈로 사망했죠. 프리스비는 제가 중시하는 흐름에 있지 않습니다. 이 흐름이 문화에 얽매이고 문화에 의해 움직이며 구도자 중심적인 교회 운동을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더 좋은 것도, 가장 좋은 것도, 최악의 것도 있지만, 이것이 바로 은사주의 운동의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완전히 다릅니다.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의 영웅들도 다르죠. 우리는 우리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우리 쪽에 계시다면, 이 귀중한 역사를 지켜나갈 책임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은사주의 운동을 감시해야 있다면 그건 바로 우리여야 합니다.

저는 이 점을 매우 염려하고 있어서 책에 따로 한 장을 떼어내서 이 내용을 집중적으로 다뤘습니다. 아직 책을 읽지 않으셨다면 12장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펴지는 마시고 나중에 읽어보십시오. 12장의 제목은 “복음적인 은사지속론을 주장하는 나의 친구들에게 띄우는 편지”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복음적인 은사지속론을 주장하는 나의 친구들에게 띄우는 편지”입니다.

은사지속론을 주장하는 친구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제가 존중하는 제 친한 친구들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에 크게 기여했고, 우리 모두를 가르쳤고, 저를 가르쳤고, 저와 함께 사역도 했고, 저와 손을 맞잡고 때로는 몇 시간씩 함께 기도하고 대화도 하면서 믿음을 굳건히 해준 친구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스스로를 “은사지속론자”라고 부릅니다. 은사주의 운동에 일부 동의하기 때문이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은사지속론자들의 태도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이 운동을 바로잡는 데 힘을 보태야 합니다. 마지막 장인 “복음적인 은사지속론을 주장하는 나의 친구들에게 띄우는 편지”에서 저는 8가지 중요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첫번째입니다. 은사지속론자들의 입장은 전반적인 은사주의 운동이 정당하다는 착각을 심어줍니다. 이들이 “나는 은사지속론자다”라고 말하는 순간에 은사주의 운동에 신뢰성을 부여하는 겁니다. 물론 은사주의를 어느 정도 제한하거나 통제하고 싶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은사주의 운동에서 극소수인 존경받는 보수적 은사지속론자들이 은사주의 운동을 인정하면, 이들의 명성 때문에 은사주의 운동 전체가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젊고 불안정한 개혁주의 신자들이 은사주의 운동에 열려 있는 개혁주의자를 따라가게 되고, 은사가 지속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거나 최소한 그 가능성에 마음을 열게 됩니다. 사실 이 둘은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저명한 은사지속론자들이 은사주의적 해석을 인정하거나 비성경적인 은사주의 행위들을 명확히 비판하지 않는다면 이 위험한 운동에 신학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결과를 낳을 뿐입니다.

둘째로, 은사지속론은 하나님이 초대교회에 주신 참된 은사인 기적의 본질을 격하시킵니다. 이번 주에 들으신 내용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두 번째 요점을 말씀드립니다. 은사지속론은 하나님이 초대교회에 베푸신 참된 은사인 기적의 본질을 격하시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사도 시대에 계시를 주셨습니다. 은사와 표적, 기적은 그 계시를 전하고 기록하는 사람들의 권위를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 2장 3절부터 4절입니다.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잘 들으십시오. 만약 이러한 표적과 기사, 기적, 방언, 예언, 치유가 오늘날 모든 신자가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 말씀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더 이상 그 무엇도 입증하는 표적이 되지 못합니다.

게다가 은사지속론자들은 신약성경의 은사 관련 용어들을 사용해서 은사주의자들의 행위를 지지하는 의미로 곡해함으로써 은사의 참된 본질을 훼손합니다. 성령님이 교회를 세우기 위해 베푸셨던 영광스러운 사역을 깎아내립니다. 만일 오늘날 은사주의 교회 안에 존재하는 은사들이 신약에 기록된 은사들과 동일한 것이라면, 그 원래의 은사들은 특별할 것이 없게 되고, 따라서 그 시대도 특별하지 않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신약의 용어를 차용하여 성경의 은사들을 재해석하는 것은 1세기에 일어났던 진정한 기적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격하시키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은사지속론은 이러한 왜곡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셋째입니다. 은사지속론은 잘못된 은사주의에 치우친 이들을 올바르게 비판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혼돈과 혼란에 빠진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기준을 제시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이 책에서 여러분은 굉장히 기괴한 것들을 발견하실 겁니다. 잘 알려진 은사주의자들이 영적 경험이라고 말하는 것들이죠. 심지어 이들 중 한 명이 오늘 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 책에는 비난받아 마땅한 기괴한 일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은사지속론자들이 이러한 일들을 비난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더 잘 아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은사지속론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죠. 높은 기준을 포기하면서 은사주의를 허용했기에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겁니다. 이제 기준이 없어졌는데 무슨 수로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을 배격할 수 있단 말입니까?

네번째입니다. 은사지속론은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신자들에게 새로운 계시를 허락하신다고 주장함으로써 더 큰 혼란과 오류로 치우칠 가능성을 열어놓았습니다. 한마디로 은사주의를 다르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오늘날에도 예언이 있지만 틀릴 수도 있답니다. 오늘날에도 방언이 있지만 실제 언어가 아니랍니다. 오늘날에도 치유가 일어나지만 예수님과 사도들 시대의 치유와는 다르답니다.

그렇다면 은사지속론은 신자들이 그 어떤 것이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게 만듭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나, 영적 체험이라고 주장하는 것들, 혹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상이나 생각을 모두 예언으로 간주할 수 있게 됩니다. 계시의 정당성을 판단할 수 있는 권위 있는 객관적인 기준이 없어지는 겁니다.

은사지속론자들은 은사주의를 일부만 받아들인다고 하지만 결국은 모든 것을 허용하게 됩니다. 무엇이 정확하고 정확하지 않은지를 판단할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성경 이외의 추가적인 계시나 신비한 체험, 예언의 말씀을 기대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신학적 혼란을 초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면 오류를 제어할 수 없게 됩니다.

다섯번째입니다.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신자에게 새로운 계시를 주신다고 주장하는 은사지속론은 암묵적으로 ‘오직 성경’이라는 교리를 부정합니다. 스티브 목사님이 어제 저녁에 명확하게 설명을 하셨기 때문에 더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제가 아는 개혁주의 은사지속론자 친구들 중의 누구도 정경의 완성을 부정하지 않을 겁니다. 성경이 66권이라는 것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고, 성경의 권위나 충분성도 부정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동시에 신자들에게 성경 이외의 부가적인 계시를 구하라고 가르침으로써 성경의 충분성 교리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이를 남용할 수 있는 방법은 많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대신해 말한다고 생각하는 권력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제멋대로 남용할 소지가 다분하죠.

여섯번째입니다. 은사지속론은 비이성적인 방언을 사적인 기도 언어로 허용함으로써 은사주의에서 말하는 무분별한 황홀경의 문을 열어놓습니다. 이들은 오늘날의 방언이 실제 언어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요? 간단합니다. 오늘날의 예언이 성경의 예언과 다르다면 오늘날의 예언에 오류가 있기 때문이고, 방언이 성경의 방언과 다르다면 실제 언어가 아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며, 치유가 그리스도가 베푸신 치유와 같지 않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은사지속론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은밀한 은사중지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저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을 뿐이라면, 은사지속론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모조품을 받아들인 겁니다. 그렇다고 자랑스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모조품을 받아들이는 것은 고귀한 태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모조품은 자신들 스스로도 인정하는 모조품이죠.

일곱번째입니다. 은사지속론은 치유의 은사가 오늘날까지 계속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은사주의 치유자들의 사기행각을 부추기는 기본 전제를 확증합니다. 치유의 은사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하면서도 어떠한 경험적 증거나 성경적 증거도 제시하지 못한 채 막연하게 주장하는 것은, 결국 이런 치유자들의 행태를 인정해주는 꼴이 되고 맙니다.

이런 짓을 하는 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정말 악한 자들 아닙니까? 진짜로 병을 고쳐주는 것이라면 병원에 가서 환자들에게 치유의 은사를 베풀어야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죠. 그 대신에 가장 절박하고 심각한 병을 앓는 사람들, 희망을 잃은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먹잇감으로 삼아서 거짓말로 돈을 벌고 있지 않습니까? 누가 이런 자들을 돕고 싶어한단 말입니까?

마지막으로 은사지속론은 사람들을 거짓으로 유혹해 성령님의 참된 사역에서 멀어지게 만들어서 성령님을 모욕합니다. 성령님의 내주하심과 성령 충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성령의 은사, 성령의 열매, 성령의 은혜를 받은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성령님이 주신 모든 약속들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굳이 하나님께 “더 주세요, 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주세요”라고 달라고 해야 할까요? 도대체 무엇이 부족하단 말입니까?

은사지속론은 성령님을 모욕했습니다. 사람들을 모조품, 가짜로 현혹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기보다는 말이죠. 하나님은 어떤 행위를 얼마나 했느냐에 따라 성령님을 주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은사지속론은 성화와 영적 성장에 걸림돌이 됩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죠. 사람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또 뭔가를 더 쫓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할 말이 더 많이 있지만 자세한 내용은 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확신하는 것은 은사주의 운동이 현대의 그 어떤 교리적 일탈보다도 더 많은 신학적 오류를 양산할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자유주의도, 심리학도, 세계교회주의도, 실용주의도, 신비주의도 모두 해로웠지만, 은사주의만큼 해로운 것은 없습니다. 그 영향력이 너무나 광범위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험주의가 한번 자리를 잡으면, 온갖 형태의 이단과 사악한 행위가 교회 안에 침투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러니까 은사주의 신학은 우리 시대의 '다른 불'이 되었습니다.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참된 교회가 응답해야 할 때입니다. 종교개혁의 유산을 이어받은 우리가 개혁신학의 본래 뜻을 온전히 지켜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라면 같은 용기와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요즘에 ‘은사주의적 칼빈주의자’라는 말을 쓰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존 칼빈이라면 은사주의를 거부했을 겁니다. 실제로도 거부했습니다. 차라리 ‘칼빈주의자’라는 부분은 빼고 그냥 은사주의자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제가 우려하는 이유는 이 선하고 경건한 청년들이 젊은 세대와 다음 세대에 미칠 영향력 때문입니다. 은사주의 운동에 대해서 마땅히 취해야 할 입장을 취한다면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이제 설교가 끝났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아직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마지막 장을 보겠습니다. 너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제가 꼭 말씀드려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만일 제가 이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다른 형제들이 저와 함께 이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목회자로서의 소명에 충실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은사주의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은 그저 제게 불쾌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목회자로서 제 의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책임을 수행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콘래드 목사님이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바울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바통을 넘기고 있습니다. 역할을 넘겨주고 있는 겁니다.

디모데전서 6장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상기시킵니다. 믿음이 곧 ‘선한 싸움’이라고 합니다. 그러고는 6장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바울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네게 부탁한 것”이란 무엇일까요?

문자적으로 보면 “보화를 지키라”입니다. 무엇이 보화입니까?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네게 맡겨진 것, 즉 하나님의 진리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이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바울이 디모데에게 바통을 넘겨주면서 디모데전서를 끝맺는 장면입니다. ‘맡겨진 진리의 보화를’ 어떻게 지키라고 하나요?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이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책임입니다. 진리의 보화를 지키는 자가 되어 보화를 지키고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죠.

바울은 디모데를 매우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디도서를 쓴 후에, 그러니까 바울 서신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인 디도서를 쓴 다음에, 디모데에게 남기는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후서를 썼습니다. 디모데에게 남기는 마지막 편지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매우, 매우 걱정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6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디모데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안수를 받아 사역자로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용하지 않고 내버려두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어려움을 주는 사람들에게 위축되었고 교회 밖에서는 박해 위협에 위축되었습니다. 내부와 외부로부터의 위협이 디모데를 침묵하게 만들었습니다. 겁이 많았던 거죠.

7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아마도 바울은 두려웠을 겁니다. 디모데에게 바통을 넘겨주려고 하는데 디모데가 약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6절에서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진리를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디모데에게 있는 은사가 장로들의 안수로 확인이 되었고, 그 은사로 진리를 전하고 선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겁쟁이가 되지 말라는 것이죠. 8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이건 또 무슨 말인가요? 바울과 함께 그 모든 세월을 보내고 사역 중에 승리하는 장면을 모두 목격한 디모데가, 주를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바울과 연관되는 것을 부끄러워할 수 있다는 겁니까? 분명히 바울은 이런 약한 모습을 보이는 디모데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심각했을까요? 13절부터 14절을 보겠습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무슨 말인지 아시겠나요? 의사소통 능력이 주특기인 사람이 많이 있죠. 외모도 멋진 데다가 청산유수에 박학다식합니다. 순식간에 청중을 사로잡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하는 교훈은 전혀 다릅니다.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진리를 보화처럼 지키라고 합니다.

사역은 지키는 일입니다. 진리를 선포할 뿐만 아니라 진리를 지키기도 해야 합니다. 바울은 생애 마지막 순간에 그야말로 심정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15절을 보면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하죠.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 모두가 바울을 버렸습니다. 바울은 혼자였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예외가 있다면 오네시보로였습니다.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모두가 바울을 버렸습니다. 그 대가는 컸습니다. 바울은 생애 마지막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야, 부탁하노니 부디 네게 전해준 보화를 지키고 바른 말을 지키라.” 2장에서도 바울은 계속 호소합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들은 바”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주어진 보화, 즉 계시된 진리입니다. 이 구절에는 총 네 세대(generation)가 나옵니다. 바울과 디모데, 충성된 사람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이어지는 세대에 있죠.

과거와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자처하는 유사 교회들이 생겨나는 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저희 교회는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와 다릅니다. 오르간도 없습니다. 언제든지 오고 싶을 때 오세요.” 기존과 다른 교회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것 같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네게 전해준 진리를 다음 세대에게 전하여 또 다음 세대에게 전할 수 있게 하라.” 전해받은 것을 충성스럽게 지키고 전하라는 뜻이지 창의성을 발휘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다음 바울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바울은 경기하는 자, 농부, 병사, 교사를 비유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8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본보기로 제시한 후에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그야말로 모든 젊은 사역자를 위한 가장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곧 머리가 단두대에 놓일 사도가 전하는 말씀입니다. 햇빛에 번쩍이는 도끼날에 목이 잘리면 바울은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세대는 디모데의 손에 맡겨질 것입니다.

저도 오늘날 목회자들의 성품과 목회 방식을 보면서 이 말씀을 생각하게 됩니다. 다음 세대가 이들의 손에서 가르침을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디모데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4절입니다.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이렇게 하면 됩니다. 건전한 교리를 간직하고 보화를 지키며 진리를 정확하게 다루라는 겁니다. 이것이 명령입니다.

이제 피해야 할 것이 나옵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망령되고 헛된 말은 큰 피해를 끼치고, 사람들을 진리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20절로 넘어갑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잠시 조금 거칠게 말씀드려도 될까요? 고대의 모든 집에는 이렇게 천하게 쓰는 그릇들이 있었습니다. 수도나 하수도 시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금 그릇이나 은 그릇에는 귀한 것을 담았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담아서 대접할 때 사용했죠. 나무 그릇이나 질그릇에는 더러운 것을 담았습니다. 음식물 찌꺼기나 쓰레기를 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그릇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변기가 되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금쟁반이 되길 원하십니까?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여기서 ‘이런 것’이란 무엇일까요?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게 하는 헛되고 세속적인 말들, 악성 종양처럼 퍼지는 그런 말의 영향력을 말합니다. “만일 이런 것들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즉 성경적이지 않은 것들로부터 벗어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결국 모든 것이 동일한 길로 향하고 있지 않나요? 동일한 길입니다. 아까 콘래드 목사님도 정말 훌륭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성경을 붙들어야 한다고 하셨죠. 3장 15절로 내려가 보겠습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 앞과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이렇게 명령합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이 말씀의 어조를 아시겠나요?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제게 처음으로 성경을 주시면서 표지에 이렇게 쓰셨습니다. “사랑하는 존, 말씀을 전파하렴.” 그렇게 아버지는 그 사명을 제게 물려주셨습니다. “말씀을 전파하라.”

제가 말씀을 전파하라는 명령에 맥락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방금 살펴본 말씀을 통해서죠. 제게는 하나님 앞에서 말씀에 충실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건전한 교리에 충실하고 제게 맡겨진 보화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생애를 마무리하면서 디모데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바울은 자신의 삶이 싸움과도 같았다고 다시 말하고 있는 겁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믿음, 기독교 신앙을 구성하는 진리를 지켰다는 겁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바울은 어려운 상황에 있었습니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이들이 바울을 버렸습니다. 10절입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바울이 했던 모든 일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런데 바울은 혼자이고 외롭습니다. 오직 누가만 남아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디모데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16절입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결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제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정말 복을 받았습니다. 바울처럼 “다 나를 버렸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복을 받았습니다. 다 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에 대해 입장을 취하는 우리 모두는 비방을 받고, 거짓으로 고발되고, 공격받고, 폭력을 당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마지막 날에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주님이 저를 굳건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역시 진리를 지키기 위해 강경한 입장을 취하다가 고립된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굳건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신실함을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디모데에게 보내는 얼마나 진심어린 편지인가요. 디모데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궁금하시다면, 그 답은 히브리서 마지막 부분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23절입니다.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어디에서 놓였나요? 감옥입니다. 디모데는 감옥에 갇혔던 것입니다. 이제는 풀려났다고 합니다. 디모데는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은사를 사용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편지를 쓸 당시 디모데는 겁쟁이였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그렇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편지를 받았죠. 이 편지가 디모데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 같습니다. 디모데는 용기를 얻어서 대담해졌고 결국 감옥에 갔습니다. 하지만 이제 놓였습니다. 풀려났습니다. 참 짤막한 말이지만 놓였다는 말이 있어서 참 기쁩니다. 정말 기쁩니다.

바울의 편지는 디모데의 인생을 바꿨습니다. 동일한 변화가 여러분 모두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보화를 지키고,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일꾼으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자로 자신을 나타내기를 힘쓰고, 말씀을 바르게 분별하며, 그렇게 바르게 분별한 말씀을 충실하게 전파해야 합니다. 모두가 우리를 버려도 괜찮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번 집회를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축복 그 이상이었습니다. 마치 변화산에 올라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영광에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마땅히 느껴야 할 감정이자 태도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했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이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 안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분으로 계시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좋은 교제를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새롭게 맺은 우정에 감사드립니다. 주님, 우리는 이 집회를 통해서 주님께 예배의 제사를 드리고, 우리의 지성과 마음을 주님께 올려드리며, 새로운 수준으로 헌신하고 주님께 조금이라도 쓰임받는 일꾼이 되려고 애썼습니다. 주님께 불명예를 안겨주는 파도를 우리만의 작은 방식으로 막아내려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며, 성령님은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도와주십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것도 하나님의 가치에 비하면 보잘것 없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겸손하게 드렸습니다. 우리의 모든 말과 모든 생각, 모든 통찰, 모든 노력, 설교자와 회중을 비롯한 이 자리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는 삶의 시작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모욕을 당하실 때 우리도 그 고통을 느끼게 하옵소서. 우리를 사용하여 주셔서 누군가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게 하시고 신자들이 불필요한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게 하옵소서.

이번 집회를 주님께 드리오며 진리가 세계로 퍼지게 하옵소서. 주님의 뜻대로 취하시고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우리가 간구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우리가 제단에 올린 것을 어떻게 하시든지 주님께 맡기고 기뻐하며 쉼을 누리기 원합니다. 모든 영광을 받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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